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
#빙화곡 (1)
만상각 이층의 소요정에 진우선과 목단화가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은 복귀한 지 며칠 되었는데, 그 뒤로 서로 마주친 게 오늘이 처음이었다.
“계속 만상각에서 지내다 보면 알겠지만, 백혜원에 천재들만 모였다고 해도 다들 따뜻한 사람이야. 숨 가쁘게 임무를 수행하고 오면 며칠씩 쉬게 해주고 그래. 부상도 치료하고, 정비도 하고, 지친 심신을 달래주라는 거지. 딱 지금처럼.”
“그렇군요. 하긴, 저도 백무원에 들어오자마자 임무를 연속으로 세 번 받았는데, 지금 이렇게 며칠째 쉬고 있네요.”
진우선이 편하게 말을 건넸다.
목단화와는 천중산에서 장사까지 함께 오면서 가까워진 상태였다.
올해로 스물다섯인 그녀는 백무원에 들어온 지 벌써 이 년이 된 선배였다.
그녀는 임무를 수행하며 번 돈으로 구매한 집에서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었다. 이번에도 거기서 심신을 회복하고 온 상황이었다.
“이럴 때 창밖을 봐야 해. 봄이 왔어.”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목단화가 창밖을 보며 봄 햇살을 만끽했다.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계절이 언제 바뀌었는지 모르거든. 볼 수 있을 때 봐두는 게 좋아.”
“그게 지금이군요.”
진우선이 목단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세상이 약동하고 있었다.
“이 정도 쉬었으면 임무를 주거든. 다들 계산이 철저해서 빈틈이 없더라고. 그러니 지금 볼 수 있을 때 봐둬야 해.”
“하긴, 허술해 보이는 사람은 없었어요.”
진우선과 목단화가 그렇게 공감하는 순간, 사예설이 소호정에 들어왔다.
“목 언니, 무원주님이 찾으세요.”
“아, 역시!”
계산이 철저하다고 말하자마자 임무가 와버렸다. 목단화가 어이 없다는 듯이 피식 웃더니, 진우선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우선아. 그럼 다음에 또 기회 되면 보자.”
“네, 알겠습니다. 임무 잘 다녀오세요.”
사예설이 진우선도 불렀다.
“진 공자는 각주님께 가면 돼요.”
“아!”
“너도 있네. 하하. 잘 다녀와.”
목단화가 진우선을 격려하며 먼저 삼층으로 올라갔다.
진우선도 천천히 소요정을 나섰다.
그때, 사예설이 입을 열었다.
“진 공자, 파멸대를 전멸시킨 거 정말 대단했어요! 고생 많았어요.”
“아! 사 소저, 감사합니다.”
진우선이 다소 어색하게 대답하고는 삼층으로 올라갔다.
사예설도 겸연쩍은지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만상각주 공야청은 진우선이 집무실에 들어오자 간단한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돌아온 지 닷새 정도 되었겠군. 잘 쉬었는가?”
“네, 배려해주셔서 잘 쉬었습니다.”
“다행이군. 좋아 보이기도 하고.”
공야청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임무들을 다 잘해줘서 고맙네. 단화를 구해오는 일도 완벽했다 들었네.”
“과찬이십니다.”
“허허. 지난 임무들처럼 이번 임무도 잘해주기를 부탁하려는 거라네. 이번 임무는 내가 주는 것이기도 하거든.”
진우선이 공야청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백무원주가 아니라 만상각주를 직접 만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빙화곡이라고 들어봤는가?”
“아니요. 처음입니다.”
“그런가? 벽소군 곡주는 자네와 일 년 전쯤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다고 하던데?”
“벽소군…… 아!”
“기억났나 보군.”
벽소군의 이름을 들으니 생각나는 게 있었다.
호심당에 들어가기 직전에 장사에서 머무르던 중, 그녀의 얼굴 주변에 씌워진 빙기를 얼떨결에 깨트렸었다.
“네. 기억이 났습니다. 악록객잔에서 대화를 한 번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허허. 역시 인연이 있었군. 어지간해서는 말 붙이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때 벽소군은 흑발의 노파, 막유수와 함께 왔었다.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아예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흘렸었다.
공야청이 업무에 쫓겨 약속을 지연시키다가 간신히 만났었기에 기억이 있었다.
“아무튼, 자네의 이번 임무는 빙화곡에 다녀오는 일이라네. 그곳에 문제가 있어서 일 년 전에도 도움을 요청했었는데, 자네가 오고 나서야 해결할 방법이 떠올랐지.”
진우선이 이어지는 공야청의 설명을 들었다. 그의 합리적인 발상에 고개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떤가? 가능하겠나?”
“네. 아마도 될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잘 부탁하네. 그리고 지금은 빙화곡에서 내려오기 어렵다고 하더군. 그래서 하루 거리인 공가객잔에서 만나기로 했네. 거기로 가면 될 걸세.”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진우선의 사천행이 결정 되었다.
***
빙화곡은 사천성 아안현의 서쪽에 늘어선 까마득한 높이의 산세 속에 있었다.
사천은 커다란 분지 지형인데, 그 중심인 성도에서 삼백 리 떨어진 아안현만 해도 고지대의 초입이라는 게 느껴지고, 다시 삼백 리를 더 가면 하늘 속으로 솟구친 봉우리들의 세계였다.
“와-!”
아안현 공가객잔에 도착한 진우선이 창밖으로 그런 광경을 보았다.
‘엄청 높구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만년설산 공가산의 위용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촉산의 왕이라 불리는 공가산은 깎아지른 듯이 치솟아 있어서 감히 오를 수도 없어 보였다.
태산이 높다 한들, 공가산에 비하면 하나의 언덕일 뿐이리라.
어디 그뿐일까.
공가산의 좌우로 까마득하게 솟은 봉우리들이 한없이 늘어서 있었다. 산세가 시야를 꽉 채우다 못해 넘치도록 에워싸고 있었다.
[허허. 과연 빙화곡이 자리를 잡을 만한 산이로다.]
검노야도 감탄을 터트렸다.
빙화(氷花)를 찾아 헤맸고, 한 송이 빙화를 피우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이 공가산의 어느 골짜기에 있을 터였다
실제로 보니 과연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곳에 문제가 생겼다.
‘마화(魔花)라니요. 천마교의 종자들이 정말 괘씸합니다.’
빙화곡의 빙화가 힘을 잃었다.
공야청이 말하길, 빙화곡의 무인은 살아있는 빙화를 통해 빙공을 수련한다고 했다.
그런데 빙화에 마기가 스며들었다. 그날 이후로 빙화곡은 세를 크게 잃었고, 빙화의 숨만 간신히 붙여가는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됐을까?’
그건 공야청이 설명해주지 않았다. 아마도 빙화곡 내부의 사정이니 직접 들으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때, 인적이 드문 공가객잔에 흑발의 노파가 찾아왔다.
‘오셨구나.’
진우선은 흑발의 노파가 벽소군의 일행인 걸 바로 알아챘다. 노파의 모습을 보자 일 년 전에 기억이 곧장 떠오른 것이다.
“진우선입니다.”
“정말 너였구나…… 어?”
흑발의 노파가 진우선을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려다가, 갑자기 놀라며 의문을 토했다.
‘이렇게 달라졌을 줄이야!’
분명 일 년 전쯤에도 진우선의 실력은 뛰어났다. 또래 중에 손에 꼽히겠다고 느꼈었다.
그저 첫인상이 나빠서 사람이 내키지 않았을 뿐.
그래서 빙화곡주 벽소군 대신 자신이 공가객잔에 내려왔다. 여차하면 내쫓아버릴 마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다.
진우선은 마치 무공을 익히지 않은 듯하면서도, 은연중에 대자연의 기운을 풍기고 있지 않은가.
도가나 선가 쪽의 무공이 경지에 이르러야 나타난다는 반박귀진(返璞歸眞)의 모습이리라.
이는 지극함이 다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대단한 성취였다.
한데 눈앞의 진우선은 그 단계도 이미 진즉에 넘은 듯했다. 얼마나 이루었는지 쉬이 추측되지 않을 정도였다.
“허! 만상각주 그놈이 서찰에 적은 게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만상각주의 서찰을 보고서 반신반의했었다. 사람의 성취가 순식간에 달라졌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바로 그 순간, 진우선이 입을 열었다.
“아직도 저를 노여워하고 계시는지요? 그때는 제가 경솔했습니다. 이렇게 사과를 드리니 화를 푸시길 부탁드립니다.”
진우선이 담백하게, 그러면서도 비굴하지 않게 말했다. 장사에서 사천 땅으로 오는 동안 줄곧 생각한 말이었다.
“허허!”
흑발의 노파가 진우선을 바라보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진 소협은 많이 변했군. 불과 일 년 사이에 사람이 참 진중해졌어. 분위기도 다르고.”
“감사합니다.”
노파의 입에서 ‘소협’이라는 말이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었다. 또한, 칭찬만 하고 있었다.
진우선이 예상했던 바와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나는 빙화곡의 장로인 막유수라고 하네. 예전의 일은 잠깐의 실수였을 테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심려치 말게나.”
“네, 알겠습니다.”
흑발의 노파 막유수가 자신을 소개하며, 진우선에게 느꼈던 앙금을 없던 일로 치부해버렸다.
“그리고 본 곡까지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바로 출발하는 게 어떻겠나? 이야기는 가면서 해도 시간이 충분할 걸세.”
“저도 좋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막유수의 말에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져온 짐을 얼른 챙겨 공가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가산의 산길은 너무나 가팔랐다. 보통 사람이라면 오르다 지쳐서 멈추거나, 숨이 넘어갈 듯이 헐떡이며 멈출 급경사였다.
하지만 진우선과 막유수는 호흡 하나 흐트러짐 없이 빠르게 오르면서 대화도 나누고 있었다.
“진 소협, 자네는 마문광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는가?”
“아니요. 처음 듣습니다.”
“만상각주가 말하지 않았나 보군. 그럼 내가 말해주겠네. 지금의 사태를 이해하려면 그놈에게서부터 시작해야 하니까.”
“경청하겠습니다.”
막유수가 잠시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빙화곡에는 두 명의 장로가 있었지. 나와 마문광 그자였다네. 그는 강해지려고 빙공을 익혔는데, 대략 십 년 정도 전부터 성취가 나아지지 않았어.”
막유수의 딱딱한 음성에서 다소간의 괴로움이 느껴졌다.
“그러던 중에 이년 전쯤의 어느 날이었네. 마문광이 곡을 내려갔다 몇 사람과 올라와서 마기를 뿌렸어. 곡은 풍비박산이 났지. 그리고 얼마 전에 알았다네. 그게 마라혈독이었다는 것을.”
“……!”
진우선이 막유수의 마지막 말에 충격을 받았다.
마라혈독이라니.
빙화곡에서 그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각주님도 여기까진 모르셨구나.’
하긴, 마라혈독이라는 이름이 알려진 것도 채 몇 달이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철혈객 철우인이 아니었다면 아직 알려지지 않았을 터였다.
“곡은 난리가 났네. 사실 전대 곡주님이 십 년 전쯤 마교도에 의해 돌아가셨거든. 그때 빙화곡이 한 차례 세가 약화하였는데, 마문광이 마교도를 불러온 거였지. 곡을 완전히 망하게 하려고 작정한 거였어!”
그때 빙화곡이 받은 충격은 가히 상상할 수도 없었을 터였다.
마교도에 의해 두 번이나 짓밟히는 것이니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하고 분했을까.
하지만 막유수는 감정을 잘 절제하고 있는지,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곡의 상황은 일 년 전에 목격한 형산파 사태와 비슷했다네. 진 소협 자네가 경험했던 그 모습과 비슷했지. 자중지란이었기에, 우리는 많은 피를 흘리며 싸워서 이겼어. 상처밖에 남지 않았지. 그런데 그때 마라혈독이 빙화에도 스며들었네.”
“아…….”
진우선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출발하기 전에 공야청은 빙화에 마기가 침범하여, 반은 빙화이며 반은 마화(魔花)인 상태가 되었다고 설명했었다.
한데 그게 마라혈독이라면 상황이 더 심각할 수도 있었다.
“알고 보니 마문광의 목적은 빙화였더군. 빙화를 아예 흡수하여 빙공을 대성하려 한 거였지. 한데 빙화에 마라혈독이 스며들면서 가져가지 못했다네.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가면 중독되었으니까, 마라혈독에 말이야.”
진우선은 빙화곡의 비사를 들으며, 이번 임무가 정확히 무엇인지 깨달았다.
‘마라혈독에 물든 빙화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