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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즉위식 날 균열을 만났다-72화 (7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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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죽. 놈이 징그럽게 웃었다. 이후 놈에게서 느껴지는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거대하고, 강대한 존재의 격이 놈의 몸에 강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전한 강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달라지는 것을 느끼며 긴장감에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군.”

놈의 입에서 쇳소리 나는, 끔찍한 느낌을 전해 주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이 차원에 발을 딛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부상을 당했거나 속박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야. 그저 이곳 자체가 나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지.”

내 생각을… 읽은 건가?

“혹여나 날 만나지 못할까 걱정은 하지 말거라. 나는 곧 이곳 차원의 의지를 꺾고 들어올 것이니까. 이제 준비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 말을 끝으로 놈에게서 그 존재의 느낌이 지워지더니, 녀석의 힘이 놀랄 만큼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신체가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의 힘이 놈에게 주어졌고, 이내 그 힘은 놈의 두 팔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진한 검은 줄기가 되어 놈의 두 팔을 휘감았고, 이내 손에 강력한 힘이 모여 진동했다. 그리고 놈은 내게 돌진해 왔다.

강력한 폭음과 빛이 세상을 뒤덮었다. 놈은 내 앞에 펼쳐진 금빛 마나 장막을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을 버티지 못한 신체가 부서져 나가고 재생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확실히 엄청난 힘이다.

금빛 장막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것이 놈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강한 힘일 뿐. 정제되지 않고 기술로 승화시키지도 못한 것. 그런 것들은 결국 어떤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고 흩어져 버리게 마련이다.

이렇게.

금빛 장막이 한차례 전방을 향해 충격파를 쏘아 보냈다. 잠시 놈이 움찔하는 사이, 이내 그 형태를 창으로 변신한 금빛 마나 장막이 놈의 명치를 관통했다.

일순간 폭주했던 힘은 금세 그 위력을 잃어버렸고, 놈은 탈진 상태가 된 것처럼 기세를 잃어버렸다. 금빛 창은 놈의 그런 틈을 놓치지 않았고, 빠르게 움직이며 놈을 분쇄하기 시작했다.

허공에 금빛 선이 수없이 그려졌다. 그리고 녀석의 내면에서 울려 오는 아우성이 전해져 왔다. 죽기 싫다고, 자신은 십이사신이며 바르의 은총을 받은 자라고. 가짜들과는 다르다고.

생에 대한 엄청난 미련과 함께 놈은 계속 작아졌다.

콩은 이 정도의 미련은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이놈은 미련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고 보니 이놈은 이름도 못 물어봤군.

하늘엔 검은 구멍이 자취를 감추었고, 태양이 완전히 떠올라 새벽의 한기를 걷어 내고 있었다. 놈을 소멸시킨 나는 마력 고리의 공명을 멈추고 탈태를 풀었다.

아까부터 이곳저곳에서 강한 힘의 충돌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검은 뿔이 이끄는 군대는 콩이 이끄는 군대와는 그 질의 차이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인 듯했다.

스레인과 호각으로 싸우는 놈과 드래곤들을 압도하는 놈들. 그리고… 알리는 끝났군.

앞으로 남은 십이사신이라는 것들은 총 열 놈. 지금 이 정도의 전력을 가진 놈들이 열 놈이나 된다면, 그것은 썩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또, 꼭 이놈만 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없는 노릇. 더 강한 놈들이 더 강한 군대를 이끌고 있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런 것들이 아킬라에 상륙했다고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지상으로 내려가자 알리 녀석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를 맞았다.

“잔챙이들 정리하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려?”

“그게… 호적수를 만났습니다.”

“호적수?”

알리 놈이 필사적으로 싸워 이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예. 이놈들은 칼란 대륙의 놈들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이 정도로 강한 놈들이 칼란 대륙으로 쳐들어왔다면, 아마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간발의 차로 겨우 이겼습니다.”

“앞으로 더 분발하도록 해.”

“예.”

관계를 맺은 적도 없는데, 녀석은 마치 나와 군신관계라도 맺은 듯했다.

그런데 저놈은 대체 뭐하는 놈이지?

고개를 돌려 멀리 희미한 윤곽이 보이는 높이 솟은 산 정상을 쳐다봤다. 이곳에 와서 전투를 하면서 느껴진 시선인데, 그렇게 거슬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존재감이 없는 시선도 아니었다.

그 시선은 계속해서 나를 주시하고 있었고 일대를 훑었다.

그 멀리서 이런 존재감을 드러내다니… 뭘까? 버마 대륙의 육황인가?

고리 13개를 공명시켜 마나 필드를 최대한으로 펼쳐도 겨우 닿을 거리라 정확한 놈의 정체를 잡아내긴 힘들었지만, 죽음의 기운이 없기에 바르의 군대가 아니라는 것과 상당히 강한 놈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지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만일 저놈이 버마 대륙의 육황이 맞다면 십이사신과 맞서 싸우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격이 다른 내가 싸우니까 이 정도지, 보통의 육황급이 맞서 싸웠다면, 힘겨운 싸움을 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게다가 놈들이 재생을 하고 부활을 하는 특성도 모른다면 분명히 필패했을 것이다. 이번에 내 손에 죽은 검은 뿔을 가진 놈은 그만큼 강한 놈이었다. 바르의 힘을 끌어내는 것도 콩이라는 녀석과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대체 그 금빛 탈태는 어떻게 하신 겁니까?”

알리 놈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너도 경지를 높여 가다 보면 알 수 있어.”

“어느 경지에 올라 있는지 말해 주실 수 있습니까?”

엄청 참다가 물어보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고리 열세 개다.”

녀석의 입이 벌어졌다.

“그 정도면… 칠대제가 아니라 마신이 되시는 게…….”

“아직 칠대제 즉위식도 다 못 마쳤는데 마신은 무슨.”

녀석이 입을 다물었고, 로아이스가 걸어왔다.

“칠대제라는 것이 헛말은 아니었나 보군.”

그는 마치 이제 인정해 준다는 듯한 느낌으로 얘기했다. 그리고 그의 뒤이어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와 지붕 위에 앉은 검은 드래곤 퓨리스는.

[네 힘에 경의를 표한다.]

내가 아닌 내 힘에 경의를 표했다. 좀 있으니 스레인이 왔고, 드래곤들이 하늘을 날며 모든 검은 괴수들의 소탕이 끝났음을 알렸다. 하여 이제 내 목적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이 근처를 지배하는 세력은 누구지?]

[현재 버마 대륙에서 가장 강한 드래곤, ‘레이라크’가 수장으로 있는 무리 ‘마고라’다.]

레이라크. 아직도 녀석이 버마 대륙의 육황이었군.

레이라크는 대제행 당시 나와 붙었던 버마 대륙의 육황이었다. 꽤나 나이가 있어서 나와의 싸움 후에 은퇴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었는데, 아직까진 그대로 있나 보다.

[혹시 저 산 꼭대기에 있는 놈이 레이라크인가?]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가리켰다.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다만,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에 둥지를 틀고 있다고 했으니, 맞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 산에서 느껴지는 시선은 그의 시선이라고 하기엔 조금 결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 산이 맞다면, 저 산으로 가야겠군.]

대륙 간 통신이나 이동을 해야 하기에, 버마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레이라크라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산에는 동행하지 않아도 괜찮겠나?]

[어. 레이라크라면 이전에 대제행을 할 때 만나서 알아. 여기까지 데려다줘서 고맙다.]

[신세는 우리가 졌으니, 고맙다는 인사는 됐다. 그럼 목적을 달성하길.]

검은 드래곤 퓨리스는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고, 다른 드래곤들을 모으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나는 산을 향해 움직였다.

“우린 저 산으로 간다.”

* * *

작은 키. 뻣뻣하고 빽빽한 붉은 머리를 뒤로 넘긴 남자. 아니, 남자아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어린 외모를 가진 존재가 굳은 얼굴로 산꼭대기 바위에 앉아 있다.

‘…….’

생각에 잠긴 그는, 다름 아닌 칠대제 중 하나인 ‘바라멜리아’. ‘비나몬’ 대륙의 소수 종족 ‘쥬난’ 출신이다.

그는 자연의 선택을 받은 자로 불을 다루는 능력을 가졌는데, 인공 태양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구사한다.

여행을 좋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그는, 친우가 있는 버마 대륙에 들렀다가 불길한 기운을 흘리는 것들이 도시를 공격하는 것을 목격했고, 친우인 드래곤 레이라크와 함께 그것들을 쓸어내 버리려던 찰나. 뜻밖의 인물에 관망하게 되어 버렸다.

레이라크는 대제행 때 결투 상대였던 신시우를 잊지 않고 있었고, 그 덕에 바라멜리아 또한 신시우라는 존재를 떠올려 냈다.

마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 대제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인물이 즉위식 날 현장에서 사라져 버린, 너무 해괴하고도 불미스러운 사건. 그렇기에 천공섬 그라가레는 사건을 비밀에 붙이고, 아직도 사라진 칠대제 후보자를 찾고 있었다.

그런 놈이 갑자기 버마 대륙에 나타났다. 그것도 드래곤을 타고, 마치 검은 괴수들을 찾아다니는 놈처럼 놈들을 공격했다.

이상하고도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놈의 경지와 하늘에 나타난 검은 구멍.

검은 구멍 너머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은 칠대제의 자리에 오른 바라멜리아의 피부에 닭살을 돋게 만들었으며, 갑자기 전신 탈태를 해 버린 신시우 또한 격이 다른 존재감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바라멜리아는 깨달았다. 검은 구멍 너머에서 느껴진 존재와 신시우라는 칠대제 후보자가 가진 격은 자신보다 위에 있다고.

그것은 본능이었다. 피식자가 포식자를 알아보는 것과 같은.

[이리로 오는군.]

레이라크가 공간이동 해 오는 신시우 일행을 감지했다. 그러나 신시우에 대해 복잡 미묘한 감정을 가진 바라멜리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짧지만 긴 시간이 흐르고,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레이라크의 무리가 있는 산은 생각보다 거리가 굉장히 멀었다. 마력고리 아홉 개를 공명시킨 공간이동 마법으로 세 번에 걸쳐서 가야 했다.

둘이었나?

만년설 위에 우뚝 솟은 바위. 그곳에 두 인영이 보였다. 멀리서 느끼기엔 하나의 시선만이 강하게 느껴졌는데, 지금 보니 둘이었다.

하나는 레이라크. 또 하나는… 더 크다.

붉은 머리를 한 남자에게서 레이라크보다도 더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전혀 숨기지 않는 자신감. 어디 숨어 있던 인물은 아닌 듯 보였다.

대체 뭘까. 육황보다도 더 거대한 힘을 가진 자.

“춥네요.”

알리가 마법으로 몸 주변에 온기를 두르며 얘기했다. 다른 둘은 마기를 돌려 한기를 흘려 내고 있었다. 조금 걸어가자 바위 앞에 도달할 수 있었고, 둘이 바위에서 내려왔다.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되어 유감이군. 레이라크.]

먼저 인사했다.

[넌 도대체 어디에 가 있었던 거지? 즉위식 날 대체 어딜 간 거냐.]

레이라크의 목소리는 걱정 반 분노 반이었다.

[차원 균열이 나를 집어삼켜 다른 차원으로 보내 버렸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냐. 그것보다…….]

지금의 나는 아킬라 대륙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대륙 간 통신은 어디에 가면 할 수 있지?]

[통신기기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지. 그러나 그 전에 제대로 해명을 해야 할 거야. 지금 이곳에 칠대제가 와 있거든.]

내 시선이 키 작은 붉은 머리 남자에게로 옮겨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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