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짙어지는 암운 (5)
“정검신협께서 살신성인 하시어 정의롭게 진실을 밝히셨으나, 제 눈이 어두워 그 뜻을 몰라봤으니 참으로 송구스럽습니다.”
“진 대협. 소인 역시 구명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황하신룡 교금천이 크게 읍을 하며 청산유수로 말을 건넸다. 신룡방의 또 다른 생존자인 철표도 연이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에 진우선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신룡방 두 분의 공력이 깊고, 중독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내가 손을 쓸 수 있었소. 하지만 다른 분들은 애석하게 되었소.”
“죽을 뻔한 저희를 구해주신 것 만으로도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교금천이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저는 너무나 면목이 없습니다. 아우들이 떠나게 된 건 다 저의 불찰이었습니다.”
“대형, 아닙니다. 대형을 보필해야 하는 제가 더 목소리를 높였지 않습니까? 이 일은 실로 제 탓입니다. 진 대협께서 입구를 폐했을 때 우리도 수채로 돌아갔어야 했습니다.”
“허헛-! 아니다, 철표야. 내가 너무 들떴던 거야. 엊저녁의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만 않았어도…….”
교금천과 철표가 서로 제 탓을 하며 매우 자책했다. 신마황동을 찾아 들어오게 된 그간의 과정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지, 그들은 연신 한숨만 내뱉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이 마음을 다소 추슬렀을 때, 진우선이 질문을 던졌다.
“근데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요?”
“대협께선 바깥의 상황을 모르셨겠군요. 어제 아침에 신마황동의 입구를 폐하고 들어가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녁때쯤에 새로운 입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아……! 그래서 갑자기 시신들이 많이 보였구나!”
진우선이 크게 탄식했다.
“저희 말고도 많았던 모양이군요.”
“맞소. 독에 당한 게 당신들만이 아니오. 오는 중에 중독되어 숨진 이들이 상당했소. 더러는 그냥 지나가다가 봉변을 당했고.”
“이 정도로 치명적인 독이었다니……! 대협께서 마라혈독과 비교하신 게 그래서였군요. 상황이 정말로 심각한 것 같습니다.”
교금천이 참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눈에서 혈광이 비치는 점이나, 독이 공중에서 번지는 게 그가 알고 있던 마라혈독의 증상과 너무나 비슷했다.
“맞소. 너무나 심각하오. 게다가 비급을 눈앞에 두고서 자기들끼리 칼부림해서 공멸한 이들도 부지기수이니, 그 밖에도 피해가 얼마나 클지는 감히 상상조차 어렵소.”
“인제 보니 실로 천마교의 음험한 계획이 틀림없습니다.”
“이제 이해하신 모양이오.”
교금천이 창피하여 고개를 푹 숙였다.
철표가 씁쓸한 얼굴로 한마디 보탰다.
“대협, 저희는 기관진식에도 당했습니다. 이 역시 그들의 짓이겠군요.”
“당연하오.”
진우선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그대들 말고도 얼마나 더 들어온 거요? 족히 수백 명은 넘게 들어온 것 같은데.”
“저희가 자정 무렵에 들어올 때 까지만 헤아려 봐도 그 정도쯤 될 겁니다. 엊저녁에 입구가 다시 발견되자 잠시 서로 눈치를 보더니,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었으니까요.”
“어쩌면 천 명이 넘었을지도 모르겠군.”
진우선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중얼거리더니, 교금천을 직시하며 말했다.
“다들 들어가서 뭔가 얻을 것 같으니, 당신들도 이번엔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겠군.”
“정확히 보셨습니다. 그게 저희의 패착이었습니다.”
“천마교의 노림수에 당했소. 내가 입구를 폐하자 괜히 놓쳤다고 생각해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았겠지. 천마교는 그 심리를 이용해 강호인들이 달려들도록 만들었소.”
“그랬을 겁니다.”
“그렇다고 모든 게 천마교 탓은 아니오.”
“맞습니다. 천마교의 꿍꿍이라고 해서 신마황동에 들어가기로 한 제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요.”
진우선이 교금천의 마음을 후벼팠다.
하지만 교금천은 심장이 바스러진 듯이 참담하여 별반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신룡방의 정예 서른 명은 가족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십 년 전에 황하 중류에 자리를 잡고 함께 신룡방을 일으켜온 이들이었다.
신마황동에서 상승무공을 얻어 다 같이 이름을 날리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한데 그때였다.
털썩- 부르르-
털썩- 부르르르-
바닥에 널브러진 신룡방 무인들의 시체가 갑자기 들썩거렸다.
“헛! 이게 무슨!”
“진 대협!”
교금천이 눈을 까뒤집을 듯이 화들짝 놀라서 외쳤다. 철표는 겁에 질려 진우선부터 찾았다.
진우선이 눈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기다리시오. 잠깐 살펴봅시다. 이곳에 괴기스러운 기운의 흐름이 있소!”
그러기를 잠시.
툭-!
시신 하나가 목이 축 늘어졌다.
그와 동시에 진우선이 시선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진우선의 표정이 심각하여 교금천과 철표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진우선이 눈을 감고서 내력을 끌어올려 괴이한 기운을 뒤쫓았다.
‘혼백이 끌려갑니다!’
[그렇구나! 예사로운 힘이 아니다. 옴짝달싹도 못 하고서 흐름에 붙들려 버렸어.]
‘맞습니다. 저 흐름을 쫓아야겠습니다. 이 괴역에 드리워져 있던 기운의 실체가 저 흐름을 타고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자꾸나!]
검노야가 진우선의 의견에 강하게 공감했다.
괴역(怪域).
두 사람이 지금 헤매는 동굴을 그리 칭한 건 귀동을 쓰러뜨리고서 진법을 지났을 때부터였다.
새로이 이어진 동굴에는 일반적으로는 전혀 알아챌 수 없는 괴상한 기운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게 혼백을 끌고 가는 힘이었을 줄이야!
진우선과 검노야는 이제야 실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한편, 열세 구의 시체들을 주시하던 철표가 교금천에게 말을 걸었다.
“대형! 모두 몇 번씩 떨었습니다. 아무래도 목숨을 잃은 순서대로 괴상한 일이 벌어진 거 같습니다!”
“잠시 기다려 보자. 진 대협께서 말씀해주실 거다.”
때마침 진우선이 눈을 떠 교금천과 철표를 바라보았다.
“저들의 혼백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소.”
“혼백이요? 그게 정말입니까?”
“믿기 어렵겠지만 정말이오.”
“그렇다면 이 또한 천마교의 음모겠군요!”
“그럴 거요. 어제 쓰러뜨린 귀동 역시 혼백들을 어디론가 보냈던 모양이니까.”
“귀동! 역시 천마교였구나!”
교금천이 이마를 잔뜩 찌푸리며 탄식을 흘렸다.
혼백의 흐름을 보던 진우선이 잠시 생각하더니, 두 사람에게 말했다.
“나는 혼백들을 뒤쫓으려고 하오. 그래서 두 사람에게 긴히 부탁할 게 있소.”
“진 대협, 하명만 하십시오!”
“두 사람에게 독을 상대할 기운을 나눠줄 테니, 동굴에 들어온 이들을 구해서 밖으로 이끌어주시오. 여태껏 보고 들은 바를 다 말해도 괜찮소.”
“알겠습니다.”
“꼭 수행해내겠습니다.”
진우선이 두 사람에게로 이화의 기운을 조금씩 나누어주었다.
“그 기운을 조금씩 전해주면 독기가 사그라들 거요. 전해준 정도면 두 시진 가량은 그리할 수 있을 거요. 부탁하오.”
“대협께선 진정한 의인이십니다. 소인이 그 뜻을 명심하고, 사람들에게 잘 전하겠습니다.”
“진 대협, 후일에 하남에 들르시거든 신룡방에 꼭 한 번 들러주십시오. 그때까지 이 인연을 귀히 여기겠습니다.”
“알겠소. 아무튼, 잘해주시오.”
진우선이 그 말을 남기고 얼른 혼백의 흐름을 좇아 자리를 떴다.
교금천과 철표가 그를 향해 깊게 습을 하고는, 동굴을 헤매기 시작했다.
***
야명주의 은은한 빛이 가득 찬 석실에서 한 여인이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순조롭군.”
여인이 석실 중앙에 놓인 거대한 향로를 보며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향로에선 불을 피우지 않았는데도, 기이한 불빛과 아지랑이가 한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제 세 번째 단계마저도 거의 다 채운 거 같은데?”
여인의 시선이 향로 위, 천장에 새겨진 문양으로 향했다.
기이한 문자와 그림으로 빼곡하게 들어찬 문양에서는 등골이 서늘한 한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콰아앙-!
굉음이 터지며, 석벽이 통째로 부서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서슬 퍼런 음성이 날아왔다.
“다 채웠다고? 무엇을 다 채운 거지?”
“누구야?”
여인이 반사적으로 내력을 한껏 끌어올려 방비하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쳐들어온 이는 앳된 얼굴의 청년이었다.
“설마…… 진우선?”
“그렇소. 당신은?”
진우선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독교.”
“이곳에 있던 독기가 모두 당신이 뿌린 거였겠군.”
“맞아. 이만큼이나 독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은 나한테밖에 없지.”
독교가 즐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선이 굳은 표정으로 곧장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무엇을 다 채웠다는 거지?”
“그걸 들었어?”
“설마 혼백을 다 채운 건가? 저 위로?”
“뭐야! 다 알고 있었네.”
진우선의 얼굴에 심각한 빛이 어렸다. 검노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귀동이 쓰러뜨린 이들도 저 진법으로 빨려든 건가?”
“당연하지. 저건 단순한 진법이 아니니까.”
“단순한 진법이 아니라고?”
“그래. 대체 뭘까? 한 번 추측해 봐. 후후후.”
독교가 이 상황이 즐거운 듯이 웃음을 흘렸다.
그때, 진법을 살펴보고 있던 검노야는 순간적으로 몹시 섬찟한 느낌을 받았다. 그에 진법을 피해 천장 위로 올라갔다.
진우선은 단박에 검을 뽑아 향로에 기운을 쏘아냈다.
퍼엉-!
쾅-!
향로가 박살나고, 파편들이 마구 튀었다.
그에 독교가 황급히 피하더니 신경질을 터트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어차피 말해줄 생각 따윈 없었을 텐데.”
“그거야 그랬지. 그래도 이렇게 부숴버리다니!”
독교가 살기등등한 눈으로 진우선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진우선이 손을 들었다.
펼친 손바닥 위에서 푸른 불꽃, 이화가 피어났다.
그 위로 매캐한 악취를 흘리는 새까만 연기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헛! 그건 뭐야?”
“어느새 독을 뿌렸구나. 이 독은 뭐지?”
“네놈……! 정말 괴물이구나. 마라제혼독마저도 무용지물이라니!”
“마라제혼독? 역시나 마라혈독과 한통속이었군.”
진우선이 대번에 눈치챘다.
마라제혼독(魔羅制魂毒)은 비급들에 묻어 있던 독과 똑같았다. 그리고 혈독쌍괴가 만들어낸 마라혈독과 성질이 유사했다.
그러다 뇌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에 진우선이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마라제혼독으로 인해 혼백이 이곳으로 온 거였나?”
“와-! 바로바로 알아채네. 맞아. 네가 방금 부순 제혼귀화로(制魂鬼火爐)가 그 중심이었지.”
“그럼 저 진법은!”
진우선이 기겁하여 천장의 문양을 바라보았다.
독교가 눈을 샐쭉하게 뜨며 매우 야비해 보이는 웃음을 흘렸다.
“흐흐. 이미 늦었어!”
“늦었다고?”
바로 그때였다.
천장에서 검노야가 불쑥 내려오며 소리쳤다.
[우선아! 큰일이구나! 이 위에도 공간이 있다. 그곳에 엄청난 귀기가 몰려 있어!]
‘귀기라고요?’
귀(鬼)는 혼백이니, 죽은 사람의 넋이었다. 그런 귀가 기운을 가진다는 건 무언가 의도하는 바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 위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제혼귀화로에서 올라간 귀화는 대체 뭐야? 귀기가 왜 가득한 거냐고?”
“흐흐흐. 궁금해?”
독교가 약을 올리듯이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천천히 설명했다.
“위에는 귀기들이 모이는 곳이야. 비역이지. 그곳에 흑명귀가 있는데, 그는 아마 제혼귀화로가 부서진 걸 알아챘을 거야.”
진우선을 바라보는 독교의 눈동자에 희롱하는 빛이 담겨 있었다.
그와 동시에.
퍼어엉-!
구르르릉-!
지진이 난 듯이 굉음과 함께 동굴이 마구 떨려왔다.
“그렇지? 이제 시작이야.”
그와 함께 천장의 문양에서 한기가 쏟아져 나왔다. 심혼마저 얼려 버릴 정도로 냉랭했다.
그러더니 어디론가 빛이 쭉 빨려 나가버렸다.
이윽고.
[히이익-!]
[히에엑-!]
[끼기기긱-!]
[끼에엑-!]
소름이 팍 끼치는 섬뜩한 귀곡성이 심혼에 전해져왔다. 그와 함께 한없이 무거운 귀기가 온몸을 짓눌러왔다.
[이럴 수가! 이건…… 귀역무간진이다!]
“……!”
백 년 전, 하늘마저 분노할 정도로 악명 높았던 잔백구유의 귀역무간진(鬼域無間陣)이 일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