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
#위험한 임무 (2)
“깨어났군.”
“흐흐-!”
백발노인이 광기 섞인 눈을 빛내며, 방금 늪에서 모습을 드러낸 괴인을 주의 깊게 살폈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검은색이었다.
흑사오음마공(黑死五陰魔功)의 내력이 전신에 골고루 깃든 상태였다.
“수고했다.”
“그렇습니까?”
“그래.”
“크크크!”
섬뜩하게 웃는 괴인에게서 핏빛 안광이 흘러나왔다. 내력을 일으킨 순간, 흑백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짜릿합니다. 큭큭!”
“그 힘을 즐겨라. 네가 익힌 건 마라혈기(魔羅血氣)다. 넌 마라혈인으로 거듭났다.”
“이제야 그 이름을 알려주시는군요.”
“이제 넌 들을 자격이 있으니까.”
백발노인의 말에 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괴인은 독지(毒地)에 들어가서 독기를 흡수했고, 새로운 마공을 이루어내며 살아남았다.
즉, 목숨을 걸었으니 뛰어난 마공이라는 대가를 얻은 셈이었다.
“적혈마벽과 천독마기는 관련이 있습니까?”
“영악한 놈. 연성하면서 다 알게 됐을 텐데, 확인하고 싶어 하는 건 여전하군.”
“저는 확인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래, 넌 그랬지. 아무튼, 네가 생각한 대로 마라혈기는 혈독쌍괴 두 분께서 함께 창안하셨다.”
“역시 그랬군요. 믿기 어렵긴 했습니다.”
혈독쌍괴는 혈괴와 독괴를 함께 아우르는 명칭이었다.
그들은 모두 약관의 나이에 출도 하여 강호를 종횡무진 누비며 기기묘묘한 행적을 벌였던 마두였다.
혈괴는 상대의 피를 짜내며 죽음을 뿌렸고, 독괴는 독물을 수집하면서 뭇 고수들을 독살했다.
그때부터 천마교의 이름이 강호에 크게 퍼지게 되었고, 사람들이 천마교의 부활과 혈독쌍괴의 존재에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둘은 자존심이 강해 ‘혈독쌍괴’로 함께 불리거나 비교되는 걸 반기지 않았다.
강호인들은 대개 혈독쌍괴를 한데 묶어 비슷한 괴인, 비슷한 실력으로 매도했는데, 혈괴와 독괴는 그런 시각 자체를 죽기보다 싫어했다.
두 사람의 활동 반경이 늘 동떨어져 있었던 게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혈괴와 독괴가 힘을 합쳤다?
혈괴의 적혈마벽(赤血魔壁)과 독괴의 천독마기(千毒魔氣)는 각자의 진신절기인데 그걸 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괴인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건 백발노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백발노인이 계속 괴인의 상태를 살펴보며 물었다.
“그런데 대성하면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왔을 텐데. 구 성 정도 익혔나?”
“맞습니다. 정확하시군요.”
“쯧쯧. 마지막 벽을 못 넘었군. 네놈이라면 넘지 않을까 싶었는데.”
백발노인이 아쉬움에 혀끝을 찼다.
흑사오음마공을 십이 성 대성하면, 마라혈기를 모두 융화시켜 진정한 마라혈인이 되고, 비로소 혈마기와 독기를 완벽하게 뿌리고 거둘 수 있다.
구 성이면 막강한 내력을 펼칠 수는 있지만, 마라혈기의 본 위력은 다 보이지 못하리라.
“부족합니까?”
“괜찮다. 마라혈기를 다루는 데 어려움은 없을 테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습니까?”
“지금은 가을이다. 너는 봄에 들어갔으니, 반년 정도 지났군.”
“일 년이었으면 마지막 벽도 넘었을 텐데요. 아니면, 그들이 더 많았거나.”
괴인이 붉은 안광을 뿌리며 백발 노인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시간, 또는 재료의 부족.
그건 괴인 자신의 탓이 아니었다.
“그렇군. 알겠다. 참고하지.”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이제 이곳에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저뿐입니다. 거대한 기운이 아홉 차례 쏟아져 들어왔거든요. 크크큭!”
“그만하고, 옷이나 입어라.”
백발노인이 괴인의 말을 끊더니 손을 한 차례 휘저었다.
멀리 돌 위에 놓여 있던 남색 무복 한 벌이 허공을 붕 떠서 날아왔다.
괴인이 곧장 옷을 입었다.
독기가 가득한 늪 속에서 반년을 지내느라 옷 따위는 이미 진즉에 녹아버린 상황이었다.
“우리는 마라혈인을 혈객(血客)이라 부르기로 했다. 너는 원하는 이름이 있느냐?”
“이름…… 따위는 잊었습니다.”
평생을 불려왔고, 반년 전까지 불리던 그 이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괴인은 이름을 버렸다.
백발노인은 괴인의 시뻘건 눈을 통해 그의 결심을 들여다보았다.
“그럼 너는 이제 철혈객이다.”
“철은 왜 붙었습니까?”
“네 증오를 잊지 말라는 뜻이다.”
“제가 원한을 어찌 잊겠습니까? 정무맹 그놈들이 철가장을 버렸습니다. 지난 백 년간 함께해왔던 철가장을요!”
괴인의 눈에서 핏빛 안광을 뿜어졌다. 마라혈기가 그의 분노에 거세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래서 철혈객이다.”
“아닙니다. 저는 복수를 완성하기 전까지 가문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을 겁니다.”
“마라혈기를 익혔지만, 네 얼굴과 무공은 남아 있다. 너는 그걸로 원한을 갚아야 한다. 그래야 천하가 너를 기억한다는 걸 명심해라. 네 복수도 마찬가지다.”
백발노인이 냉엄하게 꾸짖었다.
그와 동시에 전신에서 싸늘하게 피어난 암흑의 기세가 괴인의 분노를 꽉 억눌렀다.
“……알겠습니다.”
괴인이 수긍했다. 백발노인의 말에 틀린 바가 없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그럼 이제 교로 돌아가자. 두 분께서 널 만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죠.”
***
‘심각하다!’
녹마봉 산자락에 들어선 진우선은 굳은 얼굴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녹마봉의 겉모습은 여전히 푸르다. 하지만 속은 죽음의 기운, 사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다.
산짐승과 산새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공기는 퀴퀴했다. 초목의 푸른빛도 자세히 살펴보면 그저 멈춰 있을 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진우선은 의아함도 느끼고 있었다.
‘이상해. 왜 낯설지가 않지?’
녹마봉 산자락에 들었으니 죽음의 기운이 더욱 명확하게 느껴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기운이 익숙했다.
‘구유마라종과는 처음인데…….’
왜 익숙할까?
혹시 처음이 아니란 말인가?
진우선이 감각에 집중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아! 맹 대협!’
지금 녹마봉을 잠식하고 있는 기운은 지난날 형산파의 대사형 맹두고, 그에게서 느꼈던 기운과 흡사했다.
‘아니. 지금이 더 짙다!’
진우선이 눈을 부릅떴다.
그렇다면 지금 녹마봉은 과연 어떤 상황이란 말인가. 우려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그때 참사를 일으킨 게 구유마라종이었겠구나!’
진우선은 예기치 않았던 형산파 사태의 전말도 깨닫게 되었다.
빈틈없는 심계로 그날의 참담한 혈사를 일으킨 원흉이 바로 천마교 구유마라종이었던 것이다.
‘악랄한 놈들!’
속에서 화가 치솟았다. 그들의 잔악함과 음험함에 치가 떨렸다.
하지만 이성은 그런 감정과 별개인 것처럼, 극도로 차분해졌다.
중요한 건 지금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곳 녹마봉에 피어오르는 죽음의 기운이 독성도 포함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당시 진우선은 사태의 원인이 독처럼 작용하는 마기 때문이었다고, 형산파의 기천극 장로에게 들었다.
형산파의 무인들은 독처럼 번진 마기로 인해 이지를 상실했고,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한 채 광기에 휩싸여 오직 살육에만 빠져 있었다.
그런데 녹마봉의 사기가 형산파 사태 때보다 더 짙으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었다.
‘……!’
그 즉시, 진우선이 멈춰 서서 곧바로 엄소백에게 다가갔다.
진우선의 뒤를 따르던 일행은 당연하게도 그 자리에 정지했다.
“대주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진우선의 대화 요청에 엄소백이 신중한 표정으로 응답했다.
“말해보게.”
“지금 이곳의 사기가 너무 짙습니다. 가벼이 여기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산봉우리 하나가 죽어가고 있으니, 결코 가벼울 리 없을 걸세.”
엄소백이 동의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을 꺼낸 걸 보면, 상황이 꽤 심각한가 보군.”
“그렇습니다.”
“얼마나 심각한가?”
“매우 안 좋습니다. 지난겨울에 장사에서 형산파 사태가 벌어졌을 때와 기운이 흡사한데, 지금이 훨씬 더 지독합니다.”
“형산파 사태라면…….”
엄소백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 참사를 전해 들어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진 소협의 말대로라면, 그때의 일은 구유마라종의 소행이라는 뜻이 되는군. 또한, 우리는 마기독(魔氣毒)도 경계해야 할 테고.”
“마기독이 혹시 독처럼 작용하는 마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자네 말이 맞네. 이것도 알고 있었군. 다만 마기독이라는 이름은 맹에서도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서 임시로 붙였다네. 아마도 천마교의 혈독쌍괴 중 한 명이 비밀리에 준비했을 거라 유추하고 있지만 말이야.”
엄소백은 진우선에게 마기독을 설명하던 중,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어 바로 물었다.
“그런데 장사에서의 기운과 흡사하다고 말한 걸 보면, 혹시 진 소협은 그때 마기독을 직접 경험했었는가?”
“네, 제가 그때 경험했습니다.”
“허어! 그럼 염 소협도?”
“저는 아닙니다.”
염지광은 근처에서 대화를 듣다가 자신에게 질문이 오자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개를 끄덕인 엄소백이 진우선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진 소협만이군. 그때 듣기로 호심당 제자의 활약이 컸다고 들었네. 내 생각에는 그게 진 소협 자네 같아. 맞는가?”
“불의한 일을 보고 물러설 수 없기에, 그때 저도 한 손 거들었습니다.”
“후후. 그런가? 알겠네.”
엄소백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사실 형산파 사태 때 크게 활약한 호심당 제자의 신원과 상세한 내용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미 알려진 건 어쩔 수 없으나, 더 이상의 전력과 정보 유출을 막고자 수뇌부에서 짤막한 한마디 언급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래서 엄소백도 이름조차 모른 채 그 사태를 기억하고 넘어갔었는데, 그간 목격한 진우선의 모습 들을 통해 직감으로 알아챈 상황이었다.
아무튼, 엄소백이 그렇게 진우선과 대화를 마치고 대원들을 향해 돌아섰다.
“다들 설산호심공을 끌어올려라. 이제부터는 마기독의 위협도 대비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무의대원들이 대주 엄소백의 명령을 곧장 따랐다.
설산호심공(雪山護心功)은 엄소백이 정무맹 춘추관에서 가져와 대원들에게 전한 심법이었다.
상승 공부는 아니지만, 부지불식 중에 침투하는 기운에 대항하는 데에는 적격이었다.
유비무환의 자세로 이런 상황을 예비했던 엄소백의 행동이 지금 빛을 발하려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어억!”
“대, 대주님!”
대원들이 여기저기서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이냐?”
엄소백이 당황하여 다급하게 외쳤다.
“이미…… 무언가 있습니다!”
“내력이 제멋대로입니다!”
“끄아아!”
무의대원들이 가슴팍을 움켜쥐며 고통을 호소했다.
“몸이 너무 뜨겁습니다.”
“제 안에 마기가!”
단전 속에 침투한 마기를 느낀 무의대원은 이미 눈동자에도 붉은 빛이 어리고 있었다.
진우선이 엄소백에게 외쳤다.
“대주님. 이미 마기독이 스며들었습니다!”
“벌써?”
“저분의 붉은 안광을 보십시오. 마기독에 완전히 중독되면 핏빛 안광이 뿜어지는데, 잠시 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럴 수가!”
“완전히 중독되면 광기가 들어 적아를 구분 못 하고 살심(殺心)으로 가득 찹니다!”
진우선이 형산파 때의 기억을 되살려 상황을 빠르게 알렸다.
엄소백이 정심한 내공을 담아 외쳤다.
“이놈들아, 정신 차리고 얼른 팔호결(八號訣)을 외워라!”
팔호결은 설산호심공의 정수를 담은 구결로, 여덟 번 되뇌는 시간 동안 심법을 운용하면 이미 침투 한 기운도 능히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린 걸까.
미처 한숨 돌리기도 전에 야수의 포효가 귓전을 때렸다.
“크아아악!”
부대주 운철산이 시뻘건 안광을 흘리며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핏빛 안광이 되기 직전이었다.
“안 돼! 철산아!”
엄소백이 절박하게 외치며 그에게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