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구지의 주인 (4)
“그래서 조금 전 공격에 모든 공력을 퍼부은 거였군. 여벌의 목숨이 있으니 방어를 도외시할 수 있었어.”
진우선의 검은 동공이 염라마군을 꿰뚫어 보는 듯이 빛났다.
“네놈은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하는군. 이걸로도 제압하지 못할 줄이야!”
탄성을 흘리며 대꾸하는 염라마군의 말 속에서 진우선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극경의 고수도 견디기 힘들 삼체를 별 탈 없이 통과한 진우선이기에, 그는 처음부터 온 힘을 다해 억겁혈세의 초식을 펼쳤다.
진우선을 단박에 죽이기 위해서였고, 혹시나 죽지 않아도 죽기 직전의 타격을 입히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뜻한 바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낭패를 보았다. 진우선이 생각 이상으로 강했던 까닭이었다.
계획이 완벽하게 실패했다.
하지만 염라마군은 절망하지 않았다. 이 상황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생각이 옳았다는 방증이나 다름없었다.
‘억겁혈세가 아니었으면, 이 정도로 몰아세우지도 못했을 테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회복은 내가 빠르다!’
마라혈정이 있는 까닭이었다.
후으으읍-.
공무동 내부의 기가 요동쳤다.
염라마군의 주위로 회오리치듯 흐름이 쏠려 들었다. 그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뜨겁게 피어올랐다.
그러자 피가 흐르고 기진맥진해 보이던 염라마군이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곧 숨을 거둘 것처럼 보였으나, 지금은 죽음의 문턱에서 확실히 돌아온 듯 몸에 활기가 돌고 있었다.
반면에 진우선은 몹시 지쳐 보였다. 눈빛만이 또렷할 뿐이었다.
쿠쿠쿠쿵-!
염라마군이 거칠게 기운을 끌어 올렸다. 종전에 피워냈던 혈류강막이 더욱 크고 짙게 생겨나더니, 흉포한 기운을 흘려대기 시작했다.
“한 번 더 펼칠 셈인가?”
“막을 수 있다면 막아봐라!”
염라마군이 광오하게 웃으며, 억겁혈세의 초식을 준비했다.
기막에 혈염이 폭발하듯이 넘실거리고, 혈류가 급격하게 휘몰아쳤다. 기막 안을 가득 채운 혈연이 종전보다 더욱 뜨겁게 흩날렸다.
콰아앙!
혈류강막이 폭발했다. 내부에 꾹꾹 압축되어있던 구유마라혈기가 사방팔방으로 마구 터져 나오고 있었다.
진우선이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러 빛살을 마구 쏟아냈다. 맹폭하는 구유마라혈기에 대항해 검광이 번쩍번쩍 일었다.
그러던 중!
터엉-!
무형의 울림이 터지며, 흘러들어오던 마라혈기의 맥이 끊겼다.
그와 함께 공부동 내부의 기운이 일시에 증발했다. 찰나 간에 덮친 공허였다.
‘좋았소!’
정말 절묘하게도 용천월이 때마침 공허를 만들어낸 듯했다.
진우선이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 내며, 혈광에 휩싸인 염라마군을 향해 움직였다.
***
“네, 네놈이 마라혈정을……!”
피투성이가 된 독괴가 이를 부드득 갈며 섬뜩한 몰골로 용천월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을 용납할 수 없는지 온몸으로 끔찍한 독기를 내뿜고 있었다.
“마군께서 지금 빨아들이고 계셨거늘!”
염라마군의 혼백이 마라혈정의 기운을 격렬하게 흡입하던 걸 용천월이 한순간에 망쳐버렸다.
이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이 시뻘건 눈으로 광분하는 걸 보니, 내가 때를 잘 맞춘 모양이오.”
용천월이 숨을 헐떡이면서도 느긋하게 말했다. 목적을 성취한 데서 오는 만족감이 가득 전해졌다.
하지만 이는 독괴를 더 자극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독괴가 격노하여 눈에 쌍심지를 켠 채 윽박질렀다.
“네놈! 천독마기에 맞고도 멀쩡하다니!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제 학정홍에도 영향이 없었습니다!”
독괴의 유일한 수하 학노(鶴老)가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 복부를 움켜쥔 채 고통에 신음하는 와중에 의문을 쏟아냈다.
그의 피는 독혈이었다. 그는 학의 벼슬에서 뽑아낸 맹독 학정홍을 연구하다 자기가 중독되어 독인이 된 인물이었다.
그래서 마라혈정을 지키며 용천 월에게 학정홍을 뿌렸다.
하지만 용천월은 별반 반응이 없었다. 단지 옷만 녹아 들어갔을 뿐이었다.
오히려 학노가 용천월에게 일격을 당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다.
“후후.”
용천월이 웃음만 흘렸다.
둘을 상대하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독괴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천독마기로 마구 격공장을 뿌려대니, 그에게 일격을 적중시키는 것 자체부터 어려웠다.
게다가 학노는 순간순간마다 극독 학정홍을 뿌려왔다. 학정홍은 동혈의 돌바닥이든 어디든 치이익- 소리를 내며 녹여버렸다. 한 방 울이라도 닿았다면 뼈까지 즉시 녹아들었을 터였다.
용천월은 그런 둘의 합공을 피해 치명상을 입히고 마라혈정을 부쉈다.
‘진 무사님의 기운 덕분이다. 정말 놀라워!’
진우선이 나누어준 기운이 천독마기에 대항하고, 독기가 침입하면 태워버렸다.
그러니 용천월은 독괴와 학노를 쓰러뜨리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라혈정까지도 불태워버렸다.
화르륵-!
진우선이 건네준 화기가 마라혈정에 들러붙어 활활 타올랐다.
제단 위 그릇에 담긴 마라혈정은 마치 짐승의 피가 응혈된 선지 같았는데, 시꺼먼 연기를 피워대며 존재가 소멸하고 있었다.
“참으로 잘 타고 있군. 좋은 땔감이오. 그렇지 않소?”
“육시랄 놈!”
독괴가 독살을 부리며 대꾸했다.
“그래봤자 네놈들이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을 줄 아느냐? 진우선은 조금 전의 굉음에서 숨을 거두었다. 네놈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테지.”
“그건 모를 일이오. 그리고 마라혈정의 기운이 급격히 빨려들었다는 건 염라마군이 밀린다는 뜻 같은데.”
“크크크! 네놈 믿고 싶은 대로 나불거리는구나.”
독괴가 용천월을 사납게 노려보며, 한 치의 기세도 꺾이지 않고서 외쳤다.
그러더니 별안간에 두 손을 앞으로 내뻗으며, 기운을 뿜었다.
“어림없소!”
“혹시 내게 천독마기밖에 없는 줄 알았더냐? 그럼 오산이지.”
독괴의 손바닥에서 핏빛 기운이 쏘아졌다.
‘이건!’
용천월은 독괴가 뿜어낸 공력의 정체를 대번에 알아챘다. 마혈지처에서 흐르던 혈마기였다.
“어림없소!”
용천월이 패기있게 소리쳤다. 진우선이 건네준 수기가 혈도를 휘돌며 항마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스릉-!
용천월의 검에 강력한 기운이 맺혔다.
그는 비룡승천검강의 절초로 독괴의 공격을 잘라먹으며 짓쳐들어갔다.
이윽고.
“큭…….”
독괴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이 생의 명을 다했다.
***
쏴아아아-!
순백의 빛살이 혈무를 꿰뚫었다.
공무동에 자욱한 핏빛 기운은 중심을 잃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증발해버렸다.
붉은 연기가 걷히자,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듯이 지쳐 보였고, 한 사람은 이미 쓰러져 숨도 쉬지 않고 있었다.
“후우-. 후우-.”
살아남은 한 사람, 진우선이 힘겹게 숨을 토해내며 시신을 바라 보았다.
그때, 동혈에서 용천월이 달려나오며 진우선의 옆으로 다가왔다.
“역시 진 무사님께서 이기셨군요. 다행입니다.”
“염라마군이 절초를 쏟아내고도 다시 힘을 회복하니, 상대하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용 무사님께서 제때에 마라혈정을 끊어주신 덕분입니다.”
“저야말로 진 무사님께서 기운을 나눠주신 덕분에 까다로운 적들을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습니다.”
“용 무사님께서 실력이 뛰어나신 덕분이지요. 그리고 제가 기운을 나눠드린 게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진우선이 얇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용천월이 진우선의 발치 앞에 널브러진 괴인의 주검을 보았다.
“이 자가 염라마군이었군요. 참으로 고집스럽게도 생겼습니다. 진 무사님께서 악전고투하시느라 고생하셨네요.”
용천월이 보니, 염라마군의 시신은 미간과 가슴과 복부가 휑하니 뚫려 있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라혈기가 염라마군의 혼백에 이어져 있었으니까요.”
“아! 혼백에……. 그래서 정기신을 모두 파훼하고자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을 다 꿰뚫어버리신 거군요!”
“맞습니다.”
진우선은 문득 염라마군에게 마지막 일격을 쏘아내던 순간이 떠올랐다.
섬광적멸의 절초로 그의 공세를 반격해냈을 때, 혼백이 무언가 움직임을 보였었다.
그래서 바닥난 내공을 박박 긁어 모아 일광삼점파의 한 수로써 정기신이 깃드는 곳을 단숨에 부숴 버렸다.
그에 염라마군의 혼백마저 덩달아 이승을 떠나게 된 것이다.
“진 무사님. 그래도 모르니 아예 태워버리겠습니다.”
피웃-!
용천월이 진우선에게서 나눠받았던 화기를 쏘아냈다.
이화를 품은 화기가 염라마군의 시체를 불사르기 시작했다.
심령까지 물들 것만 같은 시커먼 연기가 지독한 악취와 함께 피어 올랐다.
용천월이 코를 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을 때까지 고약하네요.”
“정말 그렇군요.”
그때였다.
드득-! 푸푸푸-!
공무동 천장에서 균열이 생기며 돌가루와 흙들이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얼른 빠져나가야겠습니다.”
“진 무사님. 아까 발견했는데, 저쪽에 밖으로 이어진 다른 출구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리로 안내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진우선과 용천월이 릉하동을 얼른 빠져나왔다.
***
며칠 후.
방가장 총관의 업무실에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엄 대주님. 지금 상황이 어떻게 흐르고 있나요?”
“수뇌부가 대부분 숨진 구유마라 종은 지리멸렬에 빠진 상황입니다. 무의대를 비롯한 맹의 무인들이 빠르게 섬멸하고 있으니 총관님께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군요.”
방약빙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무맹 숭의각의 무의대주 엄소백이 말을 덧붙였다.
“아마도 사나흘 정도 지나면 광동에서 더는 그들에 대해 들으실 수 없을 겁니다.”
“광동만이 아니라 천하에서 들을 수 없겠죠. 구유마라종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니.”
“정확하십니다.”
“고마워요. 정무맹의 일 처리가 확실하네요.”
방약빙이 감탄을 흘렸다.
구유마라종의 마교도들을 해결해 달라고 했더니, 구유마라종 자체를 지워버리고 갔지 않은가.
우군의 모습이 이보다 더 든든할 수는 없었다.
“진 무사님과 용 무사님께서 애쓰신 덕분입니다.”
“엄 대주께서도 백괴를 베셨잖아요. 색괴에 이어.”
“염라마군을 비롯해 구유오괴 중에 넷을 벤 일과 백괴 하나를 처단한 게 비교가 되겠습니까?”
“무게감이 확 쏠리긴 하네요. 하지만 엄 대주님의 공도 작은 게 아니에요.”
방약빙이 가볍게 웃으며 말하더니, 대화를 이었다.
“진 대협께서 짧게 인사만 하고 가신 게 아쉬워요.”
“저도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본 맹에서 진 무사님이 가장 바쁘시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겠지요.”
방약빙의 음성에서 다소의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그러다 잠시 후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혹시 소문 들으셨나요?”
“소문이 있습니까?”
“운부현을 지나오는 상인들이 너도나도 말하더군요. 저승의 입구가 무너져내렸다고.”
“아!”
저승의 입구라 불린 릉하동이 하룻밤 새 무너져내렸으니, 뭇 사람들에겐 충분히 놀랄만한 일이었다.
“처음 들으신 모양이군요. 그럼 진 대협께 별호가 생긴 것도 모르시겠군요.”
“그걸 제가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사도련주와 필적하는 것은 물론이고, 염라마군을 비롯하여 사마(邪魔)의 고수들을 두루 무찌른 정검신협(正劍神俠)의 위명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