소설리스트

환영검전-48화 (48/225)

048.

#강호인의 숙명 (2)

“구출 및 지원 임무다.”

이른 새벽.

광명칠대의 부대주 척자경이 진우선 일행에게 말했다.

새벽에 정무맹의 명령서가 도착했는데, 그걸 통해 적자경이 진우선 일행에게도 공식적인 임무를 내리고 있었다.

“광명이대는 이틀 전, 이제 날이 지났으니 사흘 전에 혈련수라종과 부딪쳤다. 그리고 오 할의 전력을 잃었다고 한다.”

그때 근처에서 다른 임무 중이던 현청각의 무인들이 늦지 않게 지원을 왔다.

그 덕분에 광명이대는 몰살되지 않고 후퇴할 수 있었다.

그들이 후퇴한 방향은 남쪽이었다.

소관의 남쪽에는 광주가 있고, 그곳에 방가장이 있었다.

“우리는 소관으로 향하며 광명이대와 만나고, 소관에 도착해서는 현청각과 함께 혈련수라종을 제압하는 데 힘을 보태게 될 것이다.”

척자경이 차분하고 빠른 목소리로 설명을 마쳤다.

정확하게 요점만 전한 탓에 못 알아들은 사람이 없었다.

“다들 이해한 것 같군. 더 궁금한 게 있다면 양 대원에게 물어보면 될 거야.”

“네, 알겠습니다.”

척자경이 진우선 일행의 눈빛을 보더니 얼른 대화를 마쳤다.

겉으로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마음이 몹시 급한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람이 더 엄격해 보였다.

서영풍 대주가 척자경에게 딱딱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확실히 그랬다.

어쨌거나 척자경은 얼른 몸을 돌려 바삐 움직였다.

그러다가 문을 나서기 전에 잠시 멈춰 서고, 진우선 일행을 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다들 잘 부탁한다.”

그리고 문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아! 네…….”

상관적이 대답했으나, 상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때 상관적의 뒤에 있던 양지명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부대주님께서 많이 급하신 모양입니다. 소협들께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어젯밤에도 거의 못 주무셨을 겁니다.”

“그랬군요.”

상관적이 다소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고 가셨네요. 부대주님께서 소협들과 서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신 것 같습니다.”

“혹시 그 말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진우선이 의문을 던졌다.

척자경이 한 말의 뜻을 양지명만이 이해한 듯하기 때문이었다.

“아! 소관에서 혈련수라종과 부딪쳤을 때, 광명이대의 무인들은 소협들과 같은 호심당의 제자 분들이 힘을 발휘해준 덕분에 그나마 버텼다고 합니다.”

호심당의 제자들은 정무맹이 선별하여 뽑은 신진고수들이었다.

그래서 정무맹 오당오각에 속한 무인들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갖춘 경우가 많았다.

오당오각에서 호심당과 임무를 공유하며, 지원을 거절하지 않는 데에는 그러한 사정도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처음 만나더라도, 손발을 맞춰본 적이 없더라도, 그 실력만큼은 유용했으니까.

“어쩌면 이번에 부대주님이 직접 들르신 게 그래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호위 임무 동안에는 제게 다 맡기셨는데 말입니다.”

확실히 양지명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급한 상황에서 진우선 일행에게 새로운 임무를 전하는 것은 양지명에게 맡겨도 될 일이었는데, 그러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을 터였다.

“저희는 이결제자가 아니라, 일결제자입니다.”

“그래도 호심당 제자들이시지요. 어떤 상황을 맞닥뜨릴지 모르지만, 그래도 소협들께서는 큰 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양지명은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어쨌든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그 순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상관적과 우문혁, 민연하 세 사람이 동시에 진우선을 바라보기만 했다.

대표로 대답하라는 뜻이었다. 아까와는 대답의 무게가 다르니, 그들은 진우선에게 직접 말하도록 권하고 있었다.

진우선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알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 진 소협께 부담을 지우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양지명이 당황하여 얼른 손사래쳤다.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우문혁은 양지명의 말 속에 숨어 있는 사실을 알아챘다.

“양 대원님께서는 진 소협에 대해 잘 아시는 모양이군요.”

“네. 사실 이번에 소협들과 함께 하게 되면서 들었습니다. 진 소협께서 일등이라는 말을요.”

양지명이 순순히 인정했다.

비무의 성적은 임무와 인원을 정할 때 이미 전해진 내용이었다. 다만 그동안 굳이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든든합니다. 또,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양지명이 진우선에게 축하를 건넨 뒤, 상관적과 우문혁, 민연하에게 말을 붙였다.

“다른 소협들께서도 호심당의 뛰어난 인재라고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 후, 양지명과 진우선 일행은 새로운 임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양 대원님, 그런데 소관으로 가는 길이면 저희가 처음에 이동 경로로 삼았던 그 길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도 염두에 두었던 경로입니다.”

구출 및 지원 임무가 내려왔기에 지난번처럼 바꿀 수도 없는 경로였다.

“혈련수라종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어떻게든 마주치긴 해야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광명이대는 소관에 혈련수라종이 있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까?”

우문혁이 물었다.

방가장의 귀빈을 호위하는 동안, 광명칠대는 엿새 전에 혈련수라종의 소식을 듣고 방향을 바꾸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광명이대도 충분히 경로를 바꿀 수 있을 터였다.

“아닙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광명이대의 임무는 최근에 부쩍 늘어난 시체들을 찾고, 남은 흔적을 살피며, 적의 행적을 좇는 일이었습니다. 그 시체들은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고, 무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체에 장흔과 권흔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건 혈련수라종의 무공들에서 생기는 흔적입니다.”

혈련수라종은 살인을 마구 일삼는 패악한 무리였다.

광명이대는 그런 혈련수라종을 뒤쫓았다는 말이었다.

“뒤쫓다가 당한 것입니까? 그런 경우는 별로 없지 않습니까?”

“함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혈련수라종의 마교도가 시체 속에서 일어났고, 광명이대의 대주님이 강력한 일 장(掌)을 맞으셨다더군요. 죽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고 들었습니다.”

“아……!”

함정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진우선 일행은 광명이대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광명이대의 대주가 강력한 일 장을 맞고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느닷없이 벌어진 상황에 광명이대는 우왕좌왕했을 것이다.

시체들 가운데서 일어난 마교도는 마구 살수를 펼쳤을 테고,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매복하고 있던 자들이 덮쳤을 것이다.

급습을 받아 당황한 틈에 안팎으로 당하는 그림이었다.

“저희의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겠군요. 혈련수라종은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혈련수라종은 총 서른 명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들의 피해는 이 할이 채 안 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크게 피해 입히지도 못했다고……. 그러니 전력은 거의 유지되고 있을 겁니다.”

“아……!”

탄식이 흘러나왔다.

서른 명 중에 이 할이 채 되지 않으면, 피해 입은 전력은 많아야 다섯 명이었다.

즉, 스물다섯 명 이상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크게 피해 입히지도 못했으니, 어쩌면 서른 명 모두와 맞서야 할지도 몰랐다.

비참한 상황이었다.

“광명이대는 어떻습니까?”

“……광명이대는 그 자리에서 일곱이 숨을 거두었고, 여섯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양지명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 음성이 비통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사상자가 열셋인데 오 할이라면, 이결제자 분들을 포함한 것이겠군요.”

“맞습니다. 그리고 호심당에서 오신 분 중 한 분이 숨을 거두셨습니다.”

“…….”

대답을 한 양지명도, 질문했던 진우선 일행도 모두 말을 잃었다.

정무맹의 광명각, 천마교의 혈련수라종.

싸움은 양쪽이 같이 했는데, 피해는 너무나 일방적이지 않은가.

암습에 의한 일격이 이렇게나 무서운 결과를 만들고 있었다.

적을 알고 아군을 알기 위해 물어봤을 뿐인데, 사흘 전의 상황은 모든 게 최악이었다.

살아남은 이들을 오히려 대단해 보일 정도였다.

“현청각의 분들이 입은 피해는 어떻게 됩니까?”

“아!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분들은 총 열 분 정도인데, 경미한 상처뿐이라서 혈련수라종을 상대하는 데 문제없다고 합니다.”

“오! 그나마 다행이군요.”

“네,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소관에 가면 그분들과 광명 이대와 힘을 합쳐 혈련수라종을 제대로 상대해낼 수 있을 겁니다.”

중요한 건 광명칠대였다.

이들이 없다면 광명이대와 현청각의 무인들끼리는 승리를 도모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광명이대를 만나 소관까지 빠르게 가는 게 중요해 보였다.

“이게 바로 이번 임무의 핵심입니다.”

양지명이 이렇게 광명칠대의 계획을 잘 전했다.

진우선이 오고 간 대화를 들으며, 잠시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내려온 명령은 이해했지만 왠지 부족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혈련수라종이 소관에 며칠을 머물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들도 무언가 계획이 있지 않겠는가?

정무맹에 당하기 위해서 기다리고만 있는 건 아닐 테니까.

문득, 배에서 겪었던 상황이 떠올랐다.

철혈보의 무인들 수십 명이 배에서 목숨을 잃었던 때, 상대는 고작 한 명이었다.

전마교의 살수였던 섬호.

그의 실력이 너무도 뛰어나 멸절검 천무광 대협마저 일격을 당했었다.

만약 그때처럼 혹시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 온다면, 이번 임무는 너무도 위험할 터였다.

“혈련수라종이 취할 계책도 고려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진 소협 말씀대로 고려해봐야 합니다. 그들은 음험한 무리라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걸 만상각에서 계속 살피고 파악하고 있을 겁니다. 저희의 계획은 수시로 보완될 것입니다.”

“아! 만상각이 있었군요!”

진우선이 양지명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상각의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미처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이래서 실전임무가 필요했다. 실전임무는 이런 것들을 깨우치고 배우는 과정이었다. 호심당에서 임무를 주는 이유 중 하나였다.

만상각이 언급되자, 상관적이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만상각은 안 그래도 천하를 살피느라 언제나 가장 바쁜 곳인데…… 이렇게 혈련수라종이 그 속을 더 긁어대는군요.”

“그게 또 그들의 목적이니, 엄청나게 좋아할 겁니다. 오히려 맹과 싸우며 흘리는 피를 거룩하게 여긴다 하니, 혈련수라종은 어쩌면 싸움을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요.”

우문혁이 상관적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두 사람의 말에 진우선과 민연하, 양지명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교의 목적은 강론을 통해서 끊임없이 들어왔다.

양지명은 광명칠대로서 여러 임무를 통해 그걸 몸소 겪어 왔고.

“그래도 저는 이런 임무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진우선이 의견을 밝혔다.

살인을 마구 일삼고, 시체를 마구 유기하는 혈련수라종은 세상의 해악이었다.

그들의 행적은 진우선으로 하여금 절로 화가 치솟게 했다.

어릴 적의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무공을 잘 익혀 고수가 되고 싶었던 게, 그런 이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였다.

진우선이 눈을 빛냈다.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단호한 의지가 강렬한 눈빛으로 뿜어지고 있었다.

단전 속의 내력이 약동한다.

이제 천지간의 다섯 기운을 모두 얻어 상생하고 상극하게 된 오행진기가 세상으로 나올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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