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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검전-51화 (51/225)

051.

#만만치 않은 임무 (3)

골짜기 근처, 좌우로 길게 우거진 수풀은 햇살을 머금으며 푸르름을 뽐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냥 푸르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나무 아래 그늘진 곳에서는 무언가 희끗희끗 스쳐 가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건 사람의 형상이었다.

누굴까?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표홀하여, 기척조차 흘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수풀은 무언가 움직임을 품고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스읏-!

갑자기 수풀 속에서 검이 튀어나왔다.

검에서 뾰족한 기운이 쏘아지며, 그 앞을 지나치던 진청색 무복 사내의 등을 찔렀다.

‘……!’

진청색 무복의 사내가 멈칫했다.

등골이 오싹한 바로 그 순간, 그는 곧바로 철퍼덕 땅에 엎어졌다.

본능적인 동작이었다.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연이어 옆으로 굴러갔다.

찰나의 순간, 그렇게 회피한 후에 기습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검 한 자루가 있었다.

그 검이 쉴 틈을 주지 않고 쏘아져 왔다.

“헛!”

놀란 숨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비도 하나를 내던졌다.

쐐액-!

놀라서 엎어진 위급했던 순간이지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대처였다.

팍!

상대가 검으로 비도를 쳐냈다.

진청색 무복 사내는 그 틈에 재빨리 외쳤다.

“적이다!”

하지만 말하고 나자 늦은 걸 알았다.

채채챙-!

곳곳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등이 아려왔다.

‘베였어!’

등이 따끔거리고 쓰렸다. 찔리는 걸 피한 줄 알았는데, 어느새 베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통증을 의식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훅-!

상대의 검이 찔러 들어왔다.

검을 피하며 상대를 보았다.

처음 보는 중년인이었다.

“새로운 놈이구나. 맹의 개떼가 또 몰려온 모양이야. 흐흐흐!”

진청색 무복의 사내가 비릿하게 웃으며 중년인에게 비꼬듯이 말했다.

그러나 중년인은 상대의 모욕적인 언행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을 날리며 곧장 말을 되받아쳤다.

“그래도 피에 미친 잡놈들보다는 낫지. 안 그래, 수라객?”

“큭!”

진청색 무복 사내, 수라객(修羅客)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욕을 내뱉을 땐 속이 시원했는데, 막상 돌려받으니 속에서 울화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파앙-!

수라객이 곧장 일장을 날렸다.

핏빛 기운이 빠르게 뻗어 오자, 중년인이 재빨리 검을 휘둘러 막았다.

그걸 시작으로 겹겹이 중첩된 수라객의 장력이 연이어 날아들었다.

핏빛 기운이 여러 번 포개어지니 연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꽃은 예쁘지 않았다.

흉악했다. 그 안에 담긴 위력 때문에 끔찍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는 혈련수라종의 무공 중 하나이자, 수라객의 성명절기인 구련마장의 일 초였다.

‘……!’

그걸 알아본 중년인이 긴장을 흘렸다.

수라객은 혈련수라종을 이끄는 혈불(血佛)의 네 제자 중 하나.

그리고 광명이대를 궁지로 내몰고, 사냥하듯이 목숨을 앗아간 마교의 고수였다.

쐐액-!

중년인이 힘차게 검을 뿌렸다.

그의 검초에 수라객이 쏘아낸 구련마장의 장력이 엉켜 들었다. 핏빛 기운이 검초 안에 갇혀버린 모양새였다.

중년인이 더욱 부드럽게 검을 휘휘 돌렸다. 그러자 구련마장의 기세가 죽으며, 장력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대라칠검!”

수라객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거대한 그물을 만들어 상대를 옥죄는 검법, 대라칠검.

이는 상대의 초식이나 기운은 물론이고, 손발까지 묶을 수 있다고 알려진 특이한 무공이었다.

그리고 정무맹 광명각의 고수 서영풍의 독문무공이었다.

“내 검을 알아봐 줘서 고맙군. 그렇게 유명할 줄은 몰랐는데.”

중년인 서영풍이 피식 웃으며, 대라칠검의 초식들을 연이어 펼쳐 냈다.

수라객이 손을 바삐 놀렸다. 사방을 향해 붉디붉은 기운을 마구 뿜어댔다.

순식간에 서로가 몇 초식을 주고 받았다. 공수가 마구 오갔다.

“유명은 무슨. 허접하기만 한데.”

수라객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피식 웃었다. 빈정댈 여유가 있는 걸 보니, 서영풍과 맞상대하는 게 어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영풍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런가? 그래도 허명은 아닌데.”

최앗-!

서영풍이 검을 강하게 떨쳐냈다.

이전보다 초식 사이사이의 빈틈에 기운이 더 촘촘하게 채워졌다. 빽빽한 느낌마저 들었다.

상대하는 처지에서는 막막한 심정이 들 정도였다.

대라칠검의 절묘한 초식이었다.

퍼퍼퍼펑-!

수라객이 연거푸 구련마장을 펼쳤다.

아까보다 더 많은 핏빛 연꽃들이 쏟아져나와 두텁게 겹쳐졌다.

열 겹, 스무 겹, 서른 겹…….

그와 동시에 수라객의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대라칠검의 절초에 실린 위력이 점점 더 배가되며 옥죄여오기 때문이리라.

마구 손을 놀려도 쉽게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슥. 스슥.

수라객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힘에 부치는 까닭이었다.

‘제길!’

수라객이 다급한 마음으로 눈알을 굴렸다.

압도당하지는 않으나, 형세를 뒤집기도 어렵다.

다른 묘책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시간이 이쯤 흘렀으면 다른 마교도들이 나타날 때가 되었다.

혈련수라종의 자랑스러운 마교도들이 정무맹의 잡스러운 놈들을 무찌르고서 말이다.

그때, 서영풍이 비꼬듯이 한 마디 던졌다.

“왜? 누구 기다리나?”

“설마?”

수라객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혈련수라종의 강한 부하들이 설마하니 하나도 올 수 없단 말인가?

매복도 다 들킨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남은 건 패망뿐이었다.

그때, 서영풍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웃고 있었다.

“동료를 기다리나? 어리석군.”

“제길!”

수라객은 저도 모르게 욕을 뱉었다.

‘당했다! 무슨 수가 있었어!’

***

광명이대를 뒤쫓아 선저정에 들어온 혈련수라종 무리는 인원을 나누었고, 절반이 매복했다.

추적이 길어졌으니 예상치 못한 상황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대비였다.

이는 수라객의 생각이었다.

그는 무공에 재능이 있고 계략에 밝아 혈불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지금 매복을 펼친 것도 그의 기지였다.

매복 중에 광명이대를 만난다면, 습격하여 더욱 당황케 만들 수 있다.

또한, 다른 정무맹 무리를 만나게 된다면 매복한 이들은 숨겨진 힘으로 전략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즉, 매복은 어떤 경우에서든 이득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에게 다가온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예상과 완전 달랐다.

‘변수가 있었어! 도대체 뭐지?’

수라객은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때, 당황하는 눈동자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저놈!’

골짜기 좌우를 오가며 마구 헤집고 있는 저놈!

저놈이 지나가는 자리는 모두 혈련수라종이 매복하고 있는 자리였다.

저놈이 원흉인 게 틀림없으리라.

“이익-!”

수라객이 이를 악물었다.

퍼퍼퍼펑-!

쉴 새 없이 구련마장을 펼쳐냈다. 다급하여 위력적인 초식들을 마구잡이로 쏟아냈다.

그런데도 대라칠검을 뚫어내지 못했다. 위력은 강할지 몰라도 뻔히 보이는 공격인 까닭이었다.

서영풍은 대라칠검으로 구련마장의 공력을 풀어내며, 수라객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았다.

“봤나 보군.”

서영풍이 슬쩍 미소를 던졌다.

“마음이 급하겠어. 하지만 보내 줄 수 없지. 네 상대는 나니까.”

그 말이 수라객을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수라객은 갑자기 머리가 굳은 것만 같았다. 이곳을 벗어날 묘수도 떠오르지 않았다. 신경질만 마구 났다.

호남, 강서, 광동 인근에서 쌓아 올린 공적에 하나 더 추가하려 했을 뿐인데.

광명이대를 빠르게 몰살시키고 돌아가, 현청각의 후미를 공격하며 앞뒤로 에워싸 연전연승할 계획이었는데.

그래서 스승 혈불이 경쟁시킨 다른 세 제자를 앞서야 하는데.

그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위기였다.

바로 그때.

꾸우우- 꾸우우-

새소리가 들려왔다. 언뜻 피리 소리 같기도 했다.

“……!”

그 순간, 수라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소리가 묘하게 불안했다. 감이 좋지 않았다.

그 정체를 서영풍의 말로써 알게 되었다.

“광명이대를 구출한 모양이야.”

“제기랄!”

수라객이 욕지거리했다.

정무맹의 양동작전에 완벽하게 당했다.

눈앞의 대라칠검 서영풍에게 발이 묶였고, 그사이 광명이대는 구출되었다.

자신의 모든 계획이 망가졌고,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분통이 터졌다.

어찌 이리 되었을까?

그러나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이제 성과는 둘째 치고,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을지를 살펴야 한다.

그때, 또 보였다.

‘저놈!’

저놈은 여전히 거침없이 움직인다.

‘안 돼!’

그를 눈으로 발견하기가 무섭게, 매복해 있던 수하의 목숨 줄이 끊어져 간다.

외칠 틈도 없었다. 이번에도 순식간이었으니까.

혈련수라종의 고수들이 찰나 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놈은 어떻게 매복한 위치를 제 손바닥 보듯 꿰뚫어 본다는 말인가?

전광석화처럼 빠른 움직임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경악스러웠다.

하지만 그건 저놈의 실체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이어지는 상황을 목격한 수라객이 진실을 깨달았다.

‘……!’

고작 손짓 한 번 했을 뿐인데, 상승의 무리가 느껴지다니!

그걸 본 순간,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내리눌렀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저놈에게는 승산이 없다.

수라객이 핏발 바짝 선 눈으로 부르르 떨었다.

한순간 느꼈던 거대한 압박감!

듣도 보도 못한 놈에게서 몰살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안 돼-!”

수라객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비켜!”

파아악-!

파괴적인 기세를 담은 구련마장의 절초가 장심에서 강력하게 뿜어져 나왔다.

길을 열겠다는 강한 집념의 일격이었다.

하지만 서영풍이 수라객의 말을 따를 리 없었다.

“보내줄 것 같은가?”

“으아아악-!”

악에 받친 수라객이 구련마장의 절초들을 마구 쏟아냈다.

“단숨에 죽여주마! 모조리!”

미친 듯이 소리쳤다.

수라객이 내뿜는 죽음의 선포였다.

분노와 절망이 한데 섞인 채로, 수라객은 자신의 마공을 완전히 폭발시키고 있었다.

***

수라객이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했던 저놈, 진우선은 수풀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럿과 함께 수풀에서 나왔다.

방가장의 무사 둘과 등이 크게 베인 채 졸도해버린 마교도 하나였다.

그들이 골짜기로 바삐 걸음을 놀리는 와중에, 한 무사가 진우선에게 말을 걸었다.

“진 소협, 고맙소. 아까 우리가 다가가자 이 마교도가 먼저 공격하고는 숨어버렸는데, 어찌나 날랜지 놓쳤었소. 소협이 아니었다면 다시 찾아내기가 참 어려웠을 것이오.”

“과찬이십니다.”

진우선이 살짝 웃으며 짧게 답했다.

골짜기에 모여 있던 무인 몇몇이 방가장의 무사가 한 말을 받았다.

“우리와 비슷한 상황을 겪으신 모양이오. 우리도 이 마교도를 놓쳐서 당황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진 소협이 딱 나타났다오. 덕분에 이놈을 쓰러뜨릴 수 있었지.”

그 무사가 발 앞에 널브러진 마교도 하나를 툭 차며 말했다. 그 마교도는 아까까지 매복해 있던 적이었다.

“진 소협께 정말 감탄했소. 소협이 안 계셨다면, 크게 낭패를 볼 뻔했소. 진심으로 고맙소.”

혈련수라종의 마교도들을 제압하고 모인 무인들이 하나같이 진우선에게 탄복을 보냈다.

진우선이 그들의 말에 멋쩍은 듯이 웃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렸다.

아직 싸움이 마무리되지 않은 곳들이 보였다.

골짜기에 있던 마교도 서넛이 끈질기게 저항 중이었다. 서영풍이 마주하고 있는 수라객도 제압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저쪽만 남았습니다. 더 이상의 매복은 없습니다.”

진우선의 말에, 주변의 무사들도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음을 그들도 알기 때문이었다.

“대주님께서 승기를 확 잡지는 못하셨군.”

“구련마장이 매우 까다로워 보이는구려. 대주님의 대라칠검으로도…….”

그러던 중.

“으아아악-!”

수라객의 절규가 골짜기를 울렸다.

그의 공세가 서영풍 대주에게 광풍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분노에 잠겨 이성을 잃고 미치광이처럼 무공을 흩뿌리고 있었는데, 그 위력이 무시무시했다.

“이런!”

“낭패요.”

“수라객이 목숨을 도외시한 모양이오!”

수라객의 눈 주위로 핏빛 마기가 마구 일렁거렸다.

섬뜩하고 흉흉한 핏빛 마기는 마공이 머리까지 잠식했다는 증거였다.

수라객이 마기에 먹혀버린 모습이었다.

“당장 갑시다! 우리가 가서 합격진을 펼친다면 저 마공을 좀 억누를 수 있을 거요!”

무인들의 다급히 의견을 냈다.

서영풍과 수라객의 대결이 여태까지와 다른 양상에 접어들면서, 서영풍이 매우 위험해 보인 까닭이었다.

실상은 서영풍보다 약한 그들이 수라객의 무위를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까 싶지만, 당연히 힘을 보태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때, 진우선이 입을 열었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저 하나면 충분합니다.”

“진 소협!”

“지금 상황은 혼자서 무리요. 진 소협의 항마가 대단하다지만…….”

“괜찮습니다. 가능할 거 같습니다. 다른 적들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진우선이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몸을 날렸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진 소협-!”

그들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진우선을 외쳤다.

하지만 곧……

그들은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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