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별이 지다 (2)
진우선은 즉각 독고월을 침상에 눕힌 뒤, 기해혈 위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맹주님, 잠시만 참으십시오!”
진우선이 오행진기를 독고월에게 속히 밀어 넣었다. 넘치도록 쏟아부었다. 상황이 촉급하여 기운의 양을 조절할 새도 없었다.
독고월은 혈색이 조금 돌자마자 입을 열었다.
“진 호위…….”
“맹주님!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기운이 새어나갑니다.”
하지만 독고월은 진우선의 권유를 듣지 않았다. 몸에 기운이 돌자마자 말을 이었다.
“아까 그가…… 나를 포박하려는 걸 느꼈네…… 섬뜩했어. 자네가 막아준 그 한 수에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알겠으니, 말을 삼가십시오. 기운이 흩어집니다!”
진우선이 애원하듯 외쳤다.
독고월이 그런 진우선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생기가 다해가는 눈이지만, 자신을 위해 애써주는 진우선의 모습은 오롯이 보였다.
그에 독고월이 간신히 미소 지었다.
“자네가 있어서…… 정말 고맙네……”
독고월이 그 말을 마치고 눈을 감았다. 너무 힘들고 괴로워 눈을 뜨고 있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전신에서 밀려오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신음까지 흘렸다.
그런데도 진우선에게 말을 한 건, 적문강의 흉계에 관련한 단초를 무조건 전해야겠다는 불굴의 의지 때문이었으리라.
“맹주님! 제발 버티십시오.”
진우선이 안간힘을 쓰며 독고월에게 힘껏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러는 사이, 천도관에 정무맹의 무인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만상각주 공야청과 현청각주 여문각을 비롯한 수뇌부였다.
그들은 독고월이 생사의 기로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진우선에게 그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노심초사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응급조치를 마친 진우선이 활인 당주 왕약수에게 독고월을 맡기고 천도관 밖으로 나왔다.
“후우-.”
기진맥진하여 한숨부터 내쉬었다.
뒤따라 나온 공야청이 진우선에게 말했다.
“수고 많았네.”
“아닙니다.”
“아니라고 하지 말게. 맹주님이 살아계신 건 다 자네 덕분이니까.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
공야청이 심각한 가운데서도 어색하게 미소를 보이며 진우선의 겸양 섞인 말을 막았다. 그러고는 희미한 웃음기마저 싹 지우고 물었다.
“근데 쳐들어온 게 누군가?”
“적문강입니다!”
“역시 적문강 그놈이었나?”
“네. 그는 매우 뛰어난 마공을 펼쳐 은밀하게 나타났는데, 알고 보니 극사경에 올라 있었습니다.”
“극사경? 사마의 기운을 한 몸에 품었단 말인가?”
공야청이 기겁하여 반문했다. 이는 몰라서 되물은 게 아니라 너무 놀란 탓이었다. 그러나 곧장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럼 극마경은 아니었는가?”
“네. 극마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허-! 그래도 너무나 경악스럽군.”
사마의 기운을 다 지닌 것도 모자라, 사공이 극사의 수준이라니.
이쯤 되면 오히려 마공이 극마의 수준이 아닌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자네가 아니었으면 아무도 못 막았겠군.”
“근데 마공 실력도 절대 간과하여선 안 됩니다. 그의 신법이 극도로 은밀하여 천도관 앞에 나타날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저조차 그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감으로는 마공과 사공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허! 마공도 그 정도라고?”
극사경에 오른 사공에 비하면 마공의 성취가 다소 아쉬워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절대적 기준으로 보면 그 성취가 낮은 게 결코 아니었다.
그걸 잘 아는 공야청이기에 얼굴이 놀라다 못해 굳어지고 있는 것이리라.
“그럼 적문강이 마영이었단 말인가!”
공야청이 문득 뇌리를 스친 생각을 중얼거렸다.
“마영이요?”
“아! 자네의 말을 듣고 생각해봤네. 그런 경신법을 펼칠 만한 자라면, 흑암무영종의 마영밖에 없겠더군. 그는 마영은형신법을 완벽히 익혀냈다고 하는데, 경신법만으로는 교주인 절대천마를 제외하면 비교할 자가 없다고 들었다네!”
“그러고 보니 역용술도 상당하여 얼굴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습니다. 목소리도 달랐고요.”
“허어! 강호를 신출귀몰하게 종횡무진으로 누빌 능력을 다 갖췄군.”
공야청은 만학수사답게 척척 알아채고 있었으나, 그럴수록 적문강의 흉계에 소름이 끼쳐왔다.
“우리가 그자에게 감쪽같이 속았어! 원통할 지경이군.”
“조금 전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마 지난여름에 왔던 일도 허위였던 것 같습니다.”
“그랬겠지. 그는 분명 발작을 핑계 삼아 우리에게서 무언가 획책한 게 틀림없네. 그래서 맹주님께도 적사안을 펼친 거겠지.”
공야청이 격하게 탄식했다.
진우선이 조심스럽게 조금 전 독고월에게 들은 말을 전했다.
“그가 맹주님을 포박하려고 했었다고 합니다. 맹주님이 쓰러지시기 바로 전에 직접 느낀 바를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랬었군.”
“저 역시 그때 매우 섬찟했습니다. 제가 그자의 사특한 암경을 쳐 냈는데, 어찌나 불길한지 힘을 한껏 퍼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잘했네. 미리 차단한 게 중요한 걸세.”
공야청이 진우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때, 천도관에서 나온 왕약수가 진우선 쪽으로 다가왔다.
“진 호위. 정말 수고했네. 자네 덕분에 맹주님이 정신을 잠시 차리실 수 있을 거 같네.”
“아-!”
왕약수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은 진우선이 탄식을 흘렸다.
공야청도 비통한 마음에 빠지며, 확실하게 캐물었다.
“왕 당주님, 그럼 가망이 거의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공 각주, 맹주님은 아마 반 시진 정도 지나면 깨어나실 거라네. 근데 그때가 마지막이야. 최후의 진원지기가 빛을 발하는 거니까. 그리고 내일의 해는 보지 못하실 걸세.”
“…….”
“…….”
오늘 내로 숨을 거둔다는 말에 공야청과 진우선이 말문을 잃었다.
“그나마 오늘 하루도 진 호위가 경천동지할 능력으로 하늘의 틈을 열어 만들어낸 시간이라고 봐야 하네. 그가 없었으면 이미 임종하셨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어.”
“……그렇군요.”
공야청이 간신히 대답을 끄집어 냈다.
왕약수가 그렇게 말을 건넨 뒤, 천도관 밖으로 나선 다른 이들에게로 이동했다.
공야청과 진우선이 한숨을 쉬며 하늘을 보았다.
둘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서로의 감정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정적이 얼마나 흘렀을까.
“하늘이 심히 어둡군.”
“새벽이 참 깁니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공야청과 진우선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흘렀다.
***
아침 무렵이었다.
침상에는 정신을 차린 독고월이 미약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에 바로 옆에 선 탁신이 통탄하여 외쳤다.
“맹주.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지난밤까지만 해도 아무 일 없었잖소!”
“탁 각주, 자네가 가고 나서 적이 나타난 게 다행이야. 자네라면 끝까지 싸웠겠지. 하지만 쉬운 적이 아니었어.”
독고월이 힘없이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은 지난밤에 다시 호형호제하기로 했으면서도, 공식석상에 맞게 경칭을 쓰고 있었다.
“적이 왔으면 싸우는 게 당연한 거요!”
“자네가 아까워. 이제는 몸을 아끼게. 혼자가 아니야.”
독고월이 나직하게 조언했다.
주변에 둘러선 이들이 말에 담긴 따스함을 느끼며, 안타까움을 더 금치 못했다.
독고월이 공야청에게 물었다.
“공 각주, 준비는 다 됐나?”
“다 되었습니다.”
“고맙네.”
공야청이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맹주직을 건넬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그때, 독고월이 내당주 냉군상을 발견하고는 물었다.
“냉 당주, 뇌옥은 문제없소?”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조금 전에도 보고받았습니다.”
“그랬구려.”
정무맹의 뇌옥은 내당이 관리하는 곳이었다.
독고월은 혹시나 천마교에서 맹여립을 구해갔을까 싶어서 물어본 것이었다.
“그가 나만 노렸던 모양이군.”
“적문강이라 들었소. 내가 후에 그에게 이 죄를 단단히 물을 거요!”
탁신이 노기를 터트렸다.
그에 뒤편에 모여든 장로 몇몇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탁 각주. 나를 화장(火葬)해주게. 그가 나를 왜 노리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없애야지 않겠나?”
“맹주!”
“탁 각주. 이게 내 마지막 명이오.”
“아아아-!”
그 순간, 탁신이 오열했다.
그는 언제나 독고월 앞에서 냉랭하기 그지없었으나, 지금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죽어서 땅에 묻히지도 못한다니! 죽음까지도 꼭 그리해야만 하는 거요?”
“그게 나아. 내게 적사안을 걸어서 무언가 하려고 했고, 이제 다 죽어 가는데 또 찾아왔다네. 흉계가 있겠지. 그럼 못하게 수를 써야지 않겠나?”
독고월은 죽음을 앞에 둔 지금 순간에도 적을 생각하고, 강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탁신이 이를 악물며 외쳤다.
“내가 지켜내겠소. 나는 내 사람은 꼭 지킬 거요.”
“그러지 말게. 괜히 짐만 될 뿐이야. 죽어서 혼이 떠났는데, 육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독고월이 엷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마지막 명을 받게나. 맹주의 권위를 세워주게.”
“……알겠소.”
탁신이 한탄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고맙네. 탁 각주.”
그러더니 독고월이 단호한 눈빛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천지신명이시여! 정무맹을 굽어 살피소서. 탁신이 이날 이 시간부로 맹주로서 나아가니, 귀히 여겨 주시옵소서!”
독고월이 그렇게 맹주직을 탁신에게 건넸다.
그리고 정오 무렵, 숨을 거두었다.
그날 밤이었다.
독고월의 유언에 따라 천도관 앞뜰에서 화장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무로 쌓은 제단 위에 독고월의 시신이 놓였다.
탁신이 그의 몸 옆에 정성스럽게 쓴 족자 하나를 세웠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시신이 화르륵 타올랐다.
족자의 글씨가 시뻘겋게 타오르며, 밤하늘에 각인되었다.
-의천무제 독고월.
의에 살고 의에 죽다.
의로운 천하를 꿈꾸었고, 의로써 천명을 다했다.
아! 천하에 누가 있어 그의 의를 따를 것인가.
***
장사의 이층전각으로 되돌아온 마영은 하루를 운기조식으로 보낸 뒤, 방에서 내려왔다.
“마영님, 괜찮아지셨습니까?”
“풍노. 나는 괜찮네. 그보다 정무맹은 어떤가?”
“낮에 독고월이 숨을 거두었고, 탁신이 정무맹주에 올랐습니다. 이미 준비했었는지, 우왕좌왕하지도 않았다더군요.”
“역시나 그렇게 됐군.”
마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계속 물었다.
“그럼 시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매장지는 혹시 들었어?”
“매장이 아니라, 오늘 밤에 화장한다고 알려졌습니다.”
“아! 눈치챘군!”
“그런 것 같습니다. 독고월이 죽기 직전에 유언으로 부탁했다고 했습니다.”
풍노가 조심스레 자신의 추측을 말했다.
그는 마영의 심복으로 많은 일을 함께해온 사이였다. 마영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다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이럴 줄 알았으면, 죽기를 기다릴 걸 그랬습니다.”
“아니야. 그건 상관없어. 어차피 언제 갔어도 이번에는 어려웠을 거야.”
마영이 풍노에게 고개를 가로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진우선은 이미 극경의 무인으로서 능숙했어. 어설프지 않더군. 지난여름에 만났을 때는 현기가 짙고 특별하나, 대성은 쉽지 않아 보였는데 말이야.”
“만났던 적이 있으셨습니까?”
풍노가 놀라서 대꾸했다. 마영이 이전의 일을 말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한 번 있었지. 그때 내가 십 성의 힘으로 펼친 적사안을 완벽히 막아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천 독황공을 십이 성 펼쳤는데 파쇄하더군. 벽사의 능력이 너무나 강력했어.”
“말도 안 됩니다. 마영님의 사천독황공마저 막아내다니요! 벽사의 능력이 하늘에라도 닿은 겁니까?”
“나도 심히 당황스럽더군.”
“허-! 우리가 그를 너무 몰랐습니다.”
풍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천독황공(邪天毒皇功) 십이 성이면, 극에 가까운 무인들마저도 아찔하여 감당해내기 힘들 수준이었다.
하지만 진우선은 너무나 수월하게 막아낸 듯했다.
마치 천적인 것처럼.
“그럼 진우선은 벽사와 항마를 둘 다 지닌 것입니까?”
“맞아. 흑괴가 그의 항마의 능력이 탁월하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마영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
“마영은형신법은 극경을 이룬 무인들도 거의 못 알아채는데, 그는 알아채더군. 항마겠지. 아마 그 수준도 벽사와 비슷하게 봐야 할 거야.”
“진짜 이건 너무 말도 안 됩니다! 저는 여태껏 강호에서 그런 걸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이제 들었네.”
마영이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마음속에 화가 타오른 게 슬쩍 엿보였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괜찮아. 다음 계획을 실행하면 상관없어. 어차피 다들 삼문협(三門峽)으로 목숨을 헌납하러 모여들 테니까.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