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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구구…….
바닥의 흙과 돌이 튀어오를 정도의 진동이 평원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것은 바로 도시로 달려오고 있는 검은 군대가 만들어 내는 진동이었다.
눈앞을 새카맣게 메우며 달려오는 적에 공포에 질릴 법도 한데, 붉은 갑주의 친위대는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륙에서 가장 강한 자를 호위하는 자들이기에, 그들이 가진 무의 경지와 각오는 이 정도 적의 규모와 기세에 마음이 흔들릴 만큼 약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곡도에서 강렬한 붉은 마기가 피어올랐고, 검은 군대가 지척에 다 달았을 즈음 그들의 곡도가 휘둘러졌다.
강과 산 사이 넓은 평원에 30개의 기다란 붉은 선이 그려졌다. 이어서 수십 개의 붉은 참격들이 전방으로 쏘아져 나가며, 검은 군대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맹렬히 달려오던 검은 군대는 폭풍 같은 붉은 참격에 분쇄되어져 토막으로 바닥에 나뒹굴었고, 믿기 힘들게도 붉은 갑주의 친위대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산만한 검은 고래가 검은 안개를 뿌리며 세상을 어둠에 잠기게 하고 있었으나, 친위대의 활약은 뒤에 있는 병사들의 떨어지려는 사기를 꽉 붙들어 맸다.
공중에서는 검은 힘과 붉은 힘이 수십 차례 맞부딪혔고, 그 충격파는 도시 내부까지 전해졌다.
덜덜 떨리는 팔에 쾌감을 느낀 콩의 얼굴은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나를 이 정도로 밀어붙일 수 있다니……! 최고의 먹잇감이다……!’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상대를 꼭 잡아먹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실이었군. 이 정도 힘을 가지고 있다면, 가능해.’
칼란 대륙의 육황, 제로니 또한 상대의 힘을 인정하고 있었다. 조금 밀리는 감은 있지만, 자신과 수십 합을 버텨 내고 있었으니까.
또다시 십수 합을 나눈 둘은 잠시 거리를 벌렸다. 그사이 콩이 단검을 쥔 손을 옆으로 뻗었다. 그러자 불길한 검은 힘이 그의 팔을 타고 검으로 넘어가 마치 불꽃처럼 짙은 검은 기운이 검에서부터 분출되었고, 그것은 거대한 검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먹어 보실까.”
그 거대한 검은, 크기가 무색하게 빠른 속도로 휘둘러졌다. 크기가 커진 만큼 위력도 올라갔고, 동시에 마기를 끌어올린 제로니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크읏……!”
한 번씩 부딪힐 때마다 제로니는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불안감은 있었지만, 그녀도 다 생각이 있었다.
‘저런 식으로 힘을 쓰면 분명 금방 바닥난다.’
그녀가 보기에 상대는 무리하게 힘을 쓰고 있었다. 분명 그 힘이 얼마 가지 않아 바닥날 것이라 여겼고, 그녀는 계속 그 공격을 흘려 내며 버텨 나갔다. 역시나 그녀의 생각대로 상대의 힘이 약해지며 틈을 보였고, 노련한 그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비집고 들어갔다.
팔이 날았다. 어깨까지 잘라 냈기에 아무리 높은 경지에 있더라도 버티기 힘든 부상. 그녀는 승리를 확신하며, 그대로 그의 몸뚱이를 반으로 갈랐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일까? 상대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곳은 몇 보 떨어진 곳. 그곳에 나타난 상대는 희한하게도 잘려 나간 오른팔이 다시 자라나 있었다.
‘재생인가?’
그러나 단순한 재생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팔이 정상적이지 않았다. 팔의 색은 아래에서 우글대는 그의 부하들처럼 칠흑같이 검었고, 근육의 구분이 없었다.
즉, 모종의 술법으로 만들어 낸 임시방편이라는 얘기였다. 그렇게 결론이 내려진 제로니는 기세를 가다듬었다. 마지막 승부를 볼 요량으로 검신에서 분출되고 있는 마기를 압축시켜 날카롭게 벼려 냈다.
마기로 강화된 전신의 근육에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았고, 일순간 힘을 폭발시켰다. 팡. 하는 공기 폭발음과 함께 제로니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순식간에 상대의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섬광과 같은 돌진으로 상대의 상체를 그대로 잘라 낸 제로니. 그러나 그녀는 입에서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상대의 상체를 잘라 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기이한 각도에서 들어오는 상대의 공격은 쳐 내지 못했다.
‘어떻게 저런… 공격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이 그녀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분명 보통이라면 몸통이 잘려 전투 불능에 빠져야 할 것이 분명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상대는 상체가 잘리는 그 순간에 기습적인 공격으로 그녀의 심장에 손을 박아 넣었다.
마기로 보호되고 있던 그녀의 신체였기에, 강력한 마법이 걸린 그녀의 갑주였기에 그 충격은 더 컸다. 그런 충격 속에서 제로니는 의식을 잃어 갔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 손을 꼽은 채 매달려 있던, 상체만 남은 콩은 히죽 웃었다.
“내가 꼭, 먹는다고 했지?”
그 말과 함께 손이 뽑혀 나가며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고, 제로니는 그대로 추락했다. 반면에 하체를 잃어버린 콩의 상체는 또다시 검은 것이 꾸물꾸물 흘러나와 하체를 만들어 냈고, 그 하체로 허공을 박차고 솟아올라 추락하는 제로니를 붙잡아 고래 위에 올라탔다.
“역시 나보다 센 놈을 잡는 게 제일 재미있단 말이야.”
히죽거리는 그는 그 자리에서 죽음의 섭취를 시작했다.
* * *
저벅저벅. 파괴된 제국의 수도 시가지를 걸으며, 마나필드를 펼쳐 혹시나 남아 있을 생존자나 검은 악마들을 찾았다.
곳곳이 참혹한 풍경이었지만, 스레인은 딸에게 그 풍경을 그대로 보여 줬다.
“전쟁이란 이런 것이다. ‘마닐’. 똑똑히 보고, 가슴에 새기거라. 이제 우리 가문을 이을 사람은 너뿐이란다. 네가 가주가 되었을 때 이 풍경이 네게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조기교육이 어마어마하구만.
뜻하지 않은 조기교육의 현장. 그것을 지켜보며 뒤를 따라오던 노인은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통성명이나 하지. 네 이름은?”
걸음을 늦추며 노인을 향해 물었다. 아무래도 범상치 않은 노인이라 알고 싶은 것이 많았다.
“허… 묻는 사람이 먼저 밝히는 것이 예의 아닌가?”
“어디서 파문당했는지 모르지만, 마계의 율법을 거스르지 마시오.”
참다못한 스레인이 으르렁거리듯 얘기했다.
“왜? 저자가 칠대제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겐가?”
노인이 스레인의 신경을 긁었다.
“대제시여. ‘발라의 증표’를 보여 주시지요. 그렇지 않으면 마계의 율법으로 저자를 다스리셔야 합니다.”
발라의 증표. 칠대제의 증표를 보여 주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 증표를 받기 직전에 차원 이동이 되어 버렸는데 내게 그런 것이 있을 턱이 있나.
“증표를 받기 직전에 균열을 타고 고향으로 넘어갔다. 내게 칠대제의 증표는 없어.”
“그렇다면…….”
“그러나 자격을 갖춘 것은 틀림이 없다. 나의 대제행에 참여한 모든 대륙의 육황들과 참관인들이 그 증거야. 그들의 앞에 가면 모든 것이 드러나겠지.”
“그들은 저 검은 것들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다던가?”
노인의 빈정거림을 참지 못한 스레인이 자신의 애병을 불러냈는데, 그 순간 노인에게서 금빛 마기가 폭발했다. 이전까지 느껴지지 않던 강력한 힘이 노인에게서 뿜어져 나왔고, 나도 놀랐지만 스레인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봤다.
“뭐, 제국도 멸망한 마당에 이젠 상관없겠지.”
노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금빛 안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스레인과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저 꼬맹이 놈은 전의를 상실한 듯하고… 자칭 칠대제는 어떤가? 해 볼 텐…….”
찰나의 순간 마력을 끌어올려 고리 열 개를 공명시켰고, 내 의지에 따라 마나들이 내 전신을 강화 및 가속을 마쳤다. 그 모든 것이 찰나의 순간 일어났고, 가속이 끝나자마자 노인에게 쏘아져 나가며 주먹을 뻗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힘과 힘이 맞부딪혔고, 노인은 내 주먹을 막은 자세 그대로 뒤로 쭈욱 밀려났다.
눈을 부릅뜬 채 팔을 엑스자로 교체한 노인은, 눈을 부릅뜨고는 나를 노려봤다. 어차피 죽일 생각으로 친 것이 아니기에 그렇게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내가 정말 죽이고자 하는 의지를 실었다면, 노인은 두 팔이 날아가고 심각한 내상으로 죽었겠지.
아무튼, 노인은 이제야 뭔가를 조금 깨달은 듯했는데, 스레인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전설 속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뭐가?”
궁금해진 내가 물었다.
“금빛 마기 말입니다. 통상 보통의 마족들은 붉은색 계열의 마기를 지닙니다.”
“음…….”
그의 물음에는 가드를 내린 노인이 대답했다.
“전설은 무슨. 고작 오백 년 전 일이다.”
노인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조금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이 있었지만, 그냥 냅뒀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힘을 숨기고 있었는지. 스레인 놈이 전설이라고 하는 금빛 마기를 어째서 가지고 있었는지 궁금했으니까.
노인의 이름은 ‘로아이스’. 5백 년 전 칼란 대륙의 육황 후보였다고 했다. 현 제국 ‘환렌’ 최고의 개국공신으로, 공작의 작위를 받으며 그는 찬란한 미래를 꿈꿨다고.
그러나 황제의 장악력이 부족했던 건지 제국을 구성하는 세력 간에 갈등이 발생했고, 모종의 계략으로 인해 황제를 추종하는 세력이 불리하게 되었다.
적들의 계략이 성공하게 되면 황제의 자리까지 위험해질 위기. 황제의 가장 친한 친우이자 의리와 신뢰를 중시했던 로아이스는, 결국 총대를 메고 피의 숙청을 한 뒤 모든 죄를 뒤집어쓰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약속대로 모든 적 세력을 숙청한 뒤 도주했고, 제국군의 추격을 피해 산속 깊이 숨으면서 자신의 힘을 모두 숨기고 계획대로 세상에서 없어진 척, 추격대에게 죽은 척하며 살아갔다고 했다.
“그냥 네가 다 죽이고 황제가 되었으면 되는 거 아냐? 그리고 육황에 오르면 되지.”
“맞아. 자네 말이 맞아. 그랬어야 했지.”
보아하니 마음이 좀 약한 노인인 듯 보였다. 황제의 충실한 개가 되어 제국을 세웠고, 결국 누명을 쓰고 세상에서 없는 존재가 되어야 했던 그.
내 성격에는 좀 답답해 보였으나,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는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스레인의 얼굴이었다.
“왜 그러고 있어?”
“믿을 수가 없어서요.”
“뭐가?”
“금빛 마기를 가지고 있는 존재를 보는 것도. 그게 머나먼 전설이 아니라 고작 오백 년 전 얘기일 뿐이라는 것도, 그리고… 대역죄인 로아이스의 이야기가 이런 식의 전개였다는 것도. 모두 다 그저 신기할 뿐입니다.”
그에 로아이스가 마기를 거두고 걸어오며 말했다.
“이게 다~ 네놈들의 이전 황제 잘못이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번 겨뤄 볼 수 있겠습니까? 개국공신이자 제국 최고의 검 로아이스는 무신이라는 별호를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혈통 또한 자식을 남기지 않은 것이 국가적 손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뛰어나다 들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전개야?
로아이스는 미기적거리더니 결국 수락했다.
“뭐, 오랜만에 몸 풀기 정도로는 괜찮겠지.”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들었다.
저게 그 유명한 ‘고수가 나뭇가지를 들었을 때’인가?
“선공은 양보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