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귀환 1권
서(序)
광동성 운부현(雲浮縣) 인근에는 그 무섭다는 강호인들마저 꺼리는 금역(禁域)이 있다.
무절곡(無絶谷).
본래 무절곡에는 곡(谷)이라 불릴만한 공간이 없었다.
하지만 먼 과거.
두 절대고수의 경천동지할 싸움은 평탄한 평지마저도 뒤엎어버렸다. 오래 산 노인들은 말했다. 커다란 폭발이 있었다. 군부에서 엄금한 화약이 터지는 것과 비견할 만한 엄청난 폭발. 그로 인해 계곡이 형성되고, 무절곡이 탄생했다.
무절곡에는 사시사철 늘 안개가 끼어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으니, 그 내부로 들어가면 길을 잃는 게 당연지사. 그렇다고는 해도 안개가 사람 목숨까지 훔쳐가지는 않는다.
하나 무절곡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다.
입곡(入谷)한자, 불생환(不生還)이라.
평범한 농민도, 잘 나가던 상인도, 하늘을 날고 산을 쪼갠다는 강호의 고수도 무절곡에 들어선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한 무절곡이건대…….
한 사내가 안개를 가르며 무절곡을 헤쳐 나오고 있었다.
기인(奇人), 기인이다.
누군가 사내를 보았다면 분명 그리 말했을 터다.
머리는 봉두난발에, 입고 있는 의복은 이리저리 찢겨 넝마나 다름이 없다. 사람이라면 응당 신어야 할 신발은 어찌했는지 맨발로 걷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지라는 생각보다는 기인이라는 느낌이 먼저 든다.
기이할 정도로 담담한 얼굴 탓일까?
아니면 마치 맨바닥을 미끄러지듯 걷는, 축지법(縮地法)과 같은 신묘한 걸음걸이 탓일까? 그도 아니라면…… 사내의 주변을 은은하게 휘감고 있는 검고 붉은 특이한 기운들 탓일지도 모른다.
스스슥.
사내는 분명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데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는, 심지어 개미 새끼 한 마리 보기 힘든 무절곡이거늘. 사내가 움직이는 데 있어 옷자락 스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기이하다.
과연 기인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렇게 사내는 특이하게, 또한 자연스럽게 그 누구도 빠져나온 적이 없다는 무절곡을 벗어났다.
안개의 끝.
입구 바깥으로 벗어난 사내는 담담한 눈빛으로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무절곡은 사시사철 안개가 가득해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곳이지만, 그 입구만 벗어나도 세상은 뒤바뀐다.
계곡의 끝은 드넓은 평야.
그 속에는 작지만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작은 곤충과 동물들과 그들을 위해 양분을 뿌리고, 그들에게서 또 다른 생명을 얻는 수목들이 우거져 있다.
생명이 넘친다,
살아있는 존재들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물처럼 고요하던 사내의 표정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여태껏 담담하게만 보이던 얼굴에 격렬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들이 순식간에 오간다.
분노, 슬픔, 경악, 기쁨, 그리고 아련함…….
“아아…….”
사내의 입술이 처음으로 벌어지며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볼가로는 몇십 년 만에 흘려보는 뜨거운 눈물이 떨어진다.
“중원, 중원이야…….”
입가로는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 * *
와룡객잔.
광동성 무명현(茂名縣)에 위치한 작은 객잔의 이름이다.
비록 크기는 작지만, 무명현 아니, 광동성 전체를 통틀어 와룡객잔을 무시하는 인물은 어디에도 없다.
아니, 없었다.
전대 와룡객잔의 주인, 마전(馬佺)은 황궁에서 인정한 뛰어난 숙수다. 한때는 광동십대숙수(廣東十代熟手)로 이름을 떨쳤으며, 실제로 아직도 그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무엇하랴?
‘요리를 할 수 없거늘…….’
늦은 시각의 텅 빈 객잔.
마전은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입가를 넘어 혀, 목을 타고 넘어가는 뜨거운 화주(火酒)의 기운이 온몸을 달군다. 그 감각에 젖어, 조심스레 잔을 내려놓는 마전의 손은 빠르게 떨리고 있었다.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마전의 입가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 몸이 내 말을 듣지를 않는구나.’
분명 스스로 술잔을 들어 올렸거늘.
만지는 감촉도, 내려놓는 감각도 미약하다.
원인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의원에게 진찰을 받아본 결과, 풍(風)이라는 판명이 내려졌다.
‘풍, 풍이라니……!’
마전의 입가로 씁쓸함이 가득 담긴 너털웃음이 흘러나왔다.
“허허, 이걸 어찌한단 말인가.”
마전이 없다 한들 와룡객잔이 당장 망하지는 않는다. 그에게 직접 요리를 전수받고, 객잔 운영도 배운 둘째 아들, 마정(馬貞)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정은 아직 미숙하다.
배울 것도, 가르쳐줄 것도 많다.
광동성에서 내로라하던 와룡객잔의 가세가 기우는 것도 그 탓이었다. 음식 맛이 예전만 못하다. 오로지 ‘맛.’ 그것 하나만으로 오랜 시간 승부를 보아왔던 와룡객잔의 음식 맛이 바뀌었다.
손님들의 발길이 차츰 뜸해지는 것도 특이할 일은 아니었다.
“오래 살았지, 너무 오래 산 게야.”
마전은 이렇게 된 이유를 자신 탓이라 여겼다.
‘마현(馬賢)아…….’
이제는 볼 수 없는 첫째 아들의 이름.
십여 년 전, 향시(鄕試)에 합격한 아들이 거인(擧人)이 되어 입관하러 떠날 때, 함께 갈 걸 그랬다.
하다못해 이름난 표사라도 고용해 붙여주었어야만 했다. 무릇 사내놈이라면 스스로 세상을 이겨나가야만 한다며 주머니 속에 담은 동전 몇 푼. 아침 일찍 일어나 만든 만두 몇 개만 쥐여 보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욕심 탓이지, 욕심 탓이야.’
떠나간 첫째 아들을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가슴 한편이 먹먹해지는 마전이었다. 더욱 큰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절벽 끝으로 내몬 자신의 욕심이 일을 그르쳤다.
‘공자께서 말하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하셨거늘.’
천지신명(天地神明)이 있다면 그런 자신에게 벌을 주어도 이상하지가 않다. 자식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은 부모가 죗값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아침 식사로 뜨거운 소면을 한 접시 말아먹고, 허리에는 동전 몇 푼 담은 주머니, 오른손에는 만두 바구니를 든 채 환하게 웃으며 떠나가던 첫째 아들.
마현의 얼굴이 마전의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텅, 텅.
답답해지는 가슴을 오른손으로 크게 두들기며.
“현아, 내 아들 현아…….”
구슬프게 읊조린 마전이 다시금 술잔을 들어 올릴 때였다.
달칵.
닫혀 있던 와룡객잔의 문이 열렸다.
“영업시간 끝났습…….”
술잔을 들어 올리던 자세 그대로, 작게 읊조리던 마전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한 사내의 얼굴이 너무 낯익다. 기억 속, 가장 깊숙한 곳에 남아 있는 선명한 기억보다도 더욱 뚜렷한 모습이다.
‘내가 꿈을 꾸는 건가?’
처음 마전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풍도 왔는데, 헛것을 보게 되었다 한들 이상할 것도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 저…… 돌아왔습니다.”
기억이 선명하다 한들.
헛것이 너무 또렷하게 보인다 한들.
그 목소리까지 이리 똑같이 재현할 수 있으랴?
그럴 리가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되었다.
술잔을 들어 올렸던 마전의 손에서 급격하게 힘이 빠져나갔다.
쨍그랑.
술잔이 떨어져 깨져나가는 맑은소리가 정신을 일깨웠다.
꿈이 아니다.
헛것은 더더욱 아니다.
눈앞의 낯익은 사내는, 십 년 전 모습 그대로인 자신의 첫째 아들, 마현이다.
“현아…….”
마전은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다가온 마현이 그런 마전을 부축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위험해요, 아버지.”
“현아, 현아……!”
마전은 마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함께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강하게 내저은 마전이 마현을 부둥켜안았다.
“내 아들. 내 아들 현아. 살아있었구나, 네가 살아있었어.”
아버지의 오열에, 마현의 눈가로도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네, 아버지. 불효자 마현. 이리 살아있습니다. 이리 돌아왔습니다.”
“미안하다, 이 아비가 미안해…….”
마현의 고개가 내저어졌다. 아버지가 미안할 것이 무엇이 있던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불효자인 자신일 뿐이다. 가슴 한편이 너무나 시리다. 얼마나, 얼마나 큰 짐을 마음에 얹어두고 사셨기에 이렇게 말씀하실까? 이리도 오열하신단 말인가?
마현이 기억하던 그의 아버지가 이토록 많은 눈물을 쏟아낸단 말인가.
“연락하지…… 연락 한 번…… 못해서 죄송합니다. 너무나…… 너무나…… 죄송해요.”
침을 꿀꺽 삼키며, 입술을 파르르 떤 마현이 눈물을 왈칵, 쏟아내며 힘들게 말을 이어나갔다.
“현아……!”
아버지의 커다란 오열이 다시 한 번 터져 나왔다.
마현도 그런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린다.
이 층, 잠자리를 준비하던 마정이 내려온 것은 잠시 뒤였다.
제일장(第一章).
마현이 무절곡을 빠져나와,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세월의 흐름이다.
십 년, 십 년이 흘렀다.
강산이 변할 정도로 긴 시간이지만 마현이 마계(魔界)에서 보낸 수십 년에 비하자면 지극히 짧은 세월이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한달음에 고향으로 달려왔다.
다행히 와룡객잔이 건재하며, 아버지도 살아계신다는 이야기까지 들렸다. 정말로 안심했다. 변한 것이 없지는 않겠지만, 크게 잘못된 것도 없다.
아버지가 무사하시다는 이야기에 안도한 마현은 곧바로 몸단장을 했다. 수십 년 동안 그 지옥 같던 마계에서 제대로 씻지조차 못하고 목숨을 연명해왔다. 옷은 넝마에, 머리는 봉두난발. 이런 상태로 오랜만의 해후를 나눌 수는 없다.
저녁때까지 몸을 씻으며, 동네를 돌아다니던 꼬마 아이에게 부탁해 사 온 새 옷을 걸쳤다. 거기에 더해 새 신발을 신고 지면을 내디디니, 너무 오랜만인 감촉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단정하게 자른 후 영웅건을 두르니 제법 그럴싸한 용모의 청년이 마을 냇가에 섰다.
‘제법 잘 어울리잖아?’
처음으로 둘러 본 영웅건이 꽤나 어울리는 것에 만족한 마현은 곧바로 와룡객잔을 향해 걸어나갔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의 향취보다 그리운 것이 바로 가족의 품이다. 마현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축지법을 사용하여 단숨에 와룡객잔의 입구에 도착했다.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인기척에,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울지 않으려고 다짐했다. 한데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기껏 깔끔하게 차려입은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눈물 콧물을 다 짜내며 울었다.
그러기를 한참.
“아버지……?”
이 층에서부터 내려온 동생, 마정의 목소리가 마현과 마전을 일깨웠다. 세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묵묵히 응시하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정은 마전과 달랐다.
오랜만에 돌아온 마현을 보며, 딱히 유쾌하다고만 볼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어지는 침묵에 한참을 망설이던 마현이 조심스레 첫 마디를 떼었다.
“정아…….”
“……그렇게 부르지 마.”
마정이 얼굴을 굳히며 차갑게 답했다. 나름대로 냉정하고, 무섭게 보이려 한 행동이겠지만 마현의 입장에서야 귀여운 동생의 애교와 같이 느껴질 뿐이었다.
어느새 나이가 들어 이마에 주름이 새겨졌지만.
세월의 흐름에 지친 듯 두 눈에 깃들어 있던 반짝임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귀여운 동생일 뿐이다. 그런 동생이, 지금은 한 아이의 아버지란다.
형인 자신보다도 한참이나 앞서 나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조카가 생긴 건가?’
거기까지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하…….”
“…….”
덕분에 마정의 인상은 훨씬 더 크게 찌푸려졌다.
“웃어? 지금 형이, 웃음이 나와?”
마현은 가족들이 무사하면 됐다는 심정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자그마치 십 년이다. 그동안 가족들이 겪었던 심적인 고통은 엄청났다.
마전은 매일 밤 잠자리에서 마현의 이름을 되뇌었으며, 마정 본인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향시에 합격하여, 입관하기 위해 집을 떠나갈 때 마현의 모습은 마정의 기억 속에도 뚜렷이 남아 있었다. 웃으며, 형이 입신양명(立身揚名)해서 금의환향(錦衣還鄕)하겠다던 그 믿음직한 모습을 어찌 잊으랴?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큰 형 마현은 동생들에게 있어 우상이자 꿈이었다.
모두가 어렵다며 일찍이 손을 뗀 글공부를 혼자서 해내었다. 지켜보던 아버지가 학관에 보내, 그 재능이 빛을 발한 순간에는 동네에서 소문난 천재라 불리며 동생들의 자랑거리가 되어주었다.
병을 앓던 어머니를 여의었을 때는, 울고 있는 동생들을 품에 안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어머니가 없다 하여 기죽지 말라며, 다음 날 아침부터 어머니가 해오던 일을 직접 맡아 했다.
마현은 동생들에게 있어 대산(大山)과 같은 넓은 등과 마음을 가진 훌륭한 형이었다.
그런 형.
믿음직한 마현이 십 년 전, 갑작스럽게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
충격을 받은 것은 비단 마전뿐만이 아니었다.
마정과 다른 동생들도 울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만큼이나 구슬피 울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형제 남매를 끌어안아 주지 않는다.
마정은 마현처럼 그리할 자신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충격이 가신 후 일상적인 생활을 시작한 뒤에도 간간이 마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럴 때 형이 있었으면, 이럴 때 곁에 있어 주었으면…… 힘든 나날마다 마현의 얼굴을 그렸다.
그런데, 그렇게나 그리워했는데.
십 년 동안 연락 한 번 없다 이제야 나타났다.
살아있었으면서.
죽지도 않았으면서.
가족들의 속만 잔뜩 썩였다.
마정은 이제 그런 마현이 너무나 미웠다.
차라리 돌아오지 말지.
좋지 않은 마음까지 심장 한구석에서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아, 미안하다. 조카 생각을 하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마현의 태연스러운 말에, 마정의 쌍심지가 더욱 돋아졌다.
“우리 설(雪)이를 형의 조카로 키운 적은 없어.”
“그래도 내 동생의 딸이면 조카지.”
싱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않은 채 말을 하는 마현을 보니 마음 한구석에서 더욱 큰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만약 그리 생각했다면 크게 착각한 셈이었다.
“형은……!”
쾅.
평소라면 아끼던 객잔의 탁자를 이리 크게 내리치지 않았을 터다. 객잔에 있는 물품들이야말로 아버지가 남긴 것들. 자식인 마정이 함부로 훼손할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화가 났다.
분노했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왜 돌아온 거야. 어째서? 뭘 생색 내보겠다고! 뭐 원하는 게 있어서!”
“……정아.”
지켜만 보던 마전이 마정을 말렸다.
하지만 마정의 귀에는 이미 아버지의 목소리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눈시울을 붉힌 마정이 온몸을 부르르 떨며 말을 이어나갔다.
“단 한 번, 단 한 번쯤은 연락할 수도 있었잖아. 아버지, 운(雲)이, 연(蓮)이 생각. 하기나 했었어? 그립기는 했어? 우리는…… 나는!”
“정아!”
마전의 목소리가 조금 더 드높아졌다.
마정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십 년 만에 돌아온 형이다. 마전에게 있어서는 자식이다. 화를 내더라도, 조금 더 안정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게다가 마정은 동생으로서 도리를 넘었다. 어려서부터 형제지간의 서열에 대해서만큼은 엄격했던 마전이다. 나이가 들어 힘이 없어졌다 한들, 그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죄송합니다.”
아랫입술을 꼭 깨문 마정이 그런 마전을 보며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직후 마현을 노려보다, 말도 없이 고개를 홱 돌려 이 층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마전도 그런 마정을 굳이 잡지는 않았다.
“휴우…… 현이 네가 이해해 주거라. 정이도 진짜 네가 미워서 그러는 건 아닐 테니까 말이다.”
“예, 아버지.”
마전의 말에, 마현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이해한다.
마정의 마음을 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터다.
본인이 돼보지 않았는데, 안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오만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 마정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어린 시절, 마현을 가장 잘 따랐던 동생인 만큼 더욱 그럴 터다.
‘녀석, 변한 게 없구나.’
생각해보면 마정은 어릴 때부터 꽤나 다혈질이었다.
일단 저질러 놓고 본달까?
덕분에 나중이 되어서 후회하기가 일쑤였다.
매일 놀리기만 하던 첫사랑에게 차인 날 밤, 마현의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 와 눈물을 흘리던 마정이 떠오른다. 후회한다며, 잘해줄 것을 그랬다며 어찌나 서글피 울던지…….
‘그런 솔직하지 못한 놈이 결혼까지 해서 자식까지 낳았다니, 거 참.’
생각을 하니 또 웃음이 나온다.
그런 마현의 여유에, 마전 역시 안도한 듯 웃음을 흘렸다.
“어찌 됐든 이 아비는, 네가 돌아와서 너무나 기쁘다.”
“저도 아버지를 다시 뵐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합니다.”
“허허허…….”
마현이 빙그레, 웃음 지으며 그런 마전의 몸을 살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사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 특히 머리, 뇌 쪽에 큰 이상이 보였다.
‘풍인가?’
곤란한 병이지만, 또 문제 될 것도 없다.
마현이 손을 쓰면 풍과 같은 병을 치료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조만간 한번 손을 써야겠구나.’
그리 결정하고 나니.
“이제부터는 어찌할 참이냐?”
마현을 보며 마냥 행복한 미소만을 그리고 있던 마전이 물어왔다. 어떻게 할 것이냐? 자식이 무사한 것을 보니, 미래가 걱정되는 게 또 부모의 마음이다. 물론 이제 큰 욕심은 없었다. 그저 무탈하고 건강하게만 지내면 된다.
그리만 말해도 만족할 것 같았다.
“우선 거인의 자격이 없어진 건 아니니, 다시 한 번 관청에 가볼까 합니다.”
십 년이 지났다 하여도, 마현이 향시에 합격한 기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거인이며, 언제든 입관해서 일할 수 있다.
오래전 해놓았던 글공부가 먹고 살길마저 틔워 주는 것이다.
“그거 좋구나. 그래도 너무 무리는 말거라. 제일 중요한 것은 건강. 둘째로 중요한 것도 건강이니 말이다.”
“물론이죠. 건강하게, 아버지랑 정이, 운이, 연아랑…… 제수씨. 그리고 설아랑도 오래오래 살 겁니다. 하하.”
동생들에, 잊지 않고 제수씨와 조카까지 챙기는 마현이다.
그 모습에 마전의 입가로는 또 한 번 너털웃음이 흘러나온다. 문득, 마전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간 마현은 어찌 지내왔을까? 연락이 되지 않았던 십 년 동안, 어찌 살았을까? 하지만 굳이 묻지는 않는다.
이제 막 집에 돌아온 자식이다.
굳이 상처를 파내어 고통스럽게 만들 필요는 없다.
십 년이란 시간 동안 단 한 번의 연락을 하지 못했다.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우리 아들……’
때가 되면 알아서 이야기해주리라.
부모라 하여 자식의 아픔을 마구잡이로 헤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 생각한 마전이 작은 웃음을 흘렸다.
마현 역시 그런 마전을 보고 함께 웃으며 입술을 달싹인다.
“그러고 보니 운이랑 연아는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집 안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총 넷이다.
마전, 마정, 제수씨, 그리고 조카인 마설.
그 말은 곧 나머지 두 동생은 지금 집에 없다는 뜻.
소문으로 듣자 하니 나쁜 일은 없었던 것 같았다.
“운이는 인연이 닿아 개방의 속가제자가 되었단다.”
“개방이요?”
마현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개방이라 하면 구파일방 중 일방을 담당하는 대문파다.
문파를 구성하는 주력 대부분이 거지라고는 하지만,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들은 강호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문파 구성원과, 드넓은 영향력을 함께 갖추고 있는 전통 있는 집단이다. 구파일방의 자리란 아무나 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 개방의 속가제자라니.
출세라면 출세였다.
‘하긴 운이 정도면 훌륭한 무골(武骨)이지.’
어린 시절부터 운동신경 하나는 남달랐던 셋째 동생이다. 게다가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의 마현이 생각하기에 마운은 훌륭한 무골에 속했다.
알아보는 이가 있다면 탐을 내고도 남는다.
“산속에서 웬 거지에게 끼니를 나누어주었는데, 그가 개방의 장로였다고 하더구나. 허허. 운이 좋았지. 덕분에 지금은 무공을 배워 호남표국(湖南鏢局)의 표사로서 일하고 있단다.”
“잘 됐군요.”
고지식한 마운의 성격을 생각하자면 거지는 평생 무리다.
그러니 속가제자를 택해 표사의 길로 간 것은 아주 훌륭한 판단이라고 볼 수 있었다.
“연아는…… 놀라지 말거라.”
“……?”
“해남파 장문인의 직계제자가 되었단다.”
“정말입니까?”
마운 때도 놀랐는데, 마연 때는 몇 배는 더 놀랐다.
아버지가 경고를 한 것도 이해가 될 정도다.
해남파라 하면 구파일방에는 끼지 못하지만, 그 저력은 결코 구파일방에 못지않은 명문 대파(大派)다. 아니, 중원의 최남단. 해남도와 광동, 광서성 일대에서라면 구파일방보다도 더 강한 영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에 문주인 해남검후(海南劍后)는 강호 전체를 통틀어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로 유명했다.
그런 해남파의, 심지어 장문인 직계제자라니?
마현이 떠날 때만 해도 아홉 살배기 꼬맹이였던 여동생이 사고를 쳐도 제대로 친 셈이다.
“네가 떠나고 나서부터 유별난 재능을 보였다. 또래 남자애들하고 싸워서도 밀리지를 않고, 나중에는 인근 동네의 또래 무리들을 이끌고 다니기까지 하더구나. 여아대장부(女兒大丈夫)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지. 허허.”
듣자 하니 왈가닥도 어지간한 왈가닥이던 것 같다.
마현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아도 아닌 여아가 그 정도로 사고(?)를 치고 다녔으면 인근의 해남파 무인의 눈에 띄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해남파의 장문인 역시 여자의 몸인바. 인연의 끈이란 이런 것인가 싶을 정도다.
“모두 잘 되었군요.”
남은 마정은 아버지로부터 와룡객잔을 물려받는다.
듣기만 해도 형제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살아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쁘다. 그가 없는 십 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을지언정, 슬픈 소식은 하나도 없다.
이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으랴?
마현의 마음에 더욱더 풍족한 행복이 차올랐다.
“그렇지. 이제 현이 너까지 돌아왔으니. 정말 모두 잘 된 것 아니겠느냐.”
마전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모두가 잘 되었다.
마전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짐이 훌훌 털어져 나간다.
“잘 되었다, 잘 되었어.”
적막하던 와룡객잔 내부에 따뜻한 말과 웃음이 오간다.
너무나 잘된 일이다.
* * *
가족과의 행복한 해후를 나눈 후, 오랜만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마현은 정겨운 그리움에 또다시 웃음을 흘렸다.
‘이곳도 변한 게 없구나.’
작은 목조침대 하나, 공부를 하는 마현을 위해 준비된 목조책상과 탁자. 세 번째 걸음을 내디딜 때면 삐걱거리던 나무판자. 모두가 먼지 하나 쌓이지 않은 채 깨끗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죽었다 생각하면서도 방을 치우지 않았다.
또한 매일 밤 청소하며 관리했다.
그 일을 한 사람이 동생, 마정이라니 또 웃음이 나온다.
정말이지 솔직하지 못한 동생이다.
‘녀석, 화가 많이 난 것 같던데…….’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화가 났다고 한들,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다.
‘적어도 죽을 때를 손꼽지는 않을 테니까.’
뒤늦게 말하지 못한 것을 후회할 일도 없다.
마계에 있을 때는 달랐다. 당시에는 시간이 적이었다. 일각, 한 시진이 지날 때마다 죽음의 신호가 울리는 듯했다. 입이 세 갈래로 갈라진 괴수, 전설 속에서나 들어봄 직한 용을 닮은 괴조(怪鳥). 몸에서 불길을 뿜는 악마까지. 놈들은 쉴 틈 없이 마현과 두 스승, 동료들을 쫓았다.
그 끔찍한 지옥 속에서 하루를 살아남았다는 것은 곧 기적에 속할 정도였다.
하지만 중원은 다르다.
이곳에서는 하루를 살기 위해 기적을 염원할 필요가 없다. 조급할 필요 없다. 마현은 잃어버린 시간만큼 천천히,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생각이었다.
또한 잃어버린 세월보다 더욱 오래 행복할 예정이었다.
이제는 그럴 자신이 있었다.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마현은 자신이 매일 밤 누워 잠을 자던 목조침대를 한 손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한때는 익숙했던 감촉이, 지금은 너무나 낯설다. 탁자도, 매일 앉아서 글공부를 하던 책상도 마찬가지였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이라…….’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책들을 본 마현의 입가로 작은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도 어린 시절 가장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친구라는 걸까? 서책을 보니 옛 기억이라는 놈이 마구잡이로 고개를 추켜들며 손을 흔든다.
반갑다.
마현은 자연스레 손을 뻗어 논어(論語)를 집어 들었다.
책을 펼쳐 스르륵 종이를 넘긴다.
‘신기하구나.’
다른 모든 것은 세월의 흐름만큼 낯설어졌거늘.
서책의 종이 넘기는 이 감각만큼은 여전히 그대로다.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설 자리가 없고, 예를 알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다.’
불학예 무이립 불지예 무이립야(不學禮 無以立 不知禮 無以立也).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혹되고, 생각하기만 하며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以不學則殆)라.
잊지 않았다.
인(仁)을 중시하던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남긴 논어를 읽어 내려가는 마현의 눈이 먼 과거와 같이 반짝였다.
재미있다. 마현은 선 자리에서 정신없이 논어를 읽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책상에 앉아 다른 책을 펼치고 있었다. 그 사실에 마현은 작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것 참…….”
아무래도 오늘 밤 잠을 자기는 그른 것 같았다.
하지만 뭐 어떠랴?
이미 육체적 능력으로만 꼽자면 인간의 한계를 월등히 벗어난 마현이다. 그 지옥 같은 마계에서의 생활은 끔찍한 고통만을 선물한 것이 아니었다. 하룻밤을 새우는 것쯤, 언제 습격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잠긴 채로 선잠을 자는 것에 비한다면야 아무것도 아니다.
‘즐겁구나.’
무엇보다 너무나 즐거웠다.
처음 글공부를 시작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마현의 전신을 휘감는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책자를 읽어 내리는 마현의 귓가로 아주 오래전, 순수하고 밝은 눈동자로 천자문을 읽어 내려가던 소년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너무나 멀어,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줄 알았던 과거의 목소리였다.
제이장(第二章).
동이 틀 때까지 서책을 읽은 마현은, 가족들이 집을 나서는 소리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한달음에 바깥으로 달려나가니, 마정이 마전을 부축한 채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본 마현은 뒤늦게 해의 위치를 보고 손바닥을 마주쳤다.
‘장(場)을 보러 가시는구나.’
마현의 아버지, 마전이 운영하는 와룡객잔의 자랑거리는 말할 것도 없이 음식의 맛이다. 먹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맛은 분명 뛰어난 숙수의 솜씨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마전은 늘 말하였다.
좋은 재료에서 좋은 맛이 나온다.
될성부른 떡잎은 때깔부터 알아본다고 하였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맛있는 음식은 그 재료부터 다른 법이다. 그렇기에 마전은 오래전부터 식재료를 직접 고르는 것을 즐겼다. 남이 골라와 파는 것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전하시구나.’
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장에까지 나서는 것은 마전의 고집이다. 또한 나쁘게 말해, 아직 마정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현의 입가로 조금 난감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런 건가…….’
음식에 대해서만큼은 지독하리만큼 고지식한 마전이다. 마정의 솜씨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니 아직까지 직접 나서서 장을 본다. 마전의 입장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그가 가진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는 것을 아들인 마현이 모를 리가 없다.
‘정이가 힘들겠구나.’
하지만 마정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너무 가혹한 처사다.
어느덧 그의 나이도 서른둘이다.
처가 있고, 자식이 있는 성인이다.
한데 아직까지도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마정의 속이 얼마나 답답할지는 본인밖에 모를 따름이었다.
‘마냥 잘 되고 있던 것도 아니란 말이지.’
어제는 보이지 않던 작은 문제점이 눈에 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크게 변한 것은 없지만, 자잘한 수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속에 아무런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요리, 요리라…….’
마현은 볼을 긁적였다.
난감할 것 같지만, 딱히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이 부분에도 해답은 있었다.
* * *
마현은 굳이 두 사람을 따라 장으로 향하지 않았다.
지금 뒤를 쫓아가 봐야 안 그래도 불편한 마정의 기분만 더 상하게 할 뿐이다.
‘우선은 내 할 일부터 해야지.’
마현은 뒷짐을 지고 여유롭게 고향 동네를 걸었다.
동네라고 했지만, 와룡객잔이 있는 무명현은 해남도로 통하는 길목에 자리한 덕에 꽤 많은 방문객이 오가는 중소규모의 도시였다. 장도 따로 열리고 있으며, 작은 와룡객잔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덩치가 큰 건물들도 여럿 있다.
‘저긴…….’
걸음을 옮기던 마현이 눈을 빛내며 한 건물을 주시한다.
수많은 건물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황금빛의 커다란 건물이다. 그래서 이름도 황금루(黃金壘). 마현이 어린 소년이었던 시절 무명현에 뿌리를 내린 천하제일상단 황금세가(黃金世家)의 지부 중 하나다.
‘어린 시절에는 저기 한 번 들어가 보는 게 소원이었지.’
나이가 들어서는 북경에 있다는 본단을 구경이라도 해보는 것이 꿈이 되었다. 결국 황금루는, 비록 멀리서 밖에 지켜보지 못했지만 마현의 어린 시절 추억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장소였다.
한데 이제는 그런 황금루를 보아도 큰 감흥이 없었다.
어린 시절의 아련한 그리움을 제외하자면 별 기대도, 감격도 없다. 그 내부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마계에는 저보다 더 엄청난 성들도 가득했지.’
게다가 그런 곳에 사는 놈들 대부분은 일반적인 괴수나 괴조와는 격을 달리하는 엄청난 초강자였다. 그들을 떠올린 마현의 눈이 으스스한 빛을 흘렸다.
‘마족(魔族)놈들…….’
마현의 두 스승 중 주술(呪術) 스승이 붙여준 이름, 마족.
놈들은 말 그대로 초강자였다.
그런 주제에 지독하리만큼 잔혹했으며, 끔찍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마족에 비하자면 강호에서 말하는 마교니, 혈교니 하는 놈들은 갓난아기나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은 볼 일도 없겠지.’
마현은 끓어오르는 살기를 빠르게 가라앉혔다.
이곳은 중원이다.
더 이상 마족을 마주칠 일은 없다.
‘하긴, 더 이상 남아 있지도 않으려나?’
떠오르려는 스산한 미소를 지운 마현이 또다시 동네 구경에 나섰다. 어린 시절 마정과 함께 뛰어놀던 골목길, 그 바로 옆에서 당과 팔던 아주머니는…….
‘이제 할머니가 되셨구나.’
그러고 보니 당시에도 그리 젊은 나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전히 제 자리에서 당과를 팔고 있는 모습이 오히려 신기할 따름. 마현은 주머니를 뒤져 몇 푼 없는 동전으로 당과를 샀다.
“맛있게 드세요.”
할머니가 웃으며 건넨 당과를 입에 넣으니, 달콤한 향이 입안 가득 퍼져나갔다. 추억하는 그대로의 맛이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마전은 마현과 동생들이 이 당과를 입에 물고 다니는 걸 보면 크게 혼쭐을 내곤 했다. 집에서 해주는 밥을 놓아두고 군것질이나 하는 것을 어지간히도 싫어하셨던 기억이다.
“하하…….”
마계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며 씁쓸해졌던 기억이 단숨에 풀어진다. 그렇게 당과를 물고 여유롭게 걷다 보니 어느새 관청 앞이다.
마현은 마냥 여유로운 듯 보이지만 나름대로 계획을 가지고 움직이는 중이었다. 단지 조급하지 않을 뿐이다. 일을 순서대로, 생각해두었던 계획에 따라 하나씩 해결해나간다.
마치 실 매듭을 풀어나가는 것과 같았다.
‘아직 당과가 남았네.’
마현은 입안에서 굴리고 있는 당과의 크기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입에 당과를 문 채 입관 신청을 하러 갈 수는 없으니 말이다.
‘뭐, 다 먹고 들어가면 되지.’
마현은 천천히 혀를 굴리며 당과의 맛을 음미했다.
약 반 각 정도가 더 지나니 제법 커다랗던 당과가 콩알보다 더 작아졌다. 거기서 혀를 몇 번 더 움직이니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린다.
“쩝…….”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마현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막대를 바라보다 힘겹게 관청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입관 신청하러 왔습니다. 여기 증명패.”
관청 앞, 보초를 서던 이들은 그런 마현을 황당한 표정으로 지켜보다 거인의 자격을 알리는 패를 본 후에야 길을 열어 주었다.
“허허, 세상사 별별 놈이 다 있지.”
“그러게 말일세.”
천하는 넓고 기인은 많다.
괜히 있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 * *
한참 후, 관청을 나선 마현은 허탈한 표정으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럴 수가.’
열심히 공부해서 거인이 되었다 한들 무엇하나?
그래 봐야 무직인생(無職人生)이거늘.
‘생각하지도 못했다.’
마현이 향시에 합격한 것은 십 년 전.
다시금 말하지만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세월이다.
그동안 꽤나 비어있던 관청의 자리가 며칠 전 만석(滿席)이 되었다. 더 이상 일할 자리가 없다. 사람은 있는데, 자리가 모자라다. 천재 학사로 잘 나가던 마현이 단숨에 취직 걱정을 해야 할 팔자가 된 것이다.
“허허허…….”
멍하니 걷다 보니 절로 너털웃음이 흘러나온다.
아니, 마족도 물리치고.
심지어 그 마족 중 최고라는 마왕까지 이겨낸 후 마계를 탈출했는데 관리가 못 된단다. 이 무슨 농담 같은 이야기란 말인가? 모두 다 부질없다. 마왕을 물리칠 수 있는 강대한 무공도, 천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강력한 주술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결국.
“무직, 무직인 것을……!”
마현의 입가에서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버지, 동생들,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제수씨, 조카에게 어깨를 펴고 당당한 아들, 형, 오빠, 시형(媤兄), 삼촌이 되려 했거늘. 무직인 이상 모든 게 글러 먹은 셈이다.
“……휴우. 어쩔 수가 있나.”
마현은 작은 한숨을 쉬며 현실을 인정했다. 말 그대로다. 어쩔 수가 있나? 현실에 일어난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고민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법이다. 일단은 수긍이 중요하다. 이후 천천히 생각하는 것이 옳다. 이런 문제란 것이 본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 천천히 해결하자. 순서대로. 우선 아버지의 병부터다.’
마현이 마음을 훌훌 털어낼 때쯤에는 이미 걸음이 와룡객잔 앞까지 이어진 뒤였다.
“킁킁.”
이게 무슨 냄새야?
객잔 내부로부터 풍겨 나오는 고소한 음식 향에 마현의 코가 절로 벌렁거렸다.
꼬르륵.
배에서는 오래간만에 듣는 신호가 흘러나왔다.
입안에 침이 잔뜩 고이는 것 역시 막을 수가 없었다.
‘집 밥 냄새.’
도대체 이게 얼마 만에 맡아 보이는 집 밥 향이란 말인가?
생각해보니 전날 밤에는 해후의 감격에 너무 정신이 없어 밥 한 끼 함께 나누지 못했다. 마현은 반가운 미소를 그린 채 집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음식일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두 여성이었다. 여성이라고는 하지만 한 쪽은 아직 천진난만한 여아다.
마현은 한눈에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정이의 아내와 우리 조카로구나!’
다리에 매달려 애교를 피우는 마현의 조카, 설아를 떼어낸 마정의 부인 초이영(貂怡榮)이 부드러운 동작으로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주버님. 초이영이라고 합니다.”
초이영 역시 단번에 마현을 알아본 듯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수씨. 마현입니다.”
마현은 포권을 취하며 초이영을 직시했다.
동생의 부인이라니 형으로서 호기심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외모가 딱히 뛰어난 건 아니로군.’
따지자면 수수하다. 그렇다고 하여 그 외모에 흠잡을 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수수함 속에 묘한 기품이 숨어 있다. 간결하고 우아한 동작을 보자니 예(禮)에 대해서도 배운 것 같다. 살짝 처진 눈매와 입가는 조신하고 공손한 형태를 그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케 하는 느낌도 보였다.
‘정이에게 잘 어울리는 여인이로구나.’
마현의 입가로 빙그레 웃음이 떠올랐다.
성격이 불같고, 다급하면서도 솔직하지 못한 마정에게 다시없을 천생연분의 배필이다. 그녀라면 동생의 부족한 점을 메워가며 오손도손 즐거운 결혼 생활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 터다.
“설이도 인사해야지. 마현 삼촌이셔.”
갑작스러운 마현의 등장에 놀랐는지, 초이영의 양다리 사이로 숨었던 마설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이제 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조금 어눌한 발음으로 인사를 하는 조카의 모습에 마현의 입가가 크게 찢어졌다.
‘이럴 수가……!’
하늘의 아기 선녀가 이러할까?
넓은 아미와 초롱초롱한 눈빛, 거기에 코는 오뚝하고 입술마저 너무나 앙증맞다. 피부는 이름 그대로 눈(雪)을 닮아 새하얗고 투명하여, 그 위에 씻지도 않은 손을 얹는 것 자체가 불경죄라 여겨질 정도다.
아직은 어린지라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볼살은 또 어떠한가?
진짜 자지러지게 깜찍하다. 괜히 그런 말이 생긴 것이 아니다. 마현은 그리운 집 밥 냄새조차 잊은 채 고개를 흔들며 자신의 조카에게 감탄했다.
‘너무, 너무 예쁘잖아!’
부끄러워하며 초이영의 다리 뒤로 숨는 모습까지 너무나 귀엽다. 마현은 최근 몇십 년을 통틀어 처음으로 신에게 감사했다. 두 부모님의 혈통을 완전히 극복하여 태어난 그의 조카는 천지신명께서 점지해 내려준 아기 선녀인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우리 설아는 몇 살?”
마현이 부드러운 표정을 지은 채 설아에게 다가가 묻는다.
우물쭈물하던 설아는 자신의 오른손을 커다랗게 펼치고는 하나씩 접어 나갔다.
“한 살, 두, 살, 세 살, 네 살, 다섯 살…….”
그리고 한참이나 망설이다, 왼손마저 펼쳐 들어 엄지를 접는다.
“여섯…… 살. 여섯 살이요!”
우물쭈물하면서도 대답은 이리 또 잘하는 게 얼마나 예쁜가? 마현은 설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 살? 우리 설아 똑똑하네. 나이도 똑바로 잘 대답하고.”
“헤헤.”
마설이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웃음을 흘렸다.
아직 학당을 나갈 나이도 아닌데 스스로 수(數)를 세며 이야기한다.
‘내년부터는 글공부를 시켜 봐도 괜찮겠는데?’
천재까지는 아니어도 수재소리는 들을 수도 있다.
마현은 너무 귀엽고 예쁜 자신의 조카가 머리까지 좋은 듯하자 기분이 더욱 들떴다.
“설아 예쁘지?”
주방에서부터 고개를 내민 마전이 그런 마현을 보며 묻는다.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최고로 예쁩니다.”
함께 고개를 내민 마정은 꽤나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음에도, 어찌 됐든 딸아이 앞이라 그런지 불만을 토하지는 않았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아침밥이 다 되어가니.”
“정이가 하는 건가요?”
마현의 물음에 아주 잠시, 씁쓸한 표정을 그린 마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뭐, 이 아비도 일선에서 슬슬 물러날 때가 됐지 않았느냐. 언제까지 다 곯은 늙은 몸을 이끌고 요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허허!”
차마 오랜만에 돌아온 첫째 아들에게 풍이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마전은 마현에게 괜한 걱정을 시키기 싫어 너털웃음을 흘리며 상황을 얼버무렸다.
“다 곯았다니 무슨 소리세요. 아버지는 정정하게, 오랫동안 잘 사실 겁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이미 모든 속사정을 알고 있는 마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되었다. 되었어. 늙어서 오래 살아서 뭐하누. 자식 놈들에게 짐만 될 뿐이지.”
마전은 손을 내저으며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병 탓에 자식들이 부담을 가지는 것은 싫다. 고집쟁이 마전이라면 그런 생각을 하고도 남는다. 어쩌면 병세가 심각해질 즈음에 몰래 가출을 할지도 모른다. 자식들에게 부담이 되어 남느니, 혼자서 쓸쓸히 죽어가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절대로 그리되시진 않을 겁니다.’
마현이 아버지를 못 본 시간이 십 년이다.
그렇다면 두 배는 쳐서, 적어도 이 십 년은 정정히 살아계셔야 한다. 그래야지 효도도 하고, 십 년 동안 속 썩인 죗값을 모두 씻어낼 것 아닌가? 마전이 싫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마현은 이미 마전을 오랜 시간 건강하게 지내게 할 모든 방법을 준비해 둔 채였다.
‘자식 놈의 이기적인 욕심이라고 하시려나?’
그럴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아비를 부려먹을 생각이나며, ‘예끼, 이놈!’이라고 대갈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자식이라고 욕심이 없을 수 있는가?
마현은 빙그레 웃은 채 눈앞의 조카 설아도 어떻게 예쁘고 건강하게 키울지 생각했다.
“요리 다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밥이 나오는 것은 순식간이다.
“아침부터 진수성찬이네요.”
마현을 생각한 것인지, 아침상치고 너무나 화려했다. 따뜻한 백미에, 오색 반찬, 거기에 더해 잘 고아낸 동파육과 유산슬까지. 이걸 정말 다 먹을 수 있을지 고민까지 될 만큼 엄청난 양이었다.
“……신경 써서 만든 거니까 남기지 말고 먹어.”
마정이 마현을 향해 퉁명스럽게 말하며 마전의 접시에 반찬을 덜어주었다. 여전히 화가 난 듯 보이지만, 전날에 비하자면 훨씬 더 나은 모습이다.
마현은 빙그레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노력해보마.”
“먹자꾸나.”
뒤를 이어 마전이 선언하듯 말하자, 식탁 위로 가족들의 손이 오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마현의 손이 간 곳은 다름 아닌 따뜻한 백미였다.
화려한 반찬보다도, 이 소박한 밥 한술이 그리웠다.
적은 양을 수저에 떠 뜨거운 밥을 통째로 삼키니, 입안 가득 열기가 퍼진다.
“후, 하. 후, 하.”
몸의 내기를 돌리면 그 열기를 단숨에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뜨거움을 즐기며, 입가로 바람을 불며 밥을 음미한다. 맛있다. 기억하던 그 맛 그대로 따뜻하고 고소한 밥맛이다. 너무나 그리웠던 이 밥맛에, 마현은 눈물이 핑글 도는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이 자리는 다 함께 밥을 먹는 즐거운 자리다.
눈물을 쏟아내고 서로를 부둥켜안는 그런 신파극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어디 우리 동생이 한 요리들을 먹어볼까.’
젓가락을 들어 동파육을 집었다.
한 입 베어 무니 동파육의 부드러운 질감이 입안을 가득 메운다. 그 뒤를 따라 특유의 육수와 양념 향이 곧바로 퍼지는데, 감상은 간단했다.
‘생각보다 훨씬 맛있는데?’
끔찍했던 마계에서의 생활 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날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 말은 곧, 전혀 없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마전이나 마정만큼은 아니지만 마현 역시 요리는 할 줄 안다. 그렇기에 상황상 재료가 모인 것 같으면 한 번씩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음식을 만들었던 마현이다.
스승님들과 동료들도 그런 마현의 요리를 즐겼다.
지독한 마계 생활에서 일종의 단비와 같았달까?
덕분에 마현의 입맛도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 마현이 느끼기에도 맛있다.
왕년의 마전만큼은 안 되지만, 부족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노력했구나.’
마전이 득달같이 달려드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이만한 맛이 나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간 마정의 노력이 어떠했는지는 이미 음식이 답을 일러주고 있었다.
“아주 맛있구나.”
마현은 감상을 조금도 감추지 않은 채 솔직히 말했다.
“…….”
마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 끝이 실룩거렸다.
웃음을 참을 때의 모습이다. 오랜만에 음식을 맛보는 마현으로부터의 칭찬이 여간 기분 좋은 게 아닌 듯했다.
“제법 늘긴 했지.”
마전도 굳이 이때만큼은 마정을 몰아붙이지 않았다.
화목한 가족 식사 자리.
“이이가 아주버님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천하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겠노라고 다짐했었거든요. 매일 밤 공부하던 모습이 얼마나…….”
“어허!”
초이영이 작은 웃음을 흘리며 비밀을 누설하자, 당황한 마정이 헛기침을 토했다. 하지만 이미 모두 들을 건 들은 채다. 즐거운 미소를 입가로 그린 마현이 마정을 보았다.
“……옛날 일이야.”
마정은 고개를 홱, 하고 돌리며 말했다.
그 속에서,
“아빠 요리 맛있어!”
설아의 큰 목소리가 활기차게 울려 퍼졌다.
“하하하.”
덕분에 마현은 마음 놓고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솔직하지는 못해도 착한 동생.
자식들을 바라보며 뿌듯해하시는 아버지.
동생에게 어울리는 좋은 제수씨.
귀여운 조카까지.
부정할 수 없는 행복이 마현의 마음, 아니 모두의 마음 가득 차오르는 때였다.
* * *
모두가 잠든 늦은 밤.
조용히 책장을 넘기던 마현이 몸을 일으켰다.
‘슬슬 움직여볼까.’
마음을 먹은 순간, 그 어떤 기척과 소리도 없이 마현의 몸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곳은 마전의 방이었다.
‘좋은 꿈을 꾸고 계시는가 보구나.’
잠이 든 마전은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해후한 가족과의 만남이 즐거운 덕일까?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했다.
‘행복하셔야 합니다. 꿈속에서도, 현실에서도. 늘.’
마현은 빙그레 웃으며 오른손을 내뻗었다. 손끝에서부터 피어오른 투명한 기운이 단숨에 마전의 전신을 휘감는다. 마전의 입가에 머문 미소가 훨씬 더 짙어진다. 마현이 훨씬 더 편안하고, 좋은 꿈을 꿀 수 있도록 감각기관의 일부를 조정한 덕이다.
‘풍을 잡아내야지.’
투명한 기운의 형태가 조금 변화하였다. 이전보다 훨씬 얇고 가는, 마치 실과 같은 형태다. 마현은 그를 이끌어 마전의 머릿속으로 집어넣었다. 투명한 기운은 마현이 가진 힘 중 정화와 평안, 치료에 사용하는 이른바, 백결(白結)이다.
마현의 주술 스승이 만들어 낸 이 백결은 마계에 있을 당시에도 수많은 동료들의 목숨을 구한 힘이었다.
깊은 내상에서부터, 심한 외상까지. 심지어 목이 반쯤 잘려나간 사람도 백결로 생명의 원천지기를 몇십 배나 증폭시킨다면 살려낼 수 있었다.
의선이라 불리는 화타도 백결을 보면 경악을 감추지 못하리라.
주술 스승은 자신이 만들어낸 힘에 대한 자부심으로 크게 웃음을 흘리고는 했다.
그러한 백결이 얇은 실과 같은 형태로 변하는 것은 그만큼 세밀하게 기운을 조정할 때뿐이다. 자그마치 아버지의 뇌를 건드리는 일이다. 마현이 아무리 자신이 있다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 아버지를 치료함에 있어 자만은 금물이었다.
‘끝났군.’
풍의 근본적인 문제라 볼 수 있는 뇌의 혈관 치료에서부터, 미세한 문제점까지 깨끗하게 정화 후 치료까지 마친 마현의 입가로 만족의 미소가 떠올랐다.
‘내일이면 깜짝 놀라시겠지.’
이제 마전의 병은 말끔히 사라졌다.
아침에 몸을 일으킨 후 멀쩡히 움직이는 몸을 확인하면 크게 놀라실 게 분명하다. 게다가 마현의 선물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손가락 끝에서 불길한 검은색 기운이 넘실거렸다.
‘흑결(黑結).’
마현의 주술 스승이 지옥 같던 마계에서 만들어 낸 두 번째 힘, 흑결. 이는 본래 마계의 관리라 볼 수 있는 마족들이 사용하던 매우 기묘한 능력을 변형한 종류였다.
‘스승님은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말씀하셨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삼국지의 일화(逸話)로 유명한 손자병법에 나온 명문구다.
마현의 주술 스승 역시 그리 생각하여 마족을 연구했다. 그 끝에 탄생한 힘이 바로 이 흑결이다. 놈들이 사용하는 힘을 인간의 육체에 맞춰 개발 발전시킨 형태. 백결의 공능이 안정과 정화, 치유라면 흑결은 압박, 주입, 혼돈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언뜻 보자면 인체에 사용하여 좋을 것이 없어 보이지만, 딱히 그렇지만도 않다. 흑결의 공능 중 하나, 주입은 사용하기에 따라 주술진(呪術陣)의 형태로 인체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아무래도 심장 쪽이 좋겠지?’
마현은 망설임 없이 흑결의 기운을 마전의 심장으로 쏘아 보냈다. 일반적인 주술사들이 보았다면 뒷목을 잡고 까무러쳤을 광경이었다. 주술진은 본디 일종의 진법(陣法)이다. 특별한 형태의 진에, 주술적 기운을 불어넣어서 완성한 형태. 그를 인체에 새긴다는 것만 하여도 놀라울진대, 심장이라니!
본래 사람의 몸은 정해진 형태의 기운을 제외하고는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선천지기, 그리고 무공의 고수들이 쌓는 자연계의 내기 등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인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기운은 자연에 가까운 형태라는 말이 된다.
한데 주술적 기운은 그러한 자연의 법칙을 크게 위배한 힘이다. 인위적이고, 작위적이다. 그래서 주술을 또 다른 말로 역천(逆天)의 술이니, 사술(邪術)이니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한 힘을 인체에 새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