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천룡부 (3)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는 한낮이었다.
근심 어린 얼굴로 삼문협 일대를 살피던 정무맹 무인들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빈틈없이 치밀하게 수색하고 있으나 생사조차 알 수 없던 진우선 일행을 드디어 찾아낸 까닭이었다.
이에 임무를 총괄하던 만상각 백무원주 이능운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는 이틀을 꼬박 지새운 상태였지만, 더없이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우선아! 무사했구나!”
“무원주님이 직접 오셨군요. 오랜만입니다. 그간 절체절명의 위기가 연이어져 연락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아니다, 괜찮아! 천지조화마저 깨져버린 형국인데, 그게 어찌 가능했겠어!”
이능운이 그리 말하며 진우선을 챙긴 뒤, 곧바로 다른 이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탁 선배님과 벽 곡주님을 비롯해 많은 분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고초가 많으셨으리라 사료됩니다. 머물 곳을 잡아두었으니, 일단 쉬시지요.”
“무원주, 오랜만일세. 자네 말대로 하지.”
“네, 알겠어요.”
탁무위와 벽소군이 그에 대답했다. 만상각과 내당 소속의 무인들 역시 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 보였다.
그때, 황하신룡 교금천을 비롯한 무인들이 진우선의 앞으로 몰려나왔다. 그들은 신마황동에서 구함을 받은 이들만 수십 명이었고, 귀역무간진을 비롯해 무지막지한 진세가 이어질 때 몸을 의탁한 이들도 많았다.
“진 대협, 이제 저는 돌아가 보려 합니다.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후에 시간이 되면 반드시 찾아뵙겠습니다.”
“대협께서 귀한 발걸음을 해주신다면 저희 신룡방으로서는 큰 영광이지요. 황하에 오시거든 꼭 찾아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신룡방의 교금천이 공손히 읍을 올리고 떠나가자, 뒤이어 산서성을 삼분하는 대문파 장천문의 문주가 인사를 건넸다.
“진 대협의 구명지은에 정말로 감사드리외다. 정검신협께서 아니 계셨으면 이 서 모는 이대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오.”
“정말 다행입니다.”
장천문주 서궁이 자신을 서 모라 칭할 정도로 진우선을 극히 존대하면서 말을 이었다.
“인제 보니 정도에 우뚝 선 명성조차 하늘에 닿은 신위에 비하면 아직 부족하더이다. 소인 서궁이 지금은 비록 이름만 전하고 떠나지만, 천하대전을 승리로 이끈 대협의 존성대명은 죽는 날까지 세상에 전하겠소.”
“서 문주께서 이리 극찬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대협은 후에 산서에 오시거든 꼭 장천문을 찾아주시오. 받은 은혜를 십분의 일이라도 갚고 싶소.”
장천문주는 진우선과 짧지만 깊은 교감을 나눈 후에 발걸음을 돌렸다.
정사마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신룡방과 장천문을 시작으로, 강호인들이 소속을 막론하고서 저마다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사람들이 감사를 표하고 다 떠난 건, 한 시진이 지나서였다.
그사이 정무맹의 사람들 대다수는 이능운의 안내를 받아 근처의 장원에 들어가 있었다. 우문혁과 탁운비, 용천월 등만이 진우선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진 대협, 애쓰셨소. 천하에 우뚝 선 터라, 인사만 받는 일도 한참이구려.”
“나 역시 죽다 살아난 것에 너무나 감사한데, 다들 그런 마음이시겠지.”
“진 대협은 이 와중에도 모두의 심정을 헤아리고 있었소? 과연 품이 넓으시오.”
우문혁이 진우선의 말을 들으며 감탄을 쏟아내자, 탁운비가 대화를 이어갔다.
“진 대협이 천하대전에서 극적으로 물리치지 않았다면, 저들이 구사일생이나 할 수 있었겠소? 하하하! 진 대협의 이번 일은 강호사에 깊이 새겨질 거요.”
“탁 형,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천마교에 숨어 강호를 어지럽히던 천룡부가 마각을 드러냈으니,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
“하긴, 그 말이 맞소. 천룡부가 그저 금천이라는 미지의 적인 줄 알았건만, 천마교에 속해 양분을 빨아먹고 자랐으며, 사황에 버금갈 실력을 지니고 있었을 줄이야 어찌 알았겠소! 게다가 혼원혼천 영겁대진이라니!”
탁운비가 감히 두려운 마음을 탄식으로 흘려냈다.
사실 그를 비롯한 정무맹의 사람들은 이미 진우선에게서 삼문협 대혈겁의 개략적인 전말을 전해 들은 상태였다.
그때 다들 어찌나 놀랐는지 누군가 천하대전이라 중얼거려도 반박하는 이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천룡부의 주인인 황금존자가 극마와 극사를 다 이루었다는 말에 혼비백산해버렸다. 전설 적인 존재인 일신일마일황, 즉 창궁진인과 천마와 사황에 얽힌 비사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다들 대화는 천천히 하시죠. 일단 진 무사님을 모시고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아직 정양하셔야 하니까요.”
용천월이 냉정하게 말하자, 우문혁과 탁운비의 표정이 일순간에 딱딱해졌다.
그에 진우선이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용 무사님. 저는 일단 괜찮습니다만, 안내를 부탁합니다.”
그날 저녁이었다.
진우선은 홀로 쓰도록 마련된 독채에 들어가 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정기신을 안정시켜야 한다!’
진우선이 각오를 단단히 다지며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혼백과 육신이 불화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진우선의 혼백이 육신을 떠나려 하니, 상황이 급박하여 검노야가 얼른 선기로 붙잡고 상청영단의 영기로 붙들었을 뿐이었다.
제대로 안착한 건 아니었다.
“크으…….”
입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크게 상한 정기신이 요동치고있어 어지럽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럴수록 집중을 유지하려 애썼다.
이윽고 실낱같은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 대자연이 본디부터 지녔던 기운이 진우선의 의지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제!’
집중이 더욱 고조되었다.
신체에 조금씩 어리던 선천지기가 황금빛 용의 자태를 그려내기 시작하더니, 진우선의 육체를 관통하여 감싸 안았다.
곧 육신에서 금빛 후광이 피어올랐다. 패왕금룡신공의 호심진기가 먼저 일어나 호심강기를 이끌고 있었다.
그런데 힘껏 날아오르는 건 패왕금룡신공의 황금룡만이 아니었다.
우우웅-!
대기가 급속히 빨려들었다. 천지사방에서 수목화토금의 오행진기가 급류를 타듯이 몰려들며 심혼이 오싹해지는 파동을 자아냈다.
산천초목은 자신의 기운을 조금씩 나눠주었을 따름인데, 한곳으로 쏟아지니 어마어마한 거력으로 변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화아아-!
거대한 빛의 굴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단전 속에서 쌀알 같던 광륜이 깨어나며 섬광을 번쩍 터트리더니, 찰나간에 한없이 뻗어나가 품을 넓히고서 퍼붓는 오행진기를 맞이했다.
그렇게 선천지기가 혼령을 채우고, 오행진기가 육신을 채웠다. 패왕금룡신공과 오행진기가 끝없이 상생하며 부조화하던 정기신을 안정시켜나갔다.
그러던 중.
‘이건?’
기운의 홍수 속에서 고고히 흐르는 무언가를 느낀 순간, 그 정체를 깨달았다.
‘아-! 스승님!’
이는 검노야의 흔적인 선기가 틀림없었다.
혼돈기를 흩뜨려 날려버린 선기가 천지간에 깃들어 있다가, 지금 다가오는 것이리라.
[내 기운이더냐? 이런 식으로 우선이 네게 주게 될 줄은 몰랐거늘. 허허! 네게 득이 되면 좋겠구나.]
진우선의 마음을 느낀 검노야가 따스한 마음을 전해왔다. 신기하게도 선기에 그의 염원이 깃들어 있는지, 혼과 육을 이전보다 더욱 단단히 결속시키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가슴속에서 격렬한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눈에서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
다음날 정오 무렵이었다.
엊저녁에 진우선 일행의 소식을 접한 만상각주 공야청과 현청각주 여문탁이 어느새 무리를 이끌고서 삼문협의 장원에 도착해 있었다.
“지난밤에 신비로운 광채가 일었다더군.”
“각주님, 그걸 벌써 들으셨습니까? 실로 황홀할 정도로 신비로운 빛이었습니다. 근데 악전고투를 치른 이들에게 물어보니, 이 신광이 무간지옥 같았던 진세 속에서 홀로 천하를 밝혔다더군요.”
“허! 그랬었군. 하긴, 그랬으니 천지를 가려버리는 극악무도한 사태 속에서 이리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겠지.”
이능운의 말에 공야청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잔백마군이 귀역무간진을 펼친 후 삼층귀력으로 더욱 강화했고, 나중에는 극마극사의 황금존자가 혼원혼천영겁대진으로 한 단계 더 심화시켰다고 합니다. 피를 빨아 마시고 혼백을 잡아먹으니, 인세의 지옥이 따로 없었다더군요!”
“그게 정말인가? 말도 안 돼! 믿을 수가 없군.”
“진 무사를 발견했을 때 넋이 나간 마냥 사람이 텅 비어 보였습니다. 강호에 우뚝 선 그조차 목숨을 던지며 온 힘을 쏟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겠지요. 어젯밤의 광채는 그걸 회복하는 과정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공야청과 이능운이 천하대전에 관해 간략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공야청은 상황을 전해 들을수록 심히 놀랐다.
“그럼 진 무사에게 기별하지 말게. 그게 하룻밤 만에 될 리가 없으니 말일세. 조금이라도 더 회복에 전념할 수 있도록 놔두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기별하지 않았습니다만, 진 무사는 각주님이 오신 걸 알아챘을지도 모릅니다.”
“설마!”
공야청의 놀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밖에서 한 음성이 들려왔다.
“진우선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이능운이 허락하자, 진우선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진 무사. 정말 고생 많았네. 무탈한가?”
“저는 괜찮습니다. 오히려 각주님께서 큰 근심 걱정 속에 계시지 않습니까?”
“허, 그런가?”
공야청은 진우선의 맑고도 깊은 눈빛에서 형언할 수 없는 경외감을 느꼈다.
천지의 이치를 통달한 듯하니, 그 앞에서 자신은 마치 한낱 촌부에 지나지 않으리라.
실로 일세의 기인이었다.
그에 공야청이 진우선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진 무사, 자네는 혹시 탈경에 이르렀는가?”
“아닙니다. 선도를 깨우치는 일은 어렵지요.”
“그런가? 뭔가 탈속한 존재처럼 느껴졌는데, 내 착각이었나 보군.”
그에 진우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가벼운 미소만 지어 보였다.
“진 무사. 아직 못 들었을 거 같아 말하네만, 천룡부가 복양에서 문을 열었네.”
“아예 개파를 한 겁니까?”
“그렇다더군. 흘깃 들어보니 아예 성채를 쌓았는데, 천룡상단이 꽁꽁 감추고 있었던 모양일세. 그리고 이 무원주에게 들어보니, 진세 속에서도 천룡부의 무리가 크 게 외쳤다더군. 아마 원단쯤에 말이지. 그게 개파를 알리는 선포였을 거야.”
“아-!”
진우선이 탄성을 흘렸다.
황금존자의 실체를 쫓기 어려울 거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까닭이었다. 하지만 바꿔말하면 그는 강호를 상대로도 자신이 있다는 것이니 심히 우려되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 더욱 심각한 건, 천룡부로 인해 맹이 현재 위태롭다는 사실이네.”
공야청의 얼굴에 드리워진 수심이 더욱 깊어졌다.
“맹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장로원의 왕 노사가 반기를 들었는데, 알고 보니 천룡부에 속해 있었어. 진양각과 광명각이 그에게 넘어갔다네.”
“그럼 지금 맹이 둘로 쪼개진 것입니까?”
“그렇지.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여기 현청각주가 삼문협으로 출발하자, 그가 들고 일어섰어. 일단 맹주님과 냉 당주가 그들을 맞서고 있다네. 우리더러는 삼문협의 일을 먼저 해결하라더군.”
“삼문협에 펼쳐졌던 천마교의 대계는 끝났습니다. 흑야를 비롯한 잔당이 쫓기듯이 물러갔습니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현청각주 여문탁이 눈을 빛내며 진우선에게 물었다.
“진 무사. 나는 여문탁이네. 나와 공각주는 천룡부에 대해 아는 바가 적어 자네의 의견을 구하고자 새벽부터 달려왔지. 자네가 쫓았던 금천이 천룡부라던데, 혹시 더 아는 바가 있는가?”
“그리고 혹시 적문강도 천룡부에 속해 있는가?”
여문탁과 공야청이 연이어 물어왔다.
“각주님. 적문강이 천룡부의 주인인 황금존자입니다.”
“뭐, 뭐라고?”
공야청이 화들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그가 극마극사를 이루었구나. 천마교의 마영이 극사경에 올라있었다 하여 천룡부의 주요인물인 줄로만 알았거늘!”
공야청의 음성이 부르르 떨려왔다. 분기탱천한 까닭이었다.
“한데 마영도, 적문강도 가짜입니다. 그의 본질은 주문강이었습니다.”
“헛!”
그 순간, 공야청의 눈이 터져 나올 듯이 커졌다.
“주문강? 서, 설마 금왕(金王) 주문강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