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章)
겨울의 끝자락.
마지막이라 그런지 심술을 부리듯 더욱 강한 한파(寒波)를 몰고 오기 시작한 때, 매서운 추위가 사람들을 괴롭혔지만 그보다 더 즐거운 일이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신년(新年).
‘곧 있으면 불혹(不惑)인가.’
이제는 나이를 먹는 것도 그리 새삼스럽지만도 않게 된 마현이 웃음을 흘렸다. 새해가 찾아오면 사람들은 나이를 한 살 추가한다. 또한 각자 나름의 신년목표를 세운다.
농사꾼이라면 겨울의 끝자락에 다다랐으니, 다가올 봄에 대비하여 또 언젠가 찾아올 가을의 추수를 떠올린다.
어부 역시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따뜻한 봄날이 다가와 녹은 바닷물 위에서 그물을 펼쳐 힘차게 살아갈 생각에 힘이 넘치는 시기이다.
와룡객잔 역시 바빴다.
신년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드는 손님들을 위한 특식도 준비하고, 나름대로 가족들과 와룡서원 제자들만을 위한 연회도 치렀다. 그날은 공부와 수련도 빼먹고, 그야말로 축제였다.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었다.
매일같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는 없으니, 노는 날도 필요한 법.
그리 말한 마현 역시 정말 함께 풀어놓고 즐겼다.
“마 가가는 따로 신년 소원 없으세요?”
늦은 밤, 매혹적으로 다가온 구혜린을 품은 뒤 머리를 쓰다듬고 있을 무렵 던져진 질문이었다.
“신년 소원이라…….”
마현은 작은 웃음을 흘렸다.
딱히 없는 바는 아니었다.
“그냥 이대로 평생 행복했으면 좋겠어.”
“영원히요?”
마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쉽게도 현실에 영원이란 것은 없잖아.”
“……조금쯤은 꿈을 꾸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입술을 살짝 내민 구혜린이 분위기 한 번 못 잡는다는 듯, 타박하는 시선으로 마현을 바라보았다.
“사람은 한정된 시간을 살기에 그 안에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그것 알아? 죽기 직전의 사람이 더욱 정열적이고, 열성적으로 변하는 거? 우습지만 남은 시간이 적은 사람일수록 더욱 노력한다는 거지. 필사(必死)라는 말도 그래서 있는 것 같아.”
마계에 있을 때만 해도 그랬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정말 피땀 흘려 노력했다.
그곳에 모인 동료들 중 누구 하나 다르지 않고 모두가 그랬었다.
“……처음엔 말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요즘에 많아지기는 했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구혜린과 단둘이 있을 때는 제법 편하게 속내를 털어놓고, 쉽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만큼 가깝게 느끼고, 의지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구혜린이 좋다.
편안하다.
의지가 된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른다.
‘이런 게 사랑인가?’
나이가 불혹이 가까워져 오는데 아직도 이성 간의 사랑이란 단어에 확신을 가지기가 어려웠다. 차라리 가족들에 대한 마음이나, 제자들에 대한 정을 사랑으로 표현한다면 훨씬 더 쉬우리라.
고민하는 마현의 목둘레로, 구혜린의 양팔이 감싸졌다.
“그런 당신도 좋아요.”
입가로 흘러나오는 것은 달콤한 고백이다.
“꿈이라고, 불가능하다고 비웃어도 좋아요. 전 진심으로 좋아하는 당신과 평생이 아닌 영원히 이대로 함께하고 싶어요.”
“청혼(請婚)하는 거야?”
그 물음에, 모르겠다는 표정이 된 구혜린이 딴청을 피우며 마현의 단단한 가슴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이후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설마요. 청혼은 여자가 받는 것 아니에요?”
되돌아온 답에,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는데. 라는 말을 떠올린 마현이었지만 굳이 입 바깥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꿈이니 분위기니 잘 모르는 남자지만, 적어도 이럴 때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을 모르는 것은 아닌 덕이었다.
아니, 지금 이럴 때 해야 할 일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내가 청혼을 해야 하겠지?’
당장이 아니라도 조만간.
분명 그리해야만 한다.
하나 그 결정 역시 쉽지 않았다.
‘결혼이라…….’
누군가 불혹을 세상의 그 어떤 미혹에도 쉬이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 하였던가? 틀린 말이다. 실제로만 치자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세월을 보낸 마현이건대…….
‘너무 어려운 일이로구나.’
아직도 결혼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하나 분명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기는 했다.
‘가족들의 바람도 있고…….’
눈앞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대상.
구혜린도 존재했으니 말이다.
* * *
아이들의 성장은 무섭게도 빨랐다.
이제 열여섯.
학문에서는 사서에 이어 오경까지 접하게 된 제자들은 무공에서도 진취적인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굳이 수재 삼인방이 아니라도 일류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실력을 갖춘 제자도 여럿. 거기에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기까지 시작한 아이들도 보였다.
단순히 학문과 무공의 성장만이 발전이 아니다.
혼자서 미래를 고민할 수 있게 됐다.
아이들의 그 변한 모습에 마현의 마음 한편에는 뿌듯함이 더욱 강하게 차올랐다.
“저는 정말 글공부가 체질에 맞나 봐요.”
“학문과 무공, 모두 즐겁지만 정말 제 길인지는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이대로 열심히 공부나 해서 관리(官吏)가 되라고 하시지만…….”
누군가 이때를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라고도 했던가?
아이들은 각자의 생각과 부모의 의견에 부딪혀 많은 것을 떠올리며 마현을 향해 상담을 요청해왔다.
‘사내 녀석들만 말이지…….’
서원에 딱 셋 있는 여제자들은 마현이 아닌 구혜린을 찾아가 자신의 진로에 대해 상담했다고 하였다.
아무래도 사내아이들과 다르게 여아들은 남자인 마현보다 그녀가 편한듯했다.
‘또한 린 매가 정말 이 서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겠지.’
어찌 되었든 좋은 일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아이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다. 그저 시키는 대로, 이어진 대로, 혹은 부모님의 뜻대로 따라가기만 한다. 어쩔 수 없다. 타고난 바 운명이 정해져 있다시피 살아가야 하는 때다.
상인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상인이.
농민의 자식으로 났다면 농민으로 살아야 한다.
주어지지 않는 교육 환경과 사고의 폭을 제안하는 사상들 탓이다. 하나 마현은 아이들에게 글공부를 가르칠 때도, 무공을 일러줄 때도 굳이 그러한 제약을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이, 스스로 의견을 생성할 수 있게끔 자유논쟁 시간까지 만들어 버리지 않았던가?
변화하고 있다.
짧은 질풍노도의 시기 이후, 대다수 아이들은 다시 정해진 길을 따라 묵묵히 걷는다. 하나 와룡서원의 제자들은 다를 터였다. 스스로가 뜻하는 바대로, 원하는 길로 향할 수 있을 터다.
자신의 목표만 분명하다면 말이다.
‘그를 정할 수 있게 돕는 것도 스승의 몫.’
역시 스승이란 것은 쉽지 않으면서도, 즐거운 일이다.
‘한데…….’
생각 외로 이러한 변화가 적은 이들도 있었다.
바로 실상, 현재 마현과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는 수재 삼인방이 그러했다.
백산이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의원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활생에 힘쓰고 싶다 생각했다. 그런 만큼 열심히 의술을 익히고 있으며, 성류의문의 비기 의성활생심공(醫聖活生心功) 역시 삼성까지 경지를 이룩한 상태였다.
오래전부터 자신의 진로를 정해 길을 닦아 나가고 있다.
아이들 모두가 혼잡해 하던 시기마저 조금의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모습은 분명 뿌듯한 일이다.
‘언젠가 갑작스럽게 찾아올지도 모를 혼란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은 되지만…….’
지금의 백산이라면 충분히 그 역시 어렵지 않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 그런 면에서 차라리 백산이 나았다.
정순욱과 소수린.
이 둘이 진짜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백산처럼 어딘가에 확실히 뜻을 둔 것 또한 아닌 상태. 고민이 없지만도 않은 것은 분명한데……. 참으로 애매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마현이 둘을 찾았다.
우선 정순욱.
“너는 장차 무엇을 하고 싶으냐?”
다른 아이들은 모두 적게는 하나에서부터 많게는 열이 넘게까지도, 명확하지는 않지만 꿈이 있었다. 하니 정순욱이라고 하여도 분명 하나쯤은 하고 싶은 일이 있을 줄 알았다.
“아직은 딱히 없습니다.”
하나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고민 하나 없는 그 모습에, 내심 걱정을 쌓아 무언가를 말하려던 마현은 끝내 고개를 내젓고 나가보라 말하였다. 의지가 서지 않은 아이한테 억지로 무언가를 불어넣을 수는 없다. 이러한 고민은 스스로가 떠올릴 때부터 시작되는 법. 저리도 단호히 말할 정도면 아직은 무슨 말을 한다 한들 의미가 없을 터였다.
‘어렵구나.’
직후 소수린.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경우는 또 정순욱과 달랐다.
행복하고 싶다.
대체적으로 모두가 생각하는 궁극적 목표라 할 수 있다.
하나 그 행복을 위한 방법에 대해서는 쉽게 떠올리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꿈을 찾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한데 소수린은 그 원하는 바 대다수가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굶지 않았으면 좋겠고, 잘 곳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잠시, 마현을 응시하던 소수린이 두 눈을 빛내며 단언했다.
“스승님이 저를 버리시지만 않으면 돼요.”
마음의 문을 닫고 있다 여겼던가.
오히려 반대였다.
어느덧 그녀는 완벽히 마현을 의지하고 있었다.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단지 말을 하기 싫은 것뿐이다.
극구 마현이 원한다면, 어쩔 수 없이라도 입을 열어 주리라.
이제야 그 마음을 알게 된 마현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며 소수린에게 나가보라 하였다.
‘정순욱보다 더 곤란하군.’
차라리 정순욱이 낫다.
그는 언젠가 때가 다가온다면, 스스로 목표를 세울 확률이 높다. 하나 소수린은 다르다. 그녀는 그저 이 와룡서원이라는, 작은 공간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는 나쁘지 않았다. 마현 역시 와룡서원과 와룡객잔. 두 공간만 있다면 충분히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 수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소수린의 의지다.
‘그 아이는…….’
분명 강인하다.
말은 저렇게 한다 한들, 당장 마현이 길바닥에 내버려 두어도 혼자서 잘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학문이야 부족함이 없는 게 당연하고, 이미 그 무공 실력조차 아이들 중 제일(第一). 정순욱과 백산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의 재능은 엄청났다.
단순히 제공권뿐만이 아니다.
소수린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몇몇 타고난 인물들에게만 주어진다는 무골의 축복.
개방의 태상장로 주화화가 장담한, 장차 검후가 될 공서하가 가진 것과 같은 재능이다.
정신적인 측면도 마찬가지였다.
웬만한 일에는 평정심이 흔들리지 않으며, 타인의 시선도 크게 의식지 않는다.
하나 그 중심에는 커다란 빈틈이 분명 존재했다.
‘누군가로부터 버림받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인가.’
그래서 마현을 향해, 저리도 직접적으로 말한 것이리라.
그녀가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담담히 밝힌 이유일 터다.
‘고의로 거리를 두어야 하는가.’
생각은 하지만, 가능할 리 없다는 것쯤은 마현도 잘 알았다.
한숨이 깊어지는 밤이었다.
* * *
한 여인이 길을 걷고 있었다.
왜소한 체구에, 느릿한 걸음.
입고 있는 옷은 간결한 무복이었으며, 허리춤에는 기다란 장검까지 차고 있다. 단순한 여인이 아니다. 무인이다. 하나 그냥 무인이라 보기에는 무언가 오묘했다.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있으며, 흔히들 말하는 무인의 기세 어린 눈빛이 전혀 없다.
“이게 웬 떡인가. 오랜만에 강호에 나오자마자 만난 여인이 이런 미녀라니!”
반쯤 흐리멍덩한 눈으로, 책을 읽으며 걷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꽤나 점잖은 인상을 한 중년인이었다. 하나 그 눈빛은 절대 점잖지 않았다.
음탕하게 번뜩이는 두 눈에는 강호고수라 볼 수 있을 법한 강한 기세와 더불어, 타고난 지독한 음심(淫心)이 어려 있었다.
잠시 고개를 들어 그러한 중년인을 목도한 여인은, 다시금 흐리멍덩한 눈빛이 되어 책자로 시선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스륵.
마치 유령이 움직인 듯했다.
눈앞에 멀쩡히 서 있는 중년인이 있는데, 그를 통과하듯 앞으로 나아간다. 여인의 얼굴을 보며 음심을 풀어내던 중년인의 얼굴이 굳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강호인?”
조금 전 움직임은 분명 무공을 익힌 무인들만이 사용한다는 보법이 분명했다. 정신이 퍼뜩, 들고나니 미모에 눈이 멀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속속 눈에 들어왔다. 우선 첫째로, 그녀의 무복이 보였다. 새하얗고 간결한 느낌을 주는 옷소매의 끝자락에는 파도를 닮은 푸른 물결이 가볍게 굽이치고 있다.
허리에 찬 검은 길고 가는 편이었는데, 검병의 중앙에 역시 파도가 몇 줄기 새겨져 있었다.
‘해남파!’
중년인은 단숨에 여인의 정체가 구대문파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이 광동 일대에서라면 그보다도 더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해남파의 무인임을 알아보았다.
‘어떻게 하지?’
이미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뒤라지만, 아직 발을 뺄 여지가 남았다.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가는 모습을 보아하니 여인은 애초부터 그를 안중에도 두지 않은 듯하고…….
‘나를? 감히 이 관음옥악(觀音玉顔)을?’
관음옥안.
호북과 호남 일대에서라면 관음색마(觀音色魔)라 불리는 그는 자그마치 절정의 막바지에 다다른 고수였다.
그의 별호에서 알 수 있듯, 중후하고 따뜻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덕에 감히 별호의 앞에 관음이란 단어가 붙었지만, 그 본질은 분명한 색마. 얼굴에 혹한, 또는 무력에 굴복한 여인 수십의 순결을 빼앗은 악당이었다.
그런 주제에 자신을 스스로 관음옥안이라 부르는 만큼 외모에 자신이 있는 것도 사실. 한데 무시당했다.
‘이럴 수는 없어.’
호북에서 제갈세가(諸葛世家)의 비호를 받는 정가장(貞家場)의 여식을 건드렸다가 추적대에 덜미를 잡혀 삼 년이나 몸을 숨긴 채 살았다. 그리고 드디어 삼 년 만의 첫 강호 출두. 미모의 여인에 이게 웬 떡이냐며 나섰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못 먹는 감에 가까운 해남파의 무인.
그런 여인이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무시했다.
‘확…… 저질러?’
어차피 제갈세가에게도 쫓기고 있던 몸이었다.
구대문파와 버금간다는 오대세가의 추적에서도 벗어난 자신인데, 광동 인근이라지만 따로 떨어진 섬에서 생활하고 있는 해남파 따위가 무서울 게 뭐가 있는가?
‘그리, 저지르고 뜨면 되지.’
결심을 하니, 다시금 마음에 음심의 불길이 마구잡이로 솟았다. 멀어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니 아랫도리에는 불끈 힘이 들어갔다. 따지자면 색마 생활 십여 년간 본 여인 중 가장 아름다운 축에 속하는 미녀다. 거기에 더해 삼 년이나 혼자 밤을 달랬더니 욕구는 몇 배나 왕성해져 있는 채였다.
‘참지 않겠다!’
결심한 관음색마가 지면을 박차고 달려가 여인의 뒷덜미를 향해 단숨에 금나수를 내뻗었다.
‘우선 목덜미를 낚아채고…….’
그대로 바닥으로 자빠트린 후 마혈과 아혈을 짚는다.
이후 숲에 들어가서 적절하게 요리(?)를 하면 좋을 것이다.
적당한 반항도 좋았다.
너무 가만히만 있는 것도 재미가 없을 테니 말이다.
“크흐흐…….”
혼자만의 상상, 꿈속에 빠진 관음색마가 웃음을 흘릴 때였다.
갑자기 세상이 빙글 돌았다.
‘한 바퀴?’
아니, 둘…… 더 많다.
다섯 바퀴쯤?
공중을 몇 바퀴나 돈 지 모를 때쯤이었다.
읽고 있던 서책을 귀찮다는 듯 덮고는 품으로 집어넣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어?’
분명 움직이는 게 느릿한 것 같은데 관음색마, 본인의 몸은 몇 배나 더 느리게 느껴졌다. 날아오는 손바닥쯤이야 그저 가볍게 튕겨내면 될 것 같은데…….
퍼억-!
흉부에 강하게 틀어박힐 때까지 반응하지 못했다.
게다가 느릿한 주제에 뭐 그리 아프기까지 한지…….
“쿨럭!”
기침과 함께 핏물이 허공에 흩뿌려진다.
쿵!
몇 장을 날듯이 쏘아진 몸은 끝내 두꺼운 나무 둥치에 부딪힌 뒤에야 멈추었다.
“커억…… 커어억!”
지독한 고통!
그제야 관음색마는 눈앞의 여인이 단순한 해남파의 무인이 아닌, 초고수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이럴 수가…….’
해남파에는 고수가 많다.
하나 저처럼 어려 보이는 나이에, 흐리멍덩한 눈빛을 가진 고수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 없다. 아니, 이제는 달랐다.
“……색마.”
어느새 검을 뽑아 든 여인의 눈빛은 변해 있었다.
조금도 흐리지 않다.
완벽한 강호인, 아니 그 어떤 무인보다도 더욱 강렬하고 사나운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맹수의 왕이라는 범을 보는 듯한 기분. 그 눈빛에 몸이 움츠러든 관음색마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이 내가…….’
천하의 관음색마가 여인을 보는 눈이 없어 이렇게 죽는구나.
상념은 그것으로 끝.
여인, 공서하의 검은 일직선으로 쏘아져 단박에 관음색마의 심장을 꿰뚫었다.
핏물이 흘러내리는 가슴 부위에서 검을 뽑아 드는 그녀의 눈은 그야말로 냉정(冷情).
휘릭-, 탁.
검을 휘둘러 핏물을 털어내고, 검집에 꽂아 넣은 후에야 조금은 온정(溫情)을 담은 눈빛을 보인 공서하의 시선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아…….”
직후,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이후로는 이미 싸늘하게 식은 시체가 되어버린 관음색마를 향해 짧게 읊조린다.
“덕분에…….”
또다시 길을 잃을 뻔했는데, 지나치지 않고 목적지로 향하는 방향에 설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서쪽…….”
그곳에 공서하의 목적지, 무명현이 있었다.
제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