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80화 (180/225)

180.

#화산으로 (2)

“근래 강호에 명망이 자자하신 정검신협을 뵙게 되어 영광이오. 빈도는 화산파 현천각주 연백위라 하오.”

“연 각주님이셨군요. 반갑습니다. 진우선이라고 합니다.”

연화객잔에 들른 중년의 도사 연백위가 진우선 일행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화산파의 장로로, 장문인이었던 매화검백 장명의 다섯 사제 중 한 명이었다.

“진 대협께선 소문으로 들은 것 보다 훨씬 더 그윽한 현기를 풍기시는구려. 이곳 화산까지 멀리 와 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환영하는 바요. 사숙조께서도 대협과 만나길 학수고대하고 계시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허허.”

비록 사문에 흉사가 닥쳐 신색이 어두웠지만, 연백위는 진우선을 보며 감탄을 그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올라가시겠소?”

“그러지요. 저희는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습니다.”

“그럼 따라오시구려.”

진우선 일행이 연백위를 따라 객잔을 나섰다.

그러자 화산파의 도포를 걸친 일남일녀가 다가왔다. 연백위가 일행에게 그들을 소개했다.

“이들은 현천각의 제자로 당대의 매화검수에 든 추수림과 황륜이오.”

“정검신협을 뵙습니다. 추수림이라고 합니다.”

“황륜이 진 대협을 뵙습니다.”

추수림과 황륜이 진우선에게 포권하며 극진하게 인사를 올렸다.

“화산파에서 촉망받는 이들만이 매화검수에 든다고 들었는데, 그 중 두 분이셨군요. 반갑습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하지만, 저희는 말석에 든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매화검수의 이름이 가볍지는 않지요.”

추수림의 말에 진우선이 웃으며 대답하더니, 용천월과 제갈영을 소개해주었다.

그 후 일행들은 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도중에 진우선이 연백위에게 말을 건넸다.

“각주님. 매화검백께 일어난 일에 관해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일 각을 싸우셨다고 들었는데, 어찌 일이 그렇게 되었습니까?”

전해진 소식이 그것뿐이라, 정무맹 사람들은 더 는 바가 없었다.

“후우-! 진 대협께서 그 점을 의문스러워하실 거로 생각했소. 그날 벌어진 일이 너무나 슬프고 수치스럽기도 하여 외부에 알리지 않았으니.”

한숨을 내쉰 연백위가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본 파를 쳐들어온 이들은 셋이었소. 그들은 화산의 지리를 꿰고 있었는지 단박에 장문인께서 거하시는 태을각을 습격했소. 당시 회의 중이던 본 파의 장로 두 분이 함께 맞서 싸웠는데, 장문인과 문 사형이 숨을 거두고 홍 사형만이 사경을 헤매다가 닷새 만에 깨어나셨소. 그 과정에서 제자들도 수십 명이 도에 귀의했소.”

“아-!”

진우선이 탄식을 흘렸다. 왜 그들이 말을 아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이따가 사숙조께서 말씀하시겠지만, 진 대협께서 홍 사형을 직접 살펴봐 주셨으면 하오. 그들과 손속을 나눈 홍 사형이 아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소. 홍 사형이 입을 열어야 전말을 제대로 알 수 있다오.”

“알겠습니다.”

진우선이 침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대화 이후로 진우선을 비롯한 여섯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이 빠르게 산을 올랐다.

이윽고 화산파에 오른 일행은 백발이 성성하고 깡마른 도인을 만났다.

“반갑네. 빈도가 자하선옹이라 불리는 늙은이라네. 아직 도를 이루지 못했으나, 잠시 이곳을 살피고 있지.”

“진우선입니다. 화산의 큰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큰 분은 무슨. 제 코가 베어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아둔한 노인네인 것을.”

자하선옹이 자조적인 말로 스스로의 마음을 쏟아냈다. 상실감과 무력감이 그만큼 큰 탓이었다.

연백위가 얼른 말을 건넸다.

“사숙조님. 올라오는 길에 진 대협께 대강의 정황을 말씀드렸습니다.”

자하선옹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우선에게 말을 건넸다.

“현문의 도를 깊이 깨우친 신인이 직접 온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뻤다네. 본 파가 도움을 요청하긴 했지만, 천하의 어지러움을 두루 살피는 신인이 바로 올 수 있을 줄은 몰랐으니 말일세. 괜찮다면 지금 바로 소청각주를 살펴봐 주겠나?”

“그리하지요.”

“고맙네.”

“화산파의 일이 매우 심각한 데다, 본 맹에서 알아보니 강호에 이와 비슷한 일이 수차례 일어났었던 걸 확인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와 봐야지요.”

진우선이 그리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하선옹이 일행을 태을각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아 우두커니 화산을 내려다보는 한 중년인이 있었다.

“홍 사형! 또 여기 나와 있었습니까?”

스윽-.

중년인이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일행을 바라보았다.

“홍 사형, 밥은 먹었습니까?”

끔뻑끔뻑.

중년인은 큰 눈을 잠깐씩 감았다 뜨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다가오는 연백위만 쳐다볼 뿐이었다.

연백위가 중년인 옆에 털썩 앉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홍 사형, 뭘 보고 있어요?”

머엉-.

중년인의 초점 없는 시선이 넓게 펼쳐진 화산을 향했다.

맞은편에 우뚝 솟아오른 여러 봉우리가 새하얀 옷을 입어 순백의 미를 뽐내니, 보는 이들의 마음에 깨끗하고 드높은 기상이 스미는 듯했다.

그때, 중년인을 유심히 살핀 진우선이 자하선옹에게 말했다.

“진인께서 소청각주님을 돌보셨군요.”

“그렇다네. 다행히 목숨은 살렸네만, 빈도의 수양이 부족하여 이 이상은 회복시키지 못했네.”

“아닙니다. 목숨을 구하신 것만으로도 큰일을 하셨습니다. 소청 각주님의 혼백이 무언가에 심히 압도되어 숨어들었는데, 이는 단순히 공력만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허허. 그랬나.”

자하선옹이 애달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신인께선 방법이 있는가?”

“사건이 일어난 지 달포가 좀 넘었던가요?”

“맞네. 그쯤 되었지.”

“제가 손을 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회복될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방도가 있긴 있었군. 혹시 많이 위험한가?”

“짓눌린 혼백을 풀어주고, 그걸 짓누른 기운을 찾아 없애야 하니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미리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 시간은 오로지 소청각주께서 최대한 버텨내셔야 합니다.”

“쉽지 않겠군.”

혼백은 상단전에 깃드니, 이는 상단전을 살펴야 한다는 소리였다. 즉 생사를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자하선옹이 소청각주를 애처로운 눈길로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결단을 내렸다.

“후우-! 저리 넋 놓고 있는 모습을 어찌 계속 보고만 있겠는가. 신인께서 이렇게 오신 것도 인연일 테니, 내가 긴히 부탁을 드리겠네. 부디 구해주시게.”

“알겠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맙네. 그래도 철심매검(鐵心梅劍)이라 불릴 만큼 마음이 굳건했던 아이이니, 잘 버텨낼 걸세.”

자하선옹은 소청각주 홍대원이 제 별호대로 잘 견디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원인이 된 기운을 찾는 동안에는 아마도 소청각주의 정기신이 모두 크게 흔들릴 것인데, 자청단(紫淸丹)을 복용시키는 건 어떤가? 수도자의 정기신을 두루 북돋아 주는 영단이라네.”

“그런 영단이라면 당연히 소청각주께 도움이 될 겁니다. 참으로 귀한 물건인 것을요.”

“그래도 사람 목숨보다 귀하겠나? 이걸 써주게.”

“알겠습니다.”

자하선옹이 품에서 손때가 가득 묻은 오래된 작은 목함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진우선에게 건넸다.

그걸 받은 진우선이 연백위에게로 다가갔다.

“연 각주님. 소청각주님께 이 자청단을 복용시키신 후, 침상에 눕혀주십시오.”

“네, 그러지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연백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홍대원을 이끌었다.

“홍 사형. 이리 오십시오. 들어가실 시간입니다.”

홍대원이 연백위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주섬주섬 일어나더니, 태을각 안으로 들어갔다. 맞잡은 손을 꼭 붙잡은 채였다.

잠시 후.

침상에 누운 홍대원을 진우선이 혜안으로써 바라보았다.

섬찟!

홍대원의 눈동자 안에서 혼백을 짓누른 기운이 갑작스레 예기를 발했다.

시커먼 동공 속에 깊숙하게 숨어 있던 소름 끼치는 기운 한 줄기가 혜안에 발각돼 잔뜩 가시를 돋우고 있었다.

‘저 기운을 잡아야 한다!’

진우선이 즉각 홍대원의 머리맡으로 자리를 옮긴 후, 그의 정수리 쪽 백회혈(百會穴)위로 손을 얹었다.

화아아-!

부드러운 기운이 홍대원의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흘러내려 갔다.

홍대원의 육신이 편안히 이완되더니, 이어서 심령도 차분해졌다. 자청단 역시 그의 정기신에 빠르게 녹아들고 있었다.

그에 홍대원이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진우선의 눈에서 새하얀 정광이 뿜어져 나왔다.

연백위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숨조차 멎은 채 간절한 마음으로 빌었다.

‘진 대협, 부디 사형을 구해주시오!’

하지만 진우선은 연백위의 이런 애절한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이미 눈을 감은 채 홍대원에게 깊이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오행의 기운으로 정(精)을 보(補)하고, 철벽(鐵壁)의 금기로 심(心)을 감싸 기(氣)를 더한다.’

홍대원의 혼백이 외부의 기운에 압도되어 숨어든 것은 신(神)이 무너진 것이니, 장신(藏神)의 부(府)인 상단전을 살펴야 한다.

그런데 신은 중단전에 기를 모아 충실해지며, 기는 하단전에 정을 만들어 충실해진다.

즉, 진우선은 홍대원의 상중하 삼단전을 동시에 조율하며, 신을 다시 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걸 위해 하단전과 중단전의 준비를 마쳤다.

진우선이 곧장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명토(冥王)여, 찾거라!’

진우선이 토기를 잔뜩 일으켜 명토의 기운을 홍대원의 육신에 불어넣었다.

명부는 본디 혼백이 이르는 곳이니, 그곳의 영기인 명토의 기운은 혼백을 능히 살피고 어루만질 수 있었다. 한없이 뒤쫓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냐?’

명토의 기운이 양미간 아래에서부터 상단전을 조심스럽게 천천히 살펴 가기 시작했다.

뇌(腦)는 수해(髓海)로서 상단전이 되니, 자칫 잘못하다간 실신하여 영원히 정신을 못 차리거나 이승을 하직할 우려가 있었다.

시간이 초조하게 흘러 일 각이 지났다.

그때, 가만히 누워 있던 홍대원이 부르르 떨더니 침상에서 털썩 거리며 경기를 일으켰다.

“붙들어라!”

자하선옹이 그리 외치며 홍대원의 상체를 얼른 붙잡았다. 연백위도 거의 동시에 홍대원의 하체를 눌렀다.

둘은 그렇게 홍대원에게 매달린 채 안절부절못하는 눈빛으로 진우선을 바라보았다.

진우선은 여전히 홍대원의 상단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일 각이 더 흘렀을 때였다.

투웅-!

홍대원의 뒤통수 부근에서 묵직한 반발이 일어났다.

‘이거다!’

진우선이 단박에 알아챘다.

무거우면서도 뾰족한 그 기운이 혼백을 짓누르고 꽁꽁 묶은 까닭이었다.

‘혼백이 얼른 억압하는 힘에서 벗어나야 해!’

의념을 떠올린 순간, 명토의 기운이 진우선의 뜻을 받들어 움직였다. 순식간에 홍대원에게 스며든 외부의 기운을 비집고 파고들었다.

하지만 진우선은 곧 멈췄다.

‘이대로는 곤란하다. 기운이 상충하여 피해가 생길 수 있어. 혼백을 이 정도로 옭아맨 채 짓누르고 있을 줄이야!’

기운이 가진 힘은 침투경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 정도로 강력한 진혼(鎭魂)의 힘을 가졌다면, 진혼기라 부르는 게 좋으리라.

‘진혼기의 속박을 풀어내야 하는데!’

목숨이 걸린 귀하디귀한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상단전에서 계속 진동이 일어나니, 정이 기가 되고 기가 신이 되는 정기신의 흐름마저 마구 출렁거렸다.

진우선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때였다.

‘헛!’

심중에 경악이 터져 나왔다.

명토의 기운이 홍대원의 혼백으로 스며들더니, 연기처럼 흩어지며 함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 아닌가.

명토가 주인의 뜻에 부합되게 절로 움직인 것이다.

‘됐다!’

진우선은 곧이어 혼백을 구해낸 명토의 기운으로 홀로된 진혼기를 잔뜩 에워쌌다. 밖으로 끄집어내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예상치 못한 느낌에 당혹스러워졌다.

‘진혼기가 현문정종의 기운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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