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
#십오행이 가져온 변화 (1)
십오행의 열하루째 날.
이른 새벽, 동이 터올 무렵에 일결제자들은 이미 무곡의 골짜기 안쪽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좋지 않았다.
몸에 걸친 옷에는 흙 자국, 물 자국이 가득했고, 긁히거나 찢겨서 잔뜩 해져 있었다. 신발도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다 닳아 있었다.
잘 씻거나 닦을 수 없기에, 얼굴도 꾀죄죄해 보였다.
그런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도 엿보였다. 낮에는 긴장 속에서 지내고 밤에는 노숙하는 생활을 날마다 계속했으니, 아무리 고된 수련으로 단련했다 하더라도 피로를 느끼는 게 당연했다.
그 와중에 몇몇은 부상이 있었다. 옷 아래로 언뜻언뜻 팔다리가 드러날 때면 면포로 단단히 동여맨 게 보였다. 통증이 심해 임시방편으로 찾은 대책이었다.
이런 모습들은 모두 날마다 야전을 치른 열흘간의 흔적이었다.
대부분의 일결제자들은 이처럼 육체적으로 꽤 피폐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달랐다.
안광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더러는 야수 같다고 느껴지기도 할 만큼 사납고 날카로웠다.
마음속에 무언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이 힘들어도 버텨내고 있으리라.
손중보도 그러했다.
그의 행색은 초라했다. 잔뜩 낡고 해진 옷은 마치 거적때기나 다름없어 보였다.
거기에 풀물과 흙으로 잔뜩 덧칠하고 땀이 흥건했던 자국이 무늬를 만드니, 꾀죄죄한 모습이 악취와 함께 조화를 이루었다.
한마디로 거지꼴이었다.
게다가 눈 밑은 검었고, 눈동자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얼굴은 검게 그늘져 있었는데, 두 뺨마저 홀쭉하게 패여서 기력조차 거의 없어 보였다. 곧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을 얼굴이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표독해 보일 정도로 살아있었다.
그런 손중보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손중보는 빠르지 않았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움직이는 까닭이었다.
그는 엊그제 다리를 다쳤다. 허벅지에 강한 일격을 당해 통증이 심했다. 그런데 어제도 무리하여 움직이다 재차 타격을 입었다. 고통이 곱절 이상으로 가중되었다.
지금도 너무 아팠다. 턱 끝까지 신음이 차올라왔다. 입만 열면 새어나갈 듯했다.
그렇지만 손중보는 이를 악물고 통증을 견뎠다.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더 쓰리기 때문이다.
그는 기민한 움직임을 통해 권장지각에 두루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인재였다. 일결제자들 사이에서 근접전의 고수로 첫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 비결은 굳건한 하체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힘에 있었다. 손중보의 무재를 알아본 스승이 그에게 부풍신법(浮風身法)이라는 상승의 경신술을 전수했는데, 그때부터 깨우친 힘이었다.
손중보는 그 힘이 자신의 장점인 걸 알아서 부풍신법을 오랫동안 집중하여 수련해왔고, 그래서 더욱 강해져 있었다. 누구나 인정할 정도였다.
손중보는 그게 자랑스러웠다.
자부심도 있었다.
그랬으나, 엊그제도 어제도 단 한 수에 당했다.
‘고작 한 수였어! 단 한 수!’
두 눈을 빤히 뜨고서도 막아내지 못하고 공격을 허용했다.
상대는 자신을 오래 상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보자마자 목검으로 허벅지를 끊어내듯이 내리쳤을 뿐이었다.
그 일격에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강한 자부심이 단숨에 부서졌다.
너무도 치욕스러운 결과였다.
그간 고되게 수련한 건 무엇이던가. 허망할 정도였다.
‘믿을 수 없어!’
처음에는 결과를 부정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상처를 질끈 동여매고 어제 다시 나섰다.
그러고는 상대에게 곧바로 가장 강력한 초식을 펼쳤다. 상대가 반격해올 만한 거리도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는 똑같은 부위를 연거푸 찔러 들어왔다. 그걸 전혀 막지 못했다. 두 눈 뜨고도 당한 꼴이었다.
이번에도 단 한 수였다.
한 초식도 아니고, 그저 내려치는 동작 하나뿐이었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손중보는 어젯밤에 승패를 수없이 곱씹었다.
진 이유를 찾고 싶었다. 그걸 알아내고 보완해서 더 발전해나가고 싶었다.
그러면 지금의 패배는 훗날의 영광에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그래서 밤을 새웠다. 물론 그 결과는 허사였지만.
결국, 단 하나의 선택만이 남아 있었다.
‘그에게 물어봐야겠어!’
그래서 지금 그에게로 가고 있었다.
그를 잘 알지는 못하나, 지금의 고민을 풀어내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단 한 수에 제압했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실제로 일결제자들 가운데 실력으로 비견할 이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십오행의 일정 중 지나간 열흘간 모두 승리한 사람이며, 혼자서도 다른 스물두 명을 무릎 꿇린 사람이며, 오늘부터는 같은 편이 되니 누구보다 듬직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저기 앞에 보였다. 그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햇빛이 그를 비추고 있었다.
그는 얼굴빛이 맑았다.
함께 노숙하며 시험을 치렀건만, 긴장이라거나 피로 같은 건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평온하고, 차분해 보였다. 그런 가운데 눈빛만큼은 남달랐다.
그의 눈동자는 깊고 깊었는데, 그 가운데서 또렷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뭐라 형언키는 어려웠다. 무언가 느낀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심혼이 빨려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혹시 나를 꿰뚫어 본다면 이런 게 아닐까.
한순간, 의문조차 사라졌다.
“……!”
머릿속 사고가 멈췄고, 세상이 멎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때, 그의 입이 열렸다.
“중보.”
그와는 지난 열흘 중에 세 차례 같은 조였는데, 통성명만 했을 뿐이었다. 그동안 서로 존재만 알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등을 떼고 다가오면서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진 소협. 밤은 잘 쉬셨소?”
손중보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그는 진우선이었다.
한데 손중보가 그렇게 부르는 모습은 꽤 어색했다. 진우선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건 처음인 모양이었다. 아니, 대화 자체가 처음인 듯했다.
“그럭저럭 보냈어. 근데 왜 진 소협이라고 불러?”
“종종 혁이가 진 소협이라 부르는 걸 들었소. 나도 왠지 그게 부르기 편하오.”
손중보는 우문혁과 동갑이었다.
그는 호심당에서 한 해를 보내며 우문혁과 종종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의 말을 듣다 보니 진우선의 이름보다 호칭이 더 익숙해져 있었다.
그에 더해 최근 열흘간 십오행을 치르며 무의식적으로 경외하는 마음이 생겨 있었다.
“우리 동갑이야. 말 편히 하자.”
“괜찮소. 그래도 나는 이게 편하오. 진 소협.”
손중보는 아직 진우선이 낯선 모양이었다.
진우선도 그걸 느꼈다. 그래서 더 강요하지 않았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소?”
“응, 물어봐.”
“진 소협,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소협의 단 한 수에 속절없이 무너졌소. 엊그제도 그렇고 어제도 그랬소. 특히 어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쉽게 파훼 될 수가 없는 건데…….”
“어제라면 격공장을 쏟아내려던 그때 맞지?”
“맞소.”
그 순간 주변의 소리가 멎었다. 소곤대는 사람들조차 없었다.
정적이 흘렀다.
다들 진우선과 손중보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느라 갑자기 조용해진 까닭이었다.
적막 속에서 손중보는 진우선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정확히는 입이 열려 무슨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보. 나는 네 격공장의 위력이 상당할 것 같았어. 그래서 먼저 네 무공의 맥을 끊고자 했지.”
손중보가 펼친 격공장은 그가 익힌 무공의 절초 중 절초였다.
애초에 격공장(隔空掌)은 허공을 격(隔)하여 상대에게 곧바로 타격을 입히는 장법의 통칭으로, 상승의 장법 중 하나였다. 격공장의 방식으로 기운을 쏘아 보내면, 자취를 감추고서 공간을 건너뛰어 원하는 일점에서 폭발한다.
그 과정을 알아채기가 얼마나 힘들 것이며, 미처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입는 피해는 또 얼마나 막심하겠는가.
한데 손중보는 그러한 장법을 최선을 다해 펼쳤었다.
격공장을 연거푸 펼치니 암중의 공격이 사방에서 한꺼번에 쏟아지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진우선은 손중보에게 달려들었다. 맥을 끊기 위해서였다.
“네 장법은 무섭게 밀려오고, 네 몸놀림은 민첩하니, 무공들이 조화로워서 쉽지 않겠더라. 하지만 하체의 움직임에 비해 상체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서 미묘하게 어긋나는 거 같았어.”
“……미묘하게 어긋났소? 그럴 리 없을 텐데……. 허점이 생길 리 없는데…….”
손중보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계속 갸웃했다.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그는 스승에게서 부풍신법과 함께 여러 무공을 배웠는데, 그중 상승의 장법인 오뢰천심장(五雷穿心掌)의 성취가 높았다.
그러다 최근에 심득을 얻었고, 부풍신법의 묘용을 살리며 오뢰천심장의 절초들을 더욱 위력적으로 펼쳐낼 수 있게 되었다.
내심 좀 더 일찍 그 이치를 알았더라면, 봄에 있었던 비무 시험에서 실력으로 한 손에 꼽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진우선에게 펼쳐 보였다. 그는 비무의 우승자였으니까. 아무리 그라도 꽤 상대하기 어려울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수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진우선의 성취가 얼마나 높아졌을지는 예상하지 못한 탓이라지만, 너무도 허탈한 결과였다.
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적어도 진우선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음…… 허점이라고 할 것까진 아니었어. 다만 네 무공은 하체에 비중이 쏠려 있어서, 그 부분의 맥을 끊으면 네 기운의 흐름을 끊어 낼 수 있을 것 같았어.”
“아!”
손중보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진우선의 말이 정확해서였다.
또한, 이전에도 이런 지적을 들은 적이 있었다.
호심당에 오기 전, 스승님은 줄곧 “신법이 네 장기라고는 하나, 그것에 너무 많이 의지하고 있다.”고 하셨으니까.
스승은 무공을 전수하고 떠났으나, 그의 몇 마디 말만은 손중보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해되는 건 바로 지금이었다.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겠소!”
손중보는 내면의 무언가가 짜 맞춰지는 느낌이 들었다. 비로소 실마리가 보이는 듯했다.
스승님이 “그걸 넘어서야 너 자신을 넘을 수 있다.”라고 하신 게 이것이리라.
그 말은 곧, 지금의 실마리가 상승의 경지로도 이어져 있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물론, 체득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된 것만으로도 매우 큰 기쁨이었다.
“진 소협! 고맙소! 정말 고맙소!”
손중보가 들뜬 목소리로 마구 감사를 표했다.
그에 당황한 진우선이 얼떨결에 말을 이었다.
“내가 한 건 특별히 없는데. 아무튼, 축하해!”
“인제 보니 진 소협이 왜 진 소협이라 불렸는지 알 것 같소. 혁이의 말이 맞았소.”
흥분한 손중보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우문혁에 대해서 말했다. 그가 이렇게 된 데에 우문혁의 조언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혁이가 뭐라고 했어?”
“혁이가 진 소협은 실력도 뛰어나거니와 성품도 고매하니, 함께 하는 게 복이며 덕이라고 했소. 자신은 처음부터 그걸 알아서 다행이었고.”
“…….”
진우선은 말문이 턱 막혔다.
우문혁이 저리 말하고 다녔단 말인가.
그의 말 하나하나가 너무도 낯부끄러워서 반박하는 것조차 쉬이 내키지 않았다. 입에 그 말을 담는 게 더 창피할 테니까.
그런 진우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중보는 가슴에 있던 말을 계속 쏟아냈다.
“나 역시 진 소협과 대화를 하기 전에는 그런 걸 잘 몰라서, 그저 어려운 사람인 줄 알았소. 다들 그렇다고 했고.”
진우선의 실력은 봄에 치른 시험에서 정평이 났지만, 그와 친해진 사람은 별로 없었다.
여태까지 왠지 모르게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방금 대화해보니 알겠소. 그건 사실이 아니오. 모두의 착각이었소.”
바로 그때.
끼에엑-!
숲 저쪽에서 소름끼치는 비명이 들려왔다.
짐승 소리 같기도 하고, 사람 소리 같기도 한,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비명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끼에에엑-!
비명이 한 번 더 났다.
다시 들어도 절로 몸서리쳐지는 소리였다.
“아! 알겠소. 이건 고라니 소리요. 누가 고라니를 잡은 모양이오.”
손중보가 단정 짓듯이 말했다.
고라니는 사슴 종류의 하나인데, 이건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확신이었다.
그러자 만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혁이가 아까 먹을 걸 구하러 간다고 했는데, 두 마리나 잡았나 보네.”
두 마리면 적은 양이 아니었다. 일결제자들이 모두 나눠 먹어도 충분할 정도였다.
과연 우문혁은 고라니 두 마리를 양어깨에 걸머지고 골짜기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일결제자들의 시선이 우문혁에게로 쏠렸다.
우문혁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다 같이 먹읍시다. 오늘은 정오부터 시작한다고 했으니, 이렇게 먹는 것도 우리 능력인 거 아니겠소?”
그러더니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누가 불 좀 피워주시지 않겠소?”
“불은 내가 피우지.”
“고맙소.”
그렇게 일결제자들 사이에 훈훈한 분위기가 피어날 때.
체구가 매우 커다란 한 사람이 진우선에게로 다가왔다.
“진 공자, 반갑소. 나는 임중산이오. 그간 얼굴만 알고 있었는데, 지금이라도 인사하려 하오. 받아 주시겠소?”
“아, 반갑습니다.”
진우선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청년 임중산을 바라보았다.
느닷없는 인사였다. 다소 당황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때, “후후!” 하는 가벼운 웃음 소리가 들렸다.
진우선이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만총이 피식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