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62화 (162/225)

162.

#안정과 변화 (4)

정연서는 근처 다관에 들어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 공자. 긴히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이른 아침부터 진 공자를 찾아왔어요.”

“그랬군요. 무엇입니까?”

“진 공자.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진 공자에게서 느껴지는 산악의 신령한 기운이 할아버지의 향기와 닮았어요.”

“그래서 제 금기가 달라졌던 걸 바로 알아채신 거였군요!”

진우선이 정연서의 말을 대번에 이해했다.

오행진기를 이룬 건 변함없는데도, 만년괴암의 금기를 품은 걸 정연서가 알아챈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맞아요. 할아버지 손에 자라서 할아버지를 많이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바로 알 수 있었어요.”

정연서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신 모양이었다. 진우선은 그에 대해 더 묻지 않았다.

그때, 정연서가 품속에서 한 쌍의 옥가락지를 꺼내어 극진한 손길로 내밀었다.

“이건 제가 다섯 살 때 할아버지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거예요.”

“빛깔이 참 맑네요. 엄청 귀해 보여요.”

“좋은 거로 주셨어요. 어렸을 땐 가치를 잘 몰랐지만.”

“그런데 이걸 왜?”

진우선이 정연서에게 물었다.

그녀가 어색한 눈빛을 보이며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진 공자. 실례되는 말인 줄 알지만, 이 옥 가락지에 그 기운을 담아줄 수 있을까요? 꼭 부탁드리고 싶어요.”

“아-!”

진우선이 탄성을 흘렸다. 기감이 예민한 그녀가 할아버지의 향기를 느끼고 싶은 까닭이리라.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흩어져버릴 텐데 괜찮나요?”

“그건 어쩔 수 없죠.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진우선이 옥 가락지를 집어 들고, 만년괴암의 금기를 조금 흘려 넣었다.

옥 가락지가 금기를 한없이 오랫동안 머금고 있도록 하지는 못했다. 그러려면 애초부터 특별하거나, 지금이라도 특별하게 만들거나, 이후에 오랫동안 사용하여 길들여야만 했다.

진우선이 옥 가락지를 정연서에게 돌려주었다.

정연서가 손바닥에 올려놓고 조심스레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고마워요. 잘 느껴져요. 마음이 편해지네요.”

“다행입니다.”

정연서가 잠시 옥 가락지를 느끼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이리 부탁드린 건…… 천지무로절행진에서 할아버지를 봤기 때문이에요. 돌아가실 때의 모습을 봤거든요.”

목소리가 다소 떨리고 있었다.

그로 인해 천지무로절행진에서 끔찍한 광경을 마주하며 그녀의 상심이 얼마나 컸는지 느껴졌다.

“이런…… 정말 마음 아프셨겠네요.”

“사실 제가 욕심부린 탓이에요. 저는 그 환상을 일찌감치 무시할 수 있었는데,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여서 차마 그러지 못했거든요.”

“아닙니다. 그게 어떻게 욕심이겠습니까? 저도 이따금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나니까요.”

“진 공자도 비슷한 상처가 있었군요.”

진우선의 말에 정연서가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정적이 흘렀다.

다관에 차 마시는 소리만 종종 퍼졌다.

***

진우선이 접객당에 돌아와 백하련을 찾았다.

“진 무사님. 서 문주가 이 각 안에는 올 것 같습니다. 좀전에 염성현에 도착했다고 하더군요.”

“백 책사님께서 혼자 준비하고 계셨군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어젯밤에 중요한 건 전부 의논했으니까요.”

하지만 괜찮은 게 아닌 듯했다.

진우선은 백하련의 음성이 다소 쌀쌀맞게 느껴지고 있었다.

“정 소저 때문입니까?”

“그럴 리가요. 저는 다른 사람의 사적인 일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백하련이 살짝 웃었다. 진우선은 그 미소가 뭔가 서늘하다고 느꼈으나, 곧 사라졌다.

백하련은 평소처럼 진우선에게 말을 이었다.

“그럼 도착하기 전에 이것들만 한 번 더 살펴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사자검문주 서도광이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고, 진우선과 백하련이 대전으로 향했다.

“서 문주, 반갑소.”

“진 대인, 여기서 또 뵙는구려. 엄청난 실력을 보이셨다 들었소. 역시 대단하시오.”

서도광이 넉살 좋게 웃으며 번지르르하게 말문을 열었다.

“서 문주는 참으로 비위도 좋은 것 같소. 내게 목숨을 걸고서 이리 당당하게 들어오다니.”

“진 대인, 뭔가 오해가 있으시오. 만년삼왕과 천년설삼의 일이라면, 나는 그때 아는 바를 다 말했소.”

“그렇소? 정말이오?”

“정말이라오. 그때 드린 말씀에는 거짓이 일말도 섞이지 않았소. 설마 그게 아니었소?”

대화하던 서도광의 눈에 이채가 슬쩍 어렸다. 하지만 진우선은 미동조차 없이 되물었다.

“본인이 잘 알 텐데, 왜 그걸 나한테 묻는 거요?”

“나는 사실만 말했었소.”

“일단은 믿어보겠소. 그때 목숨을 맡겼으니 영영 나를 피할까 싶었는데, 이리 당당히 올 줄 몰랐던 거요.”

“진 대인. 오늘은 결자해지하기 위해서요. 천하에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도 있더이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오.”

“역시 나를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군.”

“……지금도 편치는 않소.”

기세를 굽히는 서도광의 모습에, 진우선은 한 걸음 물러섰다.

그에 백하련이 나섰다.

“서 문주님. 염성방의 물자를 가져오신 것과 별개로 저희를 만나고 싶다고 들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책사님도 아시겠지만, 환사문에서 온 악범승 군사의 시신이라도 요청하기 위해서요. 이번에 내가 과욕을 부린 탓에 련에까지 피해를 준 상황이라…….”

백하련과 서도광이 협상을 하기 시작했다.

진우선은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백하련의 의도대로 중간중간에 몇 마디 거들었다.

그 결과, 서도광은 기가 죽은 채로 협상을 끝마쳤다.

얼른 대전을 빠져나가려는 서도광에게 진우선이 말을 걸었다.

“서 문주. 내가 부탁이 있소.”

“말씀하시오.”

“강소성의 풍운은 이제 끝났다고 믿어도 되겠소?”

“진 대인,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

“그럼 모르시겠소?”

진우선이 차분하게 되물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서도광은 서슬 퍼런 불호령이 떨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서도광이 힘없이 웃으며 의사를 밝혔다.

“진 대인. 이제 강소삼정의 두 곳인 궁가장과 염성방이 정무맹에 협조하고 있지 않소? 우리 사자검문이 먼저 그들을 도발하지는 않을 거요.”

“그렇구려. 그럼 끝났다고 믿고 있겠소. 그리고 귀문이 연관되었거나, 가까운 곳에 무슨 일이 생기면 잘 수습해주시오.”

“허허-. 알겠소.”

서도광이 대답을 한 뒤에 바로 자취를 감췄다.

한편.

서도광과의 일을 끝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백하련은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예설아. 쉽지 않겠네. 분발해야겠다.’

평소에 사예설과 가까웠던 그녀는 염성방에 오면서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진우선. 정연서.’

아직은 두 사람 사이에 큰일이 생긴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것이라, 절로 경계심이 일어나고 있었다.

‘정 소저의 눈빛이 참 묘했어. 도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백하련은 염성방으로 출발할 때 정연서가 보였던 눈빛이 아직도 마음에 걸렸다.

그러면서 그동안 함께 해온 진우선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진우선, 그는 언제든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겠구나.’

그녀의 생각은 항상 진우선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

다음날이었다.

뜻밖의 사람들이 진우선을 찾아왔다.

교중학과 동곽소였다.

진우선이 두 사람과 함께 다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진 대협, 이분은 만유노사 동곽 선생이시오. 진 대협을 긴히 뵙고 싶다 하여 모시고 왔소.”

“진우선입니다. 반갑습니다.”

“동곽소라고 하오. 신인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오.”

백발이 성성한 동곽소가 진우선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신인이라니요. 과찬이십니다.”

“신인이 맞소. 천지무로절행진을 나설 수 있는 사람인데, 어찌 신인이 아니겠소?”

“동곽 선생께서는 다 보셨던 모양이군요.”

“진법을 지켜야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소. 양해해주시오. 그리고 나만 보았으니 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오.”

“그럼 천지무로절행진을 혼자서 운용하신 겁니까?”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놀라서 물었다.

동곽소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렇소.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우리 가문의 진법은 개인의 역량에 맡겨져 있소!”

“아-!”

진우선이 너무나도 놀라 장탄성을 흘렸다.

인제 보니 천문환상미로대진을 펼친 악범승 무리는 동곽소와 아예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때, 동곽소가 교중학에게 진중하게 부탁했다.

“교 대협, 혹시 기막을 펼쳐주실 수 있으십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동곽 선생의 말은 항상 귀하고 무겁기에, 진즉에 펼치고 있었소.”

“감사합니다.”

진우선이 동곽소에게로 말을 건넸다.

“그럼 절대천뇌의 가문이신 거군요.”

“맞소. 백 년 전 절대천뇌라 불리신 동방무궁이 내 증조부가 되시오. 그때 진법을 펼친 이후로 강호의 공분을 깊이 샀기에, 증조부께서는 동곽이라 성을 바꾸고 세상에서 숨으셨소.”

“저야말로 은거기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허허. 내가 그리 불릴 위인이나 되겠소?”

하지만 동곽소는 자신의 말과 다르게 진우선의 표현에 흐뭇해하고 있었다.

“아무튼, 내가 진 대협을 긴히 찾은 것은 물어보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오. 혹시 폐가 되는 게 아니라면 무공의 연원을 내가 말해도 되겠소?”

“그러셔도 괜찮습니다만, 저는 천지무로절행진에서 무공을 펼친 적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신 것인지요?”

“증조부님이 남기신 책들이 가문에 있소. 진 대협은 그때 금빛 기운을 두르지 않았소? 나는 그게 패왕금룡신공이라 생각하는데, 혹시 맞소?”

“아- 맞습니다.”

진우선이 잔뜩 놀란 눈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알아본 이가 있을 줄이야.

“역시 그랬구려. 확인해주어서 고맙소. 드디어 내가 증조부님의 불가해 중 하나를 해결하게 되었구려. 허허허.”

동곽소가 숙원을 하나 이룬 듯이 활짝 웃어젖혔다.

“진 대협. 지금 말하는 패왕금룡 신공이 무천 조문신 대협의 무공이 맞소? 내가 알고 있는 바는 그런데, 이게 정말이오?”

“맞습니다.”

“허허허.”

교중학이 눈을 부릅뜨며 확인하더니, 이내 한탄을 흘렸다.

“진 대협, 나와 싸울 때는 금빛 기운이 없었잖소. 그럼 나에게는 진신절기조차 쓰지 않은 것이구려. 내가 갈 길이 멀었구나.”

“그건 아닙니다. 저는 검을 깊게 익혔습니다. 운 좋게 조문신 대협의 무공과 인연이 닿은 것일 뿐입니다.”

“하긴, 나조차 넘볼 수 없었던 진 대협의 검법인데, 진신절기가 아니면 말이 되지 않지.”

교중학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 대협의 검은 정말 매서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극경에 오르실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허허. 등봉조극의 무인에게 그리 들으니 다행이구려. 사실 이참에 염성방을 떠나 검을 수련하며 강호를 주유할 생각이오.”

“큰 결심을 하셨군요!”

“서회상단의 차 단주가 아들을 가르쳐달라며 나를 초대했는데, 이제 그 아이는 더 없는 까닭이오. 또한, 내 검이 부족하다는 것도 느꼈소. 극에 오르면 천지간의 기운과 통한다 들었는데, 그랬으면 막을 수 있었지 않겠소?”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불가능은 아니라는 말이구려. 허허.”

진우선의 말에 교중학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곽소가 진우선을 나직하게 부르며 대화를 이어갔다.

“진 대협, 내일 떠나신다고 들었소. 어디로 가시는지 궁금하오.”

“이제 태산으로 갈 예정입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과연 그랬구려.”

동곽소가 입을 일(一)자로 다물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잠시 후,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 대협, 의기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오?”

“의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구려. 진 대협은 태산에서 귀인을 만나실 거요. 나는 조금 전까지 그를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 싶었는데, 어쩌면 만나는 게 진 대협의 길일 수도 있겠소.”

“무슨 길이기에 그렇습니까?”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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