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혼돈천하 (1)
우르르릉-!
콰쾅-! 쾅-! 콰콰콰콰쾅-!
삼문협 일대에 뇌성벽력이 요란하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미 한낮부터 태양이 가려져 어두컴컴한 가운데서 산봉우리가 쪼개질 정도로 번개가 내리쳤건만, 한밤중에 갑자기 뇌성벽력이 더 광범위해지고 더 강력해져 있었다.
콰콰콰쾅-!
쏴쏴쏴쏴-!
지축을 흔드는 천둥소리와 함께 장대비도 퍼붓듯이 쏟아졌다. 이 정도면 하늘에 구멍이 난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곧 천지가 멸망할 것만 같군.”
“하늘이 더욱 크게 노하셨구나!”
“산 위에서는 대체 어떤 전투가 벌어지고 있기에…….”
탁운비 일행의 주위로 모여든 이백여 명의 무인들이 손으로 빗물을 훔쳐내며, 연신 탄식을 흘렸다.
한데 그때였다.
“아! 저쪽에서 마교도들이 짓쳐오는 기세가 느껴집니다!”
“잠깐만요! 동쪽 산등성이 너머에서도 엄청난 사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럴 수가! 천마교가 모든 마교도를 삼문협으로 집결시켰단 말인가?”
“설마 사도련마저도 이곳에?”
급작스럽게 몰려드는 형세를 느낀 몇몇 무인의 말에 무인들이 더욱 기세를 잃어갔다.
“우리는…… 아무 소식도 없는데…….”
“아-! 삼문협에 잘못 왔구나!”
“욕망은 패망의 지름길이거늘, 욕심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무인들은 안간힘을 짜내어 끌어 올린 전의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며칠째 쉬지 못해 육신의 피로가 깊고, 내공의 소모도 많아 심히 지쳤기 때문이리라.
누군가 홀연히 중얼거렸다.
“맑은 아침이 올까……?”
“…….”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과 좌절로 마음마저 굴복당한 모양이었다.
탁운비가 그 모습을 보며 의기를 불태웠다.
“그건 일단 나중에 생각합시다. 이곳에는 일부만 남고, 나머지 분들은 비를 피합시다!”
“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니, 일단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아직 격전을 치르고 있는 탁 대협과 벽 곡주는 어찌합니까?”
“저는 아직 여력이 있으니, 이곳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힘이 있으신 분은 진법을 유지해주시고, 상처가 심하신 분들은 먼저 피하십시오!”
탁운비가 과단성 있게 외치자, 백하련과 제갈영이 바로 반박해왔다.
“탁 무사님! 잠시만요!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됩니다.”
“한꺼번에 움직이면 진세가 무너질 위험이 큽니다!”
“다들 지쳤습니다. 우리가 당장 이곳에서 도망칠 수도 없으니, 그게 낫습니다.”
그때, 주변에서 한둘씩 탁무위의 뜻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괜찮소. 내가 힘을 보태겠소!”
“비록 폭우가 반갑지는 않으나, 나 황하신룡은 수공에 일가견이 있소이다. 동도들께서 믿어준다면 나 역시 대의를 거들겠소!”
“다들 고맙소이다!”
두 책사의 예상과 다르게, 황하신룡을 비롯한 몇몇 강호 고수들이 의기충천하여 자원했다.
우문혁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본인 역시 다시 싸울 준비가 되었소. 동도들께서 보호해주신 덕분이오. 여러분께선 처음부터 합류하셨으니, 이제 좀 쉬어두는 게 어떻소? 나와 바꾸면 될 거요!”
“아! 감사합니다.”
그런 식으로 많은 무인이 큰 뜻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자, 백하련과 제갈영이 다소 민망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탁운비는 그런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더니, 모두에게 외쳤다.
“정검신협께서 경천동지의 대결을 벌이는 중이시오. 잔백마군을 쓰러뜨린 후 절대천마와 사령신군을 대적하는 것이니, 그야말로 천외천의 일전이지 않겠소? 정검신 협께서 저리 고군분투하시는데, 우리도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옳소!”
“맞습니다. 정검신협께서는 우리보다 더 힘드시겠지요.”
탁운비의 말이 좌중의 마음에 스며들며, 뭇 무인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과연 탁 맹주님의 자제답게, 부친을 쏙 빼닮으셨구려.”
“역시 호부에 견자 없다던 옛말이 틀리지 않았소!”
“그뿐인가? 벽력신창 탁 대협의 의기마저도 느껴지는군.”
“그리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다들 이 위기를 함께 잘 견뎌냅시다!”
벽력신창 탁무위와 빙화곡주 벽소군은 천마교의 종주들과 맞서서 격전을 치르는 중이라, 탁운비의 말에 다들 여러모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우문혁이 감탄한 표정으로 탁운비의 곁에 다가왔다.
“탁 무사님에게서 진 대협의 의로운 모습을 엿본 것 같습니다. 대단하십니다.”
“과찬이오. 우문 무사도 알다시피, 진 대협은 상황을 뒤집을 힘이 있으나 나는 그렇지 않은 까닭에,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이오.”
“맞습니다. 진 대협이 산 위에서 분전하니 산 아래에선 우리가 뜻을 모아야 하니까요.”
“내 말이 그거요. 누가 뭐래도 가장 힘들게 싸우는 건 진 대협인데, 도와야 하지 않겠소?”
탁운비는 자신의 선의를 단박에 이해한 우문혁과 의기투합했다.
그렇게 탁운비를 중심으로 무인들이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다.
천지사방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적은 여전히 많았다.
귀역무간진이 사라졌음에도 남아 있는 악귀들과 마인들, 저 멀리서 덮쳐오는 마교도들과 사파 무인들까지 끝이 없었다.
그들은 귀무가 걷혔으나 어둠과 빗줄기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천혜의 운무 속에 몸을 숨기며, 더욱 까다로운 상대로 변해갔다.
하지만 무인들의 눈은 정기로 다시 빛나고 있었다.
한 줄기 희망의 끈이 있는 한, 아직 끝난 건 아니리라.
***
그 시각.
신마황동 남쪽의 산 중턱 암자에서 삼문협 일대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내려다보는 이들이 있었다.
“탁탑천왕. 상황을 말하라.”
“존자시여. 일대에 모여든 만백성이 우왕좌왕하며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회색 장포의 금면인, 탁탑천왕(托塔天王)이 천리지청술(千里地聽術)로써 사방의 소리를 귀담아 듣더니, 위엄찬 옥좌에 앉아있는 금면인 적문강에게 공손히 말을 올렸다.
“후후후. 원하던 대로군. 드디어 우리 천룡부가 천하 역사에 이름을 새기는 순간이 왔구나.”
“천추에 둘도 없는 큰 뜻을 이루실 존자께 미리 감축드리옵니다.”
“고맙다. 하나 그 인사는 사흘 후에 받지. 미리 받아봤자 감흥이 없구나.”
“자정이 넘었으니 이제 이틀 남았습니다.”
“그런가? 후후! 이틀밖에 안 남았다고 하니 심장이 더 떨려오는군.”
존자라 불리는 적문강이 태연하게 대꾸하며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곧바로 사라졌다. 바로 청색 장포의 금면인, 금적서생(金笛書生)이 건넨 보고 때문이었다.
“존자시여. 사도련의 일천 무인들이 진격해왔습니다. 하지만 막 궁주는 끝내 명을 받들지 않았습니다.”
“허! 막 궁주가 감히 내 뜻을 거절해? 우리가 그토록 지원을 해줬는데도?”
“심마에 들어 무공을 잃은 듯했습니다. 그래서 대신 신물을 받아 왔습니다.”
“정말 용사건곤패잖아?”
적문강이 용사건곤패를 건네받더니, 휘둥그레진 눈으로 금적서생을 바라보았다.
“홍 장로께서는 충분히 쓰실 수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쓰는 거야 어렵지 않지. 하지만 심마라니! 그깟 딸 하나 잃은 걸 가지고서는. 심약하군, 정말.”
적문강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혀끝을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흑요궁주 막검해는 일찍이 아내를 잃어 딸 막소소밖에 없었는데, 딸마저 잃은 후 심마를 얻어 세상과 아예 담을 쌓은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나로선 좋은 일이군. 용사건곤패는 사도 공력의 위력을 배가시켜 주기도 하니, 때마침 큰 효과를 볼 수 있겠어.”
용사건곤패(龍蛇乾坤牌)는 흑요궁주의 신물로, 흑요궁주만의 독문무공인 용사팔형의 기운을 불어 넣으면 신비로운 빛을 내어 신분을 증명하는 패였다.
게다가 용사팔형을 통해 사도 공력과 공명하여 위력을 증폭시키는 기물이기도 해서, 탐을 내는 기물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에 핵심인 용사팔형을 적문강은 알고 있었다.
“금무신장!”
“존자시여. 부르셨습니까?”
“준비되었느냐?”
“소장과 병사들은 항시 존자의 명을 받들기만을 기다려왔습니다. 하명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잠시 대공의 성취를 위해 들어갈 것이다. 금무신장이 저 전장을 덮어 천룡부의 이름을 먼저 알리도록!”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황색 장포의 금면인, 금무신장(金武神將)이 아주 충성스럽게 부복하며 외쳤다.
그러다 문득, 극마경의 무인 하나가 쑥대밭이 된 전장을 헤매는 게 보였다.
“흑야로군. 비 맞고 다니는 꼴이 처량해.”
“혹시 존자께서는 저 자를 마음에 두신 것입니까?”
금적서생이 적문강의 말에 곧장 반응하여 의중을 물었다.
“아니. 그냥 봤어.”
“하지만 저 자는 죽여야 합니다. 마음을 돌이키지 않을 자이기에 위험하기만 할 뿐입니다.”
“맞아. 다만 그 무조건적인 충심 하나가 아까울 뿐이야. 내 것이 아니니 당연히 부숴버려야지.”
적문강이 섬뜩한 눈빛을 보이며, 살기를 흘렸다.
“이제 나는 들어가 보겠다. 잘 지켜라.”
“금도신장(金刀神將)과 금린신장(金鱗神將)이 지킬 것이니, 걱정하지 마옵소서.”
적문강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홱 돌려 암자 뒤 절벽으로 다가가 손을 내뻗었다.
그 순간, 절벽 속으로 적문강의 신형이 빨려들며 그의 모습이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번쩍!
콰쾅-!
암자 바로 옆 나무가 벼락을 맞아 불타올랐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 금적서생이 사악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 하늘이 존자를 질투하는군. 하지만 존자께선 모든 걸 다 가지신 분이며, 천하마저 가지실 분이시다.”
뇌성벽력이 가득한 하늘을 보며, 금적서생의 악랄한 웃음이 점점 광소로 변해갔다.
“후후후! 울어라, 하늘아! 울부짖음으로 천상에 서실 황금존자를 경배하라!”
***
신마황동의 산꼭대기는 급변하는 천기를 보는 세 사람의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믿을 수가 없다! 혼돈의 소용돌이가 저리 컸단 말인가! 게다가 그 암운을 내게도 걸치고 있었구나! 구주팔황의 지존인 나를 능멸했다니-!”
절대천마가 분노하여 으르렁거리며 이를 갈았다.
그 옆에서 진우선 역시 천기를 보며 느끼는 게 있었다.
“이래서 혼돈이었구나! 혼돈은 눈코입귀의 칠규(七疑)가 없으니, 하늘에서도 제 몸을 제대로 내보이지 않았어!”
사령신군은 사령통천(邪靈通天)의 비술로 그들보다 더욱 깊이 천기를 헤아리고 있었다.
“혼돈의 중심을 보았는가? 어찌 저리 탐욕스러울 수 있지?”
사령신군이 혼돈의 성격마저 엿보던 중, 갑자기 눈이 까뒤집힐 정도로 놀라며 신음을 흘렸다.
“아-! 혼돈의 장막 속에 어찌 극사의 기운이 박혀 있단 말인가! 그것도 오래되었구나! 언제부터인 거지? 대체 저게 무엇인데 내 빛을 닮았단 말인가…….”
천기를 파헤치던 사령신군이 갑자기 부르르 떨며 말끝을 채 맺지 못했다.
진우선이 물었다.
“무엇을 보았소?”
“허허. 허허허.”
사령신군이 실성한 듯이 초점을 잃은 채 웃음을 흘렸다.
“흐으으-. 모르겠다. 모르겠어. 이해할 수가 없구나.”
“네놈의 빛에도 나처럼 암운이 드리워져 있다. 즉, 사도련에도 금천의 암운이 드리워져 있었다는 거겠지.”
분노에 찬 절대천마가 살기 어린 눈으로 진우선과 사령신군을 노려 보았다.
“아무래도 금천 그놈과도 싸워야겠군. 그 전에 너희 둘부터 얼른 없애야겠다. 명부에 가거든 전하거라. 너희들은 이승의 절대자인 나 천마가 보내어 왔다고.”
절대천마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때, 사령신군이 웃음을 쪼개며 입을 열었다.
“크크크. 하늘과 통하지 못한 네놈은 그걸 못 봤겠구나. 혼돈이 극마마저 삼킬 태세였어. 그게 무엇을 뜻할까? 그와 싸우게 된다면 알게 되겠지. 크크크.”
“뭐라고? 자세히 말해봐라.”
“다 알아들었으면서 뭘 묻지? 크크크.”
절대천마가 차마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생각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 순간, 사령신군이 진우선에게 소리쳤다.
“진우선. 저 천마놈부터 죽여라.”
“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 거요?”
“저놈을 없애면 네가 원하던 천기의 비밀을 말해주마. 금천이라 이름 붙이고서 그놈을 뒤쫓고 있었으니, 충분히 값어치 있을 거다. 어떠냐? 이 정도면 충분히 거래될 거 같은데?”
“잔백마군인 건 나도 알고 있소.”
“그게 아니다. 나는 그놈의 약점을 보았어. 그리고 지금 당장 나를 죽일 수 없으면, 차라리 저놈 먼저 처리하는 게 낫지 않느냐?”
사령신군은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에도 진우선에게 계속 교섭하려 하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화아악-!
칠흑같이 어두운 밤, 뇌성벽력과 폭우만이 가득한 천지에 신비롭고 찬란한 광채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안돼! 안돼!”
사령신군이 죽을 듯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비명을 질러댔다.
혈라에 균열이 생기며, 그의 반사령에 극심한 고통이 임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빛은 점점 더 눈부시게 쏟아져나왔다.
쩍!
쩌저적-!
이윽고 혈라가 반으로 갈라지더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