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51화 (151/225)

151.

#염성방 (1)

“진 무사. 간밤에 자네가 제일 애를 많이 썼다는 걸 알지만, 바로 움직여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네. 도와줄 수 있겠는가?”

냉군상이 다소 미안한 기색으로 진우선에게 말했다.

진우선이 하루를 꼬박 새우며 여러 적을 상대했으니 쉬도록 하는 게 맞지만, 다른 적임자가 없는 까닭이었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떤 일입니까?”

“사자검문의 서 문주에게 이 일에 대해 더 알아봐 줬으면 하네.”

사자검문주 서도광과 수룡방의 장강이룡은 부상으로 인해 아직 포구에 있었다.

그들을 상대로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진우선뿐이었다.

“잘 이해했습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정말 고맙네. 사실 염성방에 만년삼왕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네. 워낙 전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영초니까.”

“저도 지금 처음 들었습니다.”

진우선 역시 고서점에서 기화요초에 관한 책을 보았으나, 만년삼왕에 대해선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일대풍운이었던 이 사태가 사실 만년삼왕 쟁탈전이었다고 생각해보면, 앞뒤가 딱딱 들어맞지. 이리 큰 희생을 내고도 타협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이니 말일세.”

진우선이 서도광에게 억류한 물자를 풀어주기로 확답 받은 것도 어젯밤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사도련의 인물들은 대부분 사리사욕에 눈이 멀었지. 환사문이 대거 나선 사실을 본다면, 백 책사의 말처럼 서 문주가 만년삼왕에 대해 의도적으로 숨겼음이 유력하지.”

“만약 그렇다면, 서 문주는 정말 욕심이 그득그득하군요.”

“잘 보았네. 이번 사태도 면밀하게 따지고 보면 그에게서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지.”

진우선의 말에 냉군상이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백하련이 냉군상에게 물었다.

“내당주님, 그럼 염성방의 일에도 저희가 관여하게 됩니까?”

“백 책사, 일단 우리가 궁가장의 부탁을 받아 강소삼정을 중재하러 왔으니, 어느 정도는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네. 하지만 염성방은 맹에 속한 게 아니니 상황을 먼저 살펴보자는 거고.”

“그렇군요. 한데 환사문이 대거 왔다면, 저희만으로는 수가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지난밤에 전투를 연이어 치른 까닭에 사상자도 꽤 있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때마침 안휘성에서 임무를 마친 진양각 무인들이 해가 뜨면 곧장 출발하겠다고 알려왔네. 지금쯤 움직이기 시작했겠군.”

“아! 다행입니다.”

냉군상이 어제 낮에 날린 전서구에 빠르게 지원이 오고 있었다.

냉군상이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진양각의 이양과 십양이 바로 오고 있는데, 각 대주가 바로 분뢰쌍검(奔雷雙劍)과 귀검(鬼劍)이더군. 둘 다 상당한 고수이니 백 책사는 잠시 걱정을 내려놓게나.”

“그러겠습니다.”

백하련이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분뢰쌍검과 귀검 모두 관무평과 비슷하거나 다소 상회하는 실력을 갖췄다고 알려진 까닭이었다.

냉군상이 다시 진우선을 바라보았다.

“진 무사, 혹시 물어볼 게 있는가?”

“없습니다.”

사실 진양각 십양의 대주인 귀검이 궁금하긴 했다. 귀검은 아마도 남가철방에서 사흘간 인연을 쌓았던 소무강일 테니까.

일 년 전쯤 만났을 땐 부대주였는데, 그간에 대주로 진급한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공적으로 의문은 없고, 사적으로는 소무강을 만나서 대화하면 될 일이었다.

진우선은 일단 눈앞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진 무사, 잘 부탁하네.”

“네. 그럼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진우선이 대전을 곧장 나섰다.

백하련도 그럴 뜻을 냉군상에게 전했다.

“저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러게나. 근데 백 책사가 부럽군. 공 각주도 너무 부러워.”

“진 무사님 때문이겠군요.”

“그렇다네. 실력만으로는 정무맹주에 올라도 이상할 게 없는 무인이 함께하는 것 아닌가. 뭐든 맡기기만 하면 될 테지.”

냉군상의 속마음이었다. 다소 딱해 보이기도 했다.

백하련은 그런 냉군상의 모습이 새로웠다. 그가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단연코 본 적이 없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만 소협은 안 됩니다. 관 원주님은 그래도 숨을 부지하셨지만, 저희는 전력에 큰 손실이 났습니다.”

백하련은 자칫 간과할 수도 있는 초무량의 공백을 생각하고 있었다.

“철저하군.”

냉군상이 백하련에게 작게 감탄했다.

“그리고 각주님께서 우문 소협도 눈여겨보시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들을 다 데려갈 셈인가?”

“만 소협과 우문 소협은 진 무사님과 매우 가까운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교(交)를 쌓으며 함께 무(武)에 정진했으니, 정무맹의 이름을 드높이는 엄청난 고수들이 된 거겠지요. 저는 그 점을 내당주님께서 모르시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공 각주도 내게 이리 말한 적은 없었네.”

냉군상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하지만 백하련은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저 역시 쉽게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하지만 내당주님께서는 맹의 발전을 그 무엇보다 우선하여 생각하시고,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시는 분이니 드린 말씀입니다.”

“백 책사는 꽤 당돌하군.”

냉군상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던졌다. 백하련의 말이 나름대로 타당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디 인원 발탁에 관한 결정이 여기서 말로 해결될 일이던가.

백하련이 곧장 한 발 물러섰다.

“아무런 권한이 없음에도 주제넘게 나서서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내당주님께서 잘 헤아려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알겠네. 이만 쉬고 싶군.”

“그럼 가보겠습니다.”

백하련이 말을 마치고 대전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냉군상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흘렸다.

“어제오늘이 너무 고단했나 보군. 내가 그런 소리를 할 줄이야.”

***

민머리 사내 장강패룡 추영공이 머리를 끌어올려 묶은 장강신룡 추대공을 불렀다.

“신룡아. 그는 확실히 도가의 냄새가 났는데, 여태껏 만나본 도사 중 가장 강했어. 서 문주도 못 당하더라. 그렇지 않냐?”

“시답지 않은 소리 그만해. 극경에 올랐다는 말 기억 안 나냐? 그래서 셋이 동시에 공격한 거잖아.”

“아! 그랬지, 참! 근데 잠깐 깜빡할 수도 있는데, 너 자꾸 형한테 구박하기냐?”

“야! 내가 형이야, 내가!”

추대공과 추영공은 새벽부터 이런 식으로 별일 아닌 거로 다투고 있었다.

수룡강기가 좋은 게 맞냐는 의문부터 시작하여, 누가 먼저 공격했어야 할지, 강기보다 더 쎈 건 없는지 등으로 아웅다웅했다.

“서 문주가 나왔군.”

장강이룡이 서도광을 발견하고서 얼른 그에게로 접근했다.

“서 문주. 내상은 잘 다스렸소? 그를 제일 많이 맞상대한 건 우린데, 서 문주가 가장 오래 걸렸소.”

“지금 내상이 문제가 아니오.”

“그럼 뭐가 문제요?”

“간밤에 있었던 일 못 들었소? 새벽에 소식이 전해졌을 텐데.”

“새벽이라면 나는 몸을 회복하느라 정신이 없었소.”

“나도 마찬가지요. 누가 부르는 것 같긴 했지만, 그냥 무시했지.”

추대공과 추영공이 새벽에 아무것도 듣지 못한 까닭에, 서도광이 간략히 설명했다.

“귀문탈백종이 궁가장을 습격했고, 진우선이 다 막아냈소. 잔백마군이 나섰다더군.”

“귀신을 부린다는 그 잔백마군 말이오?”

“엄청 쎈 놈이지 않소?”

장강이룡의 머릿속엔 강자와 약자에 대한 구분만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서도광은 무공이 매우 뛰어나나 다소 대화하기 답답한 장강이룡에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맞소. 잔백마군이 그놈이오. 한데 중요한 건 천마교가 련의 계획을 이용했다는 거지. 강소성이 혼란한 지금 말이오.”

“이런 괘씸한 마교도 놈들 같으니!”

추영공이 분노하는 사이, 추대공이 물었다.

“총군사가 염성방에 갔다고 하지 않았소?”

“아니, 총군사 말고 악 군사가 갔소. 환사문 부문주 말이오.”

환사문주 모천기가 새롭게 총군사에 올라 몹시 바쁜 까닭에, 환사문 부문주이자 총군사 아래 삼군사의 하나로 임명된 악범승이 염성방의 일에 나선 상황이었다.

“신룡아. 너도 다 잘 모르네. 아까 나보고 시답지 않다더니, 네놈도 별수 없구나!”

추영공이 추대공을 나무랐다.

서도광은 그런 둘의 대화를 무시하며 결론을 전했다.

“중요한 건 악 군사께서 환사문을 잔뜩 이끌고 나선 일에 천마교가 감히 암계를 획책했다는 사실이오. 그 탓에 내 아들도 이승을 떠났고.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가 없소. 련에서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거요.”

“맞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니까. 우리 수룡방도 당하고는 못 사는데, 서 문주와 련의 일이라면 우리도 돕겠소.”

“맞소. 나 역시 장강이룡이 도울 것임을 천명하겠소!”

추대공과 추영공이 눈을 빛내며 함께 싸우기를 다짐했다.

그때였다.

“서 문주. 나도 궁금한 게 있소. 천년설삼으로 환사문이 이렇게 움직이는 게 말이 되오?”

스으윽- 소리 없이 나타난 사내, 진우선이 물었다.

“헛!”

“어…!”

“어?”

그에 세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잠시 굳어버렸다.

“방금 서 문주가 말했다시피 간밤에 귀문탈백종이 습격해 와서 우리가 궁가장을 도와 잘 막아냈소.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니, 천년설삼이 아무리 귀하다 하나 일이 이 지경이 될까 싶더군.”

“진 대인, 정말 고생하셨소. 잔백마군의 무시무시한 악명이 아무리 대단하다 하나, 역시 진 대인에겐 못 미쳤나 보오.”

“그 말은 고맙소만, 내가 듣고 싶었던 대답은 아니군.”

진우선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진 대인, 이번 일은 천년설삼 때문이 맞소. 염성방이 세 뿌리를 다 가져가서 그런 거요. 하나쯤 나눌 수도 있지 않겠소?”

“그래서 환사문의 부문주가 문도들을 잔뜩 이끌고 나왔다는 말이오? 염성방을 전멸시키고 천년설삼 두 개를 얻어가려고? 그게 수지타산이 맞고?”

그에 서도광의 얼굴이 삽시간에 경직되었다.

진우선이 여전히 모르는 척하는 서도광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물었다.

“하지만 만년삼왕이면 어떨까 싶소. 강소성에 불어닥친 풍운이 만년삼왕 쟁탈전이라면 충분히 말이 되지 않소?”

“……!”

그 순간, 서도광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헉! 진 대인, 그게 정말이오?”

“만년삼왕이 존재하는 거였소?”

장강이룡도 잔뜩 놀란 눈으로 진우선과 서도광을 동시에 쳐다보았다.

“서 문주!”

진우선의 음성에 서도광은 간담이 서늘하고 심장에 비수가 박히는 느낌을 받았다.

눈 몇 번 깜빡이자, 온몸의 힘도 빠지고 등줄기와 이마에서 식은땀도 흐르기 시작했다.

숨이 막힐 듯한 기세였다.

“후우-. 맞소. 진 대인의 말이 맞소. 만년삼왕 하나와 천년설삼 셋을 얻었소. 염성방이.”

“그건 사실이오? 이제 서 문주를 바로 믿을 수가 없구려.”

“맞소. 사실이오. 내 목숨을 걸겠소.”

“알겠소. 그럼 잠시 그 목숨을 내가 보관해두지.”

***

신시(申時, 15~17시)에 접어들 때였다.

복구에 한창인 궁가장에 백 명의 손님이 찾아왔다. 정무맹 진양각의 무인들이었다.

혈색을 되찾은 냉군상이 대전 앞에서 그들을 반겨 맞았다. 오전에 사자검문에 다녀온 진우선의 보고를 들은 후부터 좀 쉰 모양이었다.

“다들 급히 와줘서 고맙소.”

“이양의 대주 냉하상이 내당주님을 뵙습니다.”

“십양의 대주 소무강이 인사를 드립니다.”

냉군상이 그들과 함께 대화하기 시작했다.

‘소 대협은 예상했지만, 분뢰쌍검이 냉 대협이셨을 줄이야.’

이양의 대주 분뢰쌍검 냉하상은 정무맹에 오며 철혈보의 사태를 함께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백하련이 작게 속삭였다.

“분뢰쌍검 냉 대협은 내당주님의 동생인데, 많이 안 닮았네요.”

“그랬습니까?”

“네. 형제예요.”

백하련의 말에 진우선이 그들 두 사람을 좀 더 자세히 쳐다보았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였다.

한데 그때, 진우선은 어디선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진우선이 뒤편으로 시선을 확 돌렸다.

그 순간, 한 사람의 얼굴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정 소저!’

작년에 호심당 이결제자 중 최고수였으며, 마치던 날에는 진우선에게서 오행진기의 향기까지도 느꼈던 정연서였다.

그때, 진우선과 정연서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진우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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