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놈이 없었다. 첫 번째 도시 생존자의 기억에서 보았던 그놈이 이곳에 없었다. 그래도 꽤나 강한 놈이 무리를 이끌고 있었는데, 확실히 검은 뿔이나 콩이 데리고 다니던 놈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조금 보태자면 콩과 비슷한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놈이 이끄는 군대는, 하나하나 훈련된 듯 무기를 다룰 줄 알고, 전투술에 능했다. 그런 놈들이 계속 재생하고 부활을 반복하니 다들 피로도가 쌓여 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뎌진 전투 감각의 날을 세워 줄 중요한 전투이기도 했다. 앞으로 더 많은 적과 싸우고, 더 강한 놈들과 싸우게 될 텐데, 그때 쓰여질 중요한 경험이 될 테니까.
“꽤 많이 살렸군.”
생존자들이 꽤나 많았다. 모두 다 얼빠진 얼굴들이었는데, 그중 몇몇이 아직 제정신이 있는 눈빛이라 그들에게 물었다.
“이곳이 어디쯤이지?”
내 질문을 받은 한 남자가 마른입을 달싹거리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이곳은… ‘부화크라’입니다.”
“부화크라? 캉구르 연합인가?”
“남부 혈맹입니다.”
“남부… 혈맹?”
너무 멀다. 이곳에서 서부까지 가기엔.
“알았다. 이 남부 상황을 좀 아는가?”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옆 사람들을 둘러보자 다들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
속이 타들어 갔다.
“겐디아 산맥은 어디 있지?”
남부 혈맹의 영역. 대륙 간 통신에서 녀석은 자신이 있는 곳이 겐디아 산맥의 깊숙한 곳이라 했다. 그렇다는 것은.
“아… 겐디아 산맥이라면, 이곳에서 좀 가야 합니다. 이 옆에 흐르는 작은 냇물을 따라가시다 보면 큰 강을 만나실 겁니다. 그 강을 따라 쭉 내려가시다 보면 강 너머 산줄기가 끝나가는 부분이 옵니다. 그 부분에서 왼쪽을 보시면 큰 산이 보이실 건데, 그곳이 겐디아 산맥의 시작점입니다.”
꽤 자세한 설명이었다. 딴 생각을 했다면 놓칠 만큼.
“고맙다.”
“아… 예, 저야말로…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자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빨리 움직였다.
“바로 가자.”
“저……!”
남자가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누구신지 성함이라도 알려 주시면… 저희 생명의 은인이신데 이름도 모르는 것은…….”
“신시우.”
“아… 신시우. 예… 잊지 않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바로 자리를 떴다.
* * *
“신시우…….”
‘분명 어디서 들어봤던 이름인데…….’
붉은 피부를 가진 하위 마족 남자는, 생명의 은인이 알려 주고 간 이름을 곱씹어 봤다. 어딘가에서 분명 들어본 이름. 그러나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혹시… 대제행에 성공했다고 하셨던 그분이 아닙니까?”
한 젊은 마족이 나섰다.
“아……! 그래! 맞아……!”
그제야 남자도 손바닥을 쳤다.
“분명 칠대제가 되셨다고 들었는데…….”
“아킬라 대륙을 구하러 와 주신 게 틀림이 없습니다.”
“오…….”
살아남은 사람들은 저마다 탄성을 터트리며 희망적인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들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칠대제인 신시우를 도와 달라고. 그가 이 절망에 빠진 대륙을 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 * *
굽이치는 냇물을 따라 좁은 길을 달렸다. 주변이 흐릿해질 정도의 빠르기로 달렸지만, 금방 강이 보이진 않았다.
꽤나 내려갔을 때 남자의 말대로 큰 강이 나왔고, 우리는 큰 강을 따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길이 넓어지며, 강 너머의 산맥이 끊기는 지점에 도달했다.
“저쪽이군.”
왼쪽을 보니 멀리 거대한 산이 보였다. 굉장히 규모도 크고, 높아 보였다. 우리는 다시 방향을 틀어 그곳으로 달렸다.
희미해 보이는 산은 정말 꽤나 멀었다. 평원과 산맥의 경계선을 달렸는데, 멀찍이 떨어진 평원 쪽에 뭔가 지나간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꽤 많아 보입니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기에, 스레인이 전음을 전해 왔다.
[속도를 더 높이자.]
더욱 속도를 높였고, 산맥의 끝자락에 도달할 수 있었다.
“완전히 쓸려나갔군.”
처참한 도시의 풍경에 로아이스가 혀를 찼다. 정말로 제대로 서 있는 구조물이 없을 정도로 박살이 나 있었다.
“큰놈들이 많군요.”
거대한 발자국들이 많았다. 이전에 도시에서 마주쳤던 거인 괴수들과는 또 달랐다. 더 컸다.
“가자.”
다시 움직였다. 생존자를 찾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산맥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무 위를 날듯이 이동했다. 알리는 비행 마법을 이용해 쫓아왔고, 나머지는 나와 비슷하게 이동했다.
놈들의 흔적은 숲을 파괴하고 산골짜기를 따라 쭉 이어져 있었다. 멀리 희미하게 공기가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전투 중이다……!
고리를 열두 개까지 공명시킨 후 단거리 이동마법 블링크를 섞어 쓰며 빠르게 치고 나갔다.
[먼저 가마.]
굽이치는 골짜기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강력한 힘의 충돌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윽고 멀리 검은 힘과 붉은 힘이 뒤섞여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녀석이 있는 곳인가?
불룹. 자신을 구하지 말고 다른 이들을 구하라고 했던 자. 대륙 간 통신소의 관리자로 추정되는 인물. 그가 싸우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곧 그 궁금증은 풀어졌다.
* * *
“당했습니다.”
불룹은 보고를 받자마자 처연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사방에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냥이다.’
아킬라 대륙의 남부에 위치한 대륙 간 통신소. 그곳의 책임자로 있는 불룹은 적이 골짜기로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통신소를 지키고 있던 경비대장을 포함한 경비대원과 직원들을 모두 대피할 것을 명했다.
자신은 끝까지 이곳을 지키며, 타 대륙에 아킬라 대륙의 상황을 알리고, 중요한 연락이 오면 받기 위해 남기로 했다.
그런데 대피를 했던 이들이 모두 전멸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놈들이 사방에서 포위하듯 둘러싸고 들어오고 있었다. 마치 몰이사냥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름 전술을 구 한다 이건가.’
그는 그저 지성 없는 시커먼 놈들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머리 위에서 놀고 있었다.
“전 인원 전투 준비. 결사항전이다.”
통신소에는 불룹과 함께 남겠다고 한 이들이 열 명이 있었다. 넷이 기사였고, 여섯이 마법사였다.
통신소는 꽤 요충지이기 때문에 인력들 하나하나가 어디 가서 힘깨나 쓴다는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전투태세를 갖추니 그럴듯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그 사람이 와 줄까?’
적들이 경사지를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며 불룹은 문득 얼마 전 통신했던 이를 떠올렸다. 자신을 아킬라 대륙의 전 육황이자 칠대제 신시우라 소개했던 존재.
대륙의 4분의 1을 영토로 하는 거대한 제국의 황제였던 이. 이후 육황에 올랐던 존재. 그와는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였기에 그저 사진으로 한번 그의 얼굴을 본 뒤로는 잊어버렸었다. 하여 신시우를 마주하고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낼 수가 없었다.
그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을까? 그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의 입으로 한 말만 듣고 덥석 믿고 희망을 품다니. 어리석다 생각했다.
“옵니다.”
“마법 전개.”
“마법 전개!”
스르릉-
기사 넷은 검을 빼 들고, 기력을 불어넣었고, 전신의 근육을 팽창시켰다. 이어서 마법사들의 마법이 건물의 사방으로 펼쳐졌고, 기사들은 다가오는 검은 괴수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거적때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 피부색은 생명체 같지 않은 유광 흑색. 이족보행 하며, 자신들의 몸과 같은 색의 무기를 든 놈들은, 붉은 안광을 흘리며 기사들과 부딪혔다.
기사들을 공격하는 놈들은 마법사들이 엄호를 해 줬고, 건물로 돌진하는 것들은 불룹이 상위 마법으로 모두 녹여버렸다.
기사들이 건물의 입구 쪽에 모여 있었기에, 불룹이 화력이 부족한 건물의 나머지 세 면을 모두 도와줘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산의 비탈 쪽에서 쏘아 대는 저격수 때문에 건물의 지붕에서 공격하는 마법사들이 자유롭게 싸우지 못했다.
그리고 이미 벽을 뚫고 건물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이미 제대로 방어를 하기엔 글러먹은 상황. 얼마 버티는 것도 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었기에 싸울 뿐이었다.
‘이제 끝이군.’
계속해서 마법을 사용하며 그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나 감을 느꼈다.
“컥!”
멀리서 쏴대는 저격 화살에 한 마법사가 당했고, 황급히 불룹이 그곳으로 가 보았으나, 일반 화살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투박하고 굵은 화살에 가슴팍을 꿰뚫려 가망이 없었다.
순식간에 절명한 동료의 눈꺼풀을 내려주고, 그는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가 멀리 산비탈 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적장이 나타났고, 불룹은 순식간에 그와 치열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순식간에 그의 눈앞에 나타나 단검을 휘두르는 놈을 보고, 불룹은 단번에 그가 이 군대를 이끄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여타 다른 놈들과는 달랐다. 하여 불룹은 자신의 아티팩트인 오브를 과부화시키며, 더욱 강력한 마력으로 방어 마법과 공격 마법을 동시에 시전하기 시작했다.
치열한 접전에 건물 지붕 곳곳이 무너져 내렸고, 이내 건물을 이탈해 공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헉… 헉…….”
너무 힘을 사용한 나머지, 마력 탈진 상태가 온 그는 이제 마지막임을 깨달았다. 상대는 강했고, 처음부터 그를 죽이려 생각지 않고 가지고 노는 듯하게 단검을 휘둘렀다.
그런 상대의 의도를 생각하며, 이제 그만 끝을 내자. 라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무언가 강력한 마력의 파동을 느끼고 불룹은 시선을 멀리 뻗었다. 그리곤 산골짜기 비탈의 숲 위로 무언가가 빠르게 이동해 오는 것을 느꼈다.
‘설마…….’
이상하게 또 그 백발의 존재가 떠올랐다. 이 세계에서는 본 적 없는 희귀한 종족. 신시우라는 존재를. 그리고 그의 촉은 맞아떨어졌다. 순식간에 그의 눈앞에 나타난 존재는 마법 통신기기 너머의 그 존재였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그와 싸우던 상대의 머리통을 가볍게 날려버리며 그에게 건넨 말이었다.
“대제… 폐하를 뵙습니다.”
불룹은 칠대제를 마주했을 때 어떻게 예를 갖춰야 하는지 모른다. 그저, 자신이 아는 최대한의 예를 그에게 갖출 뿐이었다.
“이놈들 정리하고 나면 건물 보수하고, 그라가레와 통신해서 ‘바라멜리아’를 찾아.”
불룹의 눈이 번쩍 떠졌다.
“천공섬… 그라가레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금 이 사태는 나 혼자서 어떻게 해서 될 게 아냐. 지금 이곳이 세 번째 대륙이지만, 더 많은 대륙들이 침공당하고 있고, 얼마나 강한 놈들이 있는지 몰라.”
그때 저격수가 쏜 화살이 그에게 날아들었고, 마치 원래 있었던 듯 그 자리에 생겨난 마나 실드에 튕겨져 나갔다.
“아… 알겠습니다.”
“그래. 여긴 내가 순식간에 정리할 거니까.”
그는 마치 부활할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금세 머리통을 복구한 적장의 머리와 팔다리를 다시 날려 버렸다.
그에게 그것은 아주 손쉬워 보였고, 불룹은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붙였던 그 존재를 떠올리며 신시우의 강함에 경외심을 느꼈다. 그러고는 옥상에서 살아남은 마법사 둘을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