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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즉위식 날 균열을 만났다-18화 (18/100)

18.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늦은 오후. 이미 마음이 붕 떠 버린 수현이와 수업을 대충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하아~ 집에서 나오니까 좀 살 것 같네요.”

얼굴이 아주 활짝 폈다.

“집에만 갇혀 있으면 확실히 답답하죠.”

함께 나온 주 비서가 수현의 말을 거들었다.

“그런데 주변에는 상점이 없나?”

“여기서 한참 걸어 나가야 됩니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게 좋긴 한데, 수현 양이 걷고 싶다고 해서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후로 정말 한참을 걸어야 했다.

아까 막았어야 했는데…….

걷자고 했던 수현이마저 다리가 아프다며 징징댔으니.

“오~ 저거 먹으러 가요.”

피자집이었다.

“떡볶이 먹고 싶다며?”

“저 집을 보니 피자가 더 땡겨요.”

“그래 그럼.”

평화스럽다.

수현이와의 산책도, 한적한 동네도 다 평화로웠다. 다만, 지나가는 행인들이 눈치를 본다거나 유심히 관찰하는 등의 시선들이 신경에 거슬렸지만, 그것도 금방 적응되었다.

이렇게 평화와 여유를 느끼고는 있지만, 마음과 머릿속은 마치 곧 튀어 나갈 것처럼 급박했다. 앞으로 있을 전쟁에 대한 계획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그래도 수현이가 잘 적응한 것 같아 다행이야.

아마도… 마나의 영향을 받아서 심신이 안정을 빨리 되찾은 것 같았다. 그런 그 아이를 볼수록,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을 간직했던 여자 ‘세렌’이 떠올랐다.

아직도 그 산속에 살고 있겠지…….

“뭔 생각해요?”

“음… 전쟁 준비랄까?”

“아닌 것 같은데…….”

이 녀석…….

얘가 말하면 정말 뭔가를 아는 눈치라서 조심스럽다.

“애인 생각 해요?”

“아닌데?”

내 마음을 훑어본 건가?

귀신같이 내 생각을 읽어 내던 세렌이 떠올라 또다시 수현이와 겹쳐졌다.

하… 이 쪼꼬만한 게 참…….

수현은 히죽 웃더니 물 한 모금 마시고 시선을 돌렸다.

“사부가 거짓말은 못하는 거 같아요. 그쵸?”

주 비서는 그저 웃으며 내 눈치를 봤다.

아직 장난칠 짬은 아니지.

“아니, 이 쪼꼬만 한 녀석이 사부를 까먹을라고 하네.”

킥킥대는 수현의 앞으로 조그마한 피자가 나왔다.

“왜 이렇게 작어?”

내 기억 속의 피자는 이것보다 적어도 세 배는 컸던 것 같은데…….

“딥디쉬 피자라고, 원래 작게 나오는 거예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처음에 피자 2개에 닭을 시키는 걸 볼 때 좀 이상하다 했었다. 그냥 이 꼬맹이가 대식가인가 보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작았구나.

냄새는 좋았다.

한 조각을 떼서 한 입 베어 무는 그 순간. 맛을 제대로 음미하기도 전에 성가신 기운이 가게의 구석에서 피어올랐다. 그리고 이어서 그 존재의 정신이 접촉해 왔다.

[기다리고 있었다.]

저놈이 어떤 놈인지, 왜 이 타이밍에 가게에 숨어 있다가 내게 말을 건 건지. 그런 것보다 맛을 음미하려는 때 방해를 받은 것에 화가 났다.

[단군 영감에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흑백의 경전을 직접 전해 받고, 해석 능력을 전해 받은 기에테 중 하나다.]

그 말에, 분노에 잠식되어 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계시자냐?]

[나는 계시자라고 불리지도 않았다. 애초에 나는 처음부터 혼자 놀았으니까.]

흥미가 솟구친 나는, 피자를 음미하며 계속 대화를 이어 갔다.

[그래서. 구석에 숨어서 내게 말을 거는 이유는?]

[네가 그리는 그림에 동참하기 위해서다.]

[내가 그림을 안 그린다면?]

[…….]

재미가 없었나……?

[그 재수 없는 노인네가 얘기했나?]

[단군 영감 말하는 거라면, 틀렸다. 그는 내가 이곳에 있는지도 몰라.]

[뭐야. 그럼 넌 누구한테 뭘 듣고 온 거지?]

뭔가 수상한 느낌에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느낌이 왔다.

[단군 영감 밑에 주시자가 셋이 있다. 나는 그중 마법사 녀석과 종종 교류를 해 왔다. 네가 나타나고, 네 행보가 심상치 않아 그 녀석에게 정보를 좀 얻었지. 그리고 오늘 녀석에게 네가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고 한다는 걸 들었다.]

[교류를 하는데… 단군 영감은 모른다?]

[우린 멀리서 정신접촉만 하니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치고. 내게 접근한 목적이 뭐냐.]

[프리메이슨은 위험한 사상을 가진 놈들이다. 그놈들이 활개 치도록 두지 않을 거야.]

반프리메이슨이라 이 말이군.

“누구랑 얘기해요?”

피자를 깨작거리며, 계속 나를 주시하던 수현이 물었다.

“아… 지나가는 부랑자가 말을 걸어서 말이야. 어서 먹어.”

주 비서도 의아한 얼굴을 했으나 둘 모두에게 먹으라고 손짓하며 다시금 녀석과 대화를 이어 갔다.

[주시자 놈에게 들었다면 알 텐데? 네 목적과 나의 목적은 다르다.]

[이 세상에 프리메이슨을 적대하지 않는 자들은 그들을 옹호하는 자들뿐이다. 그들 편에 서지 않는다면 부딪힐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놈들은 강하다. 대 전쟁을 주도했던 이들이니까.]

나도 만나 보고는 싶지만, 한국을 건드리지 않는 이상 굳이 멀리 떨어져 있는 놈들과 귀찮게 마찰을 빚고 싶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다시 찾아와라. 지금 눈앞에 일도 벅차니까 말이야.]

[네 목적을 이루게 도와주마.]

[이봐. 부랑자. 질척거리지 말고 먹던 거나 마저 먹고 가라.]

오천 년이나 나이를 처먹은 그놈들에게 흥미가 있는 것은 맞지만, 이렇게 내 여유를 빼앗는 것은 아주 불쾌했다.

[그래. 어차피 넌 나를 찾게 될 거다. 그때가 되면, 미아리에서 ‘지팡이’를 찾아라.]

그 말을 끝으로 놈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계산을 하고 나갔다.

“저 남자예요?”

“어. 거렁뱅이같이 생겼지?”

“아뇨. 거대한 칼을 든 기사 같아요.”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기특한 눈으로 쳐다봤다. 확실히 조금 전 나간 거렁뱅이 같은 놈은 기사였다. 모습은 거렁뱅이지만, 순간 발출한 기세는 기사의 그것과 일치했다. 아주 오랜 시간 망치질과 담금질로 다져진, 단단하고 날카로운 검 그 자체의 느낌.

주 비서는 그저 나와 수현이를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로 쳐다봤다. 그런 그녀와 수현이를 보다가 문득 또 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 가르침이 필요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제부터 수현이를 보며 든 생각이다. 마나와 교감하며, 세상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낀다. 굳이 수련을 하지 않아도, 수행을 하지 않아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그 아이에게 대체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와… 여기 자주 와요.”

수현이는 나와 대화했던 거렁뱅이는 잊은 듯, 피자에 집중하고 있었다.

“언니는 어때요?”

“음~ 저도 제 취향이에요.”

“그래. 가끔 오자.”

내 입맛에도 맞았다. 달달하면서도 고소하고, 새콤한 맛도 있었다. 여러 가지 맛이 순서대로 혓바닥을 휘감는 것이, 확실히 요리를 잘한다, 라는 말이 나올 만했다.

각종 마법과 시럽들이 난무하는 마계와는 다른 느낌이야.

그렇게 피자와 닭다리로 저녁 식사를 마친 우리는 집을 향해 걸었다.

[무슨 말 했어요?]

갑자기 수현이 정신을 연결해 왔다.

[별말 아니야.]

[심각한 얘기 같던데…….]

[차차 알게 될 거다.]

[나에 대한 거예요?]

[아니.]

대화는 짧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별일 없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내 방으로 올라가 태블릿 PC를 만졌다. 저번에 남 비서에게 배웠던 대로 태블릿 PC를 만지작거리는데…….

“뭐가 이렇게 많아……?”

그냥 다시없던 일로 하고 싶을 정도로 양이 많았다.

일본에 대가리 박으며 진행하는 사업이나 결연 관계 혹은 그 계획들은 모조리 취소나 폐기했다. 그리고 쓸데없어 보이는 각종 계획들 또한 폐기 및 취소했다.

그렇게 새벽 1시가 되어서야 대충 검토가 끝이 났다. 그것도 집중력을 높이는 마법까지 동원한 결과였다. 마치 이건…….

황제 집무실 같은 느낌이군.

담배를 하나 태워 물고는 창가로 걸어갔다. 그러곤 마당 한쪽 구석에 둥둥 떠 있는 몬스터를 가만히 응시했다.

“후우-”

미아리 지팡이라…….

* * *

나고야 역 건물 ‘JR센트럴 타워스’ 51층. 드넓은 공간에 소파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곳에, 한 남자가 소파에 몸을 파묻고 홀로 중얼거리고 있다.

영혼이 없는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리던 그는, 허공에 마법 술식들을 그려 내기 시작했고, 그것들은 어느새 완성되어 빛을 발했다. 그렇게 마법에 집중을 하던 그때. 빛과 함께 모이칸 스타일의 머리를 한 남자가 공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뭐 하냐?”

“공부.”

남자는 여전히 마법에 집중한 채 영혼 없는 대답을 흘렸다.

“킥… 것보다. 계시자님이 부르신다.”

“왜?”

“아무래도… 한국 귀환자 놈이 길드 단도리를 제대로 못 한 듯?”

“구체적으로 좀 얘기해라.”

“아~ 새끼. 좀 얘기에 집중 좀 해라.”

“하고 있어.”

여전히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하는 영혼 없는 대답에 모히칸의 남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 아침 광해 길드를 처먹었잖아, 그놈이. 놈의 길드 장악력이 떨어져서, 한 놈이 중요 정보를 흘렸다. 이 말이지.”

“오…….”

“그 건으로 계시자님이 부르신다고. 미친놈아.”

그제야 마법을 흩어 버리고는,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 미안.”

“천황성으로 모이란다.”

“천황폐하의 명인가?”

“천황폐하는 시발. 그냥 몬스터지. 그게 사람이냐.”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모히칸 남자는 얼굴을 부르르 떨었다.

“자세한 건 몰라. 천황성으로 모이라는 것 보니까 그놈이랑 연관되어 있겠지, 뭐.”

“언제까지?”

“지금 당장.”

광해 길드의 부마스터가 흘린 정보에 일본 전력 수뇌부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빠른 대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어둠이 고요하게 가라앉은, 새벽 4시가 넘은 시각. ‘가나가와’현, ‘단자와’산 자락에 있는 신(新) 천황성. 그 입구에 열세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머지는?”

큰 키에, 마치 사제가 연상되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날카로운 눈을 굴렸다.

“둘은 게이트에 들어갔고, 셋은 응답이 없습니다.”

“그게 끝인가?”

“나머지 둘은 행방을 찾고 있습니다.”

“개판이군.”

계시자 ‘요한’이 인상을 구겼다.

“얼른 찾아라. 중요한 일이니까.”

* * *

새벽 5시. 나는 세 비서를 모두 깨웠다. 그러곤 거실에 세 명을 나란히 세워 놓고 얘기했다.

“곧 동이 튼다. 동이 트기 전에 일본으로 갈 거야.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너희들이 수현이를 지켜야 돼. 여차하면 방위청이나 협회에 도움을 청해도 좋지만, 길드에는 청하지 마라.”

갑작스러운 내 얘기에 다들 대답은 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얼굴들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 결계가 너희들을 지켜 줄 거다. 웬만하면 집 밖으로 나가지 말고 있어.”

“예.”

“그… 귀환자님?”

“어.”

“일본에는… 싸우러 가시는 건가요?”

김 비서였다.

“그것까진 알 필요 없어. 지금 내가 움직이는 건 최소의 인원만 알고 있는 게 낫고, 자세한 내용은 아무도 모르는 게 나아.”

“아… 네. 알겠습니다. 그 누구도 수현 양을 털끝도 못 건드리게 단단히 지키고 있겠습니다.”

그 말에 내 입가가 씰룩였다.

“그래. 부탁한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거실에서 모습을 감췄다. 내가 다시 나타난 곳은 서울의 높은 상공. 아득히 높은 곳에 올라선 나는, 스마트폰의 GPS를 켜고 천황성의 방향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비행 마법에 가속 마법을 더해 천황성이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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