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00화 (100/225)

100.

#빙화곡 (2)

마기가 마라혈독으로 바뀌었으니, 만상각주가 예상한 것과 상황이 다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우선은 그걸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막유수를 안심시켰다.

“마라혈독에 대해서는 제가 수차례 경험했고, 잘 몰아낸 적도 많으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또한, 각주님께서도 한 가지 방법을 일러주신 게 있습니다.”

“하긴, 진 소협이야말로 마라혈독의 전문가겠군. 일 년 전에 형산파의 사태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도 자네의 역할이 크다고 들었었지. 만상각주의 방법도 자네 덕분에 나온 것일 테고.”

막유수가 진우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빙화에 마라혈독이 스며들어 걱정이 많았는데, 오히려 진우선이 와서 다행이다 싶었다.

아마도 진우선보다 지금 강호에서 마라혈독에 가장 잘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이제 빙화에 대한 이야기는 얼추 다 한 거 같군. 다른 사항도 몇 가지 있는데, 그건 곡에 가서 직접 보며 설명해주겠네. 이제 다 와 가니까.”

“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산을 빠르게 올랐다.

거의 절벽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가파르고 눈도 수북하게 쌓여 있으나, 두 사람은 눈에 발자국도 남기지 않은 채 거침없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막유수가 멈춰서며 말했다.

“여기가 초입이라네.”

진우선이 막유수의 옆에 내려섰다.

그러자 깊은 골짜기가 보였다.

바로 그때, 상당한 기운이 온몸을 덮쳐왔다.

“……!”

골짜기에서 바람이 불어나오는 것처럼 기운이 불고 있었다.

진우선과 검노야가 함께 반응했다.

‘스승님. 저쪽 깊숙한 곳에서 신비로운 금기(金氣)가 불어오고 있습니다.’

[허허. 그렇구나. 벌써 이 정도 기운이라면, 빙화곡은 천지간의 기운이 맺히는 곳에 지어진 모양이야.]

골짜기 깊숙한 곳에서 여러 기운이 흘러나왔는데, 특히나 짙게 퍼진 하나의 기운이 일대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던, 어마어마한 규모의 금기였다.

또한, 이곳의 금기는 굳건했으며, 대단히 이로웠다.

그 기운이 정기신에 스며드니, 머릿속이 개운해지고 마음이 든든해지며 힘이 끝없이 솟아나는 듯했다.

금기는 진우선이 골짜기로 점점 더 들어갈수록, 점점 더 진하게 온몸을 적셔왔다.

‘이럴 수가!’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속에서 연신 감탄이 터져 나왔다.

온몸을 꿰뚫는 금기가 진우선의 육신 미세한 곳까지 모두 드나드니,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동화되는 듯했다.

진우선은 이제 천지간에 함께 소통하는 존재라 그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광륜을 이룬 오행진기가 단전에서 솟구쳐 혈도를 맹렬하게 누비며, 공가산처럼 웅장함이 넘치는 금기과 어우러졌다.

그렇게 내공과 육신이 대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니, 진우선은 지금 심장이 터질 만큼 황홀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자연스레 내력이 마구 들끓어 올랐다.

“헛!”

살짝 앞서가던 막유수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놀란 눈으로 뒤돌아보았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기운이 진우선과 소통한다.

그 위압감에 순간적으로 육신만이 아니라 심혼마저 굳어버렸다.

그때, 진우선의 시선이 뒤돌아선 막유수의 눈과 마주쳤다.

“앗!”

실수였다.

진우선이 기운을 얼른 풀었다.

계속 들이닥치는 금기에 순식간에 빠져들어 오행진기까지 뛰어놀게 한 건 명백하게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러자 막유수의 심혼이 압박에서 벗어났다.

그녀가 싸늘하게 물었다.

“진 소협! 무슨 일인가? 왜 모든 내력을 피워 올렸지?”

“장로님, 죄송합니다. 이곳에 대자연의 기운이 가득하여 온몸을 적시니, 잠시 저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허! 그게 정말인가?”

막유수의 음성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녀는 질책하기보다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여태껏 대자연의 기운이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모이는 곳이 있을 줄은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마치 동정호처럼 넓은 호수에 제 몸 하나 담그는 느낌이었습니다.”

“허허!”

막유수가 허탈하여 웃었다.

진우선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느낀 건 물론이거니와, 그가 너무나 부러워진 까닭이기도 했다.

“진 소협 자네가 그 말을 할 줄은 몰랐네. 자네는 오자마자 이곳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마주했군. 정말 대단해. 나는 평생 여기 살았지만,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는데 말이야.”

막유수의 말에서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왔다.

그녀도 알았다. 빙화곡에 깃든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왜냐하면, 이미 말해준 사람이 있는 까닭이었다.

“전대 곡주님께서 자네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었네. 그분은 이곳을 천하에서 가장 신령스러운 곳이라고 자주 일러주셨지.”

“아! 맞습니다. 신령스러운 느낌이었습니다.”

막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신령스러운 기운을 아무도 마주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느끼지 못했지. 나 역시 그러했고. 그러고 보면 자네는 확실히 남다른가 보군. 오자마자 기운이 교통하고 있으니 말이야.”

“…….”

진우선이 말없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한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네. 오히려 나는 자네가 어쩌면 빙화 문제를 해결할지도 모르겠다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네.”

***

“설마…… 진 공자?”

저 멀리서 막대한 기의 폭풍이 몰아쳤다. 빙화곡으로 접어드는 길목 어딘가였다.

지금 그곳에 있을 사람은 진우선과 막유수뿐이었다.

그렇다면 진우선일 터였다.

만상각주가 진우선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길게 써서 알려온 까닭에,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건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진 공자는 서찰에서 언급됐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할지도 모르겠구나.”

기의 폭풍에서 느꼈다.

진우선의 힘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그래서 웃음이 났다.

“어쩌면…….”

그녀가 고개를 돌려보았다.

신령스럽게 피어난 순백의 꽃에 핏빛 기운이 반쯤 물들어 있었다.

눈앞의 빙화는 살아있으나 산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니었다.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희망이 생겼다.

희고 붉어져 버린 빙화가 본연의 색깔을 찾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디.”

그녀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말했다.

지금 빙화의 생사를 자신의 목숨처럼 느끼는 그녀가 바로 빙화곡주 벽소군이었다.

잠시 후.

진우선과 막유수가 빙화곡의 입구에 다다랐다.

오 장 높이의 뾰족 솟은 바위에 ‘빙화곡’이라 쓰여 있는 게 보였다.

막유수가 도착하자마자 외쳤다.

“아가씨, 기다리고 계셨어요?”

“두 분이 오는 기척을 너무 크게 내셔서요.”

“아!”

막유수가 탄성을 흘렸다.

아까 진우선이 공가산에 가득한 대자연의 기운과 소통했을 때, 벽소군이 알아채고 나온 것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입니다.”

진우선이 간단히 대답하며 벽소군을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지극히 아름다우면서도 청아하고 우아하며 고결한 기품이 있었다.

게다가 우수에 찬 눈동자가 그녀의 분위기와 어우러지니, 일 년 전보다도 더 외모가 빛나는 것 같았다.

“여기서는 얼굴을 안 가리시는군요.”

“내 집이니까요.”

“그렇네요.”

진우선이 벽소군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자 막유수가 의견을 꺼냈다.

“아가씨, 일단 진 소협과 바로 빙화를 살펴보는 게 어떨까요?”

“그래요. 그게 중요하니까요.”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세 사람의 의견이 하나로 모였다. 지금 빙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까닭이었다.

그들이 널찍한 골짜기를 가로질러 절벽 옆으로 돌아 들어갔다.

그러자 빙화가 보였다.

뒤로 시꺼먼 절벽이 병풍처럼 쳐져 있어, 흑백이 대비되며 돋보이고 있었다.

벽소군과 막유수가 잠시 진우선에게 빙화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시간을 주었다.

“순백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네요. 마라혈독이 저렇게 어려 있지만 않았으면 더 신령스러워 보였을 텐데…….”

“그렇죠? 저도 그게 참 아쉬워요.”

마라혈독이 빙화의 고결성을 크게 훼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고하게 빛을 뿌리며 한기를 은은하게 흘리니, 빙화는 참으로 영초(靈草)라 할 만했다.

진우선이 조심스럽게 수기를 운용하여 빙화에 항마의 능력을 흘려보냈다.

스윽- 스윽-

빙화에 어린 마라혈독의 기운이 조금씩 움직였다. 밀릴 듯 밀릴 듯 하면서 작게 떨었다.

진우선이 미간을 좁힌 채 빙화를 여러모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동안 지켜보던 벽소군이 물어왔다.

“상태가 어때요?”

“마라혈독이 자리를 좀 잡은 듯 합니다. 잘 밀리지 않네요. 좀 살펴봐야겠습니다.”

진우선이 당분간 방법을 찾겠다는 듯이 말하자, 막유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진 소협. 항마의 능력으로 강하게 밀어서 한 번에 씻어낼 수는 없는 건가?”

“그럴 수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빙화는 영초라, 자칫 마라혈독과 함께 영초 본연의 기운마저도 쓸려나갈 수 있어 조심스럽습니다.”

“아-!”

벽소군이 탄식을 흘렸다.

막유수의 눈에도 절망의 빛이 흘렀다.

‘각주님의 의견대로 해서도 안 된다!’

진우선은 공야청이 제안했던 방법을 쓰면 안 된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직접 보니 알 수 있었다.

원래 공야청은 세 단계로 나누어 계획을 짰었다.

첫 번째로, 진우선이 항마의 능력을 이용해 마기를 밀어낼 것.

두 번째로, 벽소군이 빙기를 운용해 빙화의 기운을 북돋을 것.

세 번째로, 몰아낸 마기를 모조리 청죽에 밀어 넣어 주변에 번지는 걸 방지하고 빙화곡에서 아예 제거할 것.

그래서 짐 속에 특별히 만들어진 청죽도 몇 개 가져온 상태였다.

하지만 이 방법은 버려야 했다.

‘마라혈독이라는 변수를 모르셨어. 이건 보통의 마기와 달라.’

마라혈독은 원기에 연결될 수 있다. 철혈객의 죽음에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빙화는 영초이니, 그 신령스러운 기운에 마라혈독이 엉켜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단순히 밀어내는 방법 말고 다른 걸 찾아야 했다.

“며칠간 빙화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내고 있으니, 방법이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진 공자, 그럼 잘 부탁드려요.”

벽소군이 살짝 고개 숙이며 말했다. 그러더니 빙긋 웃으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근데 예전과 달라지셨네요.”

“다들 그걸 느끼시나 봅니다. 아까 막 장로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렇죠. 맞아요. 일 년 전에 만났을 때는 동생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믿음직한 느낌이 드네요.”

벽소군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진우선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기분이 좋네요.”

빙화곡에 밤이 찾아왔다.

은은한 달빛이 눈에 비쳐 주변을 살짝 밝히고 있었다. 간단히 저녁 식사를 마친 진우선이 빙화 앞으로 다시 나왔다.

아까도 보면서 느꼈지만, 참으로 신비하면서도 이상했다.

‘막 장로님의 이야기대로라면 빙화가 마라혈독에 중독된 지 일 년이 훨씬 넘은 건데, 살아있는 느낌입니다. 비록 숨이 약하긴 하지만요.’

[맞다. 잘 보았구나. 빙화는 살아 있다.]

검노야가 진우선의 말을 들으며 명확히 판단해 주었다.

‘그리고 마라혈독의 기운이 딱 이 정도에서 멈춰 있나 봅니다. 아까 건드려 보니, 딱 자리를 잡고서 더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으려는 거 같았습니다.’

[그렇지. 두 기운이 나름대로 빙화 속에서 균형을 잡고 있더구나.]

진우선이 고민하며 생각한 부분을 계속 말했다. 그 과정에서 생각이 꼬리를 잇고 발전되더니, 의문이 하나 생겼다.

‘스승님, 이런 신령한 곳에 어찌 마라혈독이 자리를 잡았을까요?’

검노야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우선아. 한 번 반대로 생각해보는 건 어떻겠느냐? 신령한 힘이 있어서 오히려 마라혈독에 무너지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러면 마라혈독이 침투했으나, 신령한 힘으로 빙화가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거군요.’

진우선이 검노야의 말을 바로 이해한 순간.

‘아! 어쩌면!’

하나의 생각이 진우선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버티는 힘.

어쩌면 빙화곡 근처에 넘치는 신령스럽고 거대한 금기가 빙화의 버티는 힘이 되고 있을지도 몰랐다.

빙기는 수기의 연장선이요, 금기는 금생수의 이치에 따라 수기를 생하게 하는 까닭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검노야는 마치 진우선이 그리 생각하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한 곳을 가리켰다.

[우선아. 여기를 보아라.]

검노야가 가리키는 건 아주 거대한 바위였다.

땅속으로 어디까지 내려가 있는지, 하늘로 얼마나 솟아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바위였다.

[만년을 족히 버텨온 이 거암이 빙화에 끊임없이 생기를 불어넣고 있구나!]

‘아!’

만년괴암(萬年怪巖)이었다.

거기서 한없이 흘러나오는 기운이 빙화로 스며들어 작은 생명을 지탱하고 있었다.

‘……!’

그리고 깨달았다.

마라혈독을 풀어낼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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