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욕망과 숙명 (2)
방각 선사가 소림사 산문 앞에서 진우선 일행을 맞이했다.
“공 각주, 반갑네.”
“방장,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도련이 결성될 때 뵈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게 벌써 십 년도 더 되었군요.”
“그렇지. 세월이 참 빠르군. 그동안 공 각주는 천하를 자애롭게 굽어보는 현자가 되었고. 허허!”
“과찬이십니다. 아직 갈 길이 먼 중생일 뿐이지요. 그래도 귀를 열어두었더니, 방장께서 세존의 덕을 품으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그건 뜬소문일 뿐일세. 아직 수양이 깊지 못해 불조(佛祖)의 형상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네. 하지만 말이라도 고맙군.”
방각 선사는 일전에 공야청과 안면이 있었다.
이어서 그가 옆의 중년 도사를 소개했다.
“공 각주, 이쪽은 무당파 태화궁주인 청풍진인이라네. 때마침 본산에 머물고 있어 공 각주의 뜻을 전했고, 힘을 보태기로 하셨지.”
“태화궁주셨군요. 강호에 내려와 큰 도를 몸소 행하신다는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정무맹 만상각주 공야청입니다.”
“무당의 청풍이라 하오. 천하대전을 수습한 정무맹의 협의지사분들과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영광이오. 꼭 뵙고 싶었소.”
무당파 장문인의 사제이기도 한 청풍자가 그리 대답하며, 잔뜩 기대감 어린 눈으로 한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진 무사를 바로 알아보신 모양이군요. 실로 진 무사의 공로가 없었다면, 천하대전의 대혈겁이 얼마나 더 심했을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공야청이 천연덕스럽게 진우선을 치켜세우며, 자신의 옆자리에 세웠다.
“진우선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역시 정검신협이셨군. 무당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네. 빈도를 비롯해 모든 무당 제자가 삼문협에서 심히 절망에 빠졌었는데, 대협의 신위에 놀라고 감탄하고 안도할 수 있었다네!”
청풍자가 가슴속의 뜨거운 감정을 마구 쏟아냈다.
방각 선사도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미타불! 정검신협의 도가 지극하니, 나 역시 한없이 우러러보게만 되는구려. 과연 온 강호가 칭송할 만한 귀인이시오. 오늘 이렇게 본사에 모시게 되어 참으로 영광이오.”
“과찬이십니다. 그간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허허!”
방각 선사와 청풍자가 진우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감탄의 웃음만 계속 흘렸다.
소림과 무당, 강호의 두 명문정파에서 오랫동안 수련했음에도 이처럼 극진하고 그윽한 기운은 난생처음 경험하는 까닭이었다.
그때, 방각 선사의 눈빛을 유심히 본 진우선이 입을 열었다.
“방장께선 천기를 보셨군요.”
“맞소. 하늘을 보니 본산에 짙은 암운이 드리워지고 있더이다.”
“그 흑암의 혼돈기가 바로 천룡부주 황금존자입니다. 천하대전을 일으킨 건 천마교이나, 대혈겁으로 완성한 건 그였지요.”
“가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고 들었소. 어찌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런 악마 같은 일을 벌일 수가 있는지…….”
“그래도 방장께선 초연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진우선이 다소 안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방각 선사가 그런 진우선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곧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그것도 다 들여다보신 모양이구려. 대협이야말로 진정 신인이라 하겠소.”
“혼돈의 기운은 탐욕이 그득하여 사방을 다 먹어치우며 몸집을 불리더군요. 가까운 곳에 방장 같은 고승께서 계시니 놓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후우-. 사실 어렴풋이 추측은 했다오. 한데 신인도 그리 말하니 틀림없겠구려. 애석하게도 세상만사에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는 것 같소.”
방각 선사는 자기 일을 남 일처럼 말하고 있었다.
사람이 어찌 생사의 문제에 초연할 수 있으련만, 그는 자신을 옥죄어오는 혼돈의 공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는 아마도 불법을 깊이 닦아 등각(等覺)의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리라.
“황금존자가 삼원합일을 이루어 생사경에 오르려 하기에 그렇습니다. 화산지도로써 이루고자 했으나, 그게 막혀 이곳으로 방향을 돌린 모양입니다.”
“아-!”
방각 선사는 생사경이란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생사경은 탈경의 한 이름이니, 그가 등각을 이루어 극경을 넘어섰어도 감히 감당치 못할 경지였다.
청풍자를 비롯한 좌중 또한 진우선의 말을 듣고서 화들짝 놀라 경직되었다.
“신인, 그게 정말이오? 그럼 혼백과 귀들이 빨려 들어간 게 모두……!”
“맞습니다.”
“허어-!”
청풍자도 탄식을 터트렸다. 지옥 같았던 순간이 절로 떠오른 까닭이었다.
“아……!”
“이럴 수가……!”
한데 공포는 쉽게 전염되는 법이라, 좌중 역시 심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특히나 그 상황을 직접 겪었던 이들은 얼굴이 흙빛으로 질려 갔다.
숭산에도 지옥도가 펼쳐질까 싶어 벌써 두려워하고 있었다.
“갈! 다들 마음을 가라앉히시게.”
방각 선사가 정명한 사자후를 터트리며, 얼른 장내를 진정시켰다.
그러더니 진우선 일행을 바라보았다.
“일단 귀빈들을 안으로 모시겠소.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서 나누는 게 좋을 것 같구려.”
***
커다란 배 한 척이 장강에서 동정호로 접어들었다.
“하아…….”
뱃머리 난간에 기대어 선 귀공자 같은 무인, 용천월이 한숨을 흘렸다.
강바람이 그를 때렸다. 가느다란 턱선과 뽀얀 목선이 드러날 정도로 세찬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얼굴에 어린 근심을 날려버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천월아.”
“탁 장로님.”
“네 조부이신 용 노사께선 강하신 분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장로원의 삼대봉공 중 한 명인 용화성은 독에 당해 반도들에게 붙잡힌 상태였다.
그를 포로로 사로잡은 건 용 노사가 오랫동안 아끼던 아우, 왕동웅 노사였다.
“말씀 감사합니다. 아마 어떻게든 독을 상대해내실 겁니다. 다만 제가 이토록 큰 배신감을 느꼈으니, 조부님께선 더 심하시겠지요.”
“그러게나 말이다. 나조차 뒤통수가 얼얼한데.”
“종종 왕 노사님의 욕심이 심하다고 느끼긴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용천월은 옛 기억이 떠올라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짙은 탐심으로 번들거리던 왕동웅의 눈빛은 뱀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배가 도착하는 즉시 배반자들을 제압할 생각이다. 냉 당주라면 이미 방법을 찾아놓았을 테지.”
“그렇겠군요. 조부님을 구하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도록 저도 단단히 준비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이다.”
타무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용천월의 옆에 서서 잠시 강바람을 맞다가 입을 열었다.
“한데 그것뿐만이 아니지 않느냐?”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네 마음 말이다.”
“…….”
용천월이 아무 대답도 못 한 채, 휘둥그레진 눈으로 탁무위를 바라보았다.
“네 눈빛을 보니 알겠더구나. 그건 옛날에 내가 사매를 보던 눈빛이었어.”
“아……!”
“나는 사매에게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그게 평생에 깊은 후회로 남았고, 한 번 어긋나기 시작하니 되돌릴 수가 없더구나. 결국, 오늘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장로님께서 그분과 백년해로하셨다면 참 잘 어울리셨을 텐데, 제가 다 아쉽습니다.”
“그러니 너는 나처럼 후회하지 말라는 소리다.”
탁무위가 하염없이 동정호 수면만을 바라보았다.
햇살에 반짝이는 수면은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서 살아 숨쉬는 염능파의 옛 모습이고, 찰랑이는 물결은 그녀의 잔잔한 미소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용천월이 동정호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그게…… 너무 잘 어울려 보였어요.”
“너도 잘 어울린다.”
“하지만 벽 곡주를 능가하지는 못할 거예요.”
“허! 예전의 자신감은 어디로 갔느냐? 하도 그 모양으로 다녀서 네 본모습을 잊은 모양이구나. 강서에서 너보다 대단한 사람은 없다. 네가 괜히 용천월인 건 아니잖느냐?”
“그래서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무위에서 너무나 차이가 나니…….”
용천월의 실력은 동년배 중에서 단연 손꼽힐 정도이며, 내당에서 적수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빙화곡주 벽소군에는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저절로 위축되었구나. 어쩜 내 옛 모습과 이리 비슷할까?”
탁무위는 왠지 용천월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탁 무사님이 부럽습니다.”
“너에게도 아직 시간이 있다.”
때마침 뒤편에서 탁운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부님. 용 무사. 식사하러 오십시오.”
“상황이 참 묘하군. 제 말을 하는 줄은 어찌 알고.”
***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시각.
장사의 한 장원에서 아주 비밀스러운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계획이 너무 늦어졌어. 대체 어쩔 셈인가? 이래서야 내가 자네들 두 사람을 어찌 믿고 큰일을 맡겨?”
“송구합니다.”
“그딴 쓸모없는 말은 하지 말고, 얼른 대책을 꺼내 보게! 이미 천룡금문과 천룡마문, 천룡사문이 일어섰어. 천룡오문 중에 우리 천룡백문이 가장 늦었단 말일세.”
천룡부에 속한 천룡오문(天龍五門)은 천룡상단을 비롯하여 금마사백(金魔邪白)의 네 문파까지 총 다섯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탁 맹주의 무위가 예측한 바를 뛰어넘었습니다. 아무래도 문주님께서 탁 맹주를 상대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아-! 좌우호법인 자네 둘이 협공을 해도 부족했단 말인가?”
“그가 극경의 초입에 올라선 듯합니다.”
“뭐라? 제길! 탁 맹주가 모두를 감쪽같이 속이고 있었군! 신기수사의 이목을 가리는 것도 이제는 어려운데…….”
“그걸 거의 다 쓰신 겁니까?”
“그래. 하나 남았다.”
“그럼 내일뿐이겠군요.”
“그래. 그러니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겠군.”
세 사람의 목소리가 하나의 결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피윳-!
“누구냐!”
날카로운 비도 하나가 창살을 뚫고 쏘아져 나왔다.
곧이어 셋은 심각한 표정으로 문을 박차고 나왔다.
“…….”
하지만 그들을 맞이하는 건 적막뿐이었다.
유독 덩치 큰 노인이 저 멀리 나가떨어진 단검을 힐끗 보더니, 창문 근처로 다가갔다. 이윽고 싸늘한 눈초리로 입을 열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다. 좀 전까지 첩자가 있었어!”
“설마 우리 셋의 이목을 모두 피했단 말입니까? 그런 아이는 본문에 없습니다.”
그게 여태까지의 세 사람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각자 진양각과 광명각을 샅샅이 살펴라! 찾아내!”
“명을 받듭니다!”
***
그 시각.
“대주!”
“철산아. 무슨 일이냐?”
“큰일 났소. 우리가 의심했던 바가 맞았소. 왕 노사는 이대로 세력을 이끌고 천룡부에 입성할 생각이었소!”
“아 !”
광명각 무의대주 엄소백이 부대주 운철산의 급박한 말을 듣고 탄식을 흘렸다.
“근데 발각된 거야?”
“그건 아니오. 아마도 나를 보진 못했을 거요. 암기를 날리는 순간, 급히 몸을 내뺐으니까.”
“다행이다. 그럼 일단 체취를 지우고 와라. 시간을 벌어보마.”
엄소백은 긴박한 상황임에도 침착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로 인해 흥분해 있던 운철산의 기세도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들의 실력은 어느 정도로 느껴지더냐?”
“왕 노사는 극을 바라보는 듯했소. 하지만 항상 그 힘을 낼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소.”
“정확해?”
“느낌이 그렇소.”
“그럼 맞겠군.”
엄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녘의 별은 천강으로 흐르니, 북성천강류를 수습한 운철산은 어둠에 깃들며 밤이 전해주는 이야 기로 많을 걸 듣고 느낄 수 있었다.
“대주, 어떻게 할 생각이오?”
“내당에서 은밀히 연락이 왔다. 탁 맹주님만이 아니라 탁 전 장로님이 내일 당도하신다더구나.”
“진 대협이 아니라?”
“괜찮을 거다. 탁 전 장로님도 무극에 오르셨다고 하니까.”
“허-!”
운철산이 탄식을 흘렸다.
그러더니 맹렬한 눈빛을 쏘아대며 결심을 전했다.
“사공 각주는 내가 맡을 거요.”
잠시 후.
문밖에서 한껏 공력을 끌어올린 불청객이 느껴졌다.
“엄 대주. 안에 있나?”
“각주님이시군요. 이 밤중에 어떤 일이십니까?”
“들어가서 이야기하겠네. 극비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