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一章)
마현과 제자들의 여정이 호남땅에 이르렀을 무렵, 아이들은 거의 완전히 노숙 생활에 적응이 된 상태였다. 스스로 약초와 독초를 구분할 수 있게 됐음은 물론, 마현에게 배운 궁술을 토대로 어수룩하게나마 사냥을 잘 해나가기 시작했다.
조리도 마찬가지였다.
음식을 죽인다는 살식수(殺食手) 정순욱을 제외한다면 모두가 고기 정도는 적당히 익힐 수 있을 정도의 감각을 가지게 되었다.
정순욱이 살식수라는 괴이한 별명을 가지게 된 이유야 간단했다.
어떤 음식이든, 재료든 맛없게 만들 수 있다.
심지어 단순히 고기를 굽는 것조차 제대로 못 한다.
본인은 분해했지만, 그야말로 음식을 죽이는 손을 가진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재능을 보이는 경우, 화영령의 경우는 산에서 캔 버섯과 풀등을 이용해 고기와 섞은 요리를 직접 창안하기까지 했다. 큰 조미료 없이 나름의 맛을 내는 그 능력은 분명 마현의 입장에서도 칭찬할 수밖에 없는 뛰어난 재능이었다.
그렇게 여정에 즐거움이 더해졌다.
힘든 만큼, 얻는 것도 많다.
하나 한동안 접하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도 커질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 노릇.
호남 신녕현 인근에 이르렀을 무렵, 멀리 보이는 마을의 모습에 마현이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슬슬 객잔 음식도 먹어볼까.”
“개, 객잔 음식!”
“남이 해준 밥!”
“제대로 된 요리!”
그에 아이들은 하나같이 환호성을 토하며 마현의 말에 동조했다. 정말로 객잔에서 나오는 평범한 음식이 그리웠다는 뜻이리라.
“저, 저도 제대로 조미료만 갖춰진다면…….”
최근, 요리에 제대로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화영령의 경우만이 조금 반응이 달랐다. 이것저것 아이들에게 음식을 해준 게 많은 만큼, 섭섭함을 느낀 것이다.
“하면 마을에 들른 김에 조미료도 조금 사보자꾸나.”
“정말요?”
화영령의 얼굴이 단숨에 반색하여 활짝 펴졌다.
요리에 재미를 느끼며, 나름대로 재료나 조미료의 부재에 큰 아쉬움을 느끼고 있던 그녀였다. 만약 여기서 이러한 게 더해지면 더 맛있을 텐데. 왜 그런 생각 있지 않던가? 화영령은 감각이 있는 편에 속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그렇게 모두가 즐거운 얼굴로 마을로 들어서 객잔으로 향했다.
“오늘 밤은 여기서 묵고 가자꾸나.”
그렇게 들어선 객잔에서, 나온 마현의 말 한마디는 아이들을 더욱 들뜨게 했다.
“따, 따뜻한 물…….”
“편안한 잠자리.”
얼굴을 붉히며 황홀경에 빠진 아이들을 보며, 마현의 입가로는 작은 웃음이 감돌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고생 많은 여정이란…….’
사람을 사소한 것에 행복해하고, 감사하게끔 만드는 능력이 있다. 처음부터, 그러한 감정들을 알기를 바라고 시작한 교육이었던 만큼, 마현의 입장에서야 더욱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성과가 제대로 나타난 것이다.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 때 행복은 더 커지는 법이니까.’
사실 삶이란 것은, 그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위대한 놀라운 기적이다. 마계에서 하루, 하루를 죽음을 직시하며 살아온 마현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나 중원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떨까?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마현의 제자들은 이와 같은 생각을 할까? 조금쯤은 할 수도 있지만, 사소한 것의 소중함을 완벽하게 느끼고 있지는 않을 터다.
사소한 것의 아름다움을 알 때, 삶은 더욱 풍족해진다.
마현은 아이들이 그러한 감정을 알기를 바랐다.
자신의 삶이, 크지 않은 작은 소망에서부터 행복해져 왔듯이 말이다.
“하면 식사부터 하실 것인지, 아니면 목욕부터…….”
마현의 말에 아이들이 보인 반응에, 근처로 다가온 점소이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즐거워 보이는 제자들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떠오른 것 같은 모습이다.
“어떻게 하고 싶으냐?”
“우선 씻고 싶어요.”
“저도…….”
“밥!”
“역시 먹고 씻어야죠!”
여제자들과 남제자들의 의견이 단숨에 갈렸다.
아무래도 서로 바라는 게 상충될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다.
“하면 어차피 탕도 하나뿐이니, 소저분들 먼저 씻고, 이후 소협분들이 씻는 건 어떻습니까? 씻는 동안은 서로 식사를 하면 될 터고요.”
그러자 웃는 얼굴의 점소이가 적절한 의견을 제시했다.
남제자와 여제자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답안이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마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점소이는 곧바로 목욕물을 준비하겠다며 객잔의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이후로는 완벽히 굶주린 짐승이 된 백산과 정순욱, 양명의 식사 주문을 다른 점소이가 받았다.
“소면과 만두, 그리고 오향장육 하나에 화주도 한 병 주시오.”
마현도 오랜만에 허리춤을 풀고 음식을 주문했다.
무공이 극한에 올라 굳이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없다고는 하나, 미각의 감각을 즐기는 것은 또 별개였다. 제대로 된 음식이 먹고 싶었던 것은 마현도 마찬가지. 그렇게 주문을 받은 음식이 원형 식탁 위로 차례차례 올라오는 사이, 여제자 둘은 먼저 몸을 씻기 위해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음식이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이들은 말 한마디 없이 나오는 음식을 향해 손을 뻗어 흡입하듯 식사를 했다.
원체 잘 먹는 백산이야 그렇다 쳐도, 정순욱과 양명의 아귀 들린 듯한 모습은 마현으로서도 나름대로 신선한 모습이었다.
‘음식 맛이 그렇게 훌륭한 것도 아닌데…….’
시장이 반찬이라도 된 듯, 와룡객잔의 음식보다 더욱 맛있게 식사를 마친 남제자들이, 동시에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배를 두들겼다.
“아, 좋다.”
“끝내주게 잘 먹었어.”
“매일 이렇게 먹을 수만 있다면…….”
말을 듣자 하니, 적어도 마현이 바라는 목표는 완벽하게 이루어진 듯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여자애들이라 그런가?”
이 층에서부터 내려오는 계단에 여전히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조금 지루해진 듯 양명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정순욱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태도로 대충 대답했다가,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늦네.”
“그러게 말이지.”
이제는 백산마저도 동조에 나섰다.
묘한 분위기다.
마현은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은근슬쩍 존재감을 지워나갔다. 아이들의 입장에서야 바로 앞에 있지만, 마현이 없는 것과 같은 기분일 터다.
마현이 마음만 먹는다면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러길 또 잠시.
“저기 있잖아…….”
먼저 입을 연 것은 이번에도 양명이었다.
“……?”
“할 말 있으면 빨리해.”
백산의 시선이 향하고, 정순욱의 채근이 이어진다.
“요즘…… 예쁘지 않아?”
조심스러운 목소리의 양명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한다.
“누가?”
“소수린?”
대답은 달랐다.
백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질문했으며, 정순욱은 정확한 대상을 짚었다. 하나 옳은 질문을 한 것은 분명, 백산이었다.
“아니, 영령, 말이지.”
“화영령……?”
정순욱이 황당하다는 듯 묻자, ‘응!’이라며 고개를 크게 끄덕인 양명이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얼마 전에 요리하는 모습도 그렇고 말이지. 은근슬쩍 말투가 조신한 데다가…… 뭐랄까. 어른스럽다고 해야 되나?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예쁘다고 느껴진단 말이지.”
“……취향이니 별말은 않겠다만…….”
잠시 고민하듯, 목소리를 흘린 정순욱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확실히, 화영령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백산, 네 생각은 어때?”
“어? 나야 뭐…….”
백산이 어수룩한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예쁘지 않다기보다는, 별 관심 없다는 듯한 그 행동에도 양명의 입가로 번진 웃음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음…… 정말이지, 신기하지 않아? 처음 봤을 때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리 신경도 안 쓰이는 애였는데 말이지.”
가벼운 연애사.
흥미는 있지만, 이전에 느껴진 묘한 분위기에 비하자면 아쉬운 맛이다.
그리 생각한 마현이 슬슬 존재감을 나타내려 할 때였다.
“잘은…… 모르는데 말이야. 우리 아버지가 그랬는데, 여자는 입고 있을 때보다 벗은 상태에서 예쁜 게 더 중요하대.”
“……!!”
“……!!”
백산의 폭탄 발언에, 두 제자를 비롯한 마현의 움직임이 동시에 멈췄다.
“……잘 모른다고 했다. 그냥 들은 말일 뿐이라고.”
스스로 말해놓고도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힌 백산이 딴청을 피우며 조심스레 말을 흘렸다.
아무래도 백산은, 아버지 백일에게서 여성에 대한 좋지 않은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분명, 고작 열여섯의 백산이 가지기에는 무리가 많은 사상이다.
“너, 너 어떻게 그런 말을…….”
당황이 가득한 정순욱의 말에, 손을 내저은 백산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미, 미안하다. 또 말하지만 그냥 들은 말일 뿐이고…….”
“그, 그렇다면 영령은 분명 벗어도 예쁠 거야!”
“넌 또 무슨 말이야!”
양명의 반응에, 더욱더 얼굴을 붉히며 거친 목소리를 토한 정순욱이 백산을 보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꽉 쥔 양 주먹은 무엇이 그리 분한지, 힘이 꽉 들어간 상태였다.
“그런 말을 하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설마 네놈, 벌써 어른의 벽을 넘은 거냐?”
이후로,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레 묻는다.
“어른의 벽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말이다. 남자가 그, 여자의…… 으으…….”
정순욱은 무언가 부끄럽고, 분하다는 듯 말을 이어가다, 무언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반색하며 얼굴을 활짝 폈다.
“어른의 벽을 모르는 것을 보니 네놈…… 아직 어린아이로군.”
입가로는 어느새 오만함이 가득 밴 미소가 번진 채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 정도의 분노를 표한 것은 아무래도, 백산이 자신보다 앞서 나갔을지도 모른다는 데에 대한 승부욕의 발현이었던 듯했다.
“어른의 벽이 뭐야?”
그런 정순욱의 말을 못 알아듣기는 양명도 마찬가지.
“흥! 어린 녀석들.”
이제는 신이 나, 하찮다는 듯 콧방귀를 낀 정순욱의 검지가 객잔의 이 층을 향했다.
“어른의 벽을 알기 위해선 바로 이 위, 그 뭐냐…… 여자들의…… 음…….”
“탕을 훔쳐보자는 거야? 순욱이 너, 의외로 색마 기질이 있었구나.”
“내가 언제 그랬냐! 누구보고 색마란 거야!”
양명이, 무언가 불결하다는 듯 바라보자 흥분한 정순욱이 목소리를 더욱 드높였다.
‘더 이상은……’
위험하겠다.
스승인 자신이 있는 걸 완전히 인지하지 못한 세 제자의 대화에 놀라기도 하고,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던 마현이 존재감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쯤이면 알아서 멈출 줄 알았건만…….
“훔쳐보고 싶은 마음이야 나도 같지. 하지만 옳지 않아! 그는 나쁜 색마들이나 할 법한 일이잖아!”
“아니, 내가 언제……!”
이야기는 끝이 없다.
결국 그러한 두 사람의 다툼을 종결시킨 이들은 마현이 아니었다.
“너희들 뭐하니?”
이 층에서부터 내려온 두 여제자.
그들의 목소리에 한참 색마에 대한 주제로 목소리를 높이던 두 제자가 빠르게 입을 닫고는 딴청을 피운다.
“흐, 흥!”
“흥!”
서로를 향해 콧방귀를 끼는 것만은 변함이 없었지만 말이다.
* * *
뒤늦게, 그 자리에 마현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세 남성 제자들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추태를 부렸다고 생각한 듯했다.
“죄, 죄송합니다.”
백산의 사과에,
“잘못했습니다.”
“벌주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격렬하게까지 싸운 두 제자도 고개를 숙인다.
마현은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괜찮다. 충분히 그 나잇대에 나눌법한 대화였어.”
애초에 마현이 기척을 감추지 않았다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사태였고 말이다.
어찌 됐든, 사태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현재로써는 조금 민망하기도 하겠지만 말 그대로 시간의 문제일 뿐.
사건이 잊혀 갈 때쯤이면 아이들도 변함없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럴 만한 나잇대가 되기도 했지…… 허허.’
마현의 입장에서야 더욱 간단했다.
말 그대로 그럴 때도 됐다.
남자 제자들도, 여자 제자들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서로 이성에 호감을 가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백산이나 양명의 경우에는 너무 순수할 정도로 모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요즘 중원에서 거칠게 자라났다는 아이들은 나이 열만 넘어도 남녀 간의 관계를 이야기한다고 하니…….
‘세 아이 모두 순수한 건가.’
정말, 감출 수 없는 웃음이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마현은 그렇게 제자들과의 여정 중 생긴 즐거움에 마음을 맡긴 채 목욕을 즐겼다.
* * *
목욕을 마치고, 일 층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우당탕.
“꺄악-!”
계단에서부터 소란이 이는 소리가 마현과 제자들의 귀를 울렸다. 여기서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흘러나온 여성의 비명이, 다름 아닌 와룡서원의 제자 화영령의 것이었다는 점이었다.
“누가……!”
다급한 얼굴의 양명이 단숨에 복도를 뛰어 내려갔다.
마현과 백산, 정순욱도 그 뒤를 곧바로 따라 일 층에 도착했다.
사태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소수린은 한 식탁에 앉아 빈 요리 접시를 내려놓고 있었으며, 화영령은 바깥으로 향하는 길목에 주저앉아 당황한 표정을 한 채였다.
그 앞으로는 화려한 황금으로 수를 놓은 의복의 무인 여럿과 그보다 더 화려한 의복을 갖춰 입은, 이제 갓 열 살이 넘은 듯한 어린아이가 서 있다.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는 어린아이 측이었다.
작은 얼굴에, 새하얀 피부, 곱게 자라온 것이 분명한 인상에 제법 귀여운 얼굴을 한 소년은 화영령과 척 보아도 비싸 보이는, 헝클어진 자신의 옷을 번갈아 보면서 점점 더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붉고, 고와 보이는 입술이 파르르 떨리다 달싹달싹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너…….”
“죄,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멍하니 걷다…….”
아무래도, 분명 먼저 실수를 한 건 화영령 측인 듯했다.
‘문을 열다 못 보고 부딪쳤나?’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문을 열고 당당히 안으로 들어오려던 소년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화려한 의상의 덩치가 커다란 무인들에게 시선이 고정된 화영령과 부딪쳤다. 척 보아도 귀한 집 자식이니만큼, 그것만으로도 감정이 상했을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마현은 직접 나설까, 제자들의 반응을 볼까 고민하다 후자를 택했다.
일단은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건방지고 천박하고 더럽고 추잡한 년. 감히,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소년 아니, 미(美) 소년이라고 이름 붙여도 될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귀여운 외모와 도저히 상충되지 않는 격한 말이었다. 무엇이 그리 분한지, 얼굴을 붉히며 콧바람까지 씩씩 내뱉은 소년은 화영령의 얼굴을 가리키며 계속해서 욕설을 쏟아냈다.
“나는 네깟 년처럼 천박하고 더럽고, 음탕할 것 같은 년이 만질 수 있는 몸이 아니다! 한데, 네가…… 감히 네가…… 나를 못 본 척하고 지나치다 부딪쳐?”
“아니, 그게 저…… 못 본 척 한 게 아니라 정말로 못 봐서…….”
“갈!”
어디서부터 배웠는지, 목소리를 우렁차게 내는 법 하나는 정말 잘 배웠다.
“소공자님…….”
그런 소년을 향해, 뒤에 선 무인 중 하나가 조심스레 목소리를 흘린다.
“갈!”
하나 대답은 같았다.
소년은 매우 분하다는 듯, 눈을 붉히며 화영령을 노려본 후 허리춤의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할 수 없어.”
“거기서 진짜 검 뽑으면, 손모가지 날아간다, 꼬맹이.”
원한 가득한 소년의 읊조림에, 차가운 목소리로 응답한 것은 바로 정순욱이었다. 어느새 양명, 백산 등과 함께 앞으로 나선 그는 이 상황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소년을 노려보며 눈을 부라리고 있는 채였다.
“네놈은 또 뭐냐, 천박한 놈.”
“……뭐?”
정순욱의 쌍심지가 더욱 높게 치솟는다.
“네까짓 하찮은 놈은 귀한 이 몸에게 말을 걸 자격조차 없다. 굳이 대화를 하고 싶다면 공손히, 무릎 꿇고 부탁하도록.”
언제나 남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것은 정순욱의 역할이었다.
한데 입장이 뒤바뀌었다.
심지어 상대가 한참이나 어린 소년.
황당한 표정이 된 정순욱은, 할 말을 잃은 채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무래도 말로는 어렵겠다 생각한 듯했다.
“흥…….”
그런 모습을 보았음에도 소년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습다는 듯, 콧바람을 찬 이후 검을 뽑으러 가던 손을 계속해서 움직인다. 그렇게 검병을 강하게 움켜쥐고, 검을 내뽑으려던 순간에는…….
“……!!”
“나도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어느새 자리를 옮긴 백산이 살짝 무릎을 굽힌 채 소년의 손등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뭐, 뭐, 뭐야……!”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지 못한 건지, 깜짝 놀란 표정의 소년이 오만함 가득한 기세를 풀고 뒷걸음질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칼은 함부로 뽑는 게 아니란다, 애송아.”
덕분에 자신의 표정을 되찾은 정순욱의 조소가 빠르게 그 뒤를 따라붙는다.
“괜찮아?”
어느새, 화영령에게 다가간 양명은 그녀를 부축하고 있었다.
“응. 괘, 괜찮아.”
“이이, 이놈들이……! 다들 뭣하고 있어! 저 건방진 녀석들 당장 잡아다 무릎 꿇려!”
그 모습에 소년의 얼굴은 더욱더 붉어졌다.
뜻대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니 화를 낸다.
거기에 더해 가문의 힘을 믿고 언성을 높이고, 남들을 멸시한다.
“누구누구를 똑 닮은 아이네.”
백산이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말하자,
“그 누구누구가 만약 나라면, 넌 오늘 밤 나랑 생사결을 치러야 할 거다.”
정순욱이 저것만은 절대로 아니라는 듯 부정하며 답한다.
소수린 역시 어느덧 식탁에서 일어나 아이들 사이로 선 채였다.
만약 무인들이 제압하기 위해 덤벼든다면 함께 맞설 셈.
“뭐해! 빨리 잡으라고!”
하나 일의 방향은 묘하게 흘러갔다.
보통이라면, 이쯤 되면 모시는 주인의 명을 따라 무인들이 달려들 것이다. 하나 소년의 뒤에 선 무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딱히 무슨 말도 못한 채,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라만 볼 뿐이었다.
“오충(墺衷), 짤리고 싶어!? 빨리 저놈들 잡아오란 말이야!”
소년의 외침에, 처음 그를 불렀던 무인이 이마를 짚으며 곤란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덜컥.
문이 열리고 또 다른 인물이 들어섰다.
이번에 나타난 인물은 청년이었다.
훤칠한 키에, 새하얀 피부, 여인을 울리는 얼굴이 있다면 바로 저런 모습이리라. 그야말로 미남(美男)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청년은, 문을 연 것을 제외하자면 거의 기척도 없이 내부로 단숨에 녹아들었다. 실상 마현을 제외하자면 그 모습을 제대로 본 사람이 없으니, 그야말로 뛰어난 무공이라 말할 수 있을 터였다.
‘어린 청년이 제법이로군.’
그런 마현의 감탄 속.
조용히 걸음을 옮긴 청년이 향한 곳은 고래고래 목소리를 높이며 제자들을 공격하라는 소년의 바로 뒤였다.
호위를 담당하는 무사들은 난감하다는 표정만을 짓고 있었으며, 소년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높아져만 간다.
그 속에서.
퍼억-!
청년의 손바닥이 소년의 뒤통수를 강하게 때렸다.
“어떤 건방진 녀석이 감히……!”
얼굴이 크게 붉어지다 못해, 곧 울 것만 같은 표정이 된 소년이 목소리를 더욱 높이며 고개를 홱 돌렸다.
“건방진 네 형이다, 이놈아.”
황당한 표정으로 소년을 내려다본 청년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대공자님!”
그의 등장에, 난감해만 하던 무인들의 얼굴에도 단숨에 화색이 돌았다. 반대로 목소리를 고래고래 높이며 고집을 부리던 소년의 얼굴에는 음영이 내려앉았다. 당황한 기색도 없지 않아 크게 엿보였다.
“잠깐 볼일 보고 온 고 새에 또 사고를 치다니…… 하아…… 오충, 상황설명 좀 부탁할게.”
“예, 공자님.”
소년의 고집에 가장 많은 괴롭힘을 당했던 무인, 오충이 곧바로 청년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여태까지의 상황을 전했다. 대공자라 불린 청년의 얼굴은 시시각각 변화를 맞이했는데, 그 끝에 이르러서 한 행동은 처음과 다를 것이 없었다.
퍼억-!
“아악, 아파!”
“아프라고 때린 거다. 따라와.”
“싫어!”
“이 형이 언제 싫다면 안 데려가던?”
“끄아아악!”
소년의 고집은 엄청났지만, 청년의 막무가내는 더했다.
고집을 부리는 소년의 귀를 강하게 끌어서는 와룡서원의 제자 오인방 앞에 데려다 놓은 것이다.
이후의 일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청년이 고개 숙여 사과를 한 후.
“너도 해.”
소년의 머리를 억지로 굽혀 사과를 지시한다.
“안 해!”
“아버지보고 다음 달부터 용돈 절반으로 줄이라고 한다.”
“으으으…….”
“사과해.”
“치사해.”
이번에도 승리는 청년의 몫이었다.
소년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와룡서원의 제자들과 청년을 바라보다 입술을 강하게 깨문 후에야 힘들게 입을 열었다.
“미, 미, 미안하게 됐어!”
“죄송합니다, 라고 해야지.”
“어떻게…….”
“여준(餘俊)…….”
“으으, 죄송합니다.”
“흥, 꼴좋다.”
청년과 소년의 사과에, 콧방귀를 뀐 정순욱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추켜들었다.
그쯤 되면 오히려 반대에서 화가 날 법하건만, 청년의 태도는 처음부터 초지일관이었다.
“우리 여준이가 여러 가지로 많이 모자랍니다. 부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완벽한 저자세.
화려해 보이는 금빛 의상에, 호위무사까지 데리고 있는 힘 있는 가문의 자식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그 태도에 제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저희도 뭐…….”
“괜찮습니다.”
어찌 됐든 일이 잘 풀렸으니 됐다.
뭐, 그 정도로 생각한 것이었다.
“아, 이런.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황여진(黃餘進)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녀석은, 황여준. 제 동생입니다.”
“백산입니다.”
“정순욱.”
“소수린.”
“양명이라고 합니다.”
“화영령이예요.”
황여진의 소개에, 와룡서원의 제자들도 포권을 취하며 각자의 이름을 밝혔다.
이후로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화기애애였다.
황여진은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었으며, 와룡서원의 제자들은 그를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하면 저분이…….”
“예, 우리 스승님이세요.”
“소문의 무명와룡 선생님을 뵙게 되는군요.”
이름에 대한 소개는, 곧바로 자신들의 소속을 밝히는 데까지 이어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금세가의 황여진입니다.”
황여진은 곧바로 마현에게 다가가, 포권을 취하며 다시금 자신을 소개했다. 마현을 제외한 와룡서원의 제자들 모두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어리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황금세가?”
“설마…… 황 소협이 그 황금세가의 대공자…… 황금공자(黃金公子)라고요?”
“과분한 명호일 뿐입니다.”
황여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 뜻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황금세가가 어디던가!
자그마치 천하제일상단이라 불리며, 천하의 황금중 심할 이상을 지니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재력가이자, 현 강호 오대세가라 불릴 만큼 뛰어난 무인들도 두루 갖춘 엄청난 곳이다.
그러한 황금세가의 대공자, 황금공자 황여진 역시 유명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려서부터 상재와 무재 양측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장차 현 황금세가주를 뛰어넘어, 황금세가를 더욱 부흥시킬 것이라 각광 받는 인물.
후기지수들 사이에서는 금룡(金龍)이라고까지 불리는 이가 바로 황여진이었다.
그런 황여진이,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지체 높은 인물이 와룡서원의 제자들을 향해 먼저 고개를 숙였었다고?
“감탄이네.”
“저게 바로 될 사람인가.”
백산과 양명의 입에서 절로 칭찬이 흘러나온다.
꽤 잘 나가는 상인가라고, 열심히 오만을 부렸던 누구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쳇.”
그 누군가가 조용히 혀를 찰 무렵.
이미 황여진의 등장 전부터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던 마현의 입가로도 작은 웃음이 번졌다.
‘설마 여기까지 예상한 건가?’
주화화, 그녀가 떠오른 탓이었다.
그녀는 본래 마현에게 북해로 가, 황금세가를 돕기를 권했었다.
하나 마현은 번거로운 일은 싫다며 거절했다.
북해에서 우연히 마주친다면 도울 용의 정도는 있다며, 간단하게 정리한 것이다.
한데 끝내, 이렇게 가는 길에 두 집단은 부딪치고 말았다.
그것만이라면 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 황금세가의 대공자라는 인물이 꽤나 좋은 인상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마현에게도, 제자들에게도 말이다.
‘이래서야…….’
받은 것도 있는데 모른 척할 수만은 없다.
만약 주화화가 이러한 경유 지역까지 예상하여 마현에게 큰 부탁을 하지 않고 떠난 것이라면…….
‘내가 한 방 먹은 셈인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마현은 주화화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간 괜찮으면, 함께 차나 한잔하도록 하죠?”
“저야 바라던 바입니다.”
그렇게, 황금세가 일행과 와룡서원 일행이 동행하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 * *
“에엣취!”
“갑자기 웬 기침이십니까? 한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그러게 말이다. 누가 내 욕이라도…… 에엣취! 그러고 보니 이쯤 만날 때가 되기는 한 것 같기도……! 에헤엣취!”
“거 욕먹으면 오래 산단 말도 좋은 게 아니군요.”
“아니, 진짜 이놈이……!”
멀리서 일어난 이야기에도 예민한, 주화화와 마운의 짧은 대화였다.
제십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