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
#복귀 (1)
햇살이 쨍하게 비쳤다.
땅에서 열기가 후끈 피어올랐다. 산과 강에서 반사된 빛줄기마저도 따가웠다.
여름이었다.
모든 것이 뜨거운 계절, 여름.
흙도, 물도, 바람도 모두 뜨거운 여름이었다.
그런데 세상천지만 이렇게 뜨거운 게 아니었다.
“흐압!”
“핫!”
뙤약볕 아래서 열띤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호심당 일결제자들이었다. 지금 그들의 가슴 속은 몹시 뜨거웠다. 열정과 열망이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는 까닭이었다.
‘……!?’
눈빛도 이글거렸다. 다들 피가 들끓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수련하는 게 보였다.
‘하고 싶다!’, ‘해야만 한다!’라는 절실한 마음가짐을 온몸으로 뿜어 내고 있었다.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땀방울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져 죽을 듯한 더위에도, 그들의 의지와 기백은 꺾이지 않고 있었다.
“다들 뜨거워졌군.”
호심당주 호연강의 목소리가 작은 실내를 메웠다.
그는 일결제자들의 마음가짐이 달라진 걸 바로 알아보고 있었다.
“복귀할 때 보니, 몇몇은 기세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날이 바짝 벼려져 있더군요.”
석자풍 부당주가 호연강과 함께 연무장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좋군. 다행이야. 역시 실전을 치르는 게 가장 절실해지는 방법이 지.”
“그렇지요.”
정무맹이 호심당을 세우고 이끌어오며 내린 결론이었다.
호심당의 제자는 누구나 무재가 뛰어나고, 또 열심히 한다.
강호에 대해서도 잘 알아서, 허투루 여기는 이가 거의 없었다. 강호에 이미 소속되어 있었고, 실제로 느끼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쉬울 때가 많았다.
제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만, 정무맹의 입장에서는 제자들이 칼날 위에 서 있는 강호를 좀 더 깨닫기 바라는 것이다.
그게 호심당 제자들이 주기적으로 임무를 치르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치열한 전장을 경험하고, 누군가의 죽음을 겪으며 성장하는 건 또 다르니까.
그리하여 임무를 다녀오는데, 그 중에서 특별히 손꼽는 시점이 있었다.
일결제자의 첫 임무.
그때 다들 마음가짐이 많이 변해서 온다.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사람도 있고.
물론,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피해는 어떤가?”
“넷은 돌아오지 못했고, 셋은 크게 다쳐서 활인당에 있습니다.”
활인당(活人堂)은 정무맹에서 의료를 담당하는 곳으로, 오당오각 중 하나였다.
당주는 백발이 성성한 활인성자(活人聖子) 왕약수였다. 그의 별호가 활인성자인 것은 활인당에서 정무맹의 맹도만이 아니라 뭇사람들을 위해서도 의술을 펼치기 때문이었다.
“엊저녁에 왕 당주님께 다녀왔는데, 빠르면 석 달이고, 늦으면 해가 바뀔 때쯤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아아-! 안타깝군.”
탄식하는 호연강의 얼굴에 슬픔이 어려 있었다.
총 서른한 명이었던 일결제자의 수가 이제 스물일곱이 되었고, 그중 셋은 회복에 전념해야만 했다.
호심당의 입장에서 큰 손실이고, 각자에게도 애통할 일이었다.
“천마교가 극성이군. 그들은 항상 호전적이지만, 매년 이 시기에는 유독 우릴 한탄하게까지 만드니…….”
호연강이 침음을 삼키며 자신의 느낌을 토로했다.
천마교와의 충돌은 시시때때로 일어나고, 정무맹의 승리와 패배도 항상 있었다.
그러나 호심당의 측면에서 보자면 유독 봄에 사상자가 많았다. 일결제자가 첫 임무에 나서는 딱 그 시점이었다.
그 상황들이 맞물려 호연강의 마음속에 의심이 싹트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교도들은 우리를 노리는 것 같아. 호심당의 제자들을 말이야.”
“저도 그런 생각이 종종 들곤 합니다. 때론 억측 같기도 한데, 속상하고 분통 터지니 다른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석자풍이 호연강의 말에 동조했다.
“그렇다고 임무를 폐할 수도 없고.”
“…….”
임무가 가지는 중요성이 있기에 그 방식을 없앨 수가 없었다. 지금 겪지 않으면 훗날에는 더 큰 피해로 닥칠 수 있는 까닭이었다.
이게 첫 임무에서 많이 불거지는 큰 단점이었다.
그건 호심당의 모두가 감당해야 했다. 호심당의 제자들, 그들을 가르치는 무사부들, 호심당을 이끌 어가는 사람들 모두.
그중에서도 유독 어깨가 무거운 사람은 바로 호심당주인 호연강이었다.
그는 임무 때마다 이토록 비통한 순간을 겪어왔다.
지금도 가슴이 몹시 쓰리고 아팠다. 알고도 감당해야 하는 슬픈 순간이었다.
“그래도 이결제자들의 피해는 적었다고 들었습니다.”
석자풍이 말을 돌렸다.
이결제자는 한 명이 숨을 거두었다. 그 외에는 가벼운 부상자가 몇 명 있을 뿐이었다.
“맞네. 곳곳에서 큰 위기를 겪었지만, 그 속에서 크게 활약한 제자들이 있었더군.”
이미 이결제자 모두가 임무에서 복귀했으며, 호연강에게 보고도 완료된 상태였다.
그 가운데 눈여겨볼 제자들이 몇 있었다.
진양각에 속해 조를 이끌고 월령 마화종(月靈魔花宗)의 한 무리를 돌파해버린 정연서.
숭의각에 속해 호북 너머의 사도련을 상대로 일당백의 기세를 뿌린 심소룡.
만상각의 백혜원(百慧院)에 부름을 받고 가서 명석하게 업무를 처리한 사예설.
이번 임무에서 호평을 받은 제자가 여럿 있었지만, 이들은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군계일학이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최고의 평가를 들은 건, 그 이결제자들이 아니었다.
“그래도 진우선이 제일 대단했더군. 서 대주가 보고서를 그렇게 쓴 건 처음 봤네. 칭찬과 감탄을 넘어서 아예 경악한 모양이야.”
“네. 제가 서 대주를 만나서 직접 들었습니다. 우선이의 실력이 엄청났다고 합니다. 게다가 항마의 능력도 있어, 마교도를 정말 쉽게 상대했다더군요. 저는 그가 입술에서 침을 튀겨 가며 칭찬과 자랑을 늘어놓는 걸 처음 봤습니다.”
“그럴 수밖에. 우선이가 항마로 마교도들이 매복해 있던 위치까지 다 파악해냈었다지? 이건 정말 듣도 보도 못했던 일이야. 고작 보고서를 봤을 뿐인데도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네.”
“건네 듣기만 한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혈련수라종은 무공이 지독하고 악랄하며 손속이 잔인하기로 악명 높지 않습니까? 하지만 서 대주는 진우선이 나선 순간, 편안함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일결제자에게 그럴 줄은 몰랐다고 하는데, 듣고 있던 저도 참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호연강과 석자풍이 탄성을 내지르며 자신들이 받은 놀란 감정을 앞다퉈 말했다.
둘은 뭔가 매우 좋은 기분이 드는데, 그게 처음이라 제대로 직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허허-! 석 부당주도 그랬군.”
호연강이 웃음을 흘리더니, 말을 이었다.
“근데 얼마나 대단했으면 그랬을까? 사실 내가 아는 그 어떤 항마의 무공도 그렇지 않아. 심지어 여래불심항마공도 그러지는 못할 것이네.”
“저도 금시초문이었습니다.”
여래불심항마공(如來佛心降魔功)은 소림사의 무공으로, 마를 굴복시키는 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항마공이라고 하면 누구나 첫손에 꼽는 무공이었다.
한데 진우선의 능력은 그걸로도 설명할 수 없으니, 감탄만 할 따름이었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큰 복이야.”
석자풍이 그 말에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선은 이제 천마교를 상대하는 정무맹에서 다른 누구로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였다.
“서 대주는 이미 대원들에게 언질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방가장의 무사들에게도 신신당부했다고 합니다. 극비사항이니까요.”
“잘했군. 서 대주가 빠르게 대처했어.”
서영풍은 진우선의 무공이 가진 힘을 알아보았다.
말이 되지 않지만, 그 능력이 너무나도 뛰어나서 오히려 위험했다.
천마교의 입장에서는 척살 일순위일 것이 분명하니까.
“석 부당주. 그러고 보니 우선이를 데리고 남가철방에 갈 날이 내일이지?”
“네, 맞습니다.”
“그럼 우선이에게도 무공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조심하라고 말해 주게.”
“안 그래도 여기 나가면 바로 말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일정도 알려주어야 하니까요.”
“아! 그랬었군.”
호연강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불어서 석자풍 역시 진우선을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같다는 걸 느꼈다.
호연강은 문득 그 점에서 웃음이 났다.
“그런데…… 석 부당주, 자네 달라졌군.”
“무엇 말씀이십니까?”
“진우선에 대한 생각 말이야.”
“……아!”
뒤늦게 무언가 떠오른 석자풍은 그저 엷게 웃기만 했다.
“석 부당주, 자네는 처음에만 해도 우선이를 미심쩍어 했었지.”
“그랬지요. 제가.”
석자풍이 인정했다.
그때 분명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우선이는 참 순수하더군요. 종종 만나고 이야기해보면, 사람이 참 맑다는 생각이 들고, 세상에 때묻지 않았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분명, 혼자서 세상을 헤쳐 왔는데도 말입니다.”
석자풍이 진우선에게 받은 자신의 감상을 말했다.
호연강도 그에 동조했다.
“나도 그렇게 느꼈네. 심성이 참 맑고 올곧다고. 그러고 보면 내력에서도 현기가 느껴지고 정순한 것으로 모자라 항마의 능력까지 지녔네. 무언가 닮은 것 같지 않나?”
“그렇군요. 닮아 있습니다.”
석자풍이 호연강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심성과 무공.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두 가지다. 하지만 사람이 익혀내는 것이기에 또 서로 영향이 없을 수가 없었다.
석자풍이 어렴풋이 그걸 느끼고, 그 의미를 음미하고 있었다.
그 순간 호연강이 한마디 내뱉었다.
“사람은 무공을 닮고, 무공은 사람을 닮는다네.”
“그렇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일전에 맹주님께서 내게 해주신 말이네. 호심당에서 정무맹의 기둥이 될 인재들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여쭤봤을 때 그러셨지.”
맹주의 한마디가 호연강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 한마디가 여태껏 호심당을 이끌어오는 동안의 중요한 기준이었고, 이제 석자풍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잘 명심해두겠습니다.”
“고맙네.”
눈을 빛내며 대답한 석자풍의 모습에 호연강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선이를 보면 때로는 안타깝기도 해. 사람됨이 허식이 없어서 과하지 않지만, 때로 만용이나 허세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처럼 느껴지네. 마치 세상을 오래 산 사람 같아.”
호연강이 보기에 진우선은 애어른이었다.
그는 또래의 다른 제자들과 달리 감정 표현이 많지 않고, 실력에 자만하거나 어떤 상황에 쉽게 실망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도 않고, 교우관계에 의욕적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묵묵히 제 할 일만 했다.
조용하지만 성실하게.
호연강은 진우선의 그런 모습들에서 앳된 청년이 아니라, 어느새 조숙해져 버린 어른의 흔적을 느껴온 모양이었다.
“아!”
석자풍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호연강을 우러러보았다. 사람을 보는 그의 시선에 저도 모르게 존경하는 마음이 샘솟고 있었다.
그렇다면 호연강의 시선에서 진우선은 정확히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호연강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궁금하다네. 우선이는 어떻게 심성과 무공이 그리 올곧게 자랄 수 있었을까? 도대체 어떤 인연을 만났던 것일까?”
***
일결제자들의 뜨거운 열정은 연무장에서만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니었다.
춘추관과 독행관에도 의지를 가진 제자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들은 춘추관에서 여러 무공서를 열중하여 살폈고, 병법서와 지리서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을 마구 탐독하기 시작했다.
또, 독행관에 들러 무공에 대해 궁구했다.
연공실에서 지닌 무공을 더 예리하게 가다듬거나 새로운 무공을 살폈다.
심상 수련에 임하며 이번 임무간에 깨달은 심득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사부를 찾아가 온종일 배움을 청하는 일결제자도 많았다.
무공이란 본디 혼자서 익히고 깨닫고 완성하는 게 요원하다.
특히 새로운 무공을 시작할 때면 제대로 익히기까지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무사부를 찾았다.
무사부들은 그들을 하나도 내치지 않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환대했고, 성심성의껏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했다.
사실 무사부들은 이미 알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결제자들이 첫 임무를 다녀온 후부터 배움에 매우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것을.
아무튼, 이제 호심당은 분주했다.
한 달 남짓 이어졌던 호심당의 고요함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제자들 사이로 보이지 않는 기류도 흘렀다. 그것은 긴장감이기도 하고, 비장함이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본 호심당의 수뇌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제자들에게서 바라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스스로 노력하며 수련하는 게 가장 좋은 모양새였다. 효율도 가장 좋았다.
강호는 항상 칼끝에 서 있는 곳.
마음에 올바른 뜻을 세우고, 몸은 뜻을 이루기 부단히 수련해야 한다.
그게 정무맹이 백년간 존속되어 내려오며 체득한 이치였다.
호심당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곳에서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예전과 똑같았다.
독행관의 한 나무 옆에 앉아서, 함께 햇볕을 쬐고 나무를 바라보며 곁을 지켰다.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
바로 목제자였다.
그는 온종일 나무 옆에 앉아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참으로 조용하고 차분한 모습이었다.
사람 자체가 있는 듯 없는 듯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존재감마저 옅은 것은 아니었다.
다른 제자들이 독행관을 드나들며 그에게 깜짝 놀라곤 했다.
나무 옆에서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인데 말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심상 수련을 한다지?”
“상승의 공부라더군.”
“과연…… 남달라.”
“하긴. 그랬었겠지. 그래야 말이 되지.”
“맞네. 사람은 역시 겉모습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어.”
“아! 그러고 보니 우문혁이 그리 말했었지. 그의 진면목을 알아봤던 거였어!”
종합해보면, 목제자의 어수룩해 보이는 모습은 어느새 상승의 공부를 수련하는 고수의 면모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 우문혁만이 아니라 다수의 생각이었다.
“지난 시험에서 괜히 독보적이었겠어? 마지막 비무에서 만총과 대결할 때도 여유가 있었지. 자네들도 복기해봤겠지만, 시험 내내 그에게는 접전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어.”
“광명칠대에서도 그 활약이 엄청났지. 그래서 칠대주님은 아직도 극찬하고 계신다고 하고.”
“근데 수라객마저 단 한 수만에 제압했다고 들었네. 정말 그게 가능한 일일까?”
“허허! 자네는 아직도 의심하는가? 수라객이 두렵고 무서운 존재지만, 그건 우리에게나 그런 것이네. 그 같은 고수에게는 어렵지 않은 적이겠지.”
“고수라…… 그렇군. 그는 고수야.”
“부럽군. 속상하기도 하고.”
그들은 여기저기서 진우선에 대한 소문을 모아와 떠들었다.
그렇게 존재감이 점점 거대해져 가고 있었다.
“진우선이라…… 왠지 그 이름을 앞으로 자주 들을 거 같아.”
“그렇겠지.”
끄덕.
모두가 그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