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75화 (175/225)

175.

#구지의 주인 (1)

릉하동 내부에는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뚜욱-. 뚜욱-.

어두운 가운데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사방에 넓게 퍼졌다. 동혈이 깊고 넓은 모양이었다.

그 가운데 야명주의 작은 빛 하나로 앞서가는 두 사내가 있었다. 그들은 거침없이 쭉쭉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진우선과 용천월이 그런 두 사내를 은밀히 뒤따랐다. 몸을 가볍게 하고 발소리를 죽인 채 극히 조심 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에 더하여 진우선은 행여나 작은 인기척이라도 흐를까 싶어 기막도 펼친 상황이었다.

그렇게 일 각 정도 들어갔을 때였다.

용천월이 진우선에게 전음을 보냈다.

[계속 내리막이군요. 어디까지 내려가는 걸까요?]

[목적지가 그리 멀진 않은 것 같습니다. 마라혈기의 기운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설마 그게 느껴지셨습니까? 정말 진 무사님의 항마공은 특별하군요.]

용천월의 놀란 기색이 전음 속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진우선의 항마공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항마공들과 남다른 까닭이었다.

그때, 앞서가는 두 사람이 멈춰 섰다.

진우선과 용천월 역시 곧장 걸음을 멈춘 채, 유심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저곳에 진법이 있습니다. 기운의 흐름이 상당히 인위적입니다.]

[저들이 무언가 나눠 가지고서 들어가려는 모양입니다. 저게 있어야만 무난히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용천월은 또 놀라는 마음이 있었으나, 이제는 진우선이니 으레 그러하다고 생각하며 별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우선의 의견을 근간으로 하여 자기 생각을 덧붙였다.

[저 역시 그런 방식으로 보입니다. 저건 옥 같은데, 마기가 담겨 있습니다.]

[특별한 기운에만 길을 열어주는 방식이겠군요. 그럼 저긴 어떻게 들어가야 할까요?]

용천월은 진우선에게 답이 있을 거로 생각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는 어느새 진우선에게 묻는 방식이 바뀌어 있었다.

[어렵지 않습니다. 기운의 흐름이 내부를 봉쇄하는 형국인데, 옥돌에 담긴 마기에 반응하고 있으니 틈이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흐름을 따라가면 될 겁니다.]

[그런 수가 있었군요! 알겠습니다.]

용천월이 어둠 속에서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으나, 속마음은 달랐다.

‘그건 진 무사님이나 가능한 방법일 겁니다.’

하지만 진우선이 용천월의 속을 알 리 없었다.

진우선은 오직 어두운 동혈 속에, 전혀 알아채지 못하게 설치된 진법만을 꿰뚫을 듯이 노려볼 뿐이었다.

스윽-.

이윽고 두 사내가 진법으로 들어갔다.

진우선과 용천월이 얼른 몸을 일으켜 진법 앞으로 다가갔다.

진우선이 잠시 진법의 기운을 헤아리는 사이, 용천월이 시각을 제외한 감각에 모든 정신을 집중해 보았다.

[동굴 속 공기의 흐름은 여전히 변화가 없습니다. 벽처럼 막혀 있는 모양입니다.]

[맞습니다. 아마 이 주변이 밝았더라도 진법은 동굴 벽과 똑같이 보였을 겁니다.]

[설마 지금 보이시는 겁니까?]

[다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

용천월이 저도 모르게 전음으로 탄성을 보냈다.

하지만 진우선은 그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명토의 기운으로 뜨인 혜안(慧眼) 때문이었다.

‘혜안은 현상을 넘어 이치를 보는구나!’

진우선은 혜안의 능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릉하동 깊숙한 곳에 펼쳐진 진법이 사람의 감각을 완벽히 속이지만, 혜안마저 가리진 못하고 있었다.

[용 무사님. 기운을 단단히 끌어올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안에서 엄청난 마기가 들끓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용천월이 내력을 모두 끌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호심공도 한껏 운용했다.

그때였다.

지저의 망혼이 토해내는 괴기한 음성이 심령을 아찔하게 뒤흔들었다.

-후후후후!

그 순간, 진우선이 용천월의 손목을 잡고서 철벽의 금기를 조금 건넸다.

[염라마군이 우리의 접근을 느끼고 있나 봅니다. 기이하군요.]

[저 섬찟한 게 염라마군의 음성이었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 소리가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얼른 들어가 보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기운을 조금 더 나눠주실 수 있겠습니까?]

용천월이 조심스레 부탁하자 진우선이 금기를 밀어 넣었다.

용천월이 그 기운을 조심스럽게 품더니, 진우선에게 붙잡힌 손목을 빼내려 했다.

한데 진우선은 그대로 놔주지 않고, 항마의 힘이 담긴 수기와 이화의 힘이 담긴 화기마저 건네주었다.

[이 안에서는 호심공만으로 쉽지 않을 것 같아서 다른 기운들도 나눠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금기에 이어 수기와 화기까지 전달하는 데 일 각이 걸렸다.

[용 무사님, 그럼 이제 들어가겠습니다.]

[네.]

***

독괴가 살쾡이처럼 날카로운 얼굴로 조금 전에 당도한 두 사내를 노려보았다.

“꼬리를 달고 온 모양이오!”

“그럴 리가 없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그렇습니다. 소인 역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구유마라종을 찾아온 청의사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를 데리고 온 규염의 사내 역시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손사래치고 있었다.

“마군께서 탄식하신 걸 못 들었소? 비록 육은 잠들어 계시나, 영은 깨어 계셔서 이곳의 일을 다 알고 계신단 말이오!”

“하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청의사내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상황이 꼬였군.”

“대체 누가 여기를!”

청의사내가 당황한 눈빛을 보였다.

그때였다.

-우우우웅-!

지저에서 깊은 떨림이 올라왔다.

독괴의 눈에서 기묘한 흑광이 흐르더니, 이내 종전의 눈빛으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제길! 진우선인 모양이군. 극경의 고수라면 아마도 그일 테지.”

“진우선! 그가 여길 어떻게…….”

청의 사내가 노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독괴가 냉소적인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되었소. 일이 벌어졌는데 어떻게 된 건지 지금 생각해봤자 득 될 게 없지. 일단 마군께서 그들을 삼처(三處)로 보낼 거라 하셨으니, 아무리 그라도 빠져나오기가 마냥 쉽지는 않을 거요. 청안 당신은 얼른 용건부터 말하시오.”

“끄응-. 알겠소.”

청안(靑雁)은 흑암무영종의 고수로, 종주인 흑야(黑夜)의 두 심복 중 하나였다. 오늘 이곳을 찾은 건 흑야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지존께서 절대무공의 연성이 거의 끝에 다다르셨다고 하오. 그래서 다가오는 원단에는 오대종주를 직접 보고 싶다고 하셨소.”

지존은 절대천마를 일컫는 말이었다.

“지존께서? 알겠소. 원단이면, 두세 달 남았군.”

독괴가 청안의 말을 듣자 단박에 자신의 감정을 죽인 채, 공경하는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군께서 삼문협의 대계가 다 준비되었다고 하셨소.”

“그렇군. 그럼 시기를 언제로 잡고 있소?”

“그대들이 오면 시작이오.”

독괴가 청안의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알겠소. 닷새 후에 알려주겠소. 그때쯤이면 정확히 알 수 있을 테니.”

“오! 축하하오. 대공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오.”

청안은 구유마라종이 십년지계를 이루는 날이 코앞인 걸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듣게 되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독괴는 청안이 웃는 게 꼴 보기 싫은지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대공은 이미 끝났소. 당신이 꼬리를 달고 와서 시간이 걸리는 것일 뿐!”

“미안하오.”

“일단 꼬리부터 잘라내고 봅시다.”

독괴가 그리 말하더니, 청안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어둠이 드리워진 동혈로 걸음을 옮겼다.

***

쑤욱!

진우선과 용천월이 진법에 들어섰다.

그러자 음산하고 축축한 물기가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우웁-.’

용천월은 단숨에 목까지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으며, 호흡을 멈췄다. 짙은 마기가 불쾌하게 부딪쳐오고 있었다. 속이 너무 거북했다.

‘마치 마기로 가득한 물속을 뚫고 가는 것 같아! 항마의 기운을 나눠 받았는데도 이 정도라니!’

호심공 정도로는 얼마 버티지도 못했을 터였다.

용천월이 앞장선 진우선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진우선은 그렇게 용천월이 따라 올 수 있도록 다섯 걸음을 나아갔다.

용천월이 진우선의 뒤를 바짝 붙어가니 짙은 마기의 벽이 곧 끝났다.

짙은 안개 속에서 횃불이 희미하게 빛나는 듯이 사방이 밝아져 왔다.

하지만 빛과 함께 온몸을 단박에 갉아먹고 숨통을 끊을 듯한 치명적인 독기가 덮쳐왔다. 열독이 오르는 듯 피부가 심히 화끈거렸다.

그때였다.

화아악-!

용천월의 내부에서도 뜨거운 기운이 타올랐다.

조금 전 진우선에게서 건네받은 화기가 치솟아 오르며 몸속에 침투한 독기를 태워버리고 있었다.

때마침 진우선이 걸음을 멈췄다.

용천월이 잠시 내부를 다스린 후, 진우선의 옆에 서며 전음을 보냈다.

[진법이 극악하군요. 극독마저 품고 있다니요.]

[여기는 진법 속이 아닙니다. 진법은 내외의 세계를 완벽히 차단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우리가 방금 뚫고 나왔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이 독기는 무엇입니까?]

[마라혈독과 비슷하나, 그 독기보다 훨씬 진합니다. 아무래도 염라마군에게로 가는 첫 단계인 듯합니다.]

진우선의 대답에 용천월이 주위를 둘러보며 강한 의문을 드러냈다.

[그럼 그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아마 바로 중심부로 들어갔을 겁니다. 염라마군이 우리에게는 생문을 이곳으로 열어두었습니다.]

[손님 대접을 확실히 하는군요.]

용천월의 말에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진우선이 새하얀 이채가 흐르는 눈으로 희뿌연 독무(毒霧)가 잔뜩 낀 전방을 한참동안 둘러보았다.

만독지처(萬毒之處)였다.

잠시 후 굳은 표정으로 용천월에게 전음을 건넸다.

[독 안개 뒤편에 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기운이 땅 밑으로 빨려들고 있는데, 염라마군이 그곳에 있습니다.]

[그곳까지 가야겠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진 무사님께서 아까 나눠주신 화기가 이곳의 독을 태워 버렸습니다.]

용천월이 진우선의 말 속에 담긴 우려를 이해하고서 답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생각보다 심했다.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짙어 보여서 그 정도로도 부족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위험해 보이니 제 손을 잡으십시오.]

진우선이 용천월의 손을 붙잡은 채 독 안개 안으로 들어갔다.

‘피독주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용천월이 아쉬운 마음을 속으로 삼켰다.

피독주(避毒珠)는 독을 피하거나 몰아내는 신비로운 효능을 지닌 구슬이었다.

종전에 받은 이화의 화기와 피독주라면 진우선의 기운을 받지 않고도 이곳을 나갈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면 더는 도움을 안 받아도 됐을 테니까.

어쨌든, 그렇게 독지를 지나 문으로 내려갔다.

‘헛!’

용천월은 곧바로 코를 찔러오는 짙은 혈향에 온몸이 오소소 소름 돋았다. 즉각 후각을 막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느껴지는 건 혈향만이 아니었다.

혈향을 피워내는 근원, 피의 연못이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한가득 모인 피 웅덩이 속에서 진한 마기가 솟구쳐 올랐다.

용천월은 후각을 막아도 전신으로 침투하려는 마기와 싸우느라 정신없었다.

그때였다.

와아아-!

손목을 통해서 막대한 항마의 수기가 전해져왔다.

진즉에 진우선이 전해주었던 항마의 기운이 약해져 가고 있던 찰나, 수기가 마기를 몰아내며 온몸을 상쾌하게 휘돌았다.

진우선이 용천월을 이끌고 마혈지처(魔血之處)를 얼른 돌파했다.

문을 통해 내려가자 살을 에는 듯한 극도의 음기(陰氣)가 넘치는 공동(空洞)이 나타났다.

공동은 척 봐도 매우 스산했다.

오한이 들어 귀신마저 보일 정도로 정기신을 피폐하게 하는 음기가 가득 차 있었다.

이곳은 극음지처(極陰之處)였다.

[용 무사님. 괜찮으십니까?]

[네. 이곳은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비록 화기의 도움이 다소 있으나, 용천월은 이곳에선 크게 힘들지 않았다.

그때, 진우선이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극음의 물기가 고인 작은 웅덩이가 있었다.

[그렇군요. 위의 두 곳과 달리 이곳은 애초에 음기가 서리는 땅이었던 것 같습니다. 혹시 음한의 무공을 익히셨다면 저 물을 담아가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극음(極陰)의 정수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용천월이 바로 움직였다.

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어 안에 든 내상단을 옮겨 담더니, 약병에 물을 조심스럽게 채우고 돌아왔다.

[이제 내려가면 염라마군이 있을 겁니다. 그전에 먼저 기운을 다시 나누어드리겠습니다.]

진우선이 조심스럽게 전음을 보내며, 용천월의 손목을 붙잡고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에 용천월이 낯빛이 잠시 어두워졌다. 풀이 죽은 듯했다.

[용 무사님. 신세를 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 역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내려가게 되면 용 무사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여기까지 우리가 지나온 세 곳의 기운이 염라마군에게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극마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그를 찾아 내려온 것입니다.]

진우선은 이미 그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한 줄기가 더 있습니다.]

그건 예상치 못했던 용천월이 눈을 부릅떴다.

[제가 염라마군을 상대하는 동안, 용 무사님께서 공동 아래로 내려가 그걸 찾아서 부숴주십시오. 그곳이 아마 중심부일 것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