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60화 (160/225)

160.

#안정과 변화 (2)

“정 소저의 말대로라면, 금정대협께서 겪으신 일은 제가 본 칠성홍옥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진우선이 동굴에서 홍옥기를 발견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칠대악인의 내단, 칠성홍옥이 허공에 구슬처럼 유형화되어 뭉쳐 있었다.

“금정천악선공을 깊이 익히셨다고 들었으니, 금기의 내단이었겠군요.”

“맞아요.”

이를테면 금옥기(金玉氣)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진 공자처럼 등봉조극에 오르시진 못했어요.”

“그럼 장검평은 어땠습니까?”

“제 생각에는 극사경의 무인이었던 거 같아요. 하지만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어서 확실하진 않아요.”

“십 년간 사파의 최고수였는데도 알려진 바가 적습니까?”

“나도 그건 의문이에요. 근데 계속 수소문해 봐도 들려오는 게 별로 없었어요. 그는 목격자마저 죽이며 행적을 남기지 않기로 악명이 높았고, 그때는 사도련도 결성되기 전이라 그런 것 같아요.”

사도련은 십 년 전에 탄생했다.

극사경의 무인 섭무악이 강호에 일대파란을 일으키며 등장했고, 당시 구심점이 필요했던 사파와 흑도의 무인들이 빠르게 그의 휘하로 결집했다.

그 이전은 사파와 흑도가 중원 곳곳에서 각자도생하던 시기였다. 그러니 사파 무인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정 소저도 그간 쉽지 않았겠군요.”

끄덕.

굳은 표정의 정연서가 고갯짓으로만 대답했다.

진우선이 숨을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장검평과의 일이 칠성홍옥대법과 유사하다는 건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대법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진 게 아니었거든요.”

“아! 그건 여 숙부께 들었어요. 백혜원의 여의량 책사님을 의숙이라고 불러요. 할아버지를 많이 따르셨거든요.”

여의량이 할아버지와 의형제라면 숙조부가 맞으나, 아버지뻘의 나이라 숙부처럼 부른 모양이었다.

아무튼, 진우선은 여의량이 말을 전했다고 생각하자 단박에 이 상황이 이해되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사실 칠성홍옥의 모습을 직접 본 게 저뿐이라서 의문이었습니다.”

“여 숙부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이번에 진 공자를 만났을 때 물어볼지 말지 생각이 들었죠.”

그러다 천지무로절행진에서 내키지 않은 환상을 보았다. 그게 물어 보기로 한 동기였다.

“정 소저, 혹시 장검평과의 일은 직접 보신 것입니까?”

“네,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저를 지키며 돌아가셨고, 그때의 기억이 제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버렸어요.”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진우선은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정연서의 모습에서 잠시 연민을 느꼈다. 그러더니 자기 생각을 꺼내기 시작했다.

“정 소저, 칠성홍옥대법은 칠대악인의 내단을 칠사로 뽑힌 이들에게 전하는 술법이었습니다. 사마광후는 술법의 대가여서, 그들의 기운을 하나로 녹여내어 허공에 띄운 다음 나눠주려 했었습니다.”

“그때 막으셨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도련의 고수들을 겪으며, 이와 비슷했던 게 또 있습니다. 바로 사도련주 섭무악이 펼쳤던 무공입니다.”

“……!”

정연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우선이 섭무악과의 격전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섭무악도 장검평처럼 극사경의 무인이었습니다. 그는 바윗덩이만 한 거대한 핏빛 구슬을 날리며 공격했습니다. 그건 사기의 정수였는데, 구슬에 담긴 사악한 살기가 섬뜩할 정도였습니다.”

“섭무악의 무공도 그랬군요! 처음 들어요.”

“그렇습니다. 한데 저는 지금 섭무악의 무공이 장검평과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왜죠?”

“일단 장검평이 극사경이라고 하면, 그와 같은 무위를 보여줄 수 있는 건 섭무악밖에 없습니다. 사도련에서 지금 알려진 극사경의 무인이 그뿐이기 때문입니다.”

정연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그 외에는 제가 겪었던 사도의 무인 중 그와 유사한 무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정 소저도 여태껏 들은 바가 없으니 제게 물어 본 것이지 않습니까?”

진우선은 또 다른 극사경의 무인 적문강에 대해서는 연관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별종이거니와, 이런 방식의 무공도 쓰지 않았었다.

“맞아요. 그랬어요.”

“그리고…….”

진우선이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섭무악은 사황의 무학을 이었습니다. 그는 극사지체여서 사황을 넘어섰다고 하더군요. 또한, 사황의 맹신도라던 칠대악인이 칠성홍 옥이라는 내단을 남겼으니, 어쩌면 내력을 구슬처럼 이용하는 건 사황의 흔적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정연서가 당황하여 뒤늦게 대답했다. 놀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억측일 수 있으나, 달리 보면 사도의 무학 중 특별한 형태라 할 수 있었다.

[허허-! 이런 관점은 나 역시도 생각지 못했었다. 하지만 충분히 일리가 있구나. 섭무악이 펼쳤던 사사지옥혈공은 확실히 혈옥을 다루는 무공이었지. 사황의 진신절기이기도 했었고 말이야.]

검노야도 진우선의 추측에 덩달아 놀랐다.

진우선 역시 처음 듣는 사황의 무공에 섬찟했다.

‘혈옥이라! 이름 한 번 무섭군요. 그런 이름이 있을 정도면 사황의 흔적이 틀림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겠구나.]

이 순간!

진우선이 전율에 젖어 한 차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강한 확신과 함께 묘한 감각이 온몸을 꿰뚫고 지나간 까닭이었다.

그때, 정연서가 이해한 바를 정리했다.

“그럼 진 공자는 장검평 역시 사황의 무학을 이었고, 섭무악과 모종의 관계일 거라는 생각이시군요.”

“그렇습니다. 다들 혈옥을 다루고 있으니 틀림없습니다.”

“혈옥이라…… 그들답군요.”

정연서가 공감했다.

그 순간, 진우선이 말을 망설이다가 물었다.

“정 소저. 혹시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도 됩니까?”

“조부님의 명예만 훼손치 않는다면 상관없어요. 근데 누구에게 찾아가려는 건가요?”

“내당의 제갈 소저입니다. 그녀는 강호의 대소사를 두루 꿰고 있더군요.”

정연서가 잠시 생각하더니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요.”

진우선이 대전에서 제갈영을 데리고 정자로 왔다.

“제갈 소저. 시간을 내줘서 고맙습니다.”

“어차피 재미없었어요. 이런 연회는 원래 알맹이가 없으니까요. 배나 채우고 있었죠.”

제갈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더니, 정자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연서에게 인사를 건넸다.

“연서야. 오랜만이야.”

“그러게. 잘 지냈어?”

호심당 이결제자로 이 년을 함께 보냈던 사이지만, 둘은 어색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별로 친해 보이지 않았다.

그에 진우선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얼른 화제를 꺼냈다.

“제갈 소저. 아까 살짝 말씀드렸지만, 장검평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세요.”

“진 공자, 정확히 어떤 걸 알고 싶나요? 금정대협이 그에게 숨을 거둔 걸 궁금해하는 건 아닐 텐데요.”

제갈영이 진우선을 보며 다소 냉소적으로 말을 꺼냈다.

하지만 진우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얼른 본론으로 들어갔다.

“장검평의 무공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리고 어찌하여 종적이 사라졌을까요?”

“무공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지금 사도련의 오대사파와 두루 가까웠던 거 같아요. 교류가 꽤 있었거든요. 사마세가 같은 사파의 유력한 가문들과도 사이가 좋았고요.”

“특이하다고 할 만한 건 없었습니까?”

“강호대소사가 다 그렇다시피 정파와 사파가 자주 충돌하곤 했죠. 장검평은 추혼사검(追魂邪劍)이라 불릴 정도로 한 번 적으로 삼은 이들과는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고요. 그래서 그를 상대한 이들은 대부분 숨을 거뒀고, 십 년간 활동했음에도 이렇다 할 만한 게 없어요.”

제갈영이 다소 안타깝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럼 강호에서 사라진 건 어찌된 일입니까?”

“금정대협께서 돌아가셨을 때, 숭의각에서 맹렬하게 뒤쫓았어요. 그때 조부님도 계셨고요. 하지만 장검평은 포위망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렸다고 들었어요. 그 후로 강호에 나타나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사도련이 나타나니, 아예 잊혀갔어요.”

정무맹에서도 독고월이 분전했을 시점이었다.

그로 인해 금정대협과 장검평의 일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금세 잊혔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의문이긴 하네요. 장검평이 맹에 침투해 탈취해간 것도 있으니 갑자기 강호를 떠날 리도 없는데,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제갈영이 도리어 물었다.

그에 진우선이 딱딱한 어조로 따지듯이 반문했다.

“그건 제가 물어본 것이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죠.”

제갈영이 진우선에게 해맑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조부님은 극사경의 무인이었던 장검평이니 어디 숨어서 폐관수련을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셨어요. 그 후로 사도련이 태동하니 더는 신경 쓸 대상이 아니었고요.”

“그랬군요.”

진우선이 다소 실망하는 기색을 보일 때, 제갈영이 말을 이었다.

“재밌는 소문도 있었어요. 어떤 사파 고수가 산으로 올라갔다는 둥, 신선이 되었다는 둥 했었죠. 그래서 사람들이 암자로 올라가 보니, 아무 흔적도 없더래요. 암자도 불타버렸고요. 물론 이 소문도 사도련이 생긴 후에 없어졌어요.”

언뜻 보면 아무 연관이 없는 듯하나, 극사경의 무인이라면 그럴 듯한 일이기도 했다.

“근데 사공을 익혀 신선이 되면 사선(邪仙)일 텐데, 그게 말이 되겠어요? 도가에서도 선도에 들기가 극히 어려운데, 사파에서 신선이 된다니 말도 안 되죠.”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갈영에게 물었다.

“제갈 소저. 그렇다면 소저가 생각하기에는 장검평이 어떻게 했을까요?”

“죽지는 않았을 거예요. 손해 보기 싫어하고, 제 목숨을 그리 아끼는 사파 무인들이잖아요. 하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겠네요.”

제갈영이 돌아갔다.

정연서가 진우선에게 작게 미소 지으며 말을 꺼냈다.

“진 공자. 덕분에 많은 걸 알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정 소저. 미안합니다. 이리 불편해할 줄 알았다면 제갈 소저를 부르지 말걸 그랬어요.”

“아니에요. 유익했어요. 적어도 장검평을 계속 뒤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겠구나 싶었으니까요.”

“그럼?”

“진 공자의 생각이 타당하다고 느꼈어요. 사황의 무학과 혈옥, 섭무악 등에 대해서 알아보려구요. 그러려면 실력도 훨씬 더 키워야겠죠.”

정연서가 눈을 빛냈다. 그녀의 눈빛에서 단호한 의지가 절절히 느껴졌다.

“사도련주마저 상대하실 생각이시군요. 저도 도울 수 있는 한 돕겠습니다.”

“진 공자가 도와주면 고맙겠지만, 괜찮아요. 할아버지의 복수는 나의 일이니까요. 진 공자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

정연서가 돌아간 이후, 진우선은 연회에 돌아가지 않았다.

‘금정대협은 선도의 공부를 익혔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내력은 일반적인 내공과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곰곰이 숙고해보니, 꽤 생각해볼 거리였다.

[우선아. 그의 내력은 아마도 선단(仙丹)의 성질을 띠고 있었을 게다. 하지만 등봉조극에 오르지 못했다 하니, 안타깝게도 훌륭한 선단은 아니었겠구나.]

‘그래도 사선의 소문이 너무 허황한 건 아니었을 듯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 혹은 새로운 기운을 품을 수도 있었을 테고. 선인이란 모름지기 육체의 한계를 벗어던진 이들을 일컬으니, 선단을 받아들이는 건 영약이나 영단과는 또 다를 수 있겠지.]

‘그렇군요.’

선단의 효능을 쉬이 짐작할 수 없는데, 인간의 몸에서 선단을 뽑아갔다면 더욱 예상키 어려웠다.

진우선의 생각이 계속 이어졌다.

그때였다.

“진 대협. 종전까지 정 무사와 무슨 일 있었소? 그녀의 기백이 평소보다 훨씬 넘쳐 보이더군.”

“아! 소 대협!”

소무강이 진우선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이 정자에 나란히 앉았다.

“소 대협. 정 소저는 마음속에 아픔이 있었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기억이 있더군요.”

“그랬군. 그녀는 타인에게 자주 경계심을 보이곤 했소. 같은 대원들끼리도 말이오.”

“사람을 어려워하는데다가 기감도 발달해서 그럴 겁니다.”

“맞소. 천지무로절행진에서 나도 보았지. 그래서 그녀의 무공이 그리 뛰어났겠지만, 다른 사람의 기운도 느껴져 힘든 모양이오.”

소무강은 천지무로절행진을 빠져나올 때, 정연서가 오감을 무시하고서 기감에만 집중할 수 있을 만큼 특별한 걸 느꼈었다.

이는 무공의 발전에 좋은 영향을 주었으나, 반대로 사람을 대하는 데는 어려울 수 있었다.

“대원들의 일거수일투족도 다 보고 계시니, 소 대협께선 좋은 대주이셨군요.”

“그리 말해주어 고맙소.”

진우선은 소무강이 이렇게 물으러 온 것부터 좋게 생각되고 있었다.

“그런데 소 대협,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오.”

뜸을 들이는 진우선의 모습에 소무강이 다소 경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 대협, 저는 일전에 빙화곡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한데 소 대협의 무공이 빙화곡주님과 흡사했습니다. 혹시 빙화곡에서 오셨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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