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27화 (127/225)

127.

#의천무제 독고월 (4)

남궁무기가 천도관에 들어왔다.

독고월은 여전히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로 그를 맞았다.

“노사. 오셨소?”

“맹주, 비보를 듣고 걱정이 되어 바로 찾아왔소이다. 몸은 좀 괜찮으시오?”

“지금은 괜찮아져서, 보시다시피 전과 다를 바 없구려.”

“지난달보다 더 창백해 보이는데, 오히려 안 좋은 것 아닌가?”

“그건 노사가 잘못 봤다오. 내 눈빛이 더 깊어졌지 않소? 이번 일을 겪으며 심오한 깨달음을 얻은 것 같소.”

“오! 그렇다면 진심으로 축하하네. 맹주의 무위는 나날이 발전하는군.”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우선은 남궁무기의 축하가 가식인 걸 느꼈다.

애초에 그가 툭툭 던지는 말 속에 독고월을 견제하고 떠보는 의도가 잔뜩 깔려 있었다. 은연중에 하대를 섞어 말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남궁무기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시기심에 사로잡힌 소인배나 다름없었다.

“공 각주가 먼저 와 있었군. 오랜만이오.”

“저도 오랜만입니다.”

남궁무기가 공야청과 인사를 나눈 후, 진우선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 청년은 누구요?”

“진우선이오. 내 호위를 맡고 있소.”

독고월이 대답하자, 남궁무기가 바로 아는 척을 했다.

“아! 반갑네. 자네가 진우선이었군. 나는 장로원에서 한가로이 지내고 있는 남궁무기라네. 요 며칠간 자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때마침 이렇게 만나는군.”

“처음 뵙겠습니다.”

남궁무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진우선에게 친한 척을 해왔다.

그는 눈빛이 탁하고, 코가 크며, 볼살이 다소 늘어져 있어 심술이 궂고 탐욕이 매우 많아 보였다. 나이가 일흔이 넘었으니, 살아온 인생이 얼굴에 녹아난 것이리라.

“맹에 온 지 삼 개월 됐다는 게 진짜인가?”

“만상각에 배정된 게 삼 개월이고, 작년에는 호심당에 있었습니다.”

“아! 그렇구만.”

독고월이 진우선의 설명을 도왔다.

“그가 진결제자요.”

“진결제자?”

“지난겨울에 생겼는데 혹시 못 들었소? 호심당에서 실력이 너무 뛰어나면 진결제자가 되어 한 해 만에 마치기로 했는데.”

“아! 그거였군. 알고 있었소이다. 잠시 깜빡한 거요. 나이가 들어서.”

남궁무기가 능청스럽게 대꾸하더니, 진우선에 명령하듯 말했다.

“진 호위, 맹주를 잘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독고월과의 대화를 다시 이었다.

“맹주. 이번에 크게 고생하셨다고 들었소. 특히나 사도련주가 몹시 강해 무리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에 나를 비롯한 원로들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오.”

“걱정해줘서 고맙소.”

“당연히 걱정할 수밖에 없지. 그간 맹주가 의기를 드높이며 이곳에서 든든하게 버려주었기에 정무맹 모두가 여러 우환 속에서도 잘 왔지 않소? 맹주는 정무맹의 대들보일 뿐만 아니라, 강호의 기개를 지키는 은인이나 마찬가지였소.”

“허허. 노사는 이토록 낯간지러운 말을 참으로 잘하시는구려.”

독고월은 남궁무기의 속 빈 강정 같은 말에 그저 웃음만 날 뿐이었다.

하지만 남궁무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맹주가 탐탁지 않게 여길 만도 하오. 사실 우리도 맹주를 돕고 싶었으나, 알다시피 장로원에 들어가면 강호일선에서 아예 물러서 있어야 하지 않소? 그런 제약으로 우리도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오.”

“허허. 그랬소? 혹 극사를 이룬 사도련주가 무서웠던 건 아니고?”

“천하에 극을 이룬 무인이 몇이나 되겠소? 우리도 한낱 필부일 뿐이오. 천마교, 사도련이라면 치를 떨지만, 또 다들 죽음을 눈앞에 둔 나이다 보니 두려운 것도 많소. 이 점은 맹주가 양해해주시오.”

“원로들이 일선을 떠났으니, 그럴 거로 생각했소.”

“맹주, 우리를 이해해줘서 고맙소. 우리는 그간 맹주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게 한 거 같아 후회가 많았소. 물론 맹주가 이 시련으로 깨달음을 얻었다니 다행이지만 말이오.”

“이제 말은 그만 돌리고 슬슬 본론을 말해보시오.”

남궁무기가 말을 계속 에둘러 하자, 독고월이 목소리에 날을 세우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허허. 내가 한 말은 다 진심이었소. 아무튼, 맹주가 바빠 보이니 조심스레 의견을 올려보리다. 맹주는 숭의각주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승의각주라면 정무맹의 뜻을 몸소 실현하며, 내로라하는 실력을 갖춘 훌륭한 무인 아니겠소?”

“잘 보셨소. 우리도 그의 무위가 뛰어나고 맹의 일에 정력적으로 임하니, 맹주의 수고를 덜 수 있겠다고 생각이 모였소.”

수고를 더니 어쩌니 하지만 결국 맹주에서 물러나라는 말이었다.

남궁무기를 비롯한 장로원은 맹주의 퇴진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노사는 맹주직만 궁금한가 보구려. 나는 아직 그럴 생각이 없는데.”

독고월이 매몰차게 대꾸했다.

진우선은 문득 독고월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지 않았다면, 남궁무기가 맹주 사후(死後)를 운운하며 강권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사하구나.’

진우선이 남궁무기의 매끄러운 독설에 심한 거부감이 들었다.

그는 정도의 무공을 익혔으나 심성이 사파처럼 간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구려. 그래도 한 번쯤은 장로원의 충언에 귀를 기울여 주시오. 다들 정무맹을 아끼는 충심으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오.”

남궁무기는 뻔뻔하게도 천하의 걱정을 다 떠안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주장을 넌지시 강요했다.

그때, 공야청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만약 이곳이 천도관이 아니었다면 이미 한바탕 대차게 말씨름했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독고월은 평상심을 잃지 않고 여유롭게 말을 꺼냈다.

“노사와 장로원의 뜻은 잘 알겠소. 그건 그렇고, 내 노사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소.”

“편히 물어보시오. 무엇이 궁금하오?”

“노사, 혹시 적사안이라고 들어 보신 적 있소?”

“몇 번 들어본 거 같소. 백 년 전 사파의 거두였던 사황의 독문무공 말하는 거 아니오?”

“맞소. 그거요. 근데 사도련주가 싸우던 중에 나를 보며 이상해했소. 그는 자신이 적사안을 펼친 적이 없는데, 왜 내게 흔적이 있냐고 물었소.”

“허-! 사도련주가 사황의 무학을 이었다는 말이 사실이었구려. 근데 그가 정말 맹주에게 적사안에 당했다고 말했소?”

“내가 없는 말을 굳이 할 이유가 있소? 탁 각주도 그 자리에 있어서 다 들은 거요.”

남궁무기가 마뜩잖은 표정을 지으며 대뜸 물었다.

“그래서 맹주는 내게 정확하게 뭘 물어보려는 거요?”

“노사도 알겠지만, 나는 지난여름에 사술에 걸렸소. 한데 그때 분명 맹 내에만 있었지. 여러 가지로 바빴으니까.”

“그렇소.”

“그럼 대체 난 그때 어떻게 사술에 당한 거요? 맹 밖으로 나간 적이 없고, 사파의 무인을 만난 적도 없으니, 영문을 모르겠구려. 이러면 사공을 익힌 고수가 맹에 들어 온 것밖에 방법이 없지 않소? 이에 대해 노사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렇구려. 맹주의 말대로 누군가 들어왔을 수밖에 없소. 하지만 그런 사도의 고수가 없었는데……!”

남궁무기가 독고월의 말을 곱씹으며 대답하던 중, 마음이 뜨끔하여 말을 흐렸다. 무언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때, 독고월이 매섭게 말을 몰아쳤다.

“하지만 정무맹 한복판에서 적사안 같은 엄청난 사술을 당할 만큼 우리가 허술하지는 않소. 그런 사도의 고수가 들어온 걸 놓친 것도 말이 안 되오. 맹에 한평생 몸을 담았던 노사야말로 잘 알 거요.”

“맞소. 그렇소.”

남궁무기가 잠시 독고월의 기세에 밀려 대답을 토해냈다.

“노사! 그럼 사도련의 내통자가 우리 안에 있는 게 분명하오. 누군가가 맹의 이목을 가린 채 직접 데리고 들어온 게 틀림없소. 그래서 본 맹주는 그 시기의 출입자들을 샅샅이 조사해볼 참이오. 그만한 사도 고수의 흔적을 찾아내려면 원론적인 이 방법밖에는 없소. 밤낮없이 맹을 걱정하는 장로원도 이에 동의하고 협조해 주시리라 생각하오.”

내통!

남궁무기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안색이 창백하게 급변했다. 속으로 잔뜩 겁먹은 모양이었다.

그로 인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재차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얼른 입 밖으로 쏟아냈다.

“아! 맹주. 한 가지 의심스러운 게 있소. 그때 적문강이라는 자가 있었지 않소? 천룡상단의 외당주 말이오. 사도련의 극강한 고수에게 사공을 당해 맹주가 정심하고 웅혼한 내력으로 그의 상세를 돌봐주었잖소!”

“기억나는구려. 그때 적문강을 몇 번 만났었지. 근데 뭐가 의심스럽다는 거요?”

“그 무렵에 사도 고수의 행적을 생각하니, 자연스레 적문강 그자가 떠올랐소. 혹시 그가 무슨 수를 썼을 수도 있지 않겠소? 혹은 사도련의 고수가 그를 뒤쫓아 들어왔다거나 말이오.”

남궁무기가 다급한 목소리로 적문강을 말하며, 그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그 시기에 독고월과 자신, 그리고 사도의 무공을 연관 지으니 적문강의 일이 하나 있었던 것. 이에 바로 털어내려는 속셈이었다.

남궁무기는 자신의 안위가 극히 중요한지라, 의심의 눈초리를 당장 벗어버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노사의 말을 들으니 적문강이 심히 유력한 것 같구려. 그런데 노사가 그를 데려와서 사공에 당한 귀인을 치료하는 게 좋다고 하지 않았었소?”

그 순간, 남궁무기의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말을 하고 보니, 제 발등을 제가 찍은 격이었다.

“아! 나는 정말 몰랐소. 그리고 나는 그와 아무런 관계도 없소.”

“허어! 그랬군. 하긴, 노사는 본 맹주를 수십 년간 챙겨주고 장로원에 가서도 계속 걱정해주고 있으니, 그럴 사람이 아닐 거요. 그렇다면 내가 누구에게 묻는 게 좋겠소? 노사가 좀 도와주시오. 그때 장로원의 많은 원로가 적문강을 추천했지 않소?”

“아! 그건…….”

남궁무기가 잔뜩 당황한 기색으로 말끝을 흐렸다.

사도련과의 내통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생각나는 대로 급히 말했더니, 이제는 장로원의 고수들을 팔아먹어야 하는 상황이 왔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의 이름을 쉬이 꺼낼 수 없었다.

“허! 노사께서도 더는 모르는 모양이니 어쩔 수가 없구려.”

독고월이 남궁무기를 일별하고는 만상각주 공야월에게 말했다.

“공 각주가 한 번 진위를 살펴주셔야겠소. 죄목은 사도련과의 내통 및 맹주 살인 방조 혐의요. 어쩌면 암살을 의뢰했을지도 모르지. 진 호위를 데려가시오.”

독고월의 눈에서 서릿발 같은 냉기가 풀풀 뿜어져 나왔다.

공야청도 싸늘한 목소리로 냉큼 대답했다.

“즉시 명을 따르겠습니다. 사안이 중차대하니, 현청각과의 협조는 물론 진 호위와 함께 만상각의 귀재들을 총동원하여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일사천리였다.

그에 남궁무기는 마음이 더 다급해졌다.

내통만이 아니라 살인 방조에 암살 의뢰라니, 죄목이 너무나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맹주.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내가 얼른 알아보고 오겠소. 시간을 주시오.”

“알겠소. 노사가 이리 간절하게 부탁하며 본 맹주의 일을 덜어주겠다고 하니, 도움을 고맙게 받겠소. 그럼 어느 정도면 되겠소? 사안이 중대한지라 오래 기다릴 수는 없소.”

“열흘만 주시오.”

“안 되오. 그 정도면 새외까지 도망가기 충분한 시간이니까. 사흘 안에 알려줘야겠소.”

“아, 알겠소.”

남궁무기가 황급히 대답하더니, 진우선을 흘깃 쳐다보고는 꽁지가 빠지게 천도관에서 물러갔다.

그 후, 장내의 분위기가 다시 평온해졌다.

독고월이 한숨을 내쉬며 모든 상황을 지켜본 진우선에게 물었다.

“후우-! 진 호위, 자네가 보기에는 어땠나?”

“정무맹의 장로원에 드셨을 정도인데, 언행이나 의중이 정의롭다는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습니다.”

“잘 보았네. 자네에게 보여주기 부끄럽지만 장로원이 이렇다네. 거기엔 비단 남궁 노사만이 아니라 뒤가 구린 작자들이 수두룩하지. 그래서 아까 급히 꽁무니를 뺄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들은 맹에 헌신하여 부귀공명을 다 이루었는데도 아직 탐심이 그득그득해.”

독고월이 허탈한 마음을 쏟아내며 계속 물었다.

그는 지금의 상황보다도 진우선이 어찌 생각하는지를 더 궁금해하는 듯했다.

“그리고?”

“남궁 노사는 아까 맹주님께 들은 그대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의 태도와 대화 방식은 상대방을 참 피곤하게 만들더군요. 맹주님께서 심력을 많이 쏟으실 수밖에 없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허허. 정확하게 봤네. 나도 편치는 않았어. 그래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허장성세도 좀 부렸지. 물론 알아들은 시늉만 할 뿐, 안 믿는 모양이지만 말이야.”

독고월의 말이 참으로 씁쓸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는 곧 웃으며 말했다.

“근데 남궁 노사가 자네 눈치를 보고 가더군. 장로원에도 소문이 다 난 모양이야. 나는 진 호위가 있어서 든든하군.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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