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
#푸른 불꽃 (1)
불꽃은 빛과 열을 뿜어낸다. 붉은빛과 뜨거운 숨결을 토해낸다.
그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마주한 불꽃은 그렇지 않았다.
호박만한 크기의 불꽃은 색깔이 감청색이었다.
신비로우면서 묘한 느낌이었다.
새파란 하늘의 색을 닮았고, 깊은 바다의 색을 품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도 몰랐다.
그 자태가 곱고 우아하여 홀리는 듯도 했다.
언뜻 봤다면 커다란 보석으로 여겼으리라.
또한, 뜨겁지도 않았다.
사당 안에 불꽃의 열기가 가득했지만, 적당히 따뜻하고 편했다. 체온과 딱 맞아서 긴장을 완화해줄 정도였다.
이 감청색 불꽃은 색깔도 온도도 일반적인 불꽃과 달랐다.
하지만 이것도 불이다.
진우선은 그걸 확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오행진기의 화기가 지금 몸 안에서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었으니까.
그때, 눈에 들어오는 글자가 있었다.
“이화.”
화라락-!
진우선의 입에서 짧은 한마디가 흘러나온 순간, 불꽃이 크게 타올랐다.
호박만한 불덩이 위로 수많은 갈기가 하늘하늘 흔들거렸다.
그 모습이 반가워서 손을 흔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화……?”
남회의 입에서도 짧은 말이 흘러나왔다.
진우선이 읽은 글자를 남회 역시 발견한 상태였다.
절구통처럼 생긴 화로 겉면에 이화(離火)라는 두 글자가 양각되어 있었다.
화악-!
그렇게 남회가 이화를 말한 순간에도 불꽃이 거세게 일었다.
불꽃은 당장이라도 화로를 뛰쳐나와 난동을 부릴 것만 같았다.
남회가 흠칫 놀랐다.
흡사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느낌이 들지 않은가.
조금 전 진우선의 경우와 너무 달랐다.
아까는 분명 불꽃의 갈기들이 하늘거리며 친근해 보였는데, 지금은 불꽃 가시들을 마구 뿌려대며 적대적이었다.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섬뜩했다.
“허허.”
남회가 당황스러운 기색을 한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진 공자, 자네가 다시 불러보겠나?”
그의 말에 진우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화.”
진우선의 목소리에 이화가 변했다.
불꽃은 마치 언제 성을 냈었냐는 듯, 다시 온순해져서 화로에 얌전하게 앉았다.
“예사 불이 아니군.”
“그렇습니다.”
진우선과 남회는 이미 눈치챈 게 있었다.
“이 특별한 불의 이름이 이화인 모양입니다. 그만큼 화기로서의 성질도 강하여, 어르신과는 상극인 듯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평생 봐 왔던 불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
남회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화는…… 불의 정화이지 않을까 싶네. 내 느낌이 틀리지 않는다면 말이야.”
“아-!”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한평생 대장장이로 살아왔기에 누구보다도 불에 대해 정통한 사람이 바로 남회였다.
그의 통찰력이니 틀릴 리는 거의 없으리라.
과연 그러했다.
[정확하구나. 이화는 본디 불과 광명을 상징하니 태초부터 순수한 불의 정화(精華)이니라.]
검노야가 확인해주었다
[이화는 자신을 불태워 척사(序邪)하고 항마(降魔)하니 세상을 이루는 근본이 되며, 만물을 소생시키고 정화(淨化)하니 유익하기가 이를 데 없느니라. 그렇기에 이화는 불 가운데서 능히 천지간의 으뜸이라 할 수 있겠구나.]
‘아!’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화는 화기의 정수였다.
불의 기운을 가진 것들에서 정점이며, 특별한 존재였다.
그랬기에 사람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금기를 지닌 남회에게 강한 적개심을 보인 것이리라.
일전에 대장간에서 남회를 보았을 때보다 불길이 더욱 거셌던 게 그런 이유에서였다.
화극금의 이치.
어찌 보면 이제야 남회가 가진 금기에 격이 맞는 화기가 나타난 셈이었다.
진우선은 이렇게 외적으로 벌어진 상황을 단박에 이해했다.
그리고 내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에도 주목했다.
오행진기가 크게 반응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오행진기 속 화기는 이화에 강한 동질감을 느껴 닮아가기를 원했다.
형을 이룬 목기는 목생화의 이치로 이화를 도우려는 뜻이 있었고, 마찬가지로 형을 이룬 수기는 이화를 제압하려는 의지를 품고 있었다.
오행진기는 이화와 다양하게 감응하고 있었다.
‘이화와 함께한다면 화기의 수련에도 큰 힘이 되겠구나.’
더 나아가 오행진기의 순행과 역행, 상생과 상극에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본다면 이화와의 만남은 진우선에게도 참으로 의미가 깊었다. 아마도 소중한 인연이 될 것 같았다.
[허허허. 그렇지. 좋구나.]
검노야가 즐거워서 웃었다.
진우선이 떠올린 생각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아! 그래서였구나!”
남회가 감탄을 터뜨렸다.
“어르신.”
“하하하!”
진우선이 남회를 보자, 남회가 기분 좋게 웃어젖혔다.
“진 공자. 나는 이화가 불의 정화이니, 이화를 사용해 화로를 달구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네. 불의 기운이 더 강해질수록 정련되는 쇠의 품질도 더욱 높아지는데, 그렇다면 무엇을 만들던지 지금까지보다 더 뛰어나지 않겠나?”
남회가 흐뭇하게 웃었다.
이건 그의 행복한 상상이었다. 그처럼 천생 대장장이나 할법한 생각이었다.
진우선도 남회의 의견에 절로 동의가 되었다.
다만 걱정되는 게 한 가지 있었다.
“어르신. 그렇게 된다면야 더할 나위가 없겠습니다만…… 이화를 쓰셔도 문제없으시겠습니까?”
“가능할 것 같네.”
남회가 일말의 걱정도 없다는 듯, 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 조부님께 푸른 불꽃을 다루는 법을 들었었지. 그때는 불꽃이 어떻게 푸를 수 있을까 싶었고, 그저 나를 놀리시려는 줄로만 알았다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하고 잊어버렸지. 지금 이렇게 마주하기 전까지 말일세.”
하지만 조부의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제야 확인할 수 있었다.
“허허허. 이 낡은 화로 역시 조부께서 자주 매만지며 아끼셨던 물건이라네. 사당에 옮겨놓고서 오랫동안 신경도 안 썼었군. 내가 소홀히 했어.”
남회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거나 이화를 다루는 방법이 있다고 하니, 더는 남회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그보다 고맙네. 진 공자 덕분에 이화를 찾아내게 되었어.”
“그 말씀은 참…….”
진우선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고맙다는 말을 듣기가 민망한 까닭이었다.
그냥 이화를 발견했으면 감사의 말을 받아도 상관없으련만, 철방의 모든 불을 꺼뜨리며 폐를 끼친 상황이지 않았던가.
이화를 발견하게 된 것은 그 와중에 우연히 벌어진 일이나 다름 없었다.
“그게 아닐세. 아마도 철방의 불이 다 꺼지지 않았다면, 이화가 피어오르지 않았을 것이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게 말이 안 되지.”
“아!”
진우선은 그제야 남회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진우선과 남회는 이번 사건에 대한 관점 자체가 달랐다.
“조부님께서 푸른 불꽃에 관해 이야기해주셨을 때, 이와 비슷한 이야기도 있던 거 같은데…… 그건 잘 기억이 안 나는군. 분명 무언가 더 들었었는데.”
불을 다루는 방법만 기억하고 있을 뿐, 다른 건 또렷하게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역설적으로 그런 모습이 대야장 남회답다고 느껴졌다.
“아무튼. 진 공자, 너무 미안해하지는 말게. 소 무사에게도 꼭 그렇게 전해주고.”
소 무사는 소무강이었다.
남회는 이번 일에 대해 소무강이 진우선과 똑같은 모습을 보일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잘 전하겠습니다.”
“고맙네.”
남회가 진우선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이화를 바라보았다.
“진 공자. 일단 내 대장간은 이화로 노(爐)를 달궈볼 생각이네. 이만하면 좀 옮겨가도 쉽게 꺼지지는 않을 거 같거든.”
“바로 시도할 생각이십니까?”
“그렇네. 어차피 지금 화로가 꺼졌는데, 바로 이화를 붙이면 두 번 수고할 필요가 없지.”
남회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지금 당장 실행에 옮길 태세였다. 그만큼 마음이 달아올라 있었다.
“어르신. 그럼 제가 옮기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저도 대장간에서 이화를 관찰해도 괜찮겠습니까?”
진우선이 남회에게 부탁했다.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모습 하나가 있는 까닭이었다.
남회의 대장간에서는 화기와 금기가 항상 첨예하게 대립하지 않았던가.
이제 평범한 화기가 특별한 이화로 바뀔 텐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든지 변화가 일어날 게 틀림없었다.
진우선은 그게 조심스럽게 기대되고 있었다.
“진 공자라면 당연히 그럴 줄 알았지. 나야 상관없다네.”
남회가 씨익 웃었다.
“그나저나 이화가 자네의 수련에도 도움이 되려나 보군. 차분하던 자네가 이러는 걸 보면 말일세.”
“어르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어쩌면 이화를 통해 제 수련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허허. 이 불꽃이 그 정도인가?”
남회가 뿌듯한 눈으로 이화를 바라보았다.
집안에 두고도 그 진면목을 알지 못해 마냥 내버려 두었던 낡은 화로일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알고 보니 보물이었다.
특히 화로에서 솟아나는 이화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너무 기뻤다.
그때, 바깥에서 불빛이 나기 시작했다.
“다시 불을 켰나 보군. 다들 화로에다가도 풀무질하고 있겠어.”
철방에 불길이 돌아오니, 그건 대장장이들이 다시 자신의 작업에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나도 서둘러야겠군.”
남회는 한층 흥분되어 있었다. 얼른 이화를 써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리라.
눈빛에서도 기대감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이미 그의 마음속에선 자신의 대장간 화로가 이화로 가득 차 있을 터였다.
그런데 남회 혼자만 그렇게 고대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짙은 동공에 이화의 푸른 불꽃을 새길 듯이 바라보는 한 사람이 또 있었다.
바로 진우선이었다.
***
아침이 밝아왔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익숙한 망치 소리가 남가철방을 고요하게 울렸다.
땅- 땅- 땅-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네.’
진우선은 지금의 차분하고 평온한 풍경이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지난밤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화는 잘 타오르고 있구나.’
이글거리는 태양만큼이나 뜨거운 기운을 진하게 발산하는 화기가 생생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화가 남회의 대장간에서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어르신도 참 대단하시군.’
이화로 대장간의 화로를 채우고 싶다더니, 벌써 일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참 죄송하다.’
진우선은 불현듯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회는 어젯밤 상황에서 충분히 화를 낼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이화를 만나게 된 것에 즐거워했다.
마음이 얼마나 넓으면 그럴 수 있을까.
‘과연 대인이시구나.’
오히려 성을 내지 않으니 더욱 탄복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떠날 준비를 마친 소무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 대협, 짐을 다 챙기셨군요.”
“그렇소.”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두 사람이 서먹한 듯이 인사를 나누었다.
소무강이 늘 그러하듯이 내원을 떠나던 중, 갑자기 멈춰서며 진우선에게로 몸을 돌렸다.
“진 소협.”
진우선을 부르는 소무강의 눈빛이 아련했다.
사흘은 분명 길지 않은 시간이건만, 많은 일은 겪었기 때문일까.
문득, 소무강이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진우선을 보았다.
“고맙소.”
“별말씀을요.”
소무강은 문득 진우선에게 ‘고맙다’라는 말만 몇 번이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진우선을 만나 한령신공의 새로운 실마리를 얻었으니, 그는 은인이었다.
“진 소협. 시간이 된다면 나중에도 봤으면 좋겠소. 그럼 수고하시오.”
“네.”
답변을 들은 소무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그리고 앞으로 쭈욱 나갔다.
소무강의 뒷모습에 아침 햇살이 어렸다. 따뜻하게 보였다.
‘무뚝뚝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구나.’
진우선은 소무강에 대한 첫인상이 바뀌고 있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