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무엇이든 소멸시켜 버릴 만큼 강렬한 힘을 머금은 마검 브라빌란이, 휘둘러지지 못하고 멈췄다. 그리고 그 마검을 치켜세운 마족 베라크리토의 눈이 점차 경악으로 물들었다. 왜냐하면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신시우와 지금 눈앞의 신시우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전 결투에서 신시우는 몸과 그 일대의 마나들이 흰 빛을 발했었다. 그 빛을 내는 마나들은 강력한 공명에 반응한 특수 마나들이다. 마치 마나의 선택을 받은 존재들처럼, 희게 변한 마나들을 의지와 생각만으로 자유자재로 다룰 수가 있다.
높은 마법적 지식과 능력을 갖춘 마법사가 그런 상태가 된다면, 인지를 벗어난 움직임을 보여 주는 마스터 이상의 검사라도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대륙의 패자가 되기에 충분한 무력이라 평하는 고리 10개 이상의 마법사. 그 지고지순한 경지는 재능이 좀 있다고, 죽을 만큼 노력을 한다고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세기의 재능을 가지고, 목숨을 건 노력이 있어야만이 겨우 오를 수 있는 경지. 그렇기에 그 숫자는 지극히 소수다.
마계를 통틀어 고리 열 개의 마법사는 둘. 고리 열한 개인 마법사는 현 칠대제뿐이니 말해서 무엇하랴. 그런 경지에 처음 보는 하등한 종족이 오른 것도 인정하기 힘든 마당에, 그보다 더 높이 올라갔다니. 베라크리토는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신시우의 말이 허풍이라 생각했기에 분노가 치솟았다. 감히 하등한 종족 주제에, 존중받아야 마땅한 ‘경지’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이 보기 역겨웠다. 그러나 그의 모든 생각과 감정들은 눈앞에 떠다니는 황금빛으로 반짝거리는 마나를 보면서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신시우는 분명히 변했다. 그리고 강해졌다. 베라크리토는 한껏 무거워진 몸과 신시우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고지순한 공명을 느끼며,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거듭 인지했다.
‘저게… 고리 열두 개인가…….’
마치 신시우가 거대해져 온 세상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묵직한 존재감에 자신이 눌리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주변 마나 농도는 어떤가? ‘칼란의 절대자’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다녔던 자신도 갑갑해질 정도로 마나 농도가 높아졌다.
‘이래서는… 본래의 반밖에 움직일 수 없겠군.’
게다가 이 반짝거리는 마나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분포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언제든지 신시우의 의지에 따라 어마어마한 힘을 내는 마법으로 변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마나.
그의 전신에서 붉은 기력이 일렁였다. 상위 마족 중 ‘벨란데’라는 혈족만의 특수 능력. ‘붉은 갑옷’이 전신을 뒤덮었다.
불꽃이 타는 듯이 방출되는 붉은 갑옷은, 마스터들의 오러 블레이드를 맨몸으로 받아 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는 붉은 갑옷을 전신에 둘렀음에도 왜인지 안심할 수 없었다.
‘일격에 승부는 난다.’
으득. 이빨을 깨문 그는 기합을 넣으며 전력을 끌어올렸다.
“하압-!”
* * *
녀석은 검은 날개를 펼치며 사방으로 가공할 만한 기파를 뿜어냈다. 그에 석재 바닥이 부서져서 튀어 나가고, 사람 몇이 붙어야 할 것 같은 굵은 기둥이 박살 났다. 놈의 머리 위로 떨어진 천장의 잔해들은 그 자리에서 분해되며 먼지처럼 흩날렸다.
그리고 일순간. 날개를 접은 놈이 땅을 박찼다. 녀석의 두 손에 감긴 검에서 나온, 피를 흘리는 듯 선명한 붉은색의 오러 줄기가 허공에 선을 그리며 내게 다가왔다.
그러나 내가 지배하는 이 공간에서 녀석의 결말은 뻔했다. 오롯이 내 지배하에 있는 이 공간에선, 그 누구도 내 인지를 벗어날 수도, 내 의지와 반하는 결과를 도출할 수 없다.
촤륵.
금빛의 사슬이 녀석의 두 어깨에 감겼다. 녀석이 추진력을 잃어버리자 수없이 많은 금빛 사슬이 바닥에서 뻗어 나와 녀석의 온몸을 묶었다.
아득히 높은 경지에 올라 육황이라는 자리에 앉은 존재가, 의지를 가지고 최선을 다한 것치고는 너무 허무한 결말이었다.
사슬의 힘에 의해 녀석은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죽여라.”
연이어 내 입이 열렸다.
“싫다.”
녀석의 표독스러운 눈빛이 내게 닿았다.
“싫다고. 하등한 마족아.”
소소한 복수를 해 줬다.
“마음껏 조롱해라.”
녀석은 완전히 체념한 듯,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끝까지 품위를 처지키려고 하네.
내가 싫어하는 부분이 이 부분이었다. 이놈은 잔악한 놈이다. 그러면서도 아주 고고한 놈이다.
“근데, 저건 왜 그랬냐?”
처음에 이놈과 마주하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넘어갔던, 전신의 피부가 거의 다 벗겨진 사체. 그 끔찍한 것은 여기서 이놈 외엔 할 수 있는 놈이 없을 것이었다. 하여 구석에 날아가 버린 사체를 가리켰다.
“네가 생각날 때마다 너와 닳은 하등한 놈들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달랬지.”
아주 X나 솔직하고 당당하구나.
마계는 이런 곳이었다. 철저한 계급사회. 철저한 종족 계층이 지배하고 있었다. 상위 계층이 하위 계층을 잡아다가 껍데기를 다 벗겨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하위 계층이 반란을 일으켜, 상위 계층을 역으로 잡아먹어 그 종족 계층을 바꾸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했다. 무력과 세력만 충분히 있다면.
그게 좀 문제지.
“너답다.”
“…….”
“살려 줄 테니까. 내 명령에 복종해라.”
“싫다.”
뼛속까지 나를 하등하게 보고 있을 놈이기에 당연한 대답이었다.
“그래? 마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나 보군. 나는 돌아갈 건데 말이야.”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그 고고한 귀족도 고향에는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지?”
내 말에 놈의 눈빛이 싹 달라졌다.
“쪽팔린 줄 알아야지. 돌아가고 싶지 않냐는 말에 희망 따위를 품고 말이야. 어때. 그렇게 무시하던 외래종의 손에 목숨 줄이 달려 있는 기분이. X 같지?”
“역시. 끝까지 그 주둥이는 저급하구나.”
놈의 눈빛을 살폈다. 역시나 뒤지기 일보 직전인데도 폼이란 폼은 다 잡고 있는 저 상판때기. 사람의 살갗을 포를 떠서 죽여 놓고 자기는 고고한 척이라니. 역겹다.
“네 취미만 하겠냐.”
파츠츠츳.
허공에 검붉은 스파크가 튀며, 커다란 검은 번개창이 여러 개 만들어졌다. 세어 보자면…….
일곱 개군.
녀석의 머리 위로 빙 돌아가며 놈을 겨냥한 검은 번개창이 내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마치 사형을 집행하는 모양새였다.
“아, 참. 뭐 하나만 물어보자.”
녀석은 시선을 내린 채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너 혹시 백익교라고 아냐?”
스승님이 했던 말 중에, 마계는 하얀 날개를 가진 악마들에게 봉인을 당했다고 했다. 하얀 날개라면, 백익교와 아주 잘 맞는 말이었기에,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봉인이 오래됐긴 했지만, 상위 마족이니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을까 하고.
녀석은 고개를 들어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내리고는 대답을 회피했다.
“그래. 뭐,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차라리 안 듣고 말지, 이 재수 없는 얼굴을 계속 보고 있는 것이 더 고역이다.
“넌 꼭 지옥에 갈 거다.”
마지막까지 표독스러움과 고고함을 놓치지 않은 얼굴을 유지하는 놈에게 악담을 던지고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밑으로 내렸다. 사실 그냥 내리꽂아도 되지만, 일종의 놈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그리고 놈의 몸이 일곱 번개 창에 꿰뚫리며 터져 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끝은 추하구나.”
얼굴은 여태 해 온 것처럼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지만, 그의 죽음에서 추한 냄새가 났다. 상대를 끝까지 인정하지 못한 억울함과 상대를 경멸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죽을 때까지도 내 강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나의 우월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 절로 고개가 가로저어지는 모습이다.
마치… 내가 마나의 선택을 받은 것 같군.
죽는 놈의 감정도 읽을 수 있게 됐다. 이것이 다 고리 열두 개의 힘. 평시에 느끼지 못하던 것까지 느낄 수 있는, 조금 부풀리자면 마치 신이 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자… 이제 마무리를 지어 볼까.
뒤를 돌아 곳곳에서 신음하고 있는 천황 따까리들을 향했다.
* * *
“읏……!”
무너지는 건물의 잔해에 다리가 깔려 신음을 흘리고 있는 요한은, 처음부터 마법을 사용하여 천황성에서 멀리 떨어져야 했다고 생각했다. 같잖게 전투에 끼어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한심한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를 뼈저리게 했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마압에, 신시우가 지배하는 영역 안에서는 그 누구도 마나를 운용할 수 없는 절대적인 마나 지배까지.
다른 능력을 가진 이들도 힘들어 허덕였지만, 마나를 운용해야 하는 마법사에게는 아주 쥐약인 환경이었다.
그 탓에 그는, 떨어지는 건물의 잔해에 두 다리가 깔릴 때까지, 실드 하나 펼치지 못했다. 아무리 마력을 끌어올린들, 신시우의 마나 지배력에서 마나를 빼내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 대 전쟁 시절에 그의 힘은 막강했다. 국가를 넘어서, 세력의 최고 마법사로, 세계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무력해질 줄은 그 자신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알지 못했으리라.
“후웃……!”
요한은 한 번씩 오는 격통에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허무한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무려 오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것치고는 너무나 허무하고, 무력한 결말이라 생각했다.
‘프리메이슨도 이제 끝이군.’
신시우 같은 절대자가 그들이 설치고 다니게 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숙원을 반쯤 푼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정신병자 집단인 프리메이슨을 끝장내는 것이 자신의 숙원 중 하나였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와중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거대한 힘이 자신을 감싸 안는 것을 느꼈다.
포근함, 따스함이 자신의 내부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요한은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치유……? 누가……?’
[일어나.]
요한은 머릿속에 울리는 나긋나긋한 음성을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백발의 귀환자와 마주 할 수 있었다.
‘음……?’
[넌 일해야지.]
[무슨…….]
[천황은 죽었고, 이제 네가 일본을 다스리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신시우의 말은, 요한 자신을 앉히고 식민 지배를 하겠다는 말이었다. 그걸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굳이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가 의문이었다.
[지배 방식은 자율. 타 국가와 협력을 맺든, 뭘 하든 네 자율이다만 전쟁 준비나 모의 같은 것은 하지 마라.]
[아… 예.]
[전력 증강도 하지 말고.]
[예.]
[한국인 위협하지 말고.]
[예.]
[너랑 저놈들이 오늘 이 일의 증인이 되어, 오늘내일 사이로 언론에 발표해. 천황이 내 손에 소멸했고, 일본이 한국의 속국이 되었다고.]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정부와 연락하면서, 서로 페이스 맞추면 된다.]
[예.]
[그리고… 혹시 어제 한국에서 받은 첩보는 없나? 사실대로 얘기해라.]
신시우의 질문에 정신이 또렷또렷해진 그는 머리를 굴렸다. 무슨 대답을 해야 자신에게 이로울지. 그리고 이내 그는 선택했다.
[실은 광해 길드의 방지산이라는 자에게 시우 님의 계획을 들었습니다.]
[오… 역시. 좋아. 알았다. 내 지시사항 하나도 빠짐없이 이행하고.]
[아… 예.]
신시우가 그렇게 못을 박으니, 요한은 기억력이 없어지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조만간… 한국으로 부르마.]
그 말을 남기고 신시우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요한은 멍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다가 멀쩡한 자신의 하반신을 내려다봤다.
‘산… 건가?’
죽음에 가까워진 것을 깨닫고, 생각을 정리했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멀쩡한 몸이었다.
* * *
“오셨습니까.”
집 마당에 도착하자 남 비서가 제일 먼저 나를 맞았다.
“어. 피곤하니 좀 쉬어야겠다. 아직 긴장 풀지 말고 있어.”
“예.”
궁금하기도 할 텐데 남 비서는 그저 눈치를 보면서 대답만 할 뿐이었다. 처음엔 미숙했던 녀석이, 나와 며칠 지내면서 좀 성장한 듯하다.
방으로 올라가며,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시각은 6시 22분. 뭐, 전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던 것 치고는 좀 걸린 느낌이었다.
그래도 오늘 굉장한 수확을 했다.
칼란의 절대자를 다시금 만난 것은 정말이지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와의 만남에서 큰 수확이 있었다. 바로, 마계의 봉인이 풀린 것 같다는 것.
나 하나 정도야,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뭐 그런 의미로 해석하면 봉인과 상관없을 수 있었지만, 베라크리토는 좀 의미가 달랐다. 마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이 충분히 가능해졌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만일 확실히 봉인이 풀린 것이 맞다면, 마계로 갈 수 있는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고 볼 수 있었다.
“으아-”
오랜만에 마력 고리 12개를 풀가동시켰더니, 몸이 피로해졌다. 하여, 방에 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다.
조금만 쉬자.
잠시 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 미친… 생각이 많아서 잠이 안 와……!
몸은 피로하다고 얘기하고 있었지만, 머리가 도저히 잠들 생각이 없었다. 얼른 마계로의 문을 열어 재끼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뛰고, 머릿속이 복잡해 잠이 올 기미가 없었다.
일단 하나 해결해 놨으니. 다시 짬을 내서 관문에 대해 연구해야지.
그렇게 나는 자리에 눕는 대신 바닥에 양반다리로 앉아서 마나 수련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