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강소풍운 (2)
진우선과 만총은 남경에서 곧장 배를 갈아탄 뒤, 다음 날 아침에 항주에 도착했다.
항주지부에 들르자 지부장 안이원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진 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근래에 떨치신 위명을 많이 들었습니다. 만 소협도 정말 반갑습니다.”
“지부장님,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아침부터 분주하시군요.”
진우선은 이른 시각임에도 심히 부산스러운 항주지부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평소에는 이렇지 않습니다. 근데 어제 오후에 강소삼정의 하나인 염성방의 소방주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와서 다들 정신이 없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다소 양해 부탁드립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강소성의 정세가 급변하여 정말 힘드시겠습니다. 여기로 오면서 분위기가 흉흉한 걸 느꼈는데, 큰일이 나서 그런 것이었군요.”
진우선이 안이원을 위로하자, 안이원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진 대협께는 자세히 전해드려야겠지요. 사실 소방주는 밤중에 염성방 한가운데서 봉변을 당했는데, 그의 손에서 만상각의 인장이 나왔다고 합니다.”
“헛! 정말 만상각의 인장이었습니까?”
진우선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양주지부에서 제대로 확인했다고 합니다. 염성방주가 길길이 날뛰어서 애먹었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그리하여 어제 오후부터 남경지부와 양주지부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저희도 어젯밤부터 함부로 자리를 비우지 못했습니다.”
“만상각의 인장은 심히 정교하여, 함부로 모조할 수도 없을 텐데요.”
“아마도 임무 중에 숨을 거두신 분의 유품이리라 추측됩니다. 하지만 염성방이 우리 말을 어디 믿겠습니까? 아들이 숨을 거두었고 눈앞에 버젓이 증거가 있는데 말이지요. 그나마 음모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건 차후에나 고려해 볼 사항일 겁니다.”
안이원의 말에 진우선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저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심려케 해드렸군요. 죄송합니다.”
“지부장님 탓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건 제 마음일 뿐, 일단은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게 맞겠지요. 강소성의 일은 지금 만상각에서도 회의하고 있을 테니까요.”
진우선은 강소성에 풍운이 일어나는 걸 느꼈으나, 마음을 가라앉히고서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렇습니다. 만약 진 대협을 찾는다면, 대략 오늘 밤이나 내일 새벽쯤에 전서구가 날아올 겁니다. 그리고 궁가장에 관 대협을 비롯하여 여러 고수가 가셨으니, 그분들께서도 무언가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일단 탁 대협을 뵙겠습니다. 안내 부탁드립니다.”
진우선이 일의 우선순위를 정했다.
그에 안이원이 곧장 나갈 채비를 했다.
“지부장님이 직접 가십니까?”
“그렇습니다. 탁 대협께서는 저의 은사이시지요. 예전에 숭의각에서 오 년 정도 모셨었습니다.”
“아-!”
진우선이 탄성을 흘렸다.
“탁 대협께서 항주로 오신 이후, 열흘에 한 번씩은 꼬박 찾아뵙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 소협에 관한 이야기도 종종 들었습니다. 무재가 정말 뛰어난 제자라고 칭찬을 많이 하셨지요.”
안이원이 만총에게도 아는 척했다.
그는 한때 숭의각 무인이 맞았나 싶을 만큼, 능숙한 언변을 보였다. 항주지부장의 자리에 이미 녹아든 듯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지부장님 덕분에 스승님께서 적적하진 않으셨겠네요.”
안이원은 진우선과 만총을 항주 서호 인근의 한 장원으로 안내했다.
여름에 접어들며 꽃이 흐드러지 게 핀 서호 한쪽에 장원이 있었다.
장원이 아담하여 서호가 꽃으로 싸안은 듯했다.
“풍경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사시사철 아침저녁으로 각기 다른 운치를 흘리니, 탁 대협께서도 흡족해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인상도 전보다 매우 부드러워지셨지요.”
진우선과 만총이 안이원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장원의 문 앞에 섰다.
평호장(平湖莊)이라는 현판을 확인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시종이 나왔다.
“장주님께서 귀빈을 모시라 하셨습니다.”
시종의 말에 안이원이 너스레를 떨었다.
“두 분이 오실 걸 알고 계셨나 봅니다.”
“그러셨을 겁니다.”
진우선이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말을 묵직하게 느낀 안이원은 무언가 눈치채고서 곧장 입을 다물었다.
“들어오시지요.”
시종이 그들을 이끌고 평호장 안의 한 정자로 데려갔다.
탁무위가 거기에 있었다.
“총아, 오랜만이구나.”
“스승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나야 별일 없었지. 항주가 살기 좋으니 말이다.”
만총이 탁무위에게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탁무위가 손을 내밀자 만총이 맞잡았다. 만총은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으나, 지금은 얼굴에 감격한 빛이 가득했다.
“저는 진우선이라고 합니다. 탁 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허허, 영광일 것까지야. 우리는 일전에 청운무관에서 한 번 봤었는데, 기억하는가?”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간 참 빠르군. 벌써 일 년 반이 더 지났으니 말이야.”
진우선이 서찰 하나를 품에서 꺼냈다.
“이건 전 맹주님께서 맡기신 서찰입니다.”
“허허 !”
탁무위가 웃으며 서찰을 받아서 읽기 시작했다.
마음을 꽉꽉 눌러 담았는지, 서찰에 글자가 빼곡했다.
……함께 의기투합하며 살아왔건만, 이제는 못 본 지 몇 년 되었구나.
……항주에 가끔 들렀는데, 평호장을 짓고 사는 모습을 보며 너를 차마 부르지 못한 채 돌아갔다.
평화로운 강호는 우리의 꿈이었건만, 나는 아직 네 앞에 설 자신이 없더구나.
……마음으로 감복한 의인을 통해 서찰을 보내마.
강호는 여전히 의기가 살아 숨쉬더구나. 그가 있어 네 이름과 명예를 돌려놓을 수 있었다.
맹가 놈이 간악무도한 짓을 저질렀을 때 지켜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정말로.
……네가 이걸 받을 즈음에 나는 도에 귀의했을 거다.
하지만 함께한 시간은 영원하니, 늘 네가 있어 고마웠다. 친우여.
탁무위가 그 자리에서 서찰을 한 번 더 읽었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는데, 눈가에는 눈물이 고이는 듯했다. 심경이 복잡하여 쉬이 추스르기 어려운 듯했다.
‘친우야. 네가 다녀간 걸 왜 몰랐겠나. 괜히 서호용정차만 사가던 것도 다 알았는데…….’
독고월은 심히 미안하여 가까운 사람에게도 이런 사실을 밝히지 않았으리라. 그는 의기가 투철하나, 그만큼 마음이 여린 까닭이었다.
탁무위가 조심스럽게 서찰을 접어 품에 간직하며, 멍하니 서호를 바라보았다.
눈물 한 방울이 조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더니 탁무위가 곧 마음을 가다듬으며 진우선과 만총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허허. 자네는 그새 어마어마한 무인이 되었군. 항주에서도 자네의 이름이 종종 들린다네.”
“과찬이십니다.”
“총아, 너도 몰라볼 정도로 수련이 깊어졌구나.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탁무위가 두 사람에게 마음을 담아 말하고서 시종에게 명령했다.
“술상을 준비해오너라. 오랜만에 만났으니, 술 한 잔 하고 싶구나.”
저녁이 되자 석양이 서호에 내려앉아 그윽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탁무위와 진우선, 만총 세 사람은 정자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까 보여준 게 천뢰신창이었구나. 잘했다. 그간 홀로 수련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다행히도 네 길을 잘 찾았어.”
“감사합니다. 스승님께 한 번 확인받고 싶었습니다.”
“그랬구나. 수고 많았다. 앞으로 정진할 일만 남았구나. 물론 쉽지는 않겠으나, 그 끝을 능히 기대해 볼 만하다.”
탁무위가 빙긋 웃으며 만총을 칭찬했다.
그러더니 진우선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보았나? 오랜만에 만났을 텐데 말이야.”
“닷새 전에 저희가 한 차례 비무를 했었습니다. 한데 오늘 보여준 모습은 그때보다 더 뛰어났습니다. 그새 또 발전한 모양입니다.”
“그랬군. 그 외에는?”
“그 정도가 전부입니다. 사실 탁 대협께서 말씀하신 바가 제 생각을 훨씬 뛰어넘은지라 더 해줄 말이 없습니다.”
진우선이 겸손하게 대답했다.
“허허. 총아. 참으로 좋은 친우를 두었구나.”
탁무위가 탄복하여 웃었다.
그는 만총의 천뢰신창을 보며, 뇌정일기신공과 혼원벽력창과 낙뢰창법 외에도 뛰어난 무리(武理)가 스며 있음을 알아챘다.
아마도 서로 비무를 하며 스며들었으리라. 호심당의 무사부 수준에서는 감히 담아내기 힘든 이치였으니까.
그런데 진우선은 그걸 모를 리 없음에도, 끝내 말하지 않고 있었다.
탁무위가 기억 하나를 더듬었다.
과거 무한 만금전장에 머물렀을 때의 일이었다.
한날은 만총이 집에 와 진우선이라는 아이가 청제자임에도 무시당하고 있다고 울분에 차 외친 적이 있었다.
탁무위가 알기로 만총이 누군가를 두둔했던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때는 만총 혼자서 진우선을 위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서로를 아끼고 있었다.
“옛 생각이 나는군. 독고월 그 친구와 매일 밤 자웅을 겨루며, 함께 실력을 쌓아갔지. 너희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그때가 떠오르는구나. 허허.”
탁무위는 진우선과 만총의 모습에서 자신과 독고월의 옛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 추억으로 산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구나. 허허허.”
또한, 강한 호승심이 치솟는 것도 느꼈다.
“자네는 나와도 한 번 비무를 해 줄 수 있겠나?”
“……!”
만총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곧 이어진 진우선의 대답에 경악해버렸다.
“탁 대협께서는 이미 무극지경에 오르셨지 않습니까?”
“허허허. 그간 창을 놓고 살아서 무를 잊은 줄 알았건만, 오늘 자네를 보고 아직 멀었다는 것을 느꼈네. 자네야말로 대단하군.”
탁무위가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밝혔다.
그에 진우선이 공손히 말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한 수 가르침을 청하고 싶었습니다.”
“허허허.”
***
그 시각.
공야청과 이능운, 금청청 세 사람은 집무실에서 회의에 빠져 있었다.
“각주님. 백무원에서 근래에 시신조차 회수하지 못한 이들은 둘입니다. 지난겨울에 사도련 고수들의 협공에 숨을 거둔 양천일과 작년 여름에 월령마화종(月靈魔花宗)에게 한 줌 혈수로 변한 상선정입니다.”
“그럼 사도련과 천마교 둘 다 우리 인장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말이겠군.”
“죄송합니다.”
“무원주가 죄송할 게 뭐가 있는가? 무인이면 생을 온전히 마치기 어렵고, 우리가 종종 그들의 주검에서 무언가 훔쳐내듯이 저들도 그랬겠지.”
공야청이 이능운을 위로했다. 그의 미소가 다소 씁쓸해 보였다.
“그렇다면 천마교가 조금 더 의심됩니다. 사도련이 획책할 거였으면, 사자검문에 힘을 실어주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귀문탈백종을 염두에 둔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귀문탈백종(鬼門奪魄宗)은 마공으로써 인간의 귀문을 연 이들을 말했는데, 그들이 내놓는 계책은 귀신의 술수처럼 신기막측하기 그지없었다.
“어느 정도로 예상하나?”
“육 할 정도입니다.”
“왜?”
“사도련의 총군사인 환사문주 모천기가 어떤지 아직은 잘 모르는 까닭입니다. 그간의 일은 악중뇌 사마광후가 주도했던지라, 모천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 사 할을 주었습니다.”
천마교의 귀문탈백종에게는 여러 차례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도련의 총군사 모천기는 상대해본 적이 없었다.
공야청이 금청청의 말에 수긍했다.
“알겠네. 어쨌든 이 일로 가장 이득 볼 건 천마교이니, 육 대 사 정도가 적당하겠군. 그럼 누가 적임자겠는가?”
“각주님. 우선이가 어떨까요?”
“사실 천마교와 사도련이 비슷하게 언급된 순간, 우선이밖에 생각나지 않긴 합니다.”
금청청의 의견을 이능운이 재청했다.
“허허허. 이래서는 양측이 다 의심스러운 상황일 때마다 우선이를 찾는 건 아닐지 모르겠군.”
“그래도 다행이죠. 믿고 택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게다가 지금 강소성 바로 옆인 항주에 있기도 하고, 다음 임무지인 태산도 근방입니다.”
“하긴, 그렇군. 근데 묘하게도 지금 상황이 우선이의 반경 안에 놓여 있는 느낌이야.”
공야청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 안건은 아직 내당에 있으니 명령을 내리진 말게. 내가 잠시 후에 내당주를 만나고 오지. 그리고 백혜원에서도 한 명 보내면 좋겠군. 강소삼정의 관계까지 살펴야 하니 말이야.”
“그럼 백하련이 어떻겠습니까? 셈이 빠르고, 사리판단이 명확합니다.”
“좋은 생각이군. 그럼 무원주는 누가 그녀를 호위하면 좋을지 한 번 살펴주게.”
“알겠습니다.”
그에 이능운과 금청청이 의논하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공야청도 내당으로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 후, 한 사람이 만상각에 방문하면서 공야청이 직접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다름 아닌 내당주 냉군상이었다.
“냉 당주가 직접 만상각에 올 줄은 몰랐군. 염성방에서 만상각의 인장이 발견된 것은 심히 유감이오.”
“후우-! 나 역시 내가 이리 급히 만상각을 찾을 줄은 몰랐소. 하지만 관 원주로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더이다. 염성방에서 화동일검 교중학이 나섰다고 하니 말이오.”
“화동일검!”
공야청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화동일검(華東一劍)은 강소성만이 아니라, 산동, 안휘, 강서, 절강, 복건성의 화동지역을 아우르는 검의 절대고수였다.
그곳에서 검이라면 바로 첫손에 꼽히기에 일검(一劍)이었다.
“염성방이 그마저 빈객으로 데리고 있었소. 화동일검을 위시하여 정무맹에게 자초지종을 묻겠다고 하더이다.”
“염성방의 재력이 심히 놀랍구려. 요 몇 년 사이 그가 어디 갔나 했더니만.”
“그가 차청문 소방주를 가르치고 있었다는 소문이오.”
“허허……!”
인제 보니 화동일검 교중학은 염성방의 빈객만이 아니라, 제자의 복수에 나선 스승이었다.
그의 분노도 막대하리라.
“그럼 어떤 수를 원하는 거요?”
“달리 있겠소? 나 역시 바로 달려갈 예정이오만, 상황이 급박하니 일단 진우선을 보내주시오. 지금 항주에 있지 않소? 어차피 만상각도 관련된 일이라 대응해야 할 테고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