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01화 (101/225)

101.

#빙화곡 (3)

벽소군이 차분한 표정으로 찻잔을 만지며 가만히 생각하고 있을 때, 막유수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가씨, 마라혈독이 보통의 마기보다 훨씬 악랄한가 봅니다.”

“그러게요. 천마교가 우리한테 한 짓만 생각해도 죽을 때까지도 분이 안 풀릴 것 같은데, 이제는 마라혈독까지…….”

벽소군의 음성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너무나 냉정하여 무감정한 느낌마저 들었다. 눈동자도 너무나 투명했다. 천마교에 대한 화가 극을 다다르다 못해 초월해버린 모습이었다.

“아가씨.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마기가 그냥 스며든 정도가 아니라 빙화의 영기에까지 닿았다면, 혈독쌍괴가 힘을 합쳐 만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강호에서 그렇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어요.”

막유수가 한숨을 쉬며 자기 생각을 꺼냈다.

빙화는 본연의 영기(靈氣)가 있어 영초라 불렸다. 인간이 후천적으로 익힌 내력들과는 태생부터가 비교할 수 없는 신령한 기운이었다.

그런데 마라혈독이 영기에 들러 붙었는지, 무작정 마라혈독을 밀어내면 영기마저 같이 떠내려간다고 진우선이 경고했다.

“파파. 역설적으로 마라혈독이 그 정도가 되니, 강호에서 계속 사태가 터지는데도 쉽게 막아내기 힘든 거 아닐까요?”

“아가씨 말이 맞네요. 혈독쌍괴가 머리를 모으니, 정말 무시무시한 게 나왔습니다. 공명심이 지독 한 놈들 둘이서 아주 작심했나 봅니다.”

“파파. 그들은 마라혈독이란 이름에 둘 다 자신을 상징하는 말을 꼭 넣고 싶었던 거 같아요. ‘혈’과 ‘독’이 나란히 있잖아요.”

“그 노괴들은 그러고도 남죠. 어휴! 다 늙은 괴물들이 그냥 콱 죽어버리지, 이승에 무슨 욕심이 그리 많아서 이렇게 천하에 폐를 끼치는지…….”

막유수가 땅거죽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져서 장탄식밖에 나오지 않았다.

벽소군이 무심하게 말했다.

“십 년 전에도 그랬잖아요. 단순히 누군가에게 잘 보이겠다는 일념만으로, 춥고 험하고 외진 이곳까지 찾아와서 빙화를 내놓으라고 했으니까요. 이번에도 마찬가지겠죠.”

“그렇죠. 그게 마교도들의 삶이니까요.”

천마교는 정말 단순한 이유로 십 년 전에 빙화곡을 크게 쇠락시켰다.

“파파. 그런데 정말 천마의 진전을 다 이은 사람이 나타난 걸까요?”

“마가 놈의 말을 아직도 고민 중이셨어요? 그러지 마세요. 그럴 리 없으니까요. 인간이라면 천마공을 대성할 수 없어요.”

이 년 전에 큰 희생을 치르며 마문광을 막아냈을 때, 그는 천마의 재림을 말했었다.

-절대천마께서 지난 백 년간 아무도 이루지 못했던 천마신공을 대성하셨지. 이제 강호는 그분의 발아래에서 벌벌 기게 될 것이다.

벽소군은 마문광이 자신의 손에 죽기 직전에 내뱉었던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마문광의 말대로라면, 천마교는 절대천마를 위해 모이고 있으며, 그의 길을 예비한다는 명분 아래 온갖 악행을 펼치는 것이다.

‘마교도들이 정말 그럴까?’

강한 의문이 들면서도, 천마교의 행태를 보자면 마냥 부정할 수만은 없는 게 현실이었다.

벽소군이 그리 생각하며 막유수의 말에 대꾸했다.

“천마신공을 만든 백 년 전의 천마도 인간이었어요.”

“아가씨. 천마는 예외입니다. 천하의 마공을 집대성하고, 그 모든 걸 뛰어넘는 자신만의 천마공을 창안했는데, 그런 사람이 또 있겠어요? 고금에 유례없는 일이었고, 하늘조차 그런 인간을 다시 내릴 리 없어요.”

막유수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천마신공도 천마공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부르며, 다시는 있을 수 없는 옛이야기로 취급하고 있었다.

어쩌면 천마교를 무시하는 마음일 수도 있었다.

“하늘조차 다시 내릴 리 없다…….”

벽소군이 그녀의 말을 작게 되뇌며 잠잠히 생각했다.

“아가씨. 아무튼, 마가 놈의 말은 잊으세요. 일언반구도 하등 쓸모가 없어요.”

막유수가 냉랭하게 외치더니, 코 앞에 닥쳐 있는 화제를 언급했다.

“일단 진 소협이 방법을 찾아냈으면 좋겠네요. 며칠이 걸리더라도 말이에요.”

“그는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파파가 그랬잖아요. 마라혈독에 관해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그일 거라고.”

“그렇죠. 그때 아가씨와 직접 본 모습도 있고, 만상각주의 말에 따르면 천하에서 손꼽힐 항마공을 지녔다고 하니까요.”

“그럼 진 공자가 방법을 찾을 때까지 평소처럼 더 버텨봐요.”

벽소군이 진우선에게 신뢰를 드러냈다.

막유수가 애틋한 표정으로 벽소군을 바라보았다.

벽소군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한령신공으로 빙화의 기운을 유지할 심산이었다.

마라혈독에 의해 빙화의 기운이 약해질 때 한령신공을 일으켜 기운을 불어넣으면, 빙화는 다시 힘을 찾고는 했다.

여태까지 어느 정도 주기적으로 해왔던 일이었다.

다만 안타까운 건,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벽소군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빙화곡주와 직계들이 익히는 한령신공만이 빙화의 영기와 소통되는 까닭이었다.

“파파.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요. 나는 괜찮으니까. 이건 빙화곡주로서의 숙명이에요. 그러니 빙화곡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나의 노력에는 항상 고귀한 가치가 있어요.”

“맞습니다, 아가씨.”

담담히 전하는 벽소군의 말에 막유수가 존경하는 감정을 담아 대답했다.

벽소군은 빙화곡주로서 더없이 훌륭했다. 좌절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으니, 빙화곡의 위기와 고난에도 믿고 따를 수 있었다.

“아가씨. 그런데 아까 느끼셨듯이, 진 소협이 빙화곡의 신령스러운 기운과 교통하더군요. 전대 곡주님의 말씀이 진짜였다는 걸 깨 달았습니다. 진 소협도 대단하다 싶었고요.”

“역시! 진 공자가 그 기운을 느낀 거였군요. 빙화에 깃든 기운도 살필 줄 아는 걸 보면, 확실히 대자 연의 기운과 소통하나 봐요.”

“그게 맞겠죠. 불과 일 년 정도밖에 안 지났는데, 이렇게 되었을 줄이야…… 세상사가 참으로 신기막측한 거 같아요.”

막유수가 진우선과 오면서 느낀 감정을 전하자, 벽소군은 자신의 추측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근데 진 공자는 어디 있을까요? 마라혈독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봤으면 좋겠는데.”

“아가씨,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막유수가 벽소군에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나갔다.

“금모야, 거기 있느냐?”

“네, 있습니다.”

빙화곡에서 무공을 익히며 곡의 소사를 관리하는 제자, 홍금모가 얼른 뛰어왔다.

“혹시 진 소협이 어디 계신지 아느냐? 아까 보니 별채에 불이 꺼져 있던데.”

“그분은 식사 후에 한령지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랬군.”

한령지(寒靈地)는 빙화가 자라는 부근을 일컫는 말이었다.

진우선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방법을 찾으러 간 모양이었다.

둘의 대화를 들은 벽소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파. 우리도 올라가봐요.”

***

빙화는 영초로서, 본연의 기운인 영기는 빙기의 정수였다. 그러니 빙화를 통해 빙공을 수련할 수 있었으리라.

만년괴암은 한없이 막대한 금기를 품고서 빙화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거기에 빙화곡주 벽소군도 빙화에 직접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러니 빙화는 마라혈독에 쉽게 무너지지 않았으리라.

‘마라혈독을 풀어낼 수 있는 것들이 이미 이곳에 많이 있었어!’

진우선이 순식간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만년괴암의 신령한 금기.

금생수의 이치.

빙화의 신령스러운 빙기.

즉각적으로 빙화의 기운을 북돋을 수 있는 벽소군의 빙공.

자원은 충분했다.

‘확실하게 이어줄 수기가 없다!’

다만 수기가 없어서 그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을 뿐이다.

‘내가 수기의 역할을 해서 금기가 빙기에게 미치는 힘이 많아지 도록 돕는다면, 지금보다 상황이 훨씬 나아질 거야.’

수기와 빙기는 비슷하나 다르다.

그러니 만년괴암의 신령한 기운이 금생수의 이치를 빌어 무한히 지탱해도, 빙기로까지 전해지는 양은 많지 않았으리라.

‘특히나 만년괴암의 신령한 금기가 강력하게 빙화를 돕는다면, 마라혈독이 아예 해소될 수도 있어! 빙화가 내부에서 스스로 힘차게 이겨내는 거니까.’

바로 해결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게 아니어도 최소한 당면하고 있는 상황은 훨씬 좋아질 터였다.

한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혹시! 내가 전하는 수기에 항마의 능력을 더해본다면 어떨까?’

진우선은 문득 머릿속에 번뜩인 생각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오! 정말로 좋은 생각 같구나.]

검노야도 탄성을 흘렸다.

‘스승님 덕분입니다. 이 거암을 보여주신 덕분에 여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다. 나는 우선이 네가 생각해낸 바를 떠올리지 못했구나. 그러니 마음껏 기뻐해도 된다. 나는 그저 이곳에서 일어나는 기운의 흐름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단다.]

‘스승님, 그래도 정말 감사합니다.’

진우선이 검노야에게 공손히 마음을 전했다.

검노야는 자신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때그때 중요한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진우선 혼자서는 곧장 이 방안을 떠올리지 못했을 터였다.

그때, 뇌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스승님, 이와 비슷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소 대협의 상황도 이랬습니다.’

[허허. 그렇구나.]

남가철방에서 정무맹 진양각 소속인 귀검 소무강과 만났을 때의 일이었다.

냉기가 스스로 얼지 못하니 빙기가 되지 못했다.

그때 진우선이 자신의 수기를 더해 냉기를 채우고, 금기를 흘려 금생수의 이치로 기운이 가진 의지를 배가시켰다.

그러자 기가 충돌하며 뭉쳐지더니 빙기가 됐었다. 비록 한순간이었지만.

‘문득 그때의 감각이 떠오르네요.’

진우선의 목소리에서 다소간의 여유와 자신감이 배어나왔다.

유사한 상황에서 한 차례 성공한 경험이 있으니 이번에도 잘될 것 같았다.

[반대로 빙기를 녹인 적도 있지 않았느냐?]

‘맞습니다.’

벽소군이 빙공의 기운으로 얼음 막을 만들었을 때, 진우선의 수기가 스며들어 얼음을 녹였었다.

그러고 보니, 진우선은 빙기를 접한 적이 꽤 되었다.

[우선아. 너도 잘 알겠지만, 수기에 찬 성질이 더해지면 냉기가 되고, 냉기가 심해져 응축되면 빙기가 된다.]

‘그 반대로도 될 수 있고요.’

[그렇지. 중요한 것은 그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고 힘을 쓸 수 있느냐는 점이고.]

‘네. 잘 집중해서 해보겠습니다.’

[허허.]

검노야가 웃으며 대화를 마쳤다.

진우선은 이제 웬만해선 다 아는지라,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진 공자.”

진우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벽소군과 막유수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 때마침 오셨군요. 방금 좋은 방법을 찾았습니다.”

“정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며 살펴보니, 이곳은 신령한 기운이 충만하더군요. 그 기운을 잘 이끌어 빙화의 영기를 힘써 돕는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진우선이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과정 중에 항마의 기운까지 불어넣는다는 말을 하니, 벽소군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지금 바로 할 수 있나요?”

“아가씨!”

진우선의 설명을 같이 듣던 막유수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한밤중인 데다가, 벽소군이 너무나 빠르게 결정하니 당황한 듯했다.

“파파. 나는 빙화를 도울 방법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상관없어요.”

벽소군의 각오를 들은 진우선이 대답했다.

“지금도 가능은 합니다만,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나는 상관없어요! 그런데 진 공자가 가장 애를 많이 쓸 텐데,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저도 바로 해보고 싶었거든요.”

“좋아요.”

진우선의 말에 벽소군이 환히 웃었다.

사실 빙화곡에 존재하는 대자연의 신령한 기운, 즉 만년괴암의 기운을 주관하는 건 진우선이었다.

수기를 운용하여 빙화의 영기를 돕는 것도 진우선이고, 항마의 기운을 흘리는 것도 진우선이었다.

벽소군은 혹시나 모를 위급 상황이 있을 때, 빙화에 급히 빙기를 전할 수 있을 뿐이었다.

주된 역할은 모두 진우선이 해야 했다.

“진 공자. 나는 당신의 이 계획이 참 좋다고 생각해요. 발 벗고 나서 줘서 진심으로 고마워요. 그리고 만약 잘 안 되더라도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잘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벽소군의 말에 담긴 진심을 느끼며 진우선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파파는 이제부터 호법을 서주세요. 별일이야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네, 아가씨.”

그들의 모습을 보며 진우선이 빙화 뒤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기운이 크게 몰아칠 수 있으니, 너무 가까이는 오지 마십시오.”

“그럴게요.”

당부의 말을 건네고 나서 진우선이 온몸을 열었다.

쏴아아!

그러자 만년괴암에서 신령한 금기가 불어왔다. 바닥에서도 올라 왔다.

기운이 온몸으로 흘러들어오고, 다시 흘러나간다.

그 거듭되는 흐름 속에서 진우선이 집중하여 기운을 찾았다.

만년괴암의 신령한 기운, 금기.

빙화의 영기, 빙기.

그 가운데에서 진우선은 수기가 되었다. 오행진기 중에서도 형을 이룬 수기만을 휘돌렸다.

금기가 수기로, 수기가 빙기로.

구우우웅-!

진우선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막대한 기운에 빙화곡이 크게 울렸다.

반면에 진우선의 의식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이제 수기가 되어, 이들의 통로가 된다!’

수기에 항마의 능력을 담아 강하게 응축하자 빙기가 되었다.

만년괴암의 굳건한 힘이 무한히 도우니, 시간이 걸릴 것도 없고 기가 모자라지도 않았다.

만년괴암의 기운이 새삼 대단하다 생각하며 진우선이 그걸 빙화로 보냈다.

부르르!

빙화가 막대한 기운을 감당하느라 몸을 떨고 있었다. 그게 느껴졌다.

이제 시작이다.

진우선이 기운의 흐름에 온 정신을 쏟았다.

그때, 신령스러운 금기 가운데서 아주 특별한 힘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한없이 깊은 굳건함이 마주쳐오고 있었다.

‘스승님. 이건…….’

[허허허.]

검노야가 웃었다.

한켠에서 벽소군이 빙화에게서 일어나는 변화를 보며 놀람을 삼켰다.

‘이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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