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一章)
구혜린과 영호충은 무명현을 벗어나, 호남성(湖南城)으로 향하고 있었다.
“장사(長沙)에 은인이 계신다. 그곳까지만 가면 흑천맹 녀석들과 싸울 수 있는 지원을 받을 수 있을 터니, 너는 너무 걱정 말거라.”
“예, 사형.”
영호충은 헤어지기 전과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따뜻하며, 웃음이 많고,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가끔은 헤픈 느낌 때문에 믿음직한 면이 모자라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이란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구혜린의 입장에서는 이제 와서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 스스로 그곳을 떠났으니까.’
무명현을 떠난 이후, 그녀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를 보는 순간 마음이 약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안 돼.’
혼자라면 모를까.
영호충이 있다.
사형인 영호충이 스승님의 복수를 하겠다며 나서고 있다.
한데 그것을 알고도 어찌 외면할까.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알게 된 이상 외면할 수가 없다.
구혜린은 무뎌져 가던 마음의 검날을 가다듬으며, 이를 악문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산길이구나.”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무렵, 둘은 꽤나 험준해 보이는 산의 입구에 도달했다. 오래전에 마을을 지나쳐 왔는데, 주변에 머물러 갈 장소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 안에 넘죠.”
“그래도 괜찮겠느냐? 많이 힘들 텐데…….”
영호충의 걱정에, 활짝 핀 미소를 보인 구혜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이제 와서 되돌아가는 것보다는 낫죠.”
뒤를 보는 것 자체가 두려우니까요.
이어질 이야기를, 억지로 씹어 삼킨 구혜린의 말에 영호충이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가 그리 말한다면야…… 조금 무리해서라도 새벽 안에 산을 넘어보자꾸나.”
“예, 사형. 영 안 되면 노숙이라도 하죠, 뭐. 호호.”
“그건 내가 싫구나? 하하.”
두 사람은 웃으며 산길을 올랐다.
달이 가늘어진 제법 어둑한 날에, 산 특유의 분위기가 어우러져 꽤나 음침한 느낌이 들었지만 문제는 없었다. 두 사람은 모두 초절정에 이른 무인. 마음만 먹는다면 어둠을 꿰뚫어보는 것 따위,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산의 중턱을 막 넘어서던 참이었다.
“음…….”
앞장서 걷던 영호충이 기묘한 신음을 흘렸다.
‘혹시?’
무명현을 떠나자마자 흑천맹의 추격자가 붙었나?
걱정이 된 구혜린이 긴장하며 검병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하나, 걱정은 말 그대로 기우일 뿐이었다.
“배가 고프구나.”
넉살 좋은 웃음을 흘린 영호충이, 자신의 배를 비비며 말한다. 구혜린은 황당한 표정이 되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와룡객잔에서 점심을 먹고 떠난 이후, 여태껏 제대로 무엇하나 챙겨 먹지 못했다.
무공의 경지가 있는 만큼 굳이 먹을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굶을 필요는 없죠. 주변에 먹을 게 있나 살펴봐요.”
“그래 보자꾸나.”
노숙이 싫다는 말과는 다르게, 영호충은 제법 야외 생활이 익숙한 편이었다.
은하검결류를 익힐 당시, 유성신검을 따라 산길을 많이 탄 덕일 터다. 당연히, 산중(山中)에서 음식을 찾는 것에도 꽤나 익숙했다. 구혜린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어디 보자…….’
나무 위의 열매를 따 먹을까?
아니면 독성을 제거한 버섯도 나쁘지 않다.
구혜린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사매! 이것 봐!”
반대편으로 사라졌던 영호충이, 빠르게 되돌아오며 손에 든 무언가를 자랑했다.
‘토끼?’
야생 토끼다.
이 늦은 야밤에 생포하기는 어지간히 힘든 동물이라 말할 수 있었다.
“재주도 좋네요.”
그렇다 보니 절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하하, 녀석들한테 쫓기다 보니, 산속에서 먹을 것 찾는 능력만 늘더구나.”
“……하여간에.”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 만 구혜린이 허공으로 뛰어올라 주변의 나뭇가지를 빠르게 수집했다.
“땔감은 제가 구했어요.”
이후 지면으로 내려앉아, 허리춤에 손을 얹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소리는 듣지 않겠다는 뜻이다.
“하하, 그래, 그래. 우리 사매가 역시 최고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흘린 후, 공터를 찾아 불을 피웠다. 막 잡은 토끼의 털을 벗기고, 내장을 쏟아낸 후 불 위에 올리자 노릇노릇한 고기 향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주변에 있는 산짐승들이 냄새를 맡고 몰려들 수도 있지만 뭐 어떠랴? 자그마치 초절정고수가 둘이다.
산중지왕(山中之王)이라는 호랑이가 나타난다 한들 무섭지 않다.
“참, 여기 소금이요.”
와룡객잔을 떠날 때, 이러한 경우를 대비해 조미료 몇몇을 챙겨 받은 구혜린이 품에서 소금 병을 꺼내 들었다. 노숙을 하며 고기를 구워 먹을 때 소금이 있으면 여러모로 조금 더 맛있게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 것이다.
영호충은 말없이, 그 소금을 받아 들어 구워지는 토끼 위에 뿌리며 입술을 열었다.
“정말 좋은 사람들과 지낸 것 같더구나.”
“……그렇죠.”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정말이란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들과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복수조차 잊을 정도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나날이었다.
‘잊자, 잊자고.’
왠지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지는 감촉에, 고개를 강하게 내저은 구혜린이 자신을 타박했다. 언제까지 추억에 갇혀 있을 텐가? 언제까지 예쁘고 좋은 것만 볼 터인가? 이제 그녀의 인생은 수라(修羅)의 길이라 불려도 부족하지 않을 터다.
추억과 감상 따윈 잊어야 할 사치.
차라리 모른 척하는 편이 나았다.
“듣기 싫다면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마.”
영호충은 그런 구혜린을 보며, 웃으며 말한다.
예전부터 그랬다.
조금 가벼워 보이고, 웃음이 헤프지만 배려는 깊은 사람.
어떻게 보자니 또 마현과 반대되는 인물이었다.
‘그 사람은 다른 건 다 있는데, 배려가 있진 않았지.’
그래도 믿음직했다.
옆에서 보고 있자면 너무나 듬직했다.
그래서 더, 무명현에 기대고 있었을지 모른다.
마현이 있는, 듬직한 사내가 있는 그곳이 너무나 좋아서…….
“자, 다 됐다. 이리 와 먹자꾸나.”
또다시 상념에 빠질 뻔한 구혜린을, 영호충의 짧은 말이 구해주었다. 근처로 다가가, 영호충이 뜯어준 넓적다리를 받아든 구혜린이 작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그것 가지고 뭘. 그나저나 뜨거우니 조심해야 한다.”
아마 영호충은 그녀의 감사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모를 터다.
‘아무려면 어때.’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다.
이제는 정말.
별일 아니라 생각한 그녀가, 말없이 토끼 다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고기 노린내가 제법 진하게 났지만, 먹을 만은 했다.
‘맛있지는 않네.’
와룡객잔의 요리는 끝내주게 맛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여름의 초입에 먹었던 동벽용주와 패왕별희는 결국 그해 여름 내내 크게 대성황을 이루었다.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맛이니, 당연한 일일 터다.
‘또 먹고 싶다.’
내년 여름 아니, 그때가 아니더라도 먼 훗날.
세월이 흐르고 흘러 복수를 끝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면 다시 한 번 먹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먼 미래에는…….
‘다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툭, 툭.
하며 눈물이 방울져 볼 가를 흐른다.
벌써부터 그립다.
떠난 지 고작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무명현에서의 하루하루가 너무나 그리워진다.
‘난 역시나…….’
약하다.
강한 척하고, 제법 영리한 척하지만 바보에 불과한 것 같았다.
“사매?”
그런 구혜린을 보며, 영호충이 묻듯 부른다.
아, 눈물에 놀란 탓인가.
구혜린은 재빨리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내저으려 했다.
한데 그게 되지가 않았다.
‘모, 몸이…….’
이상했다.
기묘하게 뜨겁다.
시야는 묘하게 어그러지며,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른다.
‘이, 이게 뭐야…….’
뜨겁다. 너무나 뜨거워서, 온몸이 불타오르는 것만 같다.
“하아…… 하아…….”
입가로는 거친 숨결이 절로 뿜어져 나온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영호충이다.
“사, 사형…….”
몸이, 몸이 이상해요.
말을 하려는데, 제대로 발음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해서 나오는 것은 여전히 뜨겁고, 달뜬 신음뿐이다.
“몸이 이상하지?”
한데 다행히도, 영호충이 그 말을 알아들어 준 듯했다.
구혜린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도와달라고, 눈빛으로 외쳤다.
“그럴 거야. 아주 좋은 약이거든.”
무슨 말이지?
점점 더, 몸이 이상해져 간다.
이제는 귀가 먹먹해져 잘 들리지도 않았다.
“사매, 사매는 너무 순진해. 제법 똑똑한 척하지만, 의미가 없을 정도로 말이야. 사매 그거 알아? 이 강호는……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곳이야.”
뭐라고 긴말을 하는데, 여전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나, 이것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사형, 사형이 이상해.’
그냥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눈앞이 흐릿하여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사심(蛇心)이 전해진다.
머리가 아득해진다.
마치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기분.
뜨겁게 달궈진 몸은 무언가를 원하며 찾기 시작한다.
“이리와 사매. 품에 안기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날 거야.”
귓가로, 영호충의 끈적끈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무섭다.
‘무서워.’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공포에 잠길 때쯤에는…….
“……불안한 직감은 빗나가는 적이 없군.”
왠지 모르게 믿음직하다고 느껴지는 목소리가 구혜린의 앞을 가로막았다.
* * *
“네놈은……?”
갑작스러운 마현의 등장이 당황스러웠던지,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난 영호충이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 분노를 표현한 것이겠지만…….
“흠.”
마현의 입장에서는 조그마한 개미 한 마리가 싸우자고 덤벼드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음약(淫藥)인가?”
대신해서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눈이 반쯤 풀린 구혜린의 상태였다. 음약에 당했는지 온몸의 신경이 기묘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뜨거워진 몸은 자연스럽게 남성을 찾으며 헤맨다. 본래라면 어쩔 수 없이라도 남성을 받아들여야겠지만, 그건 일반적인 이야기다.
“잠시 쉬고 계세요.”
마현이 손을 내저으며 피어난 백결의 아지랑이가, 구혜린의 몸을 잠식하던 음약의 기운을 단번에 해소한다.
‘역시 백결은 편리하단 말이지.’
그 어떤 명약(名藥)보다도 효력이 좋은 백결은, 마현이 가지고 있는 힘 중 누군가를 지키는 데 가장 훌륭한 능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반대로 흑결과 청결, 적결(赤結)은 적을 척살(刺殺)하기 위한 힘이다. 백결이 동료를 위한 힘이라면, 나머지는 적을 무찌르기 위한 권능.
“죽엇!”
지금처럼 덤벼드는 애송이를 처리하기에 좋은 능력들이었다.
파앗.
마현의 두 눈에 가장 먼저 어린 것은 검은 기운이었다.
흑결이 온몸으로부터 흩뿌려져 나오며, 달려들던 영호충의 온몸을 옭아맨다.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며 날아들던 신형이 허공에서 멈춰 서며,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은 순식간이다.
“사, 사술……!?”
갑작스럽게 몸의 자유를 빼앗기고, 허공으로 떠오르기까지 하자 당황한 영호충의 입에서, 흔하디흔한 말이 흘러나온다.
‘사술이라…….’
흑결의 본질은 주술.
그러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도 사술(邪術)이라니…….”
스승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힘인데, 요사스럽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겁지만은 않다.
게다가 오늘, 마현의 기분은 그리 좋지 않은 편이었다.
“웬만해서는 편안한 죽음을 주자는 주의다만…….”
영호충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기분이 매우 불쾌하다.
중원에 나온 이후, 마현이 이토록 분노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그녀를 더 아끼고 있었나 봐.”
“무, 무슨…….”
영호충은 말문을 이어나가려 했지만,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인가 발끝에서부터 차오른 검은 아지랑이가 그의 벌어진 입 사이로 가득 들어차고 있었다. 덕분에 목 속이 콱 막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분명 유형(有形)이 아닌, 무형(無形)의 기운일진대, 어찌 그런 역할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사술이라 여기며, 두려워할 뿐.
“무섭나?”
공포에 절은 영호충의 눈을 보며, 차가운 눈빛을 보낸 마현이 물었다.
대답은 필요 없었다.
이미 눈빛이 말하고 있거늘, 무엇이 더 필요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그 기대에 못 미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차갑게 말한 마현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손끝에서부터 이어져 가던 흑결의 선이 끊어지며, 공중에 떠오른 영호충의 온몸을 휘감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과 귀, 코와 입, 온몸을 휘감은 흑결의 아지랑이가 조금씩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갈라지고, 갈라지며, 조금 더 자잘 자잘한 무언가로 변해간다.
사각사각사각.
기묘하고도, 두려운 소리가 영호충의 귓가를 울려 퍼진다.
사각사각사각.
무슨 소릴까.
알 수 없는, 미지(未知)의 두려움에 영호충이 가진 공포가 점점 짙어졌다.
“흑막충(黑膜蟲)이란 놈들이다. 마계에만 존재하는,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법에 능숙한 녀석들이지. 놈들은 생명을 쉽게 죽이는 법을 알지 못한다. 달라붙어 있던 생명이 죽으면, 자신들도 죽게 되거든. 그러니 말이다……. 놈들도 최대한 오래 살기 위해 발악할 것이다.”
영호충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마계니, 흑막충이니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제는 소리의 정체를 알 수가 있게 되었다.
검은 아지랑이는, 벌레가 되었다.
사각사각사각.
섬뜩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는, 놈들이 영호충의 목숨을 갉아먹는 소리다. 그것을 인식한 순간…….
“끄으읍……!”
두 눈이 부릅떠지고, 온몸으로 지독한 고통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살결이 얇게 조각조각 떨어져 흩어지는 느낌, 안구에 가득 찬 무언가가 집게를 벌려 조각조각 뜯어가는 기분.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어지는 간질거리는 이질감.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죽을 만큼,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괴롭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온몸에 새겨진다.
“그럼, 지옥에서 보자.”
마현은 그러한 영호충을 묵묵히 지켜보다, 기절한 구혜린을 들어 올리며 자리를 떠나갔다.
사각사각사각.
작고도 끔찍한 소리는, 영호충의 영혼에 새겨지기 위해 느린 속도로 접근해 온다.
느리게.
아주 느릿한 시간이 흘러갔다.
제십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