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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즉위식 날 균열을 만났다-8화 (8/100)

8

거대한 얼음 칼날에서 나온 차가운 냉기가 바람을 타고 일대를 휩쓸었다. 마치 거신의 강림을 방불케 했던 푸른 거인형 몬스터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제압되어 버렸다.

커다란 차원 구멍이 그 크기를 줄이며, 역대 가장 강력한 몬스터 풀로 기록될 구멍이 사라져 갔다.

강력한 마법으로 거인을 제압한 귀환자는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협회장과 협회 각성자들은, 그저 멍해져 있었다.

그때 그들이 있던 옥상에 한 줄기 빛과 함께 방위청장과 각성자들이 나타났다.

“협회장님!”

청장의 부름에 협회장이 고개를 홱 돌렸다. 충격을 받은 듯한 협회장의 얼굴에 방위청장의 긴급했던 얼굴 또한 숙연해졌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무시무시했어.”

대한민국 각성자 중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세 명 중 하나인 협회장이었다. 그런데 이렇도록 충격을 받은 모습은 청장으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라 그 또한 놀람이 없지 않았다.

“귀환자… 말씀이십니까?”

“그래. 나오자마자 사방팔방으로 뇌전을 줄기줄기 뿌려 대던 그 거인보다도 훨씬 무시무시했다.”

협회장은 수직으로 지상에 박힌 거대한 얼음 칼날 쪽으로 눈짓을 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얼음 칼날과 그 양옆으로 꽁꽁 얼어붙은 반쪽 난 거인이 보였다.

“정말 비현실적인 풍경이군요.”

방위청 각성자들과 협회 각성자들은 서로 뒤섞여 귀환자와 그에게 죽은 거인과 곤충형 몬스터에 대해 말을 주고받았고, 삽시간에 시끌시끌해졌다.

“너무나 압도적인 힘이었다.”

협회장의 눈에는 진심을 넘어서 경계하는 눈빛까지 섞여 있었다.

“그래도 역대 최고 규모의 몬스터 풀치고는 피해가 적어 다행입니다.”

“귀환자 소재 파악되면…….”

척.

누군가 옥상에 올라서는 소리에, 협회장을 포함한 옥상 위의 모든 인원들은 하던 말을 끊고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를 찾나?”

모두의 시선이 몰린 곳에 백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모두의 눈에 섬뜩함이 떠올랐다. 마치 저승사자라도 본 듯한 얼굴들. 이어서 그들의 시선은 귀환자 옆에 둥둥 떠 있는 커다란 몬스터에게로 옮겨갔다.

“아…….”

너무 갑작스럽고 놀라, 협회장은 그에 맞는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뭐, 딱히 엿들으려던 건 아니고. 방위청장이 온 것 같아서. 직접 해야 될 얘기가 있어서 왔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청장은 이전과 같이 깍듯한 목소리로 귀환자를 대했다.

“저기 저 산에 있는, 중국 놈들이 드나들던 차원 관문. 이제부터 내가 관리하기로 했다. 인원 배치해서 아무도 못 드나들게 해. 중국 놈들한테는 얘기해 놨으니까 다른 얘긴 할 필요가 없을 거다. 만일, 현 시각 이후로 아무나 차원 관문을 기웃거린다거나 맘대로 드나드는 놈이 있다면 아마 더 놀라운 나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제대로 관리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귀환자의 말에 청장은 단 한마디도 되묻거나 하는 것 없이 깔끔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귀환자의 타깃은 협회장으로 옮겨 갔다.

“너는 뭐하는 놈이냐?”

* * *

180cm는 넘어 보일 큰 키에, 떡 벌어진 상체. 상당히 단련된 신체를 가지고 있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 지금껏 한국에 와서 본 각성자들 중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자였다. 그런 자가 나를 찾으니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아, 각성자 협회장을 맡고 있는 박창식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근데 나는 왜 찾았어?”

녀석의 인사를 무시한 채 질문을 던졌다.

“아… 그게, 긴히 드릴 말도 있고 해서 한번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여긴 나한테 할 말이 있는 놈들이 너무 많네.

“나는 긴히 들을 말이 없는데.”

이런 식으로 퇴짜를 맞은 것이 처음인지, 놈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했다.

“할 말이 있으면 나중에 내 시간에 맞춰서 와라.”

“아… 예. 추후에 연락드린 후 찾아뵙겠습니다.”

“또 나한테 할 얘기 있는 놈?”

슥 둘러보자, 다들 내 눈길을 피했다. 마치 죄지은 놈들을 모아놓은 것처럼.

“일들 봐라.”

그 말을 남기고는 발걸음을 옮겨 전투 지역이 보이는 난간으로 갔다.

“살펴 가십시오.”

청장이 인사를 건넸고, 고개 숙이는 그를 따라 협회장을 포함한 나머지 각성자들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인사를 뒤로하고 난간 앞에 선 나는, 눈을 감고 제3의 눈이라 불리는 ‘마나 감각망’을 펼쳤다.

넓게 뻗어 나간 감지망에 수많은 전투가 감지됐다. 이곳저곳에선 아직까지 남은 몬스터들을 처리하느라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다. 내 뒤에 있던 놈들도 방위청장과 협회장의 명령에 전장을 정리하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음…….

이곳저곳을 더듬던 나는 마침내 두 비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곤 감각망을 좌표로 공간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아니……! 시우 님!”

갑자기 나타난 내 모습에, 바닥에 앉아 있던 남 비서가 벌떡 일어났다. 그에 옆에 있던 김 비서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따라 일어났다.

둘 다 온통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김 비서는 원활한 전투를 위해 치마를 찢은 듯했고, 남 비서도 여기저기 정장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힘드냐?”

“아, 하하. 아닙니다.”

“아닌데? X나 힘들어 보이는데?”

내 말에 둘은 씨익 웃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대통령한테 연락해 봐.”

“대통령… 말씀이십니까?”

“어.”

그런데 녀석의 시선이 내 뒤에 둥둥 떠 있는 몬스터에게로 향했다.

“전리품.”

“아…….”

물어보기도 전에 알아서 알려 주자 놀란 남 비서가 탄성을 흘렸다. 김 비서도 입을 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연결해.”

“아……! 옙!”

전화 연결은 금방 되어, 스마트폰이 내게 건네졌다.

“나다.”

[상계동 몬스터 풀에서 힘써 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추후에 찾아뵙고 제대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녀석은 내게 감사의 인사부터 건넸지만, 나는 그걸 무시하고 내 할 말을 쏟아 냈다.

“나는 이 한국이라는 나라에 받은 게 없다. 이 나라는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기만 했지. 그래서 더욱이 도와줄 의리 따위는 없어.”

[…….]

폰 너머는 조용했고, 나는 계속 내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이 땅을 떠난 지 벌써 육십 년이 넘었다. 그 세월이 지났음에도 나는 이 땅에서 있었던 끔찍한 일들을 잊을 수가 없었지. 내 뿌리라는 것이 내게 준 것이라곤, 씻을 수 없는 깊고도 깊은 수많은 상처들밖에 없으니. 나는 그냥 이 김에 이 나라가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 그게 내 진심이다.”

[…….]

내 다음 말을 기다리는 걸까? 폰 너머는 여전히 조용했다.

“그러나 어제 네 진심이 내 굳어 버린 마음에 파문을 만들었다. 그래서 네 부탁을 승낙하기로 했다.”

여전히 폰 너머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가 이 땅에 있는 동안은 아무도 못 건드리게 해 주마.”

[감사합니다.]

감격에 겨운 목소리. 녀석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쯧. 감격은…….

나는 그대로 폰을 남 비서에게로 건넸다.

“끊어.”

기분 탓일까? 내 앞에 선 두 사람의 얼굴에도 희망이라는 것이 비치는 듯했다.

“보다시피. 전리품이 있어서 차는 못 타고 간다. 내가 알아서 집 찾아갈 테니까. 너희들도 정리하고, 볼일들 보고 와.”

“아… 옙……!”

남 비서는 군소리 없이 시원한 대답으로 마무리했는데, 김 비서가 질문을 던졌다.

“저… 중국 각성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빠르게 이 땅에서 꺼지라고 했다고 전해. 말 안 듣고 난동 부리면 나한테 연락하고. 다 찢어 버리러 올 테니까.”

내 말에 김 비서의 광대가 올라갔다.

“넵.”

그런 그 둘을 두고 돌아서서는, 인근 건물 옥상으로 이동했다. 그리곤 다시 마나 감각망을 펼쳐, 사방을 더듬으며 뻗어 나갔다. 계속 뻗어 나갔다. 주변에 몰린 수많은 각성자들이 느껴졌다. 그냥 어림잡아도 백 단위가 넘었다.

전투 현장에서 꽤 벗어난 지역에서도 이곳저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몬스터가 많이도 튀어나온 듯했다.

더 멀리 가야 되는군.

더 많은 고리를 회전시키며 더욱 강력한 마력으로 마나 감각망을 넓혔다. 시원하게 뻗어나간 감각망에 드디어 나의 보금자리가 걸렸다.

* * *

“하…….”

수락산 중턱의 바위에 걸터앉은 브로커 김종회는, 멀리 보이는 거대한 얼음 칼날과 반쪽 난 푸른 거인을 쳐다봤다. 어디 판타지 일러스트에나 나올 법한 비상식적인 풍경에 그는 긴 한숨만 푹푹 쉬었다.

얼마 전, 성질 더러운 중국 탐사대 각성자들과 부딪히는 것을 꺼려 한 김종회는, 그들이 차원 관문을 통과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숲속 깊이 숨어들었고, 과거 그의 밥줄을 책임졌던 비장의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기력과 마력, 소리, 기척 등 사용자의 모든 것을 지워 버리는. 은신을 주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꿈과 같은 아이템인 ‘조용한 장막’. S등급 아이템으로, 비밀스러운 정보를 캐낼 때 아주 유용하게 써먹었던 아이템이었다.

그걸 쓰고서, 중국 놈들이 귀환자에게 당하는 것을 똑똑히 지켜봤다. 그리고 몬스터 풀 경보가 울렸고, 그들은 산을 내려갔다. 이어서 역사에 기록될 만한 몬스터 풀에서 거대한 몬스터들이 튀어나왔고, 가장 거대한 것들은 귀환자의 손에 처리되었다.

수없이 많은 뇌전을 사방팔방 뿌려 대던 푸른 거인을 떠올린 김종회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몬스터 풀에서 나왔다고 하기엔 너무나 강력했다. 그런 놈을 너무나 손쉽게 압도하는 귀환자를 보고, 그는 질려 버렸다.

‘그런 놈을 회유하라고?’

“하… 시발 새끼들.”

그가 그려 왔던 큰 그림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자신감은커녕 어떻게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지 고민을 시작했다.

* * *

“아이구, 아이구… 허리야…….”

서울의 어느 달동네. 눈이 내려앉은 듯 새하얀 눈썹과 백발, 깊은 주름들이 그야말로 한편의 사진 같은 느낌을 주는 노인이 동네 슈퍼 앞 평상에 앉았다. 그러고는 그 깊은 눈으로 하늘을 한번 슥 쳐다보더니.

“에잉. 오늘은 정말 X 같구만.”

한마디 걸쭉한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어서 옆자리에 앉은 이웃집 할머니의 폭풍 잔소리가 이어졌다.

“입만 열면 욕질이여! 영감탱이가. 만날 시부렁…….”

그런 할머니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할아버지의 눈이 매섭게 빛나며 하늘의 기류를 훑었다.

“무시무시하게 X 같은 놈이 왔어.”

“그거 좀 그만하라고 안혔소? 맨날 X이고 나발이고. 엥? 이… 어디 가셔?”

“허허허허. 오늘은 이만 집에 들어가야 할 것 같네.”

“조금 전에 앉아 놓고는 무슨 개소리야? …응?”

오늘따라 이상하게 빨라 보이는 노인의 발걸음에, 할머니의 시선이 그가 골목을 돌아 들어갈 때까지 뒤를 좇았다.

그렇게 골목을 돌아 들어간 노인은, 주변의 기척을 확인하더니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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