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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이름은 ‘길론 반 스레인’. 내 예상대로 칼란 대륙의 패권을 쥐고 있는 제국의 서열 5위였다. 꽤나 상위 혈통이라고 자부심을 내보일 정도.
그에 맞게 놈은 이곳에 쳐들어온 검은 괴수들을 모조리 처치했고, 그 수장 또한 소멸시켰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 대륙의 상황에 대해서 꽤 쓸만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수도와의 마지막 교신은 9시간 전. 수도는 그때까진 건재했고, 제국의 북부 쪽에서 육황이 놈들의 수장과 격돌했다는 소식이 끝이라 했다.
베라크리토 다음의 육황은 어느 정도로 강할지 기대가 됐다. 베라크리토와 비슷한 전력이라면 홀로 놈들을 능히 막아 낼 만한 전력이라 생각했으니까.
그 콩인지 하는 놈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재수 없는 베라크리토를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걱정이 해소됐다. 실력 하나만큼은 인정하니까.
나한텐 안 되지만.
인근에 있는 도시들도 9시간 전 교신이 끝인데, 그곳들도 거의 동시에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고 했다. 일단 제국의 서부 북부 지역들은 대부분 공격을 받고 있는 것으로 예상했다고.
그렇다면 아홉 시간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수도는 아직 건재한 건가? 제국이 이리 고전하고 있는데, 다른 왕국들은? 육황 놈은 콩이라는 놈을 물리쳤을까?
스레인의 얘기를 들으며 떠오른 질문들이 답을 찾지 못하고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금 통신은 가능한가?”
“시도해 봐야 합니다.”
“참, 다른 대륙 소식은?”
“옆 대륙 ‘제디아’가 정체불명의 종족에게 침공당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이후 도움 요청이 한 번 왔었고, 칼란에서도 병력을 파견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후의 소식은 없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제디아라면… 청색 피부의 ‘란’이 육황으로 있는 곳이군.
특이하게 중하위 계층에 속하는 청색 피부의 마족이 그 재능과 노력을 인정받아 육황에 오른, 놈도 강자긴 했지만, 베라크리토보단 한 수 아래였다. 그런 점에서 미루어볼 때 대륙 전체가 잠식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강한 대륙으로 열 손가락 안에 꼽는 칼란이 이렇게 고전 중이니.
마계 전체가 침공당한 것인지, 제디아와 칼란이 시작점인지 모르겠지만, 급하다는 것은 분명했다.
“칠대제들은 아직 나서지 않았어?”
“예. 아직 움직일 기미는 없습니다.”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나 보군?”
“상황 자체는 심각합니다만, 그분들께서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때는 시발. 다 뒤지기 전에 얼른 움직여야지.”
엉덩이 무거운 우리 칠대제들의 판단에 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사정을 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내 사정을 얘기해 줬다. 균열부터, 이곳에 다시 오게 된 것까지.
“차원관문을… 만드셨다는 말입니까?”
“어.”
녀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마법에 조예는 없지만, 차원 마법과 관련된 서적을 호기심에서 몇 권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제가 얻은 것은, 차원 관문이라는 것은 해석하는 것에도 무한한 시간이 소요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난 가능해.”
“허…….”
어이가 없다는 얼굴.
“수도에 연락이나 해 봐.”
“아… 예.”
녀석은 대답을 하고는, 멀뚱멀뚱 보고 있는 딸을 쳐다봤다.
“가자.”
* * *
마법 통신. 지구의 전기를 에너지원으로 하는 통신보다 좀 더 복잡하고 불편하다. 아직까지 통신 기술은 그렇게 비약적인 발전을 하지 못했다. 마법에 의존한 덕에 전기과학이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복잡한 마법 술식이 기계와 결합되어져 만들어진 마법 통신 기계들은 각 용도에 맞게 따로 제작되어지는데, 지금 이 건물 3층에 있는 통신 기계 같은 경우, 도시 및 영지 간 통신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계로, 크기가 꽤나 크다.
“받질 않습니다.”
마지막 통신 후 아홉 시간. 그 안에 벌써 수도까지 점령이 되어 버린 건가? 그렇다면 칼란의 육황이 패배했다는 이야기인가.
좋지 않았다.
“수도는 어디쯤이지?”
“여기서 동쪽 방향으로, 비행선을 타면 12시간 이내. 마나 기관차를 이용하면, 쉬지 않고 이동했을 경우 하루 반나절을 꼬박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꽤 먼 거리군.”
비행선의 경우, 속도도 빠르지만 지형에 구애받지 않고 이동하기에 더욱 빠르다. 반면 마나 기관차는 속도도 비행선보다 느리지만, 중간에 지형으로 인해 돌아가야 할 경우 소요 시간이 배가 된다.
물론 이것은 마계에서 해당되는 이야기. 지구에 있는 탈것들의 속도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마법사가 없으니 그냥 직접 이동하는 수밖에 없겠군. 지도 있으면 가져와 봐.”
보통 이 정도 거리라면 공간이동 마법을 이용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현지 마법사들도 없었고, 나 또한 칼란 대륙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기에 내가 공간이동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곳은 펼칠 수 있는 마나필드의 범위 안이었다.
“넌 어떻게 할래?”
“당연히 함께 가야죠.”
“딸내미는?”
“함께 갈 겁니다.”
“죽을지도 몰라.”
“위험한 건 여기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이 도시엔 아무도 없어서 돌봐줄 사람도 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마음 단단하게 먹어라.”
“예.”
그렇게 상위 마족 스레인과 그의 딸과 함께 도시를 떠났다.
* * *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이동을 진행했다. 지도를 따라 수도를 향해 가되, 마나필드를 펼쳐 검은 괴수들이 있으면 소멸시켰고, 마을이나 도시가 있으면 생존자를 탐색했다.
스레인은 베라크리토와 마찬가지로 언령으로 소환하는 대검을 사용했는데, 몸집만큼 거대한 대검이 무색하게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둘러 댔다. 검술 자체도 그 연속성이 긴밀하여 틈을 찾기 힘든 훌륭한 검법이었다.
검술이란 참 보다 보면 묘한 느낌이 든다.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데, 그 안에서도 서로의 다름이 분명하고, 검술 간에 상성 또한 분명하다.
나도 조금 배워 본 적이 있지만, 내게 맞지 않아 그만뒀었다.
마법사가 검술이라니. 가당치도 않지.
셀 수 없이 많은 검은 괴수들을 죽였다. 처음 보는 종류도 있었고, 봤던 놈들도 있었다. 처음에 대도시에서 내 손에 죽었던 중간보스 정도 되는 놈과 비슷한 놈들도 마주했다.
대부분 스레인이 소멸시켰고, 나는 잔챙이들을 맡았다. 이번에는 정신접촉 같은 걸 하지 않았다.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인 타격이 올 정도였으니까 안 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이동했다. 밤새 이동하여 피곤하고 힘들 법도 한데, 녀석의 딸내미는 지친 기색 하나 내지 않았다.
그렇게 수많은 마을과 도시들을 지나 수도 가기 직전 산을 넘을 때. 처음으로 생존자를 만났다.
“이른 아침에 이 산중엔 어인 일이오?”
옛 느낌이 물씬 풍기는 노인네였는데, 짧은 은발에 백색 피부, 뿔은 한쪽이 잘렸고, 날개도 모두 떨어져 나갔다. 그 모든 조합은 그가 한물간 최상위 마족이라는 것을 말해 줬다.
그러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힘이 없었다. 마치 힘을 깨우치지 않은 일반 노인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일반의 노인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일정 경지 이상에 오른 자만이 가지는 눈빛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힘을 감추고 있지만 높은 경지에 있는 존재가 분명했다.
“제국의 수도로 가고 있는 중이었소.”
“제국은 망했소.”
“보셨소?”
“당연하지. 조 앞에 서면 훤히 보이는 것을.”
노인은 팔을 뻗어 나무 사이로 커다랗게 솟아오른 바위를 가리켰다. 그에 나와 스레인은 바로 바위로 이동했고, 그 위에 올라서자 멀리 연기가 피어오르는 거대 도시가 보였다.
이 바위가 위치한 산 앞으로는, 가로막는 산이 하나도 없이 멀리 산맥의 끝자락까지 쭉 시야가 트여 있었다. 그에 마력을 이용하여 시력을 강화해 먼 도시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 서울시를 가져다 놓으면 저럴까? 싶을 정도로 방대한 규모였다. 멀리까지 뻗은 산맥의 끝자락부터 시작된 도시는, 거대한 평원 전부를 메꾸고 있었다.
처음 보는 규모는 아니었지만, 군데군데 들어선 칼란 대륙만의 건축형식을 가진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들에, 조금 심리적으로 압도되는 것이 있었다. 건축물의 웅장함에서 오는 압도감이랄까?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제 옛 영광을 뒤로하고, 모두 파괴되고 불타고 있었다. 도시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어떤 곳은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고 활활 타고 있었다.
어떤 곳은 어떤 큰 힘이 일대를 전부 쓸어버려 커다란 공터가 된 곳도 있었고, 황제가 기거하는 성으로 보이는 곳은, 성벽이라는 것이 형체를 찾아볼 수가 없었고, 안쪽 건물들도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거대한 무언가가 부순 것 같은 풍경. 마치 지옥도를 보는 듯했다.
“육황이 졌나 보군.”
“…….”
내 말에 스레인은 아무런 말 없이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러다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저것들은 대체 어디서 온 것들일까요?”
“어디서 온 것인지는 나도 몰라. 다만, 저놈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한 놈들이다. 내 고향에서 저놈들에게 패배한 종족을 만났거든.”
“고향에서 말씀이십니까?”
“어. 정식 명칭은 ‘천자’. 하얀 날개를 가진 악마들이라고 들어봤나?”
내 물음에 녀석이 고개를 홱 돌려 나를 쳐다봤다.
“하얀 날개를 가진 악마들이라면…….”
“마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마계 차원을 통째로 봉인시킨 놈들. 너도 들어봤겠지?”
녀석의 얼굴이 당황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네. 어릴 때 많이 들었었습니다.”
“그래. 바로 그놈들을 만났다. 놈들은 모종의 이유로 수천 년간 내 고향 차원에 머무르며 영혼을 모았어. 그 이유를 알기 위해 한 놈을 잡아서 머릿속을 들여다봤지. 그랬더니, 지금 마계를 혼돈에 빠트린 저 검은 것들이 그들의 차원을 침공했더군.”
스레인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들었다.
“천자들은 그 검은 것들에게 처참하게 패했어. 신격을 갖춘 이들까지 패배해 봉인되거나 소멸되었지. 그중 봉인된 신격체들을 부활시키기 위해 놈들은 내 고향에서 영혼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다 잘못 걸려서 내 손에 다 죽었지만 말이야.”
“그런 놈들도 처참하게 패할 정도라면…….”
“놈들의 중심에는 악신 ‘바르’라 불리는 신격체가 존재한다. 그 녀석의 강함은 상상을 초월하지. 우리 마계도 단합해서 대책을 강구해야 해. 이곳 칼란만 정리되면 천공섬 ‘그라가레’로 갈 거야. 거기서 나머지 칠대제들과 마신들이 기거하는 초차원으로 가는 문을 열어야 돼.”
“옳은 판단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겠군요.”
“내려가자.”
바위에서 내려오자 귀 밝은 노인이 혼잣말인 양 툭 던졌다.
“하얀 날개의 악마가 진짜 악마에게 당했군.”
“보아하니 이곳에도 놈들이 들른 것 같은데, 힘도 없는 양반이 어떻게 다 처리한 거요?”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주변의 흔적들이 심상치 않아서 이곳에서도 전투가 있었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허허. 들개들이 덤비길래 죽였을 뿐이네. 그런데 자네는 처음 보는데, 육황인가?”
그의 눈빛이 나를 가늠하고 있었다.
“보는 눈이 좀 있는 줄 알았더니. 영 맹하군.”
“뭣이……?”
노인의 한쪽 눈이 찌푸려지면서 노기 서린 눈빛을 보냈다.
“더 위.”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자네가 지금 칠대제라고 주장하고 싶은 건가? 어디서 칠대제에 대해 잘못 주워들은 모양이군. 칠대제들은 모두 그라가레에서 호의호식 중이네. 그들은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아.”
노인은 조금 격앙되어 있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칠대제 즉위식 날 다른 차원으로 날아가 버려서 그라가레에 머물러 보질 못했다.”
내 말에 노인의 미간이 찌푸려졌고, 그가 뭐라고 말하려던 차 내가 말을 이어 붙였다.
“계속 그렇게 겁쟁이처럼 숨어 살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고, 아니면 날 따라나서라. 이 칼란 대륙을 살려 볼 참이니까.”
그에 노인은 기가 차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허……! 새파랗게 젊은 것이 말본새하고는…….”
아직도 날 칠대제로 인정하지 못한 노인은, 가자미눈을 뜨고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돌아섰다.
“가자.”
“아, 예.”
칠대제에게 함부로 말하는 노인과 그를 받아주는 내 모습에 스레인은 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계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장면이니까.
“흥. 그래. 어디로 간다고?”
결국 내 밀당에 감긴 노인이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