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56화 (156/225)

156.

#진법을 깨다 (2)

-진세가 바뀌었……

진우선의 목소리가 들리다 말았다.

천지사방에 어둠이 내려 소리마저 차단되는 모양이었다.

이미 보이는 것도, 어떤 냄새도 없었다. 옆에 있었던 진우선에게 손을 뻗어도 그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감을 잃었다! 이건 천지무로절 행진이겠구나!’

소무강이 단박에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검 상담을 꽉 움켜쥐며, 한령신공 십 성의 내력을 모두 끌어올렸다.

츠츠츠측-.

소무강을 중심으로 일 장 정도의 영역에서 수많은 물방울이 결빙되었다. 한령신공의 내력을 외부로 뿜으니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세빙뿐이다!’

세빙(細氷, 작은 얼음 결정)은 한령신공으로 빙기를 일으키게 되면 얻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소무강은 세빙을 통해 감각을 대체할 심산이었다.

비바람이 몰아쳐 감각을 혼란케 했던 연환대진과 달리, 천지무로 절행진은 모든 걸 차단하여 감각을 잃게 하는 까닭이었다.

그때였다.

저 앞에서 청색 장포를 걸친 서슬 퍼런 중년인이 나타나 불호령을 내렸다.

-우리의 원수를 잊지 말아라! 그전에는 생각조차 말아야 한다!

-한령신공을 대성하여, 빙령(氷靈)을 얻어라! 그게 아니면 복수는 꿈을 깨라!

-아비를 넘지 못하고서 어찌 저자를 상대할 수 있겠느냐! 얼른 수련해라. 빙령을 얻어야 해!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그가 나타났다. 당장 빙령을 끌어올려서 죽여-!

“아버지…….”

소무강이 저도 모르게 청색 장포의 중년인을 바라보며 말을 흘렸다.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이는 까닭이었다.

십 년 전에 그들의 거처를 습격해온 마교도에게 목숨을 잃은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분노가 확 치솟아 올랐다.

‘죽여야 해!’

바로 그 순간에, 핏빛 장삼(長衫)을 걸친 미친 승려가 나타났다.

-흐흐흐. 나를 죽일 수 있으면 죽여봐라!

-부자가 둘 다 별 볼일 없는 건 똑같군. 너도 아버지 곁으로 보내 주마.

-크크크. 갈 거냐? 가족들을 버리고 가는 거냐? 매정한 놈. 우리 천마교에서도 피붙이를 버리진 않는다.

-오라버니! 가지 말아요! 여기서도 힘을 합쳐 복수할 수 있어요.

뎅겅-!

혈삼(血衫)의 광승(狂僧)이 여동생의 목을 잘랐다.

아홉 살밖에 안 됐는데!

-크크크! 꼴 좋군. 이제 너희 혈족은 너만 남았다. 널 죽이고서 빙화를 차지해야겠어! 이제 빙화는 내 것이다-!

“끄아악-!”

소무강이 고통에 울부짖으며, 울분을 토해냈다.

-크크크!

미친 땡중은 어느새 온몸에 피를 잔뜩 묻힌 채, 아버지와 여동생의 시신을 마구 뜯어먹고 있었다.

‘혈불! 죽인다! 당장!’

피 끓는 복수심이 마구 불타올랐다.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소무강은 혈삼광승 혈불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검을 들었다.

쐐애액-!

상담에 빙기가 서늘하게 어렸다. 살갗을 찢을 듯한 냉기가 풀풀 날렸다.

이 검 ‘상담’은 혈불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든 검이었다.

상담을 내리그었다.

아니, 내리긋던 중!

‘하지만…… 세빙은 반응이 없어!’

-망설이는 거냐? 크크크. 나약한 놈. 그러니 도망을 쳤지.

혈불이 비웃었다.

-옜다, 쳐봐라.

혈불이 목을 내밀었다. 혈불의 목덜미가 훤히 보였다. 이건 숫제 죽어주겠다는 행동이었다.

심장이 요동쳤다. 당장 베지 않고 뭐하냐는 듯이 모든 혈맥을 들끓게 했다.

그러나 소무강은 상담을 내리긋지 못했다.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세빙은 여전히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건 환각(幻覺)이었다.

바닥에 죽어 있는 아버지와 여동생이 보이고, 역겨운 피 냄새가 나고, 혈불은 자꾸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이 모든 게 허상일 터였다.

“아아!”

소무강이 괴로움에 소리쳤다. 미칠 것 같은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바로 그 순간.

푸츠측-!

세빙이 일부 깨졌다.

그와 동시에 진우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 대협. 정신 차리십시오!”

진우선이 소무강의 검을 든 손목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순전한 기운을 흘려보냈다.

“아-!”

“조금만 늦었다면 소 대협의 정기신(精氣神)이 크게 상할 뻔했습니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으나 진정하십시오.”

“고맙소.”

소무강이 숨을 골랐다.

조금 전까지 섬뜩한 환영에 휘둘려서 온몸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기억과 죄책감이 뒤섞여 끔찍한 광경을 만들어낸 까닭이었다.

소무강이 심신을 가라앉히며 진우선을 보았다. 금빛 기운을 온몸에 두른 그를 보고 있자니, 순식간에 평안함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소무강이 느닷없이 외쳤다.

“진 대협! 이건 선천지기 아니오? 왜 내게 그걸…….”

“소 대협. 제 진원진기를 드린 게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특별한 무공을 익혔을 따름입니다.”

진우선이 단박에 소무강의 말을 자르고 설명했다.

그러나 소무강은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소 대협, 십양에 계신 분 중에 소 대협이 가장 급격히 심신이 흐트러지셨습니다. 이제 다른 분들도 구해올 테니,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시고 기운을 잘 머금어주십시오.”

“알겠소.”

진우선이 단호한 눈빛을 보이며 다른 이들을 언급하니, 소무강은 더 반박하지 못했다.

“조심하시오.”

“염려 마십시오.”

진우선이 그 말을 남기며 몸을 돌렸다.

소무강은 진우선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세빙의 영역 밖으로 나가는 순간,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 감각이 딱 여기까지 되돌려진 거구나.’

세빙의 영역에 진에 영향 받지 않는 선천지기의 힘이 잠시 흐르기 때문이었다.

그 점을 명심한 소무강이 주변을 경계하면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진 대협이 이 정도였을 줄이야! 정말 대단하군.’

한편.

‘이 진법은 오감을 제한하는구나.’

정연서는 차분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명확히 알았다.

-진세가 바뀌었……

종전에 진우선의 목소리가 희미해졌을 때, 이미 천지무로절행진에 들어와 버린 것을.

하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기화심상천력(氣化心象天力) 때문이었다.

기운을 느끼면 의식 속에 상이 맺혔다. 어떤 느낌이거나 형상 등이 뇌리에 떠올랐다.

이는 감각으로 전해지지 않아도 기운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니, 오감이 통제된다 한들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때 눈앞에서 한없이 넓은 등을 가진 노인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연서야. 잘 자라주었구나. 고맙다.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손녀다.

-홀로 자라느라 많이 힘들었을 텐데…… 할애비가 오래 살지 못해 미안하다.

자애로운 모습의 노인은 바로 어려서부터 유일한 가족이었던 조부 정인학이었다.

‘할아버지!’

정연서는 눈앞에 떠오른 허상을 무시하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뱀처럼 쭉 찢어진 눈을 가진 사악한 사내가 맞은편에서 일어났다.

-이토록 정순한 금기라니! 산악의 굳건함마저 느껴질 줄이야. 정말 대단해. 과연 금정대협이군.

-이봐, 영감. 내가 당신의 정순한 기운이 필요해졌어. 좋은 말 할 때 내놔!

-호오! 손녀야? 예닐곱 살밖에 안 된 거 같은데, 벌써 미색이 흐르기 시작하는군. 크크크!

‘장검평!’

그는 사파의 무리 가운데 손에 꼽히던 절대고수였다. 그리고 금정대협 정인학을 살해한 원수였다.

-이 아이는 안 된다!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지. 일단 내공부터 내놔 봐.

장검평이 정인학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정인학의 단전에서 황룡의 여의주 같은 구슬 하나가 떠올라 그의 손에 쥐어졌다. 정인학의 내단이었다.

-크윽! 네놈이!

-영감. 수십 년간 바른 마음으로 성실히 수련했군. 이런 사람이 천하에 다 있었어. 크크크. 하지만 내가 잘 쓸게.

-내가 죽어서라도 내 손녀만큼은 지킬 것이다!

-영감이 나를 막을 수나 있겠어? 미색이 이리 훌륭하게 자랐으니, 내가 첩으로는 삼아주지.

‘할아버지…….’

정연서가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렸다.

분노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건만, 허상인 걸 알기에 그녀는 동요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의 대화나 행동에서부터 진실과 거짓이 뒤죽박죽 섞여 있으니 마음이 요동칠 리 없었다.

-날 죽이고 싶지 않아? 해볼 테면 해봐.

-네 할아버지도 널 지켜주지 못해.

-차가운 얼굴로 너를 가려왔군. 미색이 이렇게 흘러넘쳐서 다들 욕정에 들끓었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가려도 나는 다 알지. 크크크.

장검평의 뱀 같은 얼굴이 너무나 역겨웠다.

‘더는 보고 싶지 않아!’

정연서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환각이 모두 사라졌다. 시각도, 청각도, 그 어떤 감각도 의식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녀의 의식은 기화심상천력의 세계인 까닭이었다.

이 특별한 기감은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능력이었다. 조부 정인학이 천력(天力)이라 이름 붙인 게 그래서였다.

천지무로절행진은 오감을 차단했을 뿐, 그녀의 마음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했다.

“아…….”

정연서가 한숨을 흘렸다.

가슴에 먹먹함이 남았다.

애초에 환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조부 정인학은 태어날 때 부모를 잃은 그녀가 평생에 유일하게 믿고 따랐던 사람이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나타났기에 좀 더 살펴봤을 뿐인데, 그 끝은 허탈감뿐이었다.

‘기운을 찾자.’

정연서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눈을 빛냈다.

바로 그 순간.

‘이 기운은……?’

다가오는 기운이 있었다.

대자연의 향기를 한꺼번에 풍기며, 나아가 산악처럼 굳건한 금기마저 전해져왔다.

‘할아버지를 닮았어. 아니, 그걸 넘어섰구나.’

생각을 정정하며, 기운의 주인을 떠올렸다.

그는 진우선이었다.

“정 소저. 괜찮습니까?”

예상대로 진우선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서 순전한 기운을 흘려보내며 물었다.

“네, 괜찮아요. 고마워요.”

정연서가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다 문득 느껴지는 기운에 화들짝 놀라 말했다.

“진 공자. 당신은 선천의 금룡도 품고 있었군요!”

“…….”

***

잠시 후.

진우선이 천지무로절행진에 빠진 열두 사람을 모두 데려왔다.

그들이 다시 십이금강진을 구축하자 서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 다들 무사하셨군요.”

“진 대협 덕분에 간신히 살았습니다. 수천의 귀신이 쫓아오고 있었는데, 때마침 진 대협이 구해주셨습니다.”

“그랬나? 나는 내가 죽였던 사마의 무리들이 모두 되살아나서 나를 공격했다네. 죽는 줄 알았는데 진 대협이 때마침 건져주었지.”

“진 대협. 감사하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십양의 무인들이 안도감을 느끼며 서로 말을 쏟아내더니, 진우선에게 감사를 전하는 것으로 대화가 귀결되었다.

그때, 소무강이 명령을 내렸다.

“다들 느꼈겠지만, 진 대협이 나눠준 이 힘은 비밀로 해라.”

“알겠습니다!”

“당연하지요, 대주님! 저희가 그 정도도 모르겠습니까?”

대원들이 명을 받드는 사이, 부대주 금모룡은 사근사근한 말투로 분위기를 녹였다.

“제가 그나마 대처할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천지무로절행진의 악명이 결코 허명이 아니었습니다.”

천지무로절행진은 과거에 극경의 고수마저 숨지게 했다는데, 진우선 역시 패왕금룡신공이 아니었다면 꽤 대처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지금도 십이금강진에 호심진기를 조금 불어넣고 있어 어둠 가운데서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가 연환대진에서 바로 천지무로절행진에 떨어졌는데, 정황을 보니 환사문에서 이 진법 근처에 저들의 중심축을 잡은 모양이었습니다.”

진우선이 차분히 설명하자 일행이 모두 주의 깊게 들었다.

“그러니 바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천지무로절행진은 십 장을 둘러쳤다고 하니, 저희가 여길 돌파하는 건 너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진 대협의 말이 참으로 타당하오. 근데 가능하겠소? 천지무로절행진이니 길이 없는 것 아니오?”

소무강이 진우선에게 물었다.

“다들 천지무로절행진에서 경험하셨겠지만, 이 진법은 오감을 상실한 채 살심이 끓어오르는 게 첫째고, 사방이 어둡고 생문이 쉬이 보이지 않는 게 둘째입니다.”

그 말에 소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선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기감이 뛰어난 정 소저와 이야기해보니, 방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 따라오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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