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천하는 계속 흐른다 (2)
“진 공자가 만약 그 일을 더 살펴보겠다면, 관부까지 염두에 두는 게 좋을 거예요.”
사예설의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담긴 뜻은 단호했다. 그녀는 내심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진우선이 잠시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더 살펴봐야겠습니다. 몰랐을 땐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알고 나니 마음이 답답합니다. 그런데 지금 들은 내용만으로는 뭘 해야 할지 명확하지가 않네요.”
“그렇죠. 이제 실마리를 찾은 셈이니까요.”
사예설은 진우선의 심정을 이해하는지, 맞장구를 치며 말을 이었다.
“진 공자, 그럼 그 당시에 주변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알아보는 게 좋겠어요. 그때 가을 무렵에 안휘성과 하남성, 호북성에서 활동한 녹림도와 관원을 살펴보면 어떤 단서가 나올 거예요.”
“살펴볼 게 엄청나군요.”
“칠 년이 지난 일이고, 「혼원귀일」이란 책을 수소문하기는 어려우니까요. 사건의 중심에는 책과 사람들이 있는데, 책을 찾을 수 없으니 사람을 살피는 수밖에 없죠.”
“그렇네요.”
진우선이 사예설의 말에 수긍했다. 하지만 그의 짧은 대답과 목소리에서 막막한 마음이 잔뜩 느껴지고 있었다.
그에 사예설이 빙긋 웃으며 제안했다.
“내가 좀 도와줄까요?”
“사 소저가요? 아닙니다. 더 살펴본다면, 시간이 지금보다 훨씬 더 뺏길 거예요. 그렇게까지 하는 건 내가 너무 미안합니다.”
진우선이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혼원귀일」을 알아내는 데 걸린 시간만 해도 한 달이 넘었는데, 그때 사람들을 파악하는 건 얼마나 오래 걸릴 일이란 말인가.
이건 너무나 폐를 끼치는 일이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서류와 씨름하는 거겠죠. 그거라면 내가 진 공자보다는 훨씬 잘할 거예요. 안 그래요?”
“그거야 그렇겠죠. 하지만 이건 고마운 걸 넘어서서 미안할 정도입니다. 사 소저가 여태껏 해준 수고도 너무나 고마워요.”
“그렇게 고마워요? 그럼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요? 아, 물론 어려운 건 아니에요.”
“알겠습니다. 어떤 부탁인가요?”
사예설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진 공자. 근데 우리 이제 말을 좀 편하게 하면 어때요? 동갑이잖아요. 그건 알고 있죠?”
“알고 있습니다. 근데 이게 부탁이에요?”
“맞아요. 어렵지 않다고 했잖아요.”
진우선이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이건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다.
“그러자.”
진우선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편하게 말을 꺼냈다.
사예설도 곧바로 말을 놓았다.
“우선아.”
“왜?”
“이제야 좀 편해졌네.”
“하하!”
사예설이 배시시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진우선을 툭 쳤다. 친근감의 표시인 듯했다.
그러더니 설득조로 말을 꺼냈다.
“우선아. 근데 남촌의 일을 조사하는 건, 내가 도와줘야 해. 네가 어느 세월에 사람들을 수소문하고, 서류들을 들춰볼 수 있겠어? 백무원에서도 계속 임무가 내려올 텐데 말이야.”
“그건 그렇지만, 네게 정말 미안하니까.”
“우리 이제 친구잖아. 친구 사이에 그 정도가 어때서? 너는 만약 나한테 무슨 일이 터지면, 아예 나 몰라라 할 거야?”
“아니, 마냥 그러진 않을 거야.”
“그럼 거꾸로 생각해봐. 너에게 무슨 일이 터졌는데, 내가 나 몰라라 하는 게 맞겠어?”
사예설이 능숙하게 자기 뜻을 펼쳤다.
그녀는 진우선이 잠시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자, 말을 더 이어나갔다.
“그리고 나도 네게 도움을 받을 일이 언제 생길지 몰라. 정무맹 최고수에게 한 번 부탁할 기회가 있으면 나야말로 이득이지. 안 그래?”
사예설의 말이 묘하게 설득력 있었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 가지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악인을 돕거나 악행과 관련된 거라면, 나는 돕지 않을 거야.”
“그건 당연하지. 나 역시 정의롭고 싶은 마음으로 정무맹에 들어왔거든!”
“그건 그렇지.”
진우선이 멋쩍게 웃었다.
“아무튼, 이 일은 내가 더 살펴볼게. 아예 ‘남촌사건’이라고 이름도 붙여놔야겠어.”
“정말 고마워.”
“뭘 이런 걸 가지고. 나야말로 나중에 정무맹 최고수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훨씬 사안이 중대할지도 몰라. 그때 가서 모른 척 하지나 마!”
“그래. 알았어.”
진우선이 피식 웃으며 사예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예설이 너는 참 성격이 밝네. 사람도 좋고. 여러모로 고마워.”
진우선은 사예설과 대화하며 배려심과 따스한 마음을 느꼈다. 처음에는 의식하지 못했었는데, 사람이 편안해지고 나니 그러한 모습이 보였다.
그에 사예설이 히죽 웃었다.
“그래? 네게 칭찬을 들어서 그런가 기분이 좋네.”
***
다음 날 아침이었다.
진우선이 부름을 받고, 만상각주 공야청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축하하네. 집을 얻어서 나가는 데 석 달밖에 안 걸렸어. 여태껏 본 중에 제일 빠르군. 내가 각주가 된 이후로 무원주가 가장 뛰어났었네만, 그도 이 정도로 빠르진 못했어.”
“감사합니다.”
공야청의 축하에 진우선이 웃으며 목례했다.
“이제부턴 아침마다 진시초(辰時初, 07~08시)까지 일 층 대전으로 오면 임무를 받게 될 거네. 종종 봐서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무원주님과 혜원주님도 알려주셨습니다.”
공야청이 슬쩍 웃었다.
“다들 자네를 잘 챙겨주고 있군. 그리고 오늘내일은 자네도 여러모로 바쁠 테니 쉬도록 하고, 모레부터 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 맹주님의 서찰을 전하는 건 열흘 후쯤에 다녀오는 게 어떻겠나?”
“괜찮습니다. 그런데 총이도 갈 수 있습니까?”
“아! 호심당과는 이야기가 잘 끝났다네. 그는 이번에 천마교를 상대하는 임무를 맡았었는데, 훌륭한 성과를 거두고 돌아왔다더군.”
“다행입니다. 탁 대협께서 반가워하시겠군요.”
진우선은 공야청에게 이제 전 맹주가 된 독고월의 서찰 두 통에 대해 말해둔 상태였다.
공야청은 그 일을 독고월의 유언으로 취급하여 임무를 부여하기로 했고, 호심당과도 협조를 끝낸 상황이었다.
“근데 조금 애석하기도 해. 전 맹주님이 돌아가셨는데 슬퍼할 겨를도 없더군. 맹의 일과는 언제나처럼 흘러가고 있으니 말이야.”
“저도 씁쓸했습니다.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었거든요.”
공야청과 진우선이 서로 짧은 단상을 나누었다.
전 정무맹주 독고월이 숨을 거둔 지 아직 열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탁신을 새 맹주로 맞이한 정무맹은 아무런 문제 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어쨌든, 탁 대협에게 전할 슬픈 소식이 너무 커서 기쁜 소식이 묻힐까 했는데, 제자가 성취를 크게 얻은 걸 보면 또 다르시겠지.”
진우선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자네 친우 만총이 올 초에 치러진 비무에서 우승했다는데, 그 소식 들었는가?”
“아니요. 지금 처음 들었습니다.”
“허허. 내가 자네에게 임무를 쉼 없이 준 탓에 소식을 못 들은 거 같아 미안하네.”
공야청이 겸연쩍어 하며 말을 이었다.
“호연 당주가 자네에게 전해달라더군. 만총이 자네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다를 거라고 말이야. 그리고 우문혁도 일취월장하여 만총 다음의 실력을 선보였다면서, 자네가 그들을 만나면 엄청나게 놀랄 거라 했다네.”
“오! 그간 만나지 못했었는데, 엄청 달라졌나 봅니다. 저도 얼른 보고 싶군요.”
“허허. 그렇게 말하니 내가 더 미안해지는군.”
“아닙니다.”
진우선이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공야청의 말을 부정했다.
그에 공야청이 흐뭇하게 웃으며 호심당주 호연강에게 들은 바를 더 물었다.
“호연 당주에게 들으니 셋의 관계가 참으로 돈독했다더군.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되고,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어.”
“총이와 혁이가 그리 말했나 보군요. 저야말로 호심당에 처음 와서 어수룩한 면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 늘 곁에 있어 든든했습니다.”
“허허. 그랬나? 아무튼, 잘 알겠네. 그래도 좋은 소식을 전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군. 그럼 내일모레 보도록 하세.”
“감사합니다.”
진우선이 인사를 마친 후 만상각을 나왔다.
***
진우선이 오석교 근처로 빠르게 갔다.
‘저기구나!’
멀리서부터 자신의 집이 어렴풋이 보였다.
오석교 근처는 집들이 넉넉한 간격으로 지어져 있으며, 거리도 넓고 조용했다.
복잡한 장사 중심부와 멀지 않으면서도, 동네 전체가 고즈넉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마음에 쏙 들었다.
심장이 벌써부터 쿵쾅댔다. 진우선은 기대에 부풀어 얼른 집에 들어갔다.
“진 대협, 왔소?”
“진 대협, 반가워요.”
탁운비와 신영화가 활짝 웃으며 진우선을 맞이했다.
“탁 형, 집이 몰라볼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진우선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광경에서부터 감탄을 흘렸다.
이 집을 삼백 냥 주고 샀을 때도 괜찮았는데, 탁운비의 손이 닿으니 몰라볼 정도로 우아해진 까닭이었다.
넓은 마당의 한편에는 작은 연못과 정자가 세워져 있고, 그 뒤로 작은 정원도 꾸며져 있었다.
본래 마당을 연무장으로 쓸 계획이었는데, 그렇게만 쓰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에 더해 건물 외관도 단아하게 재단장하니, 마당의 모습과 조화를 이뤘다.
“정말 좋습니다. 이런 집에서 한 번 살아봤으면 했습니다.”
“만족할 줄 알았소. 안도 한 번 보시오. 아마 안을 보고 나면, 나에게 그 말을 한 번 더 할 거요.”
탁운비가 자신 있어 하며, 진우선을 건물 내부로 안내했다.
창고처럼 조성되어 있던 지하 공간을 넓게 키워 연공실로 만들었다. 조용히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 외에도 집안 곳곳을 잘 꾸며 놓아서, 진우선은 입이 쩍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탁 형, 정말 고맙습니다. 진짜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이토록 애를 써주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고맙고, 또 죄송합니다.”
“하하하하! 진 대협, 마음에 드시오? 그렇게 웃는 걸 보니, 영화와 함께 애쓴 보람이 있구려. 우리가 좋아서 했으니, 미안해하지 마시오.”
“신 소저께서도 함께하셨습니까?”
“네. 저도 조금 손을 보탰어요.”
“감사합니다.”
신영화가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청아한 미소가 빛났다.
“진 대협, 영화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소. 사실 이 집에 엿보이는 우아함이 누구에게서 나왔겠소?”
“아-!”
진우선이 탄성을 흘렸다. 그의 말이 바로 이해되었다.
탁운비가 눈이 부리부리하고 듬직하여 절로 호감이 가는 외모라지만, 우아하기로는 겉모습만이 아니라 천성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신영화에 비할 수 없었다.
“진 대협, 그렇게 바로 수긍하면, 내가 좀 민망하지 않겠소?”
탁운비가 능청스럽게 웃더니, 호쾌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우리가 옆집을 샀소. 거기서 살려고 말이오.”
“정말입니까?”
“그렇소. 원래 아버지와 살던 집이 있긴 하지만, 거기서 계속 살 순 없지 않겠소?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알고 많이 드나들었던 곳이니 말이오.”
“하긴, 맹주님께서 신정회도 이끄셨다고 들었습니다.”
탁운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정확하오. 그리고 나도 한 달 후쯤부터 내당에서 일하게 되었소. 고수가 필요하다고 하는 바람에 말이오. 물론 진 대협에게는 몇 수 뒤처지겠지만 말이오.”
“탁 형의 실력도 나무랄 데 없이 뛰어납니다. 신 소저도 직접 구하셨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그럼 맹에서도 뵙겠군요.”
“그렇소. 그래서 여러 가지를 축하하는 의미로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오. 괜찮겠소?”
“당연히 괜찮습니다.”
***
이틀 후 아침이었다.
진우선이 집을 나서서 다소 어색한 길을 걸으며 정무맹으로 향했다.
만상각 일층의 대전에 들어서자, 텅 빈 공간이 그를 맞았다. 오늘은 혼자인 모양이었다.
잠시 후, 공야청이 대전에 들어섰다.
“잘 쉬었는가?”
“네, 탁 형이 애를 많이 써줘서 좋은 집에서 잘 쉬었습니다.”
“다행이군. 이번에 서로 많이 친해진 모양이야.”
“그렇습니다.”
가벼운 대화를 마친 공야청이 서찰 하나를 펼치며 말했다.
“우선. 지난 며칠간 자네 덕에 첩자들을 정확히 스물한 명 색출해 냈다네. 그 점은 정말로 고맙다네.”
“제가 보고 드린 명단보다 많았군요.”
“그렇게 됐네. 접선자들도 잡았으니까. 특히나 사도련 쪽 첩자들은 대다수가 그랬지.”
공야청의 말에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네. 사도련의 첩자 중 한 명이 취월루의 여인인데, 관계가 좀 애매하게 엮였어.”
“어째서 애매한 것입니까?”
“자네도 본 적 있겠지만, 백무원의 고수 중에 한효기가 있지. 그가 취월루의 여인 무화와 아주 가까워. 한데, 무화가 접선자들과 닿아 있더군.”
“아!”
진우선이 탄성을 흘렸다.
한효기는 종종 밤새 술을 마시고, 아침에 임무를 받으러 오곤 했었다.
“무화는 사공에 조예가 깊어 보인다더군. 미혼술도 익혔다고 하고. 우리가 등잔 밑이 어두웠어.”
취월루는 장사에서 손에 꼽힐 만큼 유명한 주루였다.
그곳에 사도의 위험한 술법인 미혼술(迷魂術)을 익힌 사람이 있으니, 이는 정무맹의 눈 밑에 맹적이 있는 꼴이었다.
“알겠습니다. 첩자를 색출하고 그를 구해내겠습니다.”
“당장에 그렇게 하라는 건 아닐세. 한 무사는 그녀를 오랫동안 사랑해왔네. 자네는 그들의 관계를 알아봐 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