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章)
남곤산을 떠나오기 전, 마현이 마지막으로 한 일은 진정한 경고 문구를 남기는 일이었다.
흑천 광동침, 필살(黑天 廣東侵, 必殺).
하룻밤 사이에 놈들이 오대세력 중 하나라 자부하던 흑암성이 사라졌다. 그만한 능력이 됨을 보여주기 위해 남곤산에 거대한 상처를 남긴 데다, 경고문까지 새겼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아무리 자신 있는 흑천맹이라 하여도, 이러한 사태에서까지 함부로 광동침입을 재개하기는 힘들 터였다.
‘그래도 흑천맹…… 얕볼 수만은 없는 게 사실이군.’
솔직히, 이번 흑암성 멸문행(滅門行)은 마현으로서도 기대한 바가 컸다. 자그마치 흑천맹 오대세력 중 하나라는 흑암성의 주인이 위치한 곳이다.
목숨을 끊은 후, 영혼을 사로잡는다면 단숨에 머리로까지 향하는 정보를 얻어낼 수도 있다 믿었다.
한데, 강호에 나와 처음으로 영혼 고문에 실패했다.
양천악은 죽은 상태에서조차 마현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며, 영멸의 길을 택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영혼을 쉴 새 없이 갉아먹었을 텐데도 조금의 물러섬도 없는 그 모습은, 마현으로서도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는 강렬한 의지였다.
‘결국 얻어낸 것은 광동에서 놈들을 몰아냈다는 사실 뿐인가.’
흑주의 바로 아래, 호법이라 불리던 흑령들조차도 흑암성의 위치 외에는 그 무엇도 몰랐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알면 알수록 혀를 내두르게 될 수밖에 없는 조직이 바로 흑천맹인 셈이다.
‘일단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언제나 그렇듯, 마현의 납득 속도는 빨랐다.
할 수 없는 일에 고민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당장 순간에 최선을 다한다. 여유 속의 필사적인 삶이란 본래 그런 것이었다.
그 뒤로 일주일.
정가상단 내에서 나름대로 귀빈 대접을 받으며, 아이들과 함께 학문과 무공을 단련하고, 밤에는 구혜린을 안으며 휴식을 취하는 나날이었다.
‘드디어…….’
시험결과 발표.
기대 가득한 얼굴을 한 구혜린과 아이들을 데리고, 방문이 붙은 장소로 향한 마현의 얼굴이 단숨에 활짝 펴졌다.
“이름을 찾느라 고생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그러게요.”
구혜린 역시, 같은 것을 보았는지 밝게 웃으며 말한다.
어리둥절하던 아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고 두 눈을 부릅떴다.
[광주 원시, 최종합격자 명단.]
장원(壯元), 소수린.
차석(次席), 백산.
삼등(三等), 정순욱.
차상(次上)…….
그야말로 경사다.
수석에서부터 삼석까지, 와룡서원의 제자들이 모두 자리를 꿰찼다. 맨 위에서부터 이름들이 당당히 줄지어 있으니, 찾느라 애쓸 필요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나저나…….’
수석이 소수린일 것은 예상했지만, 차석이 백산일 줄은 몰랐다. 중용에 관한 문제는 분명 정순욱의 답이 나았는데, 아무래도 다른 부분에서 백산이 크게 앞섰던 듯했다.
“다들 정말 잘했어.”
활짝 핀 얼굴의 구혜린이, 세 아이를 향해 칭찬의 말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과분(過分)한 일이네요.”
백산과 소수린이 답했다.
서로의 결과에 꽤나 만족한 듯, 보기 좋은 얼굴이었다.
“칫…….”
반면 정순욱의 표정은 그리 좋지만도 않았다.
백산에 이어, 소수린까지.
두 번이나 밀린 덕에 삼등이다.
‘장원이 되려 했거늘.’
차석도 못됐다.
솔직히 기분이 좋을 수야 없었다.
하나 포기라거나, 분노를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다음에는…….’
지금은 아니지만, 이다음에야말로 꼭 이긴다.
노력이 부족했다면 더욱 최선을 다하면 된다.
필사(必死)적으로 훗날을 기약한다.
자신을 다시금 가다듬으며, 백산과 소수린을 번갈아 본다.
직후에야 퉁명스럽게나마 한마디 말을 건넬 생각이 들었다.
“축하한다. ……하나 다음에도 이런 요행이 통할 거라 생각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입을 열고 보니, 정작 한마디보다 몇 배는 긴 이야기가 덧붙여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솔직하지 못한 정순욱의 머리 위로는, 마현의 손이 얹어진다.
“너 역시 축하한다.”
장원이 안 되었고, 차석이 아니면 또 어떠할까.
삼등 역시 대단한 결과이거늘.
그 진심 담긴 축하에, 고개를 움직여 손을 떨쳐낸 정순욱이 인상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답한다.
“고작 삼등으로 무슨…….”
실상은 어째선지 기쁜 마음이 들어, 입술 끝이 삐죽거리며 솟아나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 내기 위한 반항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 * *
와룡서원의 세 제자가 장원에서부터, 삼등까지 모두 차지한 것은 그야말로 큰 경사였다. 무엇보다 대단한 일은 이번 원시가 아이들의 첫 시험이었다는 점이었다.
‘본래 시험이란 것이 그렇지만…….’
단번에 합격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몇 해에 걸쳐 고생을 하는 이들도 많다. 쌓은 지식의 문제도 있겠지만, 경험으로 인한 지혜의 차이 탓이 가장 컸다. 한데 아이들은 아직 어린 나이, 고작 열다섯에 첫 번째 시험을 치러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합격만 하면 곧바로 입관(入官)이 가능한, 향시를 치를 자격이 생긴 것이다.
이 정도면 빠르면 약관을 넘은 직후, 늦어도 이립 전에는 거인의 자격을 딸 수 있다. 보통 천재라 불리는 이들이 약관 즈음 향시에 합격하니, 세 아이 모두 그러한 재능을 엿보인 것과 다름없는 셈이다.
며칠 후, 정가상단 내에서는 큰 연회가 벌어졌다.
최근 일이 바빠 정신이 없다던 정철영까지 성도에 도착해 벌어진, 큰 축제였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음식도 다양하게 식탁 위로 깔린다.
장원의 정문에는 큰 글씨로 쓰인 현수막까지 걸렸다.
축(祝), 와룡서원 제자 삼인(三人) 정순욱, 백산, 소수린 광주 원시 합격.
재주꾼들이 들어와 묘기를 보이고, 즐거운 음악이 깔린다.
정가상단과 친분을 쌓고 있는 이들은 모두 몰려들어 정순욱의 합격을 축하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와룡서원에 관한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주제였다.
“무명와룡 선생이 그렇게 대단하다더니, 일을 냈네.”
“그러게 말이지. 제자 삼인이 장원에서 삼등까지 먹었으니……! 단순히 글만 잘 쓰는 게 아니란 말이지.”
“듣자 하니 간단한 무공도 가르쳐, 건강도 챙겨준다던데.”
아니, 오히려 주 대화가 와룡서원과 마현에 관한 이야기였다.
“모두 선생님 덕분입니다.”
정철영마저도 마현을 찾아와 술잔을 내밀며 공손히 인사한다. 중심에 서게 된 마현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이들이 노력한 덕분이지요.”
“어찌 그게 제자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공개된 장원 학생의 중용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 무릎을 탁 친 학자들이 줄을 선답니다.”
취한 것이 분명하다.
너무나 기분이 좋은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술을 마신 정철영이 침을 튀기며 말했다. 그를 옆에서 오랜 시간 모셔온 금린의 입장에서야 놀라운 일이었다.
‘본래 저러는 분이 아닌데…….’
정철영은 절제를 인생의 덕목으로 알고 사는 인물이다.
오죽하면 정가상단 신의현 본단의 크기가 지점인 광주 지부만 못할까. 뿐만이랴, 그는 먹는 음식도 조촐했다. 함께 일하는 식구들과 소소한 밥상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삶의 낙이다. 버는 것보다 쓰는 법이 더 중요하다고 늘 말하던 인물이 바로 정철영이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제대로 회포를 풀었다.
장원을 개방하고, 사람들을 초대한 것으로 모자라, 고급 음식, 고급술을 풀며 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아들, 정순욱의 오만불손함 덕에 걱정도 많고, 사이가 안 좋은 모습을 보일 때도 있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아버지란 뜻이었다.
“게다가 우리 순욱이가 삼등, 삼등이랍니다. 하하.”
처음 공개된 소수린의 답안으로 칭찬을 늘어놓던 정철영은 끝내, 정순욱에 관한 것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비록 장원은 아니고, 차석도 아니지만 좋다. 집안 내에서만 천재 취급을 받았을 뿐, 실제로는 그리 뛰어난 머리를 가진 것이 아니란 사실을 잘 알았기에 더욱 좋았다.
“얼마나 노력했을까요. 우리 순욱이 성격에…… 얼마나…… 얼마나 힘든 시간들이었을까요.”
불안하기도 했었다.
제 잘난 맛에 살기만 하는 정순욱이, 언젠가 벽을 만난다면 그에 무너져 망가지지 않을까. 혹시 비뚤어지지 않을까. 아직 어린 정순욱을, 타향이라 볼 수 있는 와룡서원에 맡긴 것은 그러한 버릇을 고쳐줄 수도 있다는 기대심 때문이었다. 혼자서 외지 생활을 이겨내고, 견뎌내다 보면 세상을 직시하리라 믿어본 것이다.
하나,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언제나 그렇듯 선생까지 무시하는 태도로 사고를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 모든 걱정이 덜어졌다.
정순욱은 변했다.
본인은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여전히 말투는 곱지 않지만.
분명 달라졌다.
단순히 상대를 무시하는 것에서, 남을 인정하는 법을 배웠다.
또한 누군가와 맞서며 싸우는 법도 익혔다.
예(禮)를 행하지 않을지언정, 모르지는 않는다.
찾아온 선생들에게 타박만 주며 내쫓던 정순욱은 더 이상 없었다. 모두 마현의 덕이다. 와룡서원이라는 울타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정철영은 장담할 수 있었다.
오늘은 그가 태어나 세상에서 가장 기쁜 날이다.
장성한 자식이, 훌륭하다 할 만한 모습으로 저 멀리 앉아 있다.
시선이 마주한 순간에는 고개를 휙, 돌리며 모른 척하지만 또 어떠랴.
‘역시 기분 좋은 것을.’
입가로는 미소만 번질 뿐이다.
* * *
“……칫.”
“또 왜 그래?”
바로 옆에 앉은 정순욱이 혀를 차자, 옆에 앉은 백산이 의문을 표한다. 묵묵히, 그런 백산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이던 정순욱은 끝내 고개를 내저으며 퉁명스럽게 말을 흘렸다.
“단순무식한 곰에 불과한 네놈이 뭘 알겠느냐.”
“……너 요즘 시비 더 격하게 거는 것 같다.”
“마음에 안 들면 덤벼보든지.”
입가로, 비릿한 미소를 띤 정순욱이 백산을 도발했다.
“그럴 생각은 없고.”
“겁쟁이.”
“원래 곰은 겁이 많아.”
“누가 그러더냐?”
“내가.”
하나 언제나 그렇듯, 백산은 그런 정순욱의 도발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떠넘길 뿐이었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된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휘두르면 피하기만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흥.”
정순욱은 가볍게 콧바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리될 줄 알고 시작한 싸움이라 그런지, 별로 화가 날 일도 없었다. 오히려 결정적인 것은 그다음이었다.
“……아버님 때문이냐?”
입가에 묻은 음식 기름을 손등으로 비벼 닦아낸 백산이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으로 묻는다. 자연스레 정순욱의 양미간이 찌푸려졌다.
“네깟 놈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냐.”
“너희 아버님에 대해선 잘 모르지. 근데…….”
그사이에도 오리 다리 하나를 집어, 빠르게 흡입한 백산이 남은 뼈를 정순욱에게로 향하며 말한다.
“너는 제법 잘 알거든.”
“……하.”
기가 차다는 듯, 헛바람을 내뱉은 정순욱이 인상을 크게 찌푸리며 눈을 부라렸다.
“언제나 사람 좋은 웃음만 짓고 있어서 오냐오냐 넘어가 줬더니, 진짜 내가 우습나 보구나. 비천한 천민 주제에.”
“늘 느끼지만 너 진짜 말버릇 고약하다. 진짜 싸울래?”
“말 잘했다. 어디 한 번……!”
따악.
백산의 손에 들려있던 오리 뼈가, 정순욱의 머리를 순식간에 두들기고 지나간다.
“항복.”
황당한 표정을 지은 정순욱의 분노보다 더 빨랐던 것은, 때린 백산의 항복 선언이었다. 정순욱의 입장에서야 또다시 넋이 나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곰은 원래 겁이 많아서. 맞는 것 싫어해.”
동시에 반대편 오리 다리를 쭈욱 뜯어서는 또다시 입에 욱여넣는 백산이다.
화가 난다.
‘그냥 뒤집어?’
어차피 눈 돌아가면 상 엎고 주먹 날리는 것 일도 아니다.
참는 이유는 하나뿐.
이 자리가 정철영이 마련한, 와룡서원 제자 삼인방의 축하 연회란 것이다. 여기서 뒤집으면 기껏 준비한 정철영의 노고가 모두 의미를 잃는다.
‘내가 언제 그런 것 따졌다고…….’
생각하고 나니, 또 열이 뻗친다.
언제부터 남의 입장을 배려했던가?
그는 정순욱이었다.
오만불손, 유아독존의 정순욱인 것이다.
한데, 그리 생각해도 쉽게 주먹이 나가지 않는다. 마현과 함께 마주 앉아, 기뻐하며 활짝 웃는 정철영의 얼굴을 본 탓일 터다.
“……유치해.”
그 와중에, 반대편에서 말 한마디 없이 천천히 음식만 먹고 있던 소수린이 작게 말한다. 정순욱의 온몸이 다시 한 번 파르르 떨렸다.
“너, 너, 네깟 것까지……!”
이제는 여기저기서 다 무시다.
언제부터 천하의 정순욱이 이런 꼴을 당했단 말인가.
“오랜만에 수린이가 말을 다 하네. 어찌 됐든 나도 반쯤 동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해. 언제부터 참고 살았다고 그러는 거냐.”
백산의 말대로였다.
그는 정순욱이었다.
스스로 자부하는 천하의 정순욱.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뭐든지 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을 상처 입히고, 밀어내기도 했다.
언제부터 망설였던가?
어울리지 않는다.
마음에도 들지 않았다.
“쳇……!”
다시 한 번, 크게 혀를 찬 정순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윽고 여전히 마현과의 대화에 정신이 없는 정철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한다.
“좋은 부자(父子)로구먼…….”
백산이, 그 뒷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중얼거린다.
“애늙은이.”
“뭐, 뭣……!?”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수린에게 듣고 납득하기는 힘든 이야기에, 흐뭇하게 웃던 백산의 입술은 단숨에 금붕어처럼 벙긋거리는 형태로 변한다.
그야말로 즐거운 연회였다.
* * *
장원 내부의 조용한 방.
마주 앉은 두 부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의 눈을 직시하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아직 연회가 한창이었다. 사람들은 붐비고,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린다.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먼저 입을 연 측은 정철영이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정순욱이 둘이서만 할 이야기가 있다 하여 자리를 옮겼다.
한데 정작 방 안에 들어서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사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쯤이야 잘 알았다.
어느덧 정순욱의 나이도 열다섯.
머리가 클 대로 컸다.
삼 년 전.
정철영이 말했던 거짓을 눈치채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한데 질문을 해도 여전히 정순욱은 말이 없다.
그저 묵묵히, 정철영의 두 눈만을 바라본다.
끝내 한숨을 내쉰 정철영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삼 년 전 일이라면, 사과하마. 너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한들 납득하기 어렵겠지.”
많이 성장했다지만, 여전히 애다.
당시 정철영의 마음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을 터다.
또한 어떻게 따져도 거짓을 말한 것이 옳다고는 할 수 없다.
게다가 정철영 본인 역시 그 거짓 때문에, 자식의 시험 합격을 축하하는 자리에서까지 와 말 한마디 못 붙이고 있지 않았던가? 차라리 이런 식으로라도 풀 수 있으면 좋다. 먼저 용기 내서 다가온 자식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원한다면 고개를 숙여서라도…….”
“그리하시면 진심으로 화를 낼 것입니다.”
방으로 들어서, 처음으로 입을 연 정순욱이 눈을 붉혔다.
“지나간 일입니다. 게다가 애초부터 별로 신경 쓰고 있던 일도 아니고요. 또 그, 뭐냐…….”
꽤나 기특하게 말한 정순욱은 말끝을 늘인 후 한참이나 입을 닫고 있었다.
그러다가는 또, 말을 하려다.
말려다.
몇 번이고 고민하는 눈초리를 보인다.
“할 말이 있다면 해 보거라.”
답답해진 정철영이 그런 정순욱을 채근했다.
“그러니까, 그, 뭐냐…….”
정순욱이, 다시 한 번 입을 열려 애를 쓴다.
하나 역시 쉽지는 않은지 또다시 입을 닫아 버렸다.
이제 정철영은 그냥 무한히 기다리기로 했다.
‘어찌 됐든 오해는 풀린 듯하니…….’
생각보다 훨씬 훌륭하게 성장해 준 아들은, 아비의 치부까지 덮으며 번듯하게 말한다.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고민이 우스울 정도로 간단한 결말. 그래서 더욱 뿌듯하다. 정말이지, 오늘은 정철영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기쁜 날일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러니까……!”
그러던 사이.
얼굴을 붉힌 정순욱이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직후 아직 왁자지껄한 바깥을 바라보며 빠르게 말을 잇는다.
“다 저를 위해서 해주신 일 아닙니까. 감사하게도 생각하고 있어요. 어린 시절, 당시에 갇혀 있기만 했다면 지금보다도 더 못난 놈으로 남아 있었을 테니까요. 아직 다 안다고 말할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이해합니다. 아버지 마음. 감사히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리고…….”
쉴 새 없이, 호흡 한 번 돌리지 않은 채 긴 말을 이은 정순욱이 얼굴을 크게 붉혔다. 놀란 표정의 정철영은 처음 보는 아들의 모습에,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부른다.
“순욱아.”
“그리고…… 저, 삼 등 했습니다.”
그 끝은, 정순욱의 자기 자랑이라면 자랑이었다.
삼등.
와룡서원에 들어간 지 삼 년 만에, 원시를 치르고 삼 등으로 합격했다. 솔직하게 말한 적은 없지만, 마현의 칭찬도 기뻤다. 주변의 시선도 여간 나쁘지만은 않았다. 비록 장원은 아니지만, 어쨌든 좋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아버지가 옆에 있었다면, 함께였다면…….
그러던 차, 정철영이 광주에 도착했다.
어울리지 않는 큰 연회를 열고, 술에 취하기까지 했다.
기대했다.
아버지가 말해주기를.
잘했다고.
우리 아들 자랑스럽다고.
사실, 바랐었다.
“장하다. 장해. 잘했다. 우리 아들 최고다.”
그리고 그 바람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얼굴을, 코를, 눈을 붉게 붉힌 정철영이 계속해서 말한다.
“아주 잘했어. 너무 장해. 자랑스럽구나. 내 아들. 순욱이. 멋지다.”
“……다음에는 장원 할 겁니다.”
그 칭찬에, 함께 술에 취한 것마냥 얼굴을 크게 붉힌 정순욱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연하지, 누구 아들인데!”
그 말을 받아, 정철영이 자신만만하게 외친다.
직후로는.
“킁…… 아이고. 이거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몸 상태가, 조금 이상하네.”
몇 번이고 코 주변과 눈가를 훔치며 읊조린다.
정순욱은 그런 정철영의 얼굴을 흘낏, 바라본 후 가볍게 답했다.
“감기인가 봅니다. 저도…… 뭐…… 옮은 것 같네요.”
아들의 눈가도 붉어진다.
바깥의 소란에 어울려있는 누구 말마따나, 그야말로 좋은 부자지간이었다.
* * *
귀향길은 자그마치 팔두마차(八頭馬車)에, 호위무사까지 딸린 금의환향(錦衣還鄕)이었다. 마현의 입장에서야 부담감이 심한 탓에 거절하려 한 호의였지만, 정철영은 그야말로 막무가내였다. 타고 가지 않으면 마차를 그 자리에서 버릴 것이라고까지 하니, 마현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
정말이지, 화려하게 무명현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말이지…….’
도착하니 또 화려한 현수막이 마현의 눈을 어지럽힌다.
와룡객잔의 정문에 걸린 와룡서원 학생들, 원시 합격 명단 탓이었다.
거기에는 백산과 정순욱, 소수린 외에 다른 곳으로 시험을 치르러 갔던 아이들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아니, 어떻게 아버지가 나보다도 더 빨리…….’
흥이 난 정철영이 도와 여기저기서 정보를 전해준 덕이란 것은 알지도 못한 채, 돌아오자마자 또다시 축하 연회를 하게 된 마현과 구혜린, 세 제자였다.
“오늘 와룡객잔의 음식은 무료입니다, 무료!”
거기에 마전의 깜짝 선언까지 이어진 덕에, 객잔은 그야말로 인산인해.
먹을 복이 터졌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에 백산의 입가로는 함박웃음이 번졌다.
“역시, 와룡객잔 음식이 최고야.”
광주에서 먹은 다양한 음식들도 놀라웠지만, 역시 맛은 와룡객잔이다.
“동감한다.”
“인정.”
다른 아이들 역시,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머리털 나고 와룡객잔에서 먹은 음식보다 맛있는 것을 먹어 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
“산아, 우리 아들. 내 새끼!”
“아버지!”
그러는 사이, 객잔의 문을 박찬 백일이 들어섰다.
일이 바빠 홀로 보낸 자식 놈이, 성도에 가서 시험을 쳐서 합격을 했단다. 근데 그냥 합격도 아니고, 차석이란다.
‘차석, 차석이라니!’
하루 일까지 접고 와룡객잔으로 뛰어든 백일은 이제는 자신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 큰 백산의 몸을 부둥켜안고 감격의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네가. 우리 아들이 해냈구나. 해냈어! 선생님, 선생님 어디 계세요?”
그렇게 시원하게 기뻐한 이후에는, 마현을 찾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 틈새에 섞여 조용히 음식을 먹고 있던 마현을 발견한 백일이 후다닥 뛰어가 머리를 조아렸다.
“아이고, 선생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술도 끊어 몸도 건강해지고.
자식마저 자랑스럽게 컸다.
너무나 감격스러워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백일의 마음과 다르게, 마현의 입장에서는 이 역시 난처한 일이었다.
“사, 산이 아버님. 우선 일어나셔서…….”
“아닙니다. 아니에요. 제가 어찌, 선생님 앞에 고개를 들까요.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금방이라도 기쁨의 눈물을 쏟아낼 듯,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답한 백일은 계속해서 감사를 표한다.
“우리 무명와룡 선생님 덕에 무명현 전체의 명성도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무명의 흥세지요.”
뒤를 이어.
연회에 참석한 객잔 손님 중 한 명이 잔을 들고 큰 목소리로 말한다.
“과연, 와룡객잔의 자제분입니다.”
“무명와룡!”
사람들은 그런 마현을 칭찬한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시선에, 자연스레 마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런 건 체질이 아닌데.’
부담스럽다.
하나 이어지는 사람들의 시선은 멈추질 않는다.
“자, 그럼 다들. 우리 무명와룡 선생과 무명현을 위하여!”
“위하여!”
처음 나섰던 사람이 다시금 목소리를 높이고.
그 뒤를 따라 수많은 사람이 합창한다.
서로 간의 술잔이 부딪치며 웃음소리와 기쁨이 오간다.
더 이상 마현의 목소리로는 막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난감하긴 하지만…….’
모두가 즐거우니 되었다.
좋은 게 좋은 일이다.
그리 생각한 마현의 입가로도, 즐거운 미소가 번져갔다.
제육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