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귀환-80화 (81/83)

(第十五章)

아이들이 전장에서 성장하고, 위기를 맞이하고 있을 무렵.

마현은 섬서의 하늘 위에 서 있었다.

‘수라장(修羅場)이로구나…….’

내심과, 입가로 동시에 쓴 신음이 흘렀다.

화산검선이 종적을 감춘 이후, 정의맹의 전력은 반 이하로 감퇴되었다. 단순히 종선휘의 무위 탓만이 아니다. 그 이름에 이끌려 싸우던, 그 이름을 숭배하며 힘을 내던 무인들의 어깨에서 힘이 빠진 탓이다.

이는 극명한 사실.

그를 드러내듯, 정의맹은 최악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천마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왕 하나 없는, 일부 마두들과 천마친위대가 이끄는 마군들에게 연전연패로 수세에 몰리고 있는 것이다.

무림인의 싸움은, 책략보다, 군략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사기(士氣)다.

종선휘가 종적을 감춘 지 칠 주야가 지나며, 이미 사기는 밑바닥을 치는 상황.

이 상태로 간다면 정의맹의 존속 자체가 흔들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애쓰고 있군.”

안타까움을 표현하던 마현의 두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지상으로 향한다. 그곳에 보이는 것은 마현에게 있어서도 너무나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마운과 마연.

동생들.

그리고 곤란한 얼굴의 주화화와, 심한 부상 이후 회복했는지 온몸에 부목을 댄 남우가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아마 현재 상황을 타파할만한 묘안을 찾고 있는 듯하지만, 쉽지는 않아 보였다.

물론 문제는 곧 해결될 일이다.

‘천마를 잡겠다.’

마현이 결심했다.

그가 어떠한 경지에 달했든, 무엇을 익혔든,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나 처음 다짐했듯, 언제까지나 이러한 일에 나설 수는 없었다. 마현은 무림에 한 발 걸치고 있지만, 결코 무림인이 아니다.

무명와룡.

그 별호처럼, 무명현에 머무는 한 명의 스승일 뿐이었다.

‘하니…….’

이번이 정말 마지막.

그리 결심한 마현이, 지상의 가족들을 향해 한 줄기 전음을 남긴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직후, 마현의 신형이 허공에서 유령과도 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 * *

“바, 방금?”

깜짝 놀란 표정을 한 마운이, 마연을 향해 묻는다.

“마, 맞아. 분명 큰 오빠였어.”

전음이었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했다.

남우가 일어난 이후,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전선을 가다듬던 마연의 눈동자가 크게 끔뻑였다.

“마현이 왔느냐?”

주화화가, 놀란 듯 그런 둘을 향해 묻는다.

“예, 한데 모습은 보이시지 않고…… 그냥 이번이 마지막이라고만…….”

읊조리던 마운이, 무언가 깨달은 둣 양손을 탁 쳤다.

“설마, 형님께서 직접 천마와 생사결을 맺으러…….”

“아무래도, 정황상 그렇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

주화화가,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사실, 내심 몇 번이고 바랐던 상황이다.

만약 정말로 천마신이 화산검선을 꺾었다면, 그를 죽일 수 있는 인물은 오롯이, 마현뿐이다. 하나 언제까지나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

결국 마현이 말한 마지막의 의미는 간단할지도 몰랐다.

“오빠가,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무림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

“……우리도 울타리 밖으로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뜻이겠지.”

납득한다.

이해하고 있었기에, 애초에 먼저 찾지 않았다.

하여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이제 울타리 밖으로 갈 것이 아니라, 세상을 초탈해 살아야 할 나이거늘…….”

그러고 보니, 자신의 처지에 한숨이 나오는 것은 주화화뿐이었다.

“……그런데 큰 형님이 그렇게 강한가요?”

영문을 모른 채, 두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 것은 남우였다.

질문에 대한 답은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강하지.”

마운이 말한다.

“천상천하를 통틀어, 가장 강할 게다.”

주화화가, 입을 내밀며 투덜거리듯 말한다.

“천마도 이제 끝장이란 소리지.”

마연 역시 입을 모아 말했다.

‘그 사람 좋아 보이던 큰 형님이…….’

이들이 이렇게까지 입을 모아 칭찬할 정도로 강한 무위를 익히고 있다니…….

다른 것은 큰 상관 없었다.

‘혹시 연 매에게 잘못해서 걸리기라도 한다면…….’

등 뒤로 쭈뼛, 솟아나는 소름에 남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목숨이야 아까운 것이니 말이다.

“하하하…….”

어색한 남우의 웃음이,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

* * *

“왔군.”

깊은 어둠 속.

옥좌에 앉아 지루한 듯 턱을 괴고 있던 천마의 얼굴로 미소가 떠올랐다.

“네가 무명와룡인가?”

수많은 마군들이 진을 치고 있고, 천마 호위대의 시선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러한 마군 본영(本營)의 한복판에, 소리소문없이 귀신처럼 등장할 수 있는 이는, 전 강호를 통틀어 몇 없을 터다.

하기에 천마신은 눈앞의 사내를 마현이라 확신했다.

“…….”

마현은 답을 하지 않았다.

굳이 말을 섞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를 가늠할 수 있는 영역에 서지 않았던가?

‘생각보다 더 대단하군.’

직접 마주한, 천마신의 존재감에 마현은 오랜만에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진심으로 상대해야 할 존재라고 여겼지만, 기대 이상이다.

패배.

두 글자를 떠올리지는 않았지만, 자칫하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쯤은 충분히 자각되었다.

“말이 없는 편인가 보군. 하긴, 뭐 어떤가. 서로가 지루함의 극에 달해,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영역인 것을. 고맙군. 자네마저 화산검선 그 늙은이처럼 날 실망시켰다면, 정말 절망할 뻔했어.”

말을 하면서, 동시에 기세를 일으킨다.

하늘 위로 솟은 겁화는 당장에라도 마현을 잡아먹을 듯 검은 혀를 날름거린다. 마현 역시 그에 맞서 기를 일으켰다. 붉고, 푸른, 검고, 흰 네 가지 기운이 동시에 뒤섞여 솟아오른다.

“으음……?”

그를 보며, 오묘한 신음을 흘린 천마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기이하군. 한 몸에 품은 기운이 이토록 많다니.”

아니, 기이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마현의 얼굴.

무언가 권태에 찌든 듯한,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과 다르다.

“네놈, 혹시 해서 묻는 것인데, 이 만남이 즐겁지 않은 것이냐? 아니지. 삶이 지루하지 않나?”

“…….”

마현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대신하여 돌아온 것은.

슈욱-!

번개 줄기처럼 쏘아진 푸른빛 섬광이다.

콰앙-!

폭음과 함께, 앞으로 쏘아져 푸른 섬광을 잡아먹은 검은 화염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설마, 네놈은…… 이 몸과 다르다는 말이냐!?”

천마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있을 수 없다.

절대의 고독은,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그 허망함을 이해하는 자는 오로지 절대자뿐이다.

하나, 천하를 통틀어 절대자는 단 하나.

그렇기에 늘 외롭다. 천마 본인이 그러했다. 하여, 자신과 함께 절대를 논할 인물이 있기를 바랐고, 드디어 마주하였다. 한데, 어째서 외롭기만 하여야 할 절대자가 저토록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가? 삶의 즐거움이 엇비치는 눈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납득할 수 없었다.

아니, 용서할 수 없었다.

“답하거라, 이 건방진 놈!”

콰르르르-!

대전(大殿)이 무너진다.

“우와와!”

“처, 천마궁이……!”

천마신이 머무는 곳이, 곧 천마궁.

그러한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본 바깥 마교도들이 마구잡이로 소리를 질렀지만, 작금의 천마신에게는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답하지 않겠다면, 죽여서 물어주마!”

지옥불보다도 뜨거운, 검은 겁화를 쏘아내며 괴성을 토한다. 직후, 무너지는 대전에서 쏟아지는 바위를 디뎌 치솟아 오르며, 검을 뽑아 들었다.

카가가각-!

검이 공기를 타고 내려오는데,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대기가 찢기다 못해, 엄청난 압력에 괴로움을 호사하는 것이다.

마현은 그 공격에 대해 양팔을 저어 두 개의 심검을 띄워 올리며 응수했다.

파바밧-!

불빛이 번뜩이고, 검은 화염이 마구잡이로 마현을 덮쳐간다. 하나 검은 화염은 끝내 마현에게 닿지 못한 채 또 다른 두 개의 심검에 의해 갈라진다. 마현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천마가 그 뒤를 쫓는다.

쾅-!

쾅-!

지상에 있는 무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불빛이 부딪치고, 또다시 부딪치는 일련의 섬화(閃火)뿐이었다.

“이, 이 무슨……!”

“대체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인세의 것이라고 보기 힘든, 그 엄청난 대전(大戰)에, 모두의 입이 벌어진다.

“이 건방진 놈이……! 외롭지 않고, 그 힘을 어찌 사용할 수 있단 말이냐!”

그 와중에, 분개를 토하는 천마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죽어라! 네놈은 나와 동족이 아니다! 즐겁지 않다. 죽어라, 죽어서 네놈의 무가치함을 증명해라!”

그 목소리에 따라 검은 겁화가 점점 더 크기를 불려갔다. 이윽고, 형상을 취해간다.

거대한 검은 검과 방패를 든, 두 눈에서 검은빛을 토하는 인간을 닮은 미지의 존재의 출연에 반응한 것은 지면 아래에 있던 마교도들이었다.

“처, 천마신이다!”

혹은 초대 천마!

마교에 있어, 신은 곧 교주다.

하나, 그러한 교주보다도 더욱 높은 유일무이의 지고의 존재가 있다면 그가 바로 초대 천마, 처음 마교를 세운 천마신이었다.

하기에 천산의 중심에는, 아주 거대한 초대 천마의 동상이 서 있었다.

그를 보며 매일 기도하고, 숭상하라는 뜻이다.

따지자면 천마신교의 무신(武神)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천마신의 동상과 같은 존재가, 기운을 통해 실체화하여 인세에 강림했다.

아무런 말도, 소리도 내뱉지 않지만 그 존재감이 이미 하늘을 뒤덮고, 땅을 벌벌 떨게 할 정도다.

“대단하군.”

그 모습에, 마현이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죽어라! 재수 없는 놈!”

후우웅-!

거대하게 휘둘러지는 천마신의 검에 맞서기 위해 네 자루, 아니 다섯 자루의 심검까지 뽑은 마현이 맞선다.

그리고 처음으로.

“음…….”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찌푸린 마현이 휘청인다.

이윽고…….

그 힘에 밀려나기 시작한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콰앙-!

폭음이 일었을 때는, 허공에서부터 지면으로 내팽개쳐졌다.

마현이, 처음으로 적의 공격에 쓰러진 것이다.

“이 천마신께서 네놈에게 몸소 벌을 주겠다. 건방진 놈. 오만한 놈. 외로움을 모르는 자가, 절대의 힘을 온건히 다룰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쓰러진, 먼지 구름이 피어오르는 지면에 묻힌 마현을 향해 오만 성을 낸 천마신의 검이 다시 한 번 들어 올려졌다.

“으아아……!”

천마신의 검에는, 적과 아가 없다.

마현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환호하다, 죽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았던 마교도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도주했다.

“후우…….”

그 중심.

짙은 먼지 구름 속.

깊은숨을 토한 마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찔하군.’

정말이지, 온몸이 저릴 정도의 강렬한 일격이다.

확실히 평범한 인간이 이 정도까지 힘을 가졌다면, 저러한 인성을 품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나, 그래 봐야.

인간의 한계영역을 간신히 초월했을 뿐이다.

마현의 눈이 빛난다.

손은 어느덧, 허공에 생성된 검은 구멍으로 파고든 채였다.

마황고.

그 끝을 모르는 거대한 아가리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한 자루 검이었다. 길지도 않고, 예리하지도 않다. 투박하다 못해 반 토막 난 특이한 기형검(奇形劍).

“오랜만이로군.”

그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중원으로 돌아온 이후, 마현은 단 한 번도 자신의 무공을 펼친 적이 없다. 오롯이 스승님들께 물려받은 힘만을 사용하였을 뿐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여 애초부터 마현은 무공이라 할 법한 행위를 취한 적이 없었다.

워낙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탓에, 그저 투박하게 힘을 쏟아 모두 해결해 왔던 것이다.

하나 마계.

그 지독한 악마들의 땅에 사는 무시무시한 마왕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마현의 진정한 힘은 달랐다.

“날뛰어보자, 추마(追魔).”

끼이이-!

검이, 기이한 울음을 토한다.

오랜만에 듣는 그 괴성에, 마현의 입가로 싸늘한 웃음이 번졌다.

“어디 한 번 견뎌보아라. 자신을 신이라 지칭하는 자여.”

진정으로 신을 자칭할 자격이 있는지.

시험을 내리는 이는 마계라는 하나의 차원(次元)을 정벌한 후, 그 정점(頂點)에 서 인간의 굴레를 벗어던진 이.

마신(魔神) 마현이었다.

<9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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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귀환 9권

1. 마교패퇴

먼 과거.

마계의 마지막 마왕이 거대한 육신의 반 토막을 송두리째 빼앗긴 후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대체 무슨 권능(權能)이냐?]

거대한 마왕의 가슴 위로 올라서, 싸늘한 웃음을 지은 마현이 답했다.

“마신무결(魔神武結).”

마왕의 떨리는 눈이, 마현의 오른손에 쥐어진 반 토막 난 검을 향했다.

형태는 검이지만, 단순한 무구(武具)가 아니다.

그야말로 힘의 집결체, 이미 그 존재 자체가 또 하나의 권능이라 부를 수 있는 보구(寶具)이자, 무공(武功)이다.

[큭큭…… 감히 한낱 인간이 마신을 자처하게 될 줄이야.]

마왕은 웃었다.

하나 감히 부정하지 못했다.

[인정하노라. 너는 마신이다. 우리의 가슴에 공포를 새겼던, 네 두 스승조차도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던 이름을 가진 절대자다.]

끼이이-!

마왕의 떨리는 시선이, 보채듯 울음을 흘리는 한 자루 검으로 향했다.

[하나, 그 힘이, 언젠간 너조차도 집어삼킬 것이다. 강한 힘은……]

서걱-!

읊조리던 마왕의 남은 반신이, 거대한 어둠에 집어 삼켜졌다.

“시끄럽군.”

마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어떠한 저주(詛呪)도 더 이상 그를 감싸지는 못한다.

그는 굴레를 벗어던진 자.

이로써, 진정한 마신이 되어버린 인간(人間).

하나, 이제는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 다시금 안락한 삶을 살고자 한다.

“돌아가고 싶군.”

그로부터 며칠 뒤, 그는 중원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귀환(歸還)한 것이다.

* * *

끼이이-!

섬뜩한 울음소리를 흘리는 추마가 마구잡이로 몸을 뒤틀었다. 당장 사냥에 나서자며 마현을 보채는 것이다. 마현은 그런 추마를 굳이 달래지 않았다.

“마음껏 날뛰어보자꾸나.”

파앗-!

지면을 박차, 단숨에 상공으로 날아오른 마현의 추마가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뱉는 천마신의 목을 향해 날아든다.

“어딜 감히!”

천마신은 자신의 등 뒤로 떠오른, 거대한 천마를 움직여 방어에 나섰다. 그의 검은 무적(無敵)이었다. 어떠한 창도 뚫지 못하는 방패와, 어떠한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을 함께 갖추었으니, 두려울 바도, 물러설 이유도 없었다.

콰앙-!

거대한 방패와 마현의 추마가 부딪치며 굉음을 토했다.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우레와 같은 울음소리를 토했다.

“신이시여…….”

그를 보는 지상의 이들이 탄식을 토했다.

감히 그들에게 닿을 생각은 떠올릴 수 없었다.

마주하는 것만으로 두 다리가 떨리고 무릎이 기울었다.

무의 극(極).

천외천(天外天)이라 불리는 하늘 밖의, 또 다른 하늘에 사는 무신(武神)들이 신마(神魔)의 대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저 박동하는 충격만으로, 주변에 모인 이들의 몸이 떨렸다. 내기는 뒤틀리고, 자연이 울음을 토했다. 백수(白壽)를 살아간다 한들, 이러한 광경을 단 한 번이라도 마주할 수 있을까? 행운(幸運)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던 무신들의 시대의 재림을 그들은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죽어라, 죽어.”

두 눈에서 으스스한 검은 열기를 토하는 천마신이 계속해서 읊조렸다. 마현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 추악한 감정을 마주하며, 웃었다.

“너는 마(魔)다.”

“그래, 나는 마다! 마중마(魔中魔)! 모든 마의 종주(宗主), 천마신이 바로 이 몸이시다!”

천마신이 답했다.

마현의 입가로 흐르는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하기에 너는 이 자리에서 죽는다.”

“개소리!”

“네가 마인 이상, 추마는 끝까지 쫓는다. 설령 네가 세상의 끝에 있다 하여도…… 너를 지옥으로 보낼 것이다.”

“감히……!”

천마신의 눈이 으스스한 빛을 흘릴 때였다.

쩌적-!

막상막하(莫上莫下)의 힘겨루기를 보여주며, 한 치의 물러섬도 없던 천마의 방패에 금이 갔다. 천마신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말한 바 있듯, 천마의 방패는 그 어떤 창도 뚫지 못한다. 한데 어째서…….

“모순이, 왜 모순이겠나?”

입가로 보이던 웃음을 거둔 마현이 기운을 부풀렸다.

동시에 잠시 모습을 감추었던 다섯 자루의 심검이 다시금 모습을 나타냈다. 날아든 곳은 천마신의 목이 아니었다.

추마!

반 토막 난 마를 쫓는 사냥꾼을 향해 다섯 자루의 심검이 함께 달려들었다. 추마는 그러한 다섯 자루의 검을 거침없이 집어삼켰다.

끼이익-!

울음을 토하며, 삼키고, 또 삼킨다.

반 토막뿐이던 추마의 부러진 검날 위로 심연(深淵)을 닮은 어두운 기운이 솟아났다.

콰지직-!

버티고 있던 방패의 균열이 깨어졌다.

그 엄청난 힘에, 놀란 천마신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흠칫.

‘이 내가?’

그는 천마신이다.

스스로 자부하는 마중마.

마의 종주였다.

한데, 그런 그가, 같은 검은 빛 기운을 사용하는 마현에게 밀리고 있었다.

‘어째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납득하고 싶지도 않다.

두 눈을 부릅뜬 천마가 다시금 앞으로 나섰다.

콰앙-!

동시에, 버티고 있던 방패가 폭음과 함께 깨어졌다.

거대한 천마의 신형이 뒤뚱거리며 휘청였다.

마현은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날렸다.

후웅-!

“네놈은 나를 이기지 못한다!”

천마신은 물러서지 않고, 그런 마현에게 맞서나갔다.

거대한 천마의 검이 하늘을 가르고 대지를 쪼갤 듯한 기세로 마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

카앙-!

마현은 그조차도 가볍게 막아섰다.

이후 검날을 맞대고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가가가각-!

추마의 검날이, 거대한 흑염의 검날을 갉아먹으며 기쁨의 비명을 토한다.

탐욕자(貪慾者)!

추마는 모든 마의 속성을 지닌 기운을 잡아먹는다.

하기에, 그 어떠한 마도 추마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거대한 흑염의 검이라 한들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놀랍군.”

흑염의 검을 잡아먹으며 나아가는 마현의 눈이, 감탄을 토했다.

한 자루가 아니었다.

어느새, 부서진 방패를 대신해 또 다른 흑염의 검을 생성한 천마의 검이 마현의 옆을 노리고 날아들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마현의 허리를 베어버릴 듯한 맹렬한 기세다.

후웅-!

눈을 빛낸 마현은 그러한 흑염의 검을 가볍게 회피했다.

‘세 자루째!’

놀라움은 그치지 않았다.

허공!

어느새 생성됐는지 모를 흑염의 검이 또다시 마현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뒤에서…….’

천마신 본인이 타오르는 흑염의 기운을 전신에 두른 채, 마치 화신(火神)과 같은 모습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진퇴양난(進退兩難).

물러날 곳은 없었다.

어디로 피한다 한들, 뱀의 혀를 닮은 흑염의 불길은 마현의 몸을 단숨에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죽어라!”

자신감에 가득 찬, 천마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마현의 입가로 진한 웃음이 떠올랐다.

등 뒤로부터는 거대한 암흑의 기운이 파도치듯 요동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멈추어라.”

음성은 낮았다.

하나 언령은 강력했다.

“……!!”

마구잡이로 마현을 태워버릴 듯, 날아들던 거대한 흑염의 검이 날아들던 모습 그대로 허공에 멈추었다. 심지어 자신감 넘치던 천마신조차 움직임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 정지된 세상 속에서, 마현 홀로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늦은 시간에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여유로운 걸음.

허공을 노닐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 마현이 웃었다.

“먹을 건 이 정도가 전부인 것 같다.”

끼이이-!

화답하듯, 추마가 울음을 토한다.

어딘지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기대에 비해서는 조금 부족하겠지만, 마계를 벗어나서 이 정도만 해도 놀라운 일이지.”

천마신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눈앞의 거짓말 같은 풍경도, 손가락 하나 까딱거려지지 않는 본인의 몸도 무엇도 납득할 수 없었다.

‘어째서?’

분명 대단한 적이라고 여겼지만,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천마신이었으니까. 마의 종주였으니까, 한데 반항할 수 없다. 이성이 아닌 본능이 거부한다. 내심 깊게 들여다보면, 그 속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두렵다고?’

하기에, 부정한다.

‘이 내가? 그럴 리 없다.’

복종하고 싶다. 무릎 꿇고 싶다. 감히 마주하는 것조차 두려울 지경이다.

부정하고, 부정하지만 본능은 이미 그의 몸에 깊게 배어 그의 몸을 사슬처럼 옭아매고 있었다. 벗어날 수 없다. 절망이, 처음으로 천마신의 뇌리를 뒤덮었다.

두렵다.

도망가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천마신의 본능이, 마현의 본질을 보며 공포에 떨었다.

마현은 그러한 천마신을 보며 웃음 지었다.

“말했지? 네가 마인 이상, 추마에게서 도주할 수 없을 거라고.”

마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게 됐군. 도주할 기회조차 없겠어. 자, 식사 시간이다. 추마.”

손에 부여잡고 있던, 억지로 달래고 있던 추마를 풀어놓는다.

화악-!

동시에, 반 토막 난 추마가 하늘을 가리는 거대한 어둠으로 변했다. 세상이 어둠으로 뒤덮이고, 그 어둠은 자신보다 미약한 작은 어둠을 향해 커다란 아가리를 벌렸다.

쩌억-!

“마, 말도 안 돼.”

부정하는 천마신에게로, 흉측하게 벌어진 어둠의 아가리가 다가갔다.

꿀꺽-!

침묵이 예고 없이 찾아왔다.

* * *

마현은 실상, 셀 수도 없는 많은 무공을 익혔다. 구결에서부터, 정확한 초식까지 무엇 하나 빼먹지 않고 마현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공이 부족하여 그들의 것을 전수받았다.

하나, 최강(最强)에 닿은 마현이 무공을 익힌 것은 생존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의무였다. 마계라는 지옥에 떨어져, 살아남기 위해 발악했던 동료들에 대한 의리였다.

그들이 살아 있었다.

모두가, 살고 싶어 했다.

그런 그들을, 마현이 기억한다.

모든 것을 품는다.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무리 편안한 생활에 깃들었다 한들 어찌 그들을 잊을까?

하나 품었다 하여도 정식으로 그들의 무공을 온전히 펼친 적은 없었다. 구결을 따르지도 않았으며, 완벽한 초식을 보이지도 않았다. 의도했다기보다는, 필요한 과정이 아니었기에 저절로 생략되었다.

마현의 무공은 이미 인간의 탈을 벗어 던진 지 오래다. 형식도, 과정도 의미가 없다. 하기에 마현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무공이란 것을 펼치지 않았다.

하나, 마신무결.

추마를 다루는 것만은 달랐다.

마신무결은 그야말로, 신의 힘이다.

또한 추마는 그러한 마신무결이 형상화된 무지막지한 괴물이었다. 하고자 한다면, 단순히 마(魔)뿐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집어삼키는 것도 가능하다. 해서 마현도 추마를 다룰 때만큼은 전력(全力)을 다해야만 했다. 날뛰는 추마를 제어하지 않는다면, 마현은 진정 세상을 파멸시킬 마신이 될 터였으니 말이다.

“돌아와라.”

하늘을 뒤덮은 심연의 어둠을 향해, 손을 내뻗은 마현이 말했다.

끼이익-!

추마가, 진한 울음을 토하며 마현의 부름을 거절하려 한다.

“돌아와라, 추마.”

마현의 눈에서, 스산한 어둠이 흘러나왔다.

의지를 가진 신의 힘이라 한들, 그를 창조한 것은 마현이다. 또한 마현이 굴레를 벗어던져 터득한 힘은 궁극의 제어(制御)다. 설령 한 세계의 진짜 신이 나타난다 한들, 마현의 제어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신조차 집어삼킬 수 있는 추마라고 한들, 그러한 마현의 제어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끼이이-!

끝내, 검은 하늘은 다시금 반 토막 난 검의 형태를 갖추어 마현의 손 위로 떨어졌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유독 더 말을 안 듣는군.’

손 위에 올라서서도, 쉴 새 없이 몸을 뒤트는 추마가 욕심을 나타냈다. 세상조차도 집어삼킬 수 있는 괴물이 본신을 드러냈으니, 고작 천마신 정도로는 배가 차지 않아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휴우…….”

이 상태로는 마황고로 돌아가라 한들, 쉽게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물론 억지로 밀어 넣는다면야 어쩔 수 없겠지만…….

‘기껏 몸을 드러내게 했으니, 나도 책임은 져야겠지.’

마침 주변으로는 괜찮은 먹잇감도 꽤나 많았다.

죽었으나, 저주에 걸려 살아 있는 자들과 같이 움직여야 하는 이들.

강시는 천마가 사라진 마교라 한들, 정의맹과 흉왕성에 큰 적이 될 터였다.

‘기왕 나선 일, 깔끔히 처리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마현의 마음을 읽었음인가?

끼이이-!

추마가 기쁨의 울음을 토했다.

* * *

단숨에 중원강호를 집어삼킬 것만 같던 천마신교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천하제일 고수를 자처하던 교주 천마신이 의문의 고수에게 당해 목숨을 잃은 탓이다. 당시의 싸움을 목격한 마인들은, 수많은 강시조차도 단숨에 집어삼키는 의문의 고수를 보며 공포를 느꼈다.

전의(戰意)를 완전히 상실했다.

정의맹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여전히 맹주, 화산검선은 실종 상태였지만 대신하여 맹주 대리직에 오른 주화화와 제갈천의 공세(攻勢)는 대단했다. 수많은 마두들이 저항을 하려 하였지만, 천마신을 잃고 전의마저 사라진 그들은 무력할 뿐이었다.

중원 무림이 승기(勝機)를 붙잡았다.

뒤를 이어, 귀주 일대에서 격전을 벌이던 흉왕성 측에서도 승전보가 전해졌다.

전장을 휩쓸던 역마왕은 사라지고, 무패철황 철표가 다시금 흉왕성으로 복귀했다. 완전히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한 그는 아직 전장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생사를 관리한다는 염라귀왕 초주의 주술로, 잃었던 다리를 회복하였으나 곧바로 예전과 같은 움직임을 보일 수는 없던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장에 나선 무패철황은 신위를 크게 떨쳐 보이며 수많은 마두의 목을 베었다.

무패의 철황은 비록 많은 것을 잃었지만 여전히 패배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흉왕성 무인들의 마음속에 불을 지폈다.

그때쯤, 귀주 일대로도 천마신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처음, 천마신교 측은 소문을 믿지 않았다. 천마신이 누구던가? 초대 천마의 뒤를 이어, 유일하게 천마삼재공을 대성한 지고(至高)의 고수다.

죽을 리가 없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문은, 천마신의 무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마조조차도 흔들리게 만들었다.

“정녕…… 그분이 당했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언제까지고 소문을 무시할 수만도 없다. 실제로 천마가 패배하고, 죽었다면, 그는 마교의 두뇌로서 그에 어울리는 판단을 내려야 하는 책임을 가진 인물이었다.

야욕이 크다 한들, 마교 전체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후우…….”

침통한 한숨이 마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절대의 무위를 갖춘 천마신을 믿고 나선, 확신에 가득한 중원 무림 정벌이었다. 한데 너무나도 허망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대체 누구냐?’

천마신을 죽였다는 의문의 고수.

그가 모든 것을 망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역마왕을 잡아두어야 했어.’

역마왕은, 마교 전체를 통틀어 천마신 다음가는 고수다. 아직 그가 천마신교에 남아 있었다면, 차선책이라도 펼쳐 계속해서 싸움을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하나, 이제는 역마왕도 없다.

‘내 욕심이 모든 것을 망쳤구나!’

한탄하고 있을 무렵, 마조의 마음에 쐐기를 박는 소식이 들렸다.

“우마왕께서 용제에게 당했습니다!”

“아…….”

마두에 이어, 마왕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마를 짚으며, 탄식을 토한 마조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물러나야 하는가…….”

더 이상 버티는 것은 의미가 없다.

천마신교는 패배했다.

2. 새로운 시대

천마신교가 중원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좋게 말하자면 그리 말할 수 있었다.

실제를 따지자면, 필살의 도주다.

마교도들은 죽음을 각오한 채, 본진인 십만대산을 향해 뛰어야만 했다. 그 뒤를 중원 무림의 수많은 고수들이 쫓았다. 수많은 마인들이 추살 당했으며, 중원 무림에 대한 원한을 남겼다.

그들의 집착과 분노에 이를 간 마왕들과 마조는 다짐했다.

언젠가 꼭 다시 강호로 돌아오리라.

받은 피 값을, 더욱 진한 피 값으로 갚아 주리라.

절치부심한 그들에 의해, 강호에는 또 한 줄기 원한이 새겨졌다.

하나, 그는 마교의 사정에 속했다.

중원 무림은 승리의 기쁨으로 들끓었다.

그 무섭던 천마신과, 마교의 마왕들을 패퇴시키고 승리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싸움에서 모두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승리까지 하였으니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중원 무림은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하나, 그 축제의 물결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도 분명 존재했다.

“모두 기뻐 보이는군.”

창밖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은 주화화가 말했다.

“일단, 승리니까요.”

맞은편에 앉은 여인이 함께 밖을 바라보며 말한다.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에 정말로 크게 놀랐을 터였다.

그도 그럴 게,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사마소였다.

사마세가의 가주이자, 중원 무림 사파 세력을 대표하는 흉왕성의 두뇌를 담당하는 그녀가 어찌하여 정의맹 맹주 대리인 주화화와 마주하고 있단 말인가? 분명, 마교의 난이 있기 전까지만 하여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하나 마교의 난은 정말로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물과 기름처럼 절대로 섞일 수 없을 것 같던 두 세력을 하나로 묶었다.

외부의 위협이, 그들만의 세상이라 여겼던 중원강호를 얼마나 위협할 수 있는지 몸소 체감한 덕이었다.

“승리에 도취되는 것 역시, 다음 싸움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맹주께서 이해해주시지요.”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제갈천이, 탐탁지 못한 표정을 한 주화화를 향해 웃으며 말한다.

“이제는 대놓고 맹주라는구나.”

“맞지 않습니까?”

“엄밀하게 말하자면 맹주 대리지.”

“……휴우, 뭐, 지금은 집안싸움을 보일 때가 아니지요. 그래서 반천뇌, 당신이 가져온 흉왕성의 입장을 듣고 싶군요.”

두 사람의 대화를 웃는 얼굴로 지켜보던 사마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미 충분히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흉왕성도 이번 사태는 꽤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마침 정의맹 총군사께서 하신 말씀이 딱 옳네요. 집안싸움 할 때가 아닌 것 같다. 이게 우리 흉왕성의 입장입니다.”

서로 정과 사, 이념을 가른 채 싸우고 있지만 그도 중원이라는 땅이 있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머물 수 있는 땅.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대지. 그 모든 것을 빼앗긴다면 자신의 이념을 주장할 권리조차 사라진다.

하기에 흉왕성 역시 이례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정의맹과 같은 입장이라, 정말 다행입니다.”

그는 정의맹 역시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당장 천마신교의 위협을 거둬냈다고는 하나, 아직 중원 무림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번 일로, 중원 무림은 크게 약해졌다.

수많은 대문파가 문을 닫았고, 고수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부분.

중원 무림이,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다는 인식을 보였다.

만약 의문의 고수의 개입에 의한, 천마신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중원 무림은 무너졌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중원 무림도 패배할 뻔하였다. 그러한 사실이, 수많은 세외의 세력들에 있어 즐거운 소식이 되었다.

이제 중원 무림을 노리는 이들은 더욱 많아질 것이었다.

남으로는 남만, 바다로는 왜국(倭國), 북으로는 얼마 남지 않은 흉노의 후예들과, 여진 무림이 이빨을 드러낼 터였다. 너무나 많은 적이다. 정의맹과, 흉왕성이 따로 떨어져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눈다면 중원 무림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게 될 터였다.

결과를 뻔히 아는데,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눌 수는 없다.

정사동맹이 이루어짐은 이미 예정된 바였다.

“후훗, 참으로 우습네요.”

사마소가, 웃음을 터트렸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 게냐?”

“평생을 싸울 줄만 알았던 정의맹과 연합이라니요.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일이 이렇게 제 손에 의해 벌어지다니, 우스울 수밖에 없지요.”

“흥, 사람의 탐욕이 만들어낸 본성일 뿐이지. 제 밥그릇을 빼앗길 것 같으니, 하나로 뭉칠 수밖에.”

“나쁜 일만은 아니잖아요?”

“……동의하지.”

어쨌든, 서로를 향해 검을 겨뤄야만 했던 한민족이다. 이렇게라도 하나가 되는 것은 나쁘지 않을 터였다. 밥그릇에 위험이 사라진다면 다시 흩어질 터지만…….

‘내가 그 더러운 꼴을 볼 때까지 살지는 않겠지.’

어서 빨리 세상을 초탈하여 살고 싶다.

어깨에 얹어진 정의맹주라는 무거운 짐을 다시금 떠올린 주화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 그 어린놈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게야?’

개방의 일 탓에, 곁을 떠난 마운이 유독 그리워지는 때였다.

* * *

결국, 주화화는 제갈천의 부탁을 이기지 못한 채 정식으로 정의맹주의 위(位)에 올랐다. 현재 강호제일배분인 그녀가 없다면, 다시금 정의맹이 사분오분 될 것이라며 오열하는 제갈천의 생떼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던 탓이었다. 그래, 생떼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세속을 떠나 조용히 살고 싶다던 화산검선이 어떻게 발목을 잡혔을지 뒤늦게야 깨달은 주화화는 날이 갈수록 한숨이 늘었다.

그렇게 주화화가 정식으로 정의맹주에 취임한 얼마 뒤, 강호에는 하나의 소문과, 하나의 소식이 울려 퍼졌다.

소문은 다름 아닌, 화산검선의 최후에 관한 이야기였다.

장막에 감춰져, 갑작스러운 실종이 되었던 화산검선의 최후는 장엄하게 천마신과 동귀어진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산검선이 중원을 구했으며, 여전히 중원 무림은 굳건하다. 갑작스럽게 퍼진 소문은, 호사가들을 크게 뒤흔들어 두 가지 파(波)를 만들었다.

한 측은 불신파다.

화산검선의 동귀어진은, 정의맹의 의도된 소문일 뿐이다. 갑작스러운 발표도 이상한 데다, 이제 와 떠드는 게 너무나 수상하다는 것이었다.

옹호파는 반발했다.

조금 늦은 발표긴 하지만, 천하제일 고수인 화산검선이 아니면 누가 천마신을 막았겠는가? 상식적으로 오로지 화산검선만이 가능한 일이다.

수많은 소란 거리를 남긴 채, 소문은 조금씩 중원에서부터, 세외까지 드높게 울려 퍼졌다.

소문이 아닌 확실한 소식은 바로 정, 사 동맹의 존속에 관한 이야기였다.

천마신교와의 대전까지만 합의되었던 정사동맹이 철혈의 약속으로 무기한 이어졌다. 두 세력의 정상들이 모두 모여, 피로 서신을 작성하였으니, 동맹이 쉽게 깨어지는 일은 없을 듯했다.

중원 무림은, 마음을 든든하게 하는 정, 사 각자의 대표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길 마다치 않았다. 하나로 뭉쳐서 이겨나가야 할 어려운 때다. 생각이 있는 자라면 누구든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나, 세외.

바깥에서 보는 시선은 또 달랐다.

중원 무림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은, 그들의 입장에서 보기엔 이빨과 손톱이 다 빠진 늙은 호랑이의 몸부림에 불과했다.

험난한 땅을 벗어나, 비옥한 영토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언제까지고 갇혀 살 이유는 없지 않은가?

험난한 세외의 야만족들을 통합한 지배자들이 야욕을 드러내며 검을 뽑았다.

환란(患亂)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 * *

머리가 울린다.

몸은 꿈쩍할 생각도 하지 않고, 눈꺼풀은 천근추(千斤錘)라도 달아놓은 듯 너무나 무거웠다.

그래도 주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제법 명확했다.

“순……욱!”

“언제…… 눈…….”

내심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명부(冥府)에 가기에는 일렀나?’

정순욱은, 자신이 꼼짝없이 죽을 줄로만 알았다.

그 무시무시한 역마왕의 일격을 맨몸으로 받았으니, 다시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그저, 나름대로 사내다운 최후를 맞이하였다 생각하며 만족했다.

연모(戀慕)하는 여인의 목숨을 구하고 죽었으니, 한 점 후회는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 걱정이 많았었다.

‘이제야 좀 아버지하고도 친해졌는데……. 불효자가 될 뻔했어.’

부모보다 먼저 가는 불효(不孝)를 저질렀다면, 선계(仙界)에 가기는 글렀을 터고 지옥(地獄)에 떨어졌을 텐데, 그 무섭다는 지옥의 마귀들과는 어찌 지낼 것이며, 뜨거운 지옥 불의 열기는 또 어떻게 견디겠는가? 상상만으로 끔찍한 일이었다.

아쉬움도 컸었다.

목숨을 던져 구했으니, 소수린이 그를 보는 시선도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하나 그리 생각해봐야, 죽은 이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걱정되고, 무섭고, 아쉬웠다.

‘참, 많이도 생각했구나.’

의식을 놓기 전 짧은 시간이 그토록 길게도 느껴진다 했더니 많은 생각이 오갔었다.

너무나 다행히, 그러한 생각은 쓸데없는 기우(杞憂)로 그쳤다.

‘살았어.’

아직 몸이 무겁긴 하지만, 조금씩 힘이 돌아오는 느낌이 있었다. 게다가 의식은 점점 더 명확해지니, 곧 눈꺼풀에 달린 무거운 추도 떨어질 것 같았다.

“순욱이…… 순욱이 움직이고 있어!”

양명의 화들짝 놀란 목소리가 들린다.

어리게까지 느껴지는, 그 목소리가 이토록 반가울 줄 몰랐다.

“뭐라고!?”

다급한 백산이 달려와, 몸에 기운을 불어넣는 것이 느껴졌다.

‘고맙다.’

예전이었다면 한없이 부정했겠지만, 이제 와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백산은 그에게 둘도 없는, 가장 소중한 친우(親友)다.

그의 따뜻한 기운이 너무나 좋았다.

“일어날 것 같아?”

화영령의 목소리도 들렸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절대로 그녀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같은 와룡서원의 제자로서, 충분히 좋아하고 있었다.

“아마…… 곧…… 다행히, 별 탈은 없어 보여.”

백산이 답했다.

‘그래, 나 곧 일어난다. 기다려라.’

정순욱이 내심으로 답했다.

“……순욱.”

마지막으로 들려온 목소리는, 소수린의 것이었다.

‘아아…….’

걱정 가득한, 그 목소리가 어찌나 듣고 싶었던지.

두근, 두근.

심장이 박동하는 것이 느껴진다.

친구들의 목소리를 통해 살아 있음을 느낄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이래서야 무슨 짓을 해도 부정할 수가 없다.

소수린을 살리고자 아무런 생각 없이 몸을 날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부터,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정순욱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좋다, 제길, 미치도록 좋아.’

뒤늦게나마,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살았어. 살았다고.’

아직 세상을 떠나기에는 어린 나이.

그는 살아남았다.

* * *

다음 날, 정순욱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순욱이가 눈을 떴어!”

이번에도 바로 앞에서 멀뚱멀뚱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던 양명이 가장 먼저 반겼다. 뒤를 이어 와룡서원의 소중한 친구들이 주변을 둘러쌌다.

“하…… 하…….”

이미 전날부터, 친구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정순욱이 웃었다. 밝게 웃고 싶은데, 아직 몸 상태가 뜻을 따르지 않아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정말, 다시 보니 이토록 반가운 얼굴이 따로 없었다.

“괜찮은 거냐?”

백산이 맥을 짚으며 묻는다.

정순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멍청한 자식!”

백산이 화를 냈다.

그럴 만도 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무모한 행동이었으니 말이다.

“정말 다행이야…….”

화영령의 안도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뭐…… 호들…… 갑…… 이야…….”

이 정도쯤은 문제없다는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

소수린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정순욱을 바라보며, 흔들리는 두 눈빛을 계속해서 흘릴 뿐이다.

그러기를 한참.

“……고마워.”

무슨 말을 할지, 힘겨워하던 그녀가 첫마디를 건넸다.

정순욱은 웃었다.

“당…… 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힘겹게, 밝은 미소를 보일 수 있었다.

그 모습에 소수린의 두 눈이 눈물이 고였다.

“일단 쉬자. 며칠간 정양하면 몸을 일으킬 수 있을 거야.”

“……응.”

확실히, 몸은 아직 휴식을 원했다.

눈을 떴지만 몸은 무겁다.

의식은 다시금 멀어져갔다.

“또…… 이따가…….”

정순욱의 눈이 다시금 감겼다.

* * *

그로부터 보름이 흘렀다.

정순욱이 침상을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친구들의 정성 어린 간호와, 용대언의 대대적인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내부 장기가 완전히 다 망가져, 죽어가던 정순욱을 살린 것도 용가(龍家)의 비약(秘藥)인 여의단(如意丹)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용의 정기를 품었다는 여의단은, 단순한 내상약이 아니었다.

용가 의약당(議約黨)에서 말하기를, 감히 소림의 소환단에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한 영약임을 자부하는 보물이 바로 용가의 여의단인 것이다.

워낙 귀한 자재를 쓰는 탓에, 용가 내에도 몇 없는 여의단 중 하나가 정순욱을 위해 쓰였다.

그 뒤로도 수많은 약재와 금침, 보양식 등이 정순욱에게 전해졌다. 용대언이 느끼는 책임감도 보통이 아니었던 탓이리라.

“무사히 깨어났다니, 정말 다행이다.”

정순욱이 몸을 일으킨 날, 용대언이 아이들을 찾아와 안도의 웃음을 보였다.

실상 정순욱이 더 이상 눈을 뜨지 못한다면 마현의 얼굴을 어찌 보아야 하나, 걱정이 많던 그였다. 안 그래도 천마신을 쓰러트린 의문의 고수가 마현임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 사마소와 제갈천의 언성을 못 이겨 헛소문에 동의한 사실도 민망한 판에, 제자의 목숨까지 자신의 작전으로 잃게 했다면…….

‘끔찍하군.’

아마 스스로가 부끄러워 개울물에 코를 박고 죽었을지도 몰랐다. 정순욱이 눈을 뜸으로써 용제의 의문스러운 자살 사건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여러모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볼 수 있었다.

“전쟁은 끝났다. 무명와룡 선생님께서 천마신을 죽였어. 하니, 마음껏 쉬었다 가도 좋다. 아무도 그분의 이름을 칭송하지 않지만, 너희들은 무림을 구한 영웅의 제자들이니까.”

용대언은 아이들을 향해서 만큼은 진실을 말해주었다.

아무도 무명와룡의 이름을 알아주지 않는다.

헛소문이 중원 전역을 뒤흔들어도, 마현은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다. 거짓 사실에 분노한 마현이 검을 빼 든다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중원은 진정 무림을 구한 영웅이 어떤 이인지를, 알게 될 터였다.

하나 마현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지켜본다.

초탈(超脫)한 자의 마음이 중원을 지키고 있는 방패가 될 수 있던가? 불가능하리라 믿었지만, 마현이라는 거대한 방패는 그러한 일을 가능케 하고 있었다.

결국 마현은 더 이상 무림의 일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여전히 무림을 지키고 있었다. 한데 어찌 칭송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모두가 모른다 한들, 용대언 본인 만큼은 마현의 진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백산이 웃는 얼굴로 답했다.

화산검선은 대단한 고수이지만, 천마신을 잡으러 나선 것은 마현이다. 하면, 천마신은 분명 마현에게 죽었을 터다. 제자들은 그의 무공에 대해 안다. 그 크기에 대하여 잘 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한들, 설령 모두가 욕한다 한들, 제자들에게 있어서만큼은 마현은 다시없을 평생의 은사였다. 위대한 스승이었다.

“알아두면 되었다. 다시금 말하지만, 용가에 준비된 모든 것들을 마음대로 이용하여도 좋다. 식솔들에게, 너희를 대하는 것을 나를 대하듯 하라 하였으니, 아무런 불편도 없을 게다.”

“용제의 은혜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은혜야…… 너희의 스승에게서 우리가 받은 것이 아니더냐.”

쓴 미소를 지은 용대언이 방을 떠났다.

제자들만 남은 방 안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스승님은 대단해.”

먼저 입을 연 이는 정순욱이었다.

아직 성치도 않은 몸을 짧게 떨며, 두 눈이 전율한다.

마현은 작은 서원의 스승일 뿐이다.

세상의 수많은 호사가들 모두가 모르는 은자(隱者)다. 하나, 이 강호의 가장 정상에 오른 이들은 그러한 은자를 존경한다. 칭송한다. 와룡(臥龍)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드넓은 천하에 있어 그 누구보다도 큰 인물이 자신들의 스승이었다. 아니, 스승이다.

뿌듯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제자가 그 깊은 전율에 잠긴 시간이 흐른 후.

“한데…… 각자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양명이 물었다.

마현은 아이들에게 선택을 맡겼다.

언제까지고 와룡서원이라는 울타리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다.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겪고, 스스로 성장해야 할 때라고 하였다.

“음…… 우선 난…… 계속 과거시험을 치를 생각이야.”

질문을 했던 양명이 가장 먼저 답했다.

“무공도 익혔지만, 어찌 되었든 난 학사니까…… 게다가 배우는 것은 역시 즐겁고, 헤헤…….”

“양명답네.”

백산이, 웃으며 답했다.

“영령은?”

양명의 시선이, 기대를 가득 담은 채 화영령에게로 향했다. 마음에 담고 있는 그녀가, 함께하기를 바라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진심일 터였다.

“아직…… 딱히 정한 바는 없어.”

본래라면, 꿈은 명확했다.

현모양처.

영령은, 좋은 남편을 만나, 정말 좋은 부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나, 그 역시 좋은 남편을 만나야지 가능한 일이다. 하기에 우선은 모른다고 했다.

이어서…….

“일단, 너랑 같이 갈까 해.”

양명을 직시하며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양명이라면 그런 남편이 되어주지 않을까? 아직 흔들리는 마음뿐일 수도 있지만, 그녀 역시 양명에게 전혀 관심이 없지는 않았다.

궁금했다.

그가 대체 어떠한 길을 걸어갈지.

이름만큼이나 밝은 인물이 될지 너무나 알고 싶었다.

“흐음…….”

둘을 보며, 턱을 쓰다듬은 백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다름 아닌 무시무시한 역마왕의 얼굴이었다.

‘분명 기다린다고 말했다.’

하나, 언제까지고 기다릴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언제고, 천하를 아우르는 고수인 용제조차도 감당하지 못한 역마왕이라는 무시무시한 인물이 자신을 찾아올 터였다. 그때가 돼서, 자신을, 주변을 지킬 힘이 없다면 어찌 될까?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정순욱이 힘없이 공중을 날던 모습이 떠올랐다.

‘더 이상…….’

더 이상, 그런 꼴을 또 볼 수는 없다.

강한 의지가 있고, 그만한 힘. 능력이 있었다면 결코 같은 일을 겪지 않아도 됐을 터였다.

‘강해질 거야.’

마현은 그에게, 이름만큼이나 큰 산이 되길 바랐다.

또한 백산 역시 그러한 길을 가고 싶었다.

대협이 되겠다.

그러기 위하여 험한 길을 갈 생각이었다.

힘없는 정의는 결코 정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결심을 한 백산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난…… 홀로 강호를 주유할 생각이야.”

“……위험할 텐데.”

정순욱이 걱정된 음성으로 말했다.

성혼을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나이라지만, 아이들은 아직 어리다. 홀로 강호를 주유하기에는 생각이 얕으며, 경험도 부족하다. 아니, 누구라 한들 홀로 강호를 주유하는 일은 쉽지 않다. 문파가 어째서 생겼으며, 집단은 또 왜 만들어지던가? 한 손이 열 손을 감당하기란 힘든 법이다. 또한 강호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 비일비재하게 매일같이 벌어진다. 조금만 방심해도 목숨이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위험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그것을 몰라 결정한 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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