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영검전-198화 (198/225)

198.

#요동치는 천기 (1)

자정을 넘어 어둠이 한없이 깊은 시각.

산중에는 섬뜩한 귀무가 자욱했다. 괴기한 안개 사이로 흐릿한 악귀들이 귀화를 내뿜으며 마구 날뛰고 있었다.

귀무 속에서는 귀곡성과 비명만이 가득 들려올 뿐이었다.

인세에 지옥이 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후우-!”

귀들과 격전을 치르고 내쉬는 한숨 속에서 끝 모를 절망감이 묻어 나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잠시 쉬십시오.”

백하련이 무인을 격려했다.

그는 칠성둔형진의 한 축을 맡아 반 시진 동안 분전하고 탈진한 상태였다.

“책사님.”

“말씀하십시오.”

“우리…… 살아나갈 수 있겠습니까?”

지친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꺼낸 한마디에서 위축된 마음마저 전해지는 듯했다.

그의 말에 주변의 무인들이 슬쩍 이목을 집중했다. 그들의 얼굴에도 하나같이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당연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백하련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어떻게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우리의 내력은 점점 고갈되어 가는데, 저들의 기세는 꺾일 줄을 모르니…….”

“진세의 경계로 가기도 어려운 데다, 보이지도 않고요.”

“진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나는 아까 여기 오기 전에 밖으로 나가려 했는데, 방향도 못 찾고 헤매기만 했소. 귀무 속에서 빙빙 돌았는지, 오히려 산중에 들어와 있더이다.”

“귀신의 농간이겠지! 괜히 귀역무간진이겠소?”

“답답할 노릇이군.”

하지만 무인들은 암울하기만 했다. 이미 절망에 전염되어 찌들어 버린 모습이었다.

그 무렵 비천귀와 일전을 벌인 뒤 운기행공에 들어갔던 우문혁이 우직한 음성을 꺼냈다.

“백 책사님. 저는 이제 충분히 쉬었으니, 다시 나서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아닙니다. 휴식을 취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조금 더 쉬십시오!”

“괜찮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격전을 치른 우문혁의 몰골은 심히 형편없었으나, 눈빛만은 형형했다.

그에 중년의 의기소침한 무인이 곧바로 우문혁을 말렸다.

“아니요. 우문 대협은 더 쉬시오. 비천귀와의 일전에서 전신공력을 다 쏟아부었는데, 어찌 충분히 회복되었겠소?”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비천귀 같은 적이 지금 또 나타난다면, 저는 당장이라도 그와 전력으로 붙을 수 있습니다.”

우문혁의 패기 넘치는 대답에 중년의 무인이 머쓱해졌다.

하지만 우문혁의 말이 끝난 게 아니었다.

“그보다 저는 아직 대협이라 불릴 수준이 아닙니다. 그리 부를 만한 분은 진 대협이시지요.”

“아! 진 대협…….”

“정검신협께서 과연 다시 오시겠소? 어찌 되셨을지 모르겠는 데…….”

“당연히 다시 오실 겁니다. 그분은 자신에게도 철저하시니까요. 그리고 분명히 방법을 가지고 계실 겁니다.”

“맞아요. 동굴 쪽을 보면 알겠지만, 아까부터 귀기가 그쳤어요. 진 무사님이 신마황동 내부에서 천마교의 음모를 파훼하고 계신 거죠!”

백하련이 우문혁의 말을 받으며 신마황동의 이문을 가리켰다.

뭇 무인들이 동굴 쪽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화아아아아-!

순백의 환한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앗?”

“헛!”

저마다 부지불식간에 놀람을 토해냈다.

갑자기 온몸을 충만하게 적셔오는 청명한 기운을 맛보게 될 줄이야!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으나, 이어진 귀기들의 비명이 사실임을 전했다.

[히익-!]

[껙-!]

“커헉!”

주변에서 마교도들이 죽어나가는 소리도 연이어 들려왔다.

“설마……?”

누군가 의문을 드러낸 순간, 검을 든 한 사내가 빛 가운데서 걸어 나왔다.

“진 대협!”

“정검신협이다!”

“오오- 우린 살았구나!”

뭇 무인들이 놀람을 토해내다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흐윽!”

진우선의 한마디에, 감격하여 흐느끼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그때, 제갈영과 백하련, 우문혁이 진우선에게로 달려왔다.

“진 무사님. 예정보다 빠르게 돌아오셨군요! 다행입니다.”

“제갈 책사님도 그렇고, 다들 고생이 많으셨나 봅니다. 언제부터 여기에 계셨던 겁니까?”

“한낮부터 있었습니다. 그때 귀역무간진이 급작스럽게 펼쳐지다 보니, 빠져나갈 틈이 없었지요. 아마 일고여덟 시진은 된 것 같습니다.”

“일단 근방의 귀무와 귀기, 마인들을 처리했으니, 한숨 돌릴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조금 전에 빛이 가득한 걸 보고 궁가장에서의 기억이 떠올라서 너무나 놀랐어요.”

“그걸 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맞습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제갈영의 말대로, 진우선이 펼쳤던 직전의 한 수는 광영무의 광명천하였다.

진우선이 고개를 돌렸다.

“백 책사님도 도착해 계셨군요. 혁아, 오랜만이야.”

“진 무사님. 늦지 않게 와주셔서 다행입니다.”

“진 대협, 반갑소. 일 년 만이오. 본인도 이제 정식으로 만상각의 무인이 되었소.”

“혁이 넌 몸이 더 커졌구나. 반갑다.”

진우선이 그렇게 백하련과 우문혁을 만나는 사이, 제갈영이 전 무인들에게 말했다.

“일단 악귀들이 사라지며 주변이 잠잠해졌으니, 칠성둔형진을 유지만 한 채 다들 쉬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

“진 대협.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뭔데?”

우문혁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진우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명옥기도 깨달으셨던 거요?”

“아니, 그건 익힌 적 없어. 그때 네게 건네준 이후로 아예 잊었으니까.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

명옥기는 진우선이 창궁관에서 얻어 우문혁에게 건넨 비급이었다.

“그게 정말이오? 그럼 대체 어떻게 진 대협에게서 명왕기의 기운이 느껴진단 말이오?”

“명왕기?”

“명옥기가 진경에 들어서니 내공의 성질이 더 짙어지면서 변했소. 염왕신권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본인은 그걸 명왕기라 부르고 있소.”

“그게 내게서 느껴졌다고?”

“그렇소. 아까 진 대협이 빛을 뿌리며 나타났을 때, 본인은 그걸 똑똑히 느꼈소.”

“아!”

진우선은 그제야 우문혁의 의문을 이해했다.

조금 전에 펼친 건 명토의 기운이었다.

“내가 운 좋게 인연이 닿아 명부의 영기를 얻었어. 그래서 명왕기와 비슷했나 보네.”

“허어-! 그런 일이 있었소? 어쩐지 명왕기와 닮았으면서도 훨씬 기운이 짙고 극밀하다 싶었소. 명부의 영기였다면, 그게 당연하겠군.”

진우선은 오해가 생길까 조심스레 말했는데, 우문혁은 단박에 믿는 눈치였다.

“후후! 과연 진 대협은 대단하시오. 진 대협의 활약상을 들으며 날마다 감탄이 그치지 않았는데, 역시 하늘이 진 대협을 택한 모양이었소.”

“하핫!”

우문혁이 대놓고 칭찬하자, 진우선이 멋쩍은 웃음만 흘렸다.

“혁아. 너도 정말 강해졌구나. 게다가 네 기운이면 귀기들과도 상극이었겠는걸?”

“맞소. 그래서 진 대협에 비하면 대단하지는 않으나, 나름대로 악귀들을 물리치는 데 일조를 했다오. 후후후!”

“일조한 수준이 아니에요. 아주 큰 힘을 발휘해주셨습니다. 특히나 귀역무간진을 등에 업은 잔백마군의 심복 비천귀를 일격에 없애버렸죠.”

다가오던 백하련이 우문혁의 성과를 직접 전했다. 그녀는 제갈영과 함께 칠성둔형진의 정비를 마치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진 대협! 드디어 만나게 되었소.”

“우선아. 오랜만이다.”

뒤따라온 탁운비와 만총이 인사를 건넸다. 용천월과 한효기는 말 없이 목례했다.

백하련이 본론으로 넘어갔다.

“진 무사님, 전하실 말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들 느끼셨겠지만, 귀역무간진이 펼쳐진 이후, 한 차례 큰 파동이 있었을 겁니다. 그건 잔백마군이 삼층귀력으로 대귀역무간진을 펼쳐낸 것입니다.”

“대귀역무간진!”

“헛! 이럴 수가!”

“신마황동은 아무래도 일천 악귀의 정수로 삼층귀력을 만들고자 펼친 계략 같습니다. 그걸 위해 온갖 비급과 무구 등으로 유혹하고, 마라혈독의 일종인 마라제혼독을 써서 혼백을 붙들었습니다.”

“미쳤군!”

“마교도!”

진우선이 연이어 전하는 충격적인 내용에 일행들은 감히 놀람을 토해낼 틈도 없었다.

그때, 백하련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혼백이 허공으로 떠올라 잔백마군에게로 빨려들고 있습니다. 그는 떠오르는 모든 혼백을 먹어치울 기세인데, 그럼 진세가 깨지기 전에는 계속 이런 걸까요? 혹시 이를 막을 방도가 있겠습니까?”

“방법은 하나입니다. 잔백마군이 자신을 축으로 귀역무간진을 펼쳤으니, 그를 제압해야만 진법을 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상대할 작정입니다.”

“아!”

그 순간, 제갈영이 장탄식을 흘렸다.

여태까지 귀역무간진의 운용 흐름이 왜 안 보였는지 단박에 깨달았고, 더 나아가 잔백마군의 속셈마저 알아챈 까닭이었다.

“잔백마군은 삼층귀력으로 대귀역무간진을 펼쳐냈고, 혼백을 수거하여 그 힘으로 진세를 계속 떠받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진세가 계속 강해지고 있었던 거예요!”

귀역무간진이 강해지면, 진세를 온몸에 두르는 악귀과 마인들도 더 강해질 테고, 그리하여 흡수할 혼백이 늘어나면 다시 귀역무간진이 강화된다.

도저히 끊어낼 방도가 보이지 않는 악순환의 극치였다.

“그래서 제가 지금 올라가려고 합니다. 가능한 한 빨리 잔백마군을 저지해야 합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귀영들을 이끌고 오는 신장귀는 저희끼리 상대해보겠습니다.”

“월령마화종도 모습을 드러냈으니 각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러겠습니다. 진 무사님과 함께 오신 분들도 저희와 힘을 합치면 되는 거겠죠?”

“네. 제 기운으로 황하신룡 금 방주가 구한 이들이니, 잘 도와주실 겁니다.”

진우선이 데려온 무인들이 족히 여든 명은 되었다. 그들 역시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조금이라도 힘을 회복하여 손을 모은다면 큰 도움이 되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진우선이 조심스레 입을 열자, 백하련을 비롯한 일행이 긴장 어린 표정으로 귀를 모았다.

“지금 천기가 마구 떨리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으로 절대천마와 사령신군이 오고 있는 모양 입니다.”

“……!”

“……!”

모두가 너무나 당황하여 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절대천마와 사령신군이라니!

“그래서 그 전에 잔백마군을 쓰러뜨릴 생각입니다. 천마교에는 극마경의 무인들이 여럿이니, 그들이 오기 전에 귀역무간진을 어떻게든 깨야 합니다.”

“진 무사님. 저희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요?”

끄덕.

진우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행은 차마 그 소식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 여전히 눈동자를 심히 떨고 있었다.

그때, 얼른 정신을 차린 제갈영이 입을 열었다.

“진 무사님. 어제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여기로 모여드는 천하 각지의 무인들이 수두룩한데, 그 가운데 혈불은 어느새 서안을 지났다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진우선이 잠시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았다.

귀역무간진의 귀무가 짙었으나, 그의 시선을 가리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근방에 온 모양입니다. 극마의 기운이 진세 밖에 있으니까요.”

“아!”

“그리고 아마도 예상하시겠지만, 진세 바깥에도 상당한 무인들이 모여 있습니다. 진이 깨지면 그들도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러겠습니다.”

좌중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진우선의 말은 다 끝난 게 아니었다.

“귀역무간진 밖에는 원군도 있습니다. 한 분은 아마도 빙화곡의 벽 곡주이실 거고, 한 분은 벽력신창 탁 대협이십니다.”

“헛-!”

“아!”

탁무위의 조카인 탁운비와 제자인 만총이 동시에 탄성을 흘렸다.

다른 일행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가보겠습니다.”

“진 무사님. 조심하십시오!”

“진 대협. 부탁드리오!”

“전심으로 기다리고 있겠소.”

고개를 끄덕인 진우선이 잔백마군을 향해서 섬광처럼 쏘아져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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