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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슬픔이 깔린 얼굴을 한, 한 여인이 푸르게 빛나는 뿔을 지닌 사슴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지금 세상을 위해 세상으로 나가려 하고 있었다.
자신의 눈부신 재능을 시기한 세상이 두려워, 대륙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산맥의 깊숙이 들어와 숨어 지냈던 그녀의 이름은 ‘마를레나’.
그녀는 본능적으로 대륙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운 것을 느꼈다. 그것은 한참 전이었지만, 세상과 단절했기에 세상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워낙 강한 자들이 즐비했기에 알아서 잘 헤쳐 나가겠지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틀렸다. 여러 산맥이 만나는 복잡한 산속에 자리를 잡고 있던 탓에 수많은 동식물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들려오는 소식은 절망적인 소식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곳저곳에서 대륙을 잠식해 가는 불길한 기운에 대해서도 들었고, 결국 대륙이 멸망으로 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녀는 용기를 냈다.
이대로 세상이 멸망하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대륙에 살고 있는 이들 때문이 아니었다. 대륙의 대자연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시우 씨, 어디 있는 거예요……? 아직도 칠대제를 위해 세계를 떠돌고 있나요? 도와줘요. 세상이 멸망할 위기에 처했어요.’
마를레나는 과거 며칠이었지만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신시우를 마음속으로 찾으며, 사실상 대륙의 마지막 방어선이 될 곳으로 향했다.
* * *
높은 산 위. 마를레나는 자신을 돕기로 한 수많은 동물들을 데리고 서서 멀리 전장을 바라봤다. 수많은 이들이 길게 방어선을 만들고 있었고, 그 뒤로도 굉장히 많은 수의 병력들이 보였다.
그 반대편에는 더욱 많은 수의 검은 군대가 있었다. 칠흑같이 검은 것들이 우글거리는 그 군대에서, 마를레나는 굉장히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준비됐니?”
마를레나의 물음에 동물들이 저마다 울음소리를 내거나 마나 파동을 일으키며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했고, 마를레나는 아킬라 대륙을 구원할 최후의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높은 산맥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평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전투는 시작되었고, 서로 뒤엉켜 난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짙어진 불길한 기운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가자!”
마를레나의 외침과 함께 수많은 동식물, 영물들이 일제히 돌진했고, 마를레나는 먼저 앞으로 이동해 마법을 펼쳤다. 강력한 마력에 그녀의 눈에서는 푸른빛이 흘러나왔고, 휘둘러진 두 손에는 푸른빛이 맺혔다.
마나의 축복을 받은 자답게 의지만으로 수많은 마법으로 하늘을 수놓았고, 그것들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지상으로 퍼부어졌다.
그녀에게 전쟁은 처음 겪는 일이었고, 이런 전투도 처음 하는 전투였다. 그럼에도 정확하게 적들을 타격했다.
그리고 전세는 한 번에 역전되었다. 갑작스럽게 달려든 영물들이 마나 공격을 퍼부었고, 짐승들은 검은 군대에게 달려들어 집중 공격했다.
하나하나 집중적인 공격을 맞은 것들은 쓰러졌고, 다시 살아나길 반복하다 결국 소멸했다. 마를레나가 데려온 지원군들은 적이 다시 일어나도 당황하지 않고 다시 죽였다.
그렇게 전세는 아킬라 대륙군 쪽으로 기울었고, 적들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마치 정말 전쟁에서 승리한 것 같은 느낌에 흥분한 캉구르 연합군은 적들을 쫓아 추격하기 시작했고, 많은 적을 소멸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공격에 연합군은 물론이고, 마를레나도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구체가 허공으로 솟더니, 이질적인 속도로 지상으로 낙하한 뒤 연합군을 일직선으로 밀어 버렸다.
그 구체는 도시까지 뻗어나가 막심한 피해를 주었고, 조금 전까지 승리의 가능성을 엿보던 캉구르 연합군은 완전한 절망으로 빠져 버렸다.
그 공격은, 마치 언제든지 너희들을 쓸어버릴 수 있다, 라고 경고하는 듯했으니까.
게다가 그 공격으로 캉구르 연합군의 사령관과 참모들이 목숨을 잃었고, 상당수의 전력을 일순간에 잃어버렸다.
그렇게 절망하는 그들의 앞에, 또 다른 새로운 검은 괴수들이 등장해 비행하며 그 위세를 과시했고, 캉구르 연합군과 마를레나는 더욱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바로 공격을 해도 되었음에도 검은 군대는 공격하지 않고 자신들의 진영에 머물렀고, 전장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
기껏 용기를 내어 세상에 나온 마를레나의 눈에 절망에 빠진 병사들이 보였다. 오래전 신시우와의 만남 이후로 아무하고도 말을 섞어 본 적이 없는 마를레나는 그들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먼저 말을 걸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주저하고 있는 그때.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에게 다가와 머리를 숙인 자는 잿빛 피부에 백발을 한 마족이었다. 신시우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인사를 받은 그녀는 경계심과 함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리고 말문이 막혀 버렸다.
“혹시, 다른 대륙에서 지원을 오신 겁니까?”
마를레나가 말을 하지 않자, 잿빛 마족은 혹시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몸짓으로 그녀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이리 오시지요. 연합군 막사로 모시겠습니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마족은 그녀의 뒤에 있는 영물들과 동물들을 둘러보며 몸짓과 함께 말을 덧붙였다.
“동료분들은 잠시 떨어져 있어도 괜찮겠지요?”
“아…….”
마를레나는 황급히 푸른 뿔 사슴을 불렀다.
“얘는 함께 가야 해요.”
아킬라어를 구사하는 그녀에 마족은 입을 벌렸다.
“아……! 예. 그러시지요.”
마족은, 그녀가 아킬라어를 알아들을 줄 알았음에도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를 막사로 안내했다.
* * *
우리는 버마 대륙에 있는 다섯 개의 대륙 간 이동소 중 가장 가까운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꽤나 큰 규모의 드래곤 무리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한바탕 전쟁을 치렀는지 도시가 온전치 못했고, 굉장히 어수선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레이라크의 부탁에 바로 대륙 간 이동 마법을 준비해 줬다. 아킬라 대륙이 꽤나 먼 거리라 일곱 드래곤이 힘을 합쳐야 하는데도 흔쾌히 준비했다.
[무운을 빈다.]
말속에서 그의 진심 어린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드래곤 특유의 마나 친화력 덕에 그의 마음이 제대로 전해져 왔다.
그도 느낀 것이다. 그 불길한 기운을. 오래 살았기에 느끼는 촉도 있을 것이고, 그것이 고스란히 걱정이 되어 내게 전해졌다.
[고맙다. 다음엔 만날 땐 네 호의에 보답하마.]
일부러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걱정하지 말라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입꼬리가 내려갔고, 드래곤들의 주문이 이어졌다. 강력한 마법이 우리 모두를 강력하게 결속시켰고, 기이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이내 온 세상이 빛으로 뒤덮었다.
* * *
눅눅한 습도 있는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고, 이내 시야가 돌아왔다. 이후 펼쳐진 풍경은 익숙한 것들이었다.
모든 것이 파괴되어 있는 폐허. 이전과 다르게 마법 이동소의 지대가 높지 않아 도시 전체를 볼 순 없었지만, 이동소의 상태를 보건데, 완전한 파괴가 이루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도 말을 먼저 꺼내는 이는 없었다. 이곳이 내가 그토록 가고자 했던 아킬라 대륙이었으니까.
“맞게… 온 거겠죠?”
스레인의 물음에 나는 발밑을 내려다봤다. 조금 훼손되었지만, 대충 봐도 익숙한 문양이 커다랗게 원형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맞아.”
아킬라 대륙의 문양이었다.
“움직이자.”
먼저 근처에 유일하게 멀쩡한 3층 건물의 옥상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주변의 처참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는데, 정말 버마 대륙에서 봤던 그 도시만큼이나 처참했다.
폭격이라도 맞은 듯 성한 건물이 없었고, 높이 솟았던 것 같은 탑은 그 하단만이 탑이 있었노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3층 건물 옥상에서 도시의 대부분이 보이다니…….
아킬라 대륙의 건물들은 도시급으로 가면 보통이 2~3층 이상이기에, 언덕이 아닌 이상 3층 옥상에서 이렇게 도시의 대부분이 훤히 보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 이렇게 대부분이 훤히 보인다는 것은 대부분의 건물들이 부서졌다는 얘기였다.
“저기 저건 대체 뭔가?”
로아이스가 손으로 가리킨 곳은 멀리 안개가 둘러싸인 협곡 쪽이었다. 이른 아침의 안개가 둘러싸인 거대한 산맥. 그 산과 산 사이에 무언가 거대한 것이 똬리를 틀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회오리……?”
아무리 봐도 안개 너머에서 땅과 하늘이 연결된 그것은 회오리였다. 그것도…….
검은 회오리……!
대륙을 잠식시킨다는 그것. 대륙 간 통신에서 들었던 그것이 바로 저것을 말하는 듯했다.
단순히 놈들이 지나가서 남은 죽음의 기운인 줄 알았더니…….
사실 오자마자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진하게 남아 있는 죽음의 기운. 그 불길한 기운이 그저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저 회오리에서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만일, 바르 놈이 했던 그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준비가 저것이라면, 전 마계를 뒤져서라도 모두 없애야 된다.
“일단 저쪽으로 가 보자. 뭔지 알아야겠어.”
움직이면서도 생존자를 찾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의무적으로 찾는 생존자였는데, 의외로 생존자를 한 명 찾을 수 있었다.
“발견 당시부터 계속 이 상태입니다.”
생존자를 찾은 것은 알리. 그는 충격이 너무 커서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인 것 같다고 얘기했다. 왜냐하면 생존자가 그저 입을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좀 이상한 것은, 그녀는 그 어떤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전쟁터 한복판에 있었던 듯 이곳저곳에 상처투성이였으며, 피딱지가 곳곳에 눌어붙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로아이스와 스레인도 의아한 얼굴들이었다.
“기억을 들여다봐야겠다.”
완성된 마법에 오른손을 그녀의 정수리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천천히 기억을 읽어 들였다.
이웃들이 괴물들에게 잡혀서 찢겨지고, 내장과 피가 비처럼 쏟아지는 끔찍한 장면들. 이 기억의 주인은 그 장면에 다리가 풀려 일어서지 못하다가 운 좋게 어떤 건물의 지하에 숨게 된다.
그러나 귀신같이 찾아낸 두 발로 걷는 검은 괴수가 건물을 부수고 지하를 열어 그녀를 잡아냈고, 그녀는 머리채를 잡혀서는 질질 끌려갔다.
한참을 끌려가서 도착한 곳은, 인간으로 추정되는 어떤 존재의 앞이었다. 그것은 거적때기 같은 것을 걸치고 후드를 눌러쓰고 있었는데, 그 존재와 마주하자마자 그녀는 대소변을 지리며 주저앉아 버렸다.
후드를 눌러쓴 존재는 그런 그녀에게 다가와서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공포를 전해라. 이곳에 오는 모든 것들에게.”
그놈은 콩이나, 검은 뿔을 한 녀석과는 완전히 다른 중압감을 가진 놈이었다. 그놈은 그 말을 마치고는 일어나 무리를 이끌고 사라졌고,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을 있었다.
“뭔가 찾으셨습니까?”
내가 눈을 뜨자마자 알리가 물어왔다.
“놈이 일부러 이 여자를 살려 두고 갔어.”
“예?”
로아이스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고, 스레인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혹시나 이다음에 이 도시를 찾아올 누군가에게 공포를 전하라고 살려 둔 거야.”
알리는 눈만 껌뻑일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다른 놈이다. 이전의 놈들과는 분위기부터가 완전히 달라. 이전과는 다른 싸움을 해야 할지도 몰라.”
내 분위기를 알아챈 것인지. 셋 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로아이스도 내 말을 무겁게 받아들인 듯했다.
“일단은, 저것을 없애야겠다.”
내 시선의 끝에는 안개 너머에 보이는 검은 회오리바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