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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신시우의 분노가 일대의 모든 마나를, 더 나아가 산맥 전체와 공중의 모든 마나를 잠식해 갔다.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마나들은 신시우의 분노를 품은 채 마치 공격명령을 기다리는 정예군처럼 로브의 남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질리는군.’
온 세상이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를 마친 느낌. 전신에서 금빛을 내뿜는 남자를 상대하려면 온 세상을 상대해야 한다, 라는 압박감이 그의 전신을 짓눌렀다.
“제법이잖아 너. 그래. 너 정도 격이 되어야 싸울 맛이 나지.”
십이사신 중 서열 5위 ‘멜랑’은 로브를 벗어 던졌다. 그러자 알 수 없는 문신이 새겨진 상체가 드러났다.
“멜랑이다. 넌 이름이 뭐냐?”
“신시우다.”
신시우의 목소리가 마치 신의 그것처럼 주변을 울렸다.
“좋아. 내가 전력으로 상대하는 걸 고맙게 생각해라.”
“뭐, 하나만 물어보자.”
“뭐든.”
멜랑은 여전히 여유 있는 눈빛으로 신시우를 응시했다.
“네 그 피부색은 누굴 바탕으로 만들어 낸 거지?”
* * *
바르의 개. 십이사신 중 하나인 멜랑. 그는 지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다른 차원에도 비슷한 인종이 분명히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대체 이놈이 뭘 보고 황색 피부와 검은 머리칼을 하고 있는지.
“비교적 최근 일이긴 한데, 이 모습을 한 놈이 바르 님에게 덤빈 적이 있었다. 네놈과 같은 피부색을 가졌지. 머리색만 빼면 네놈과 비슷한 생김새였어. 그놈은 상상을 초월하는 무력을 가지고 있었고, 십이사신들이 많이 죽어났다. 그리고 바르 님과 정면 대결을 펼쳤고, 치명상을 입히게 되지.”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런데 말이야. 바르 님에게 덤빈 놈은 어떻게 됐게?”
대답 대신 그저 가만히 놈을 응시했다.
“소멸했다. 상처 좀 입히고 말이지.”
“확실히 우리 인간이 강하단 말이야. 흰 날개 달린 악마 놈들도 줄행랑을 쳤던 그 바르 놈에게 치명상도 입히고.”
“맘껏 떠들어라. 마지막이 될 테니까.”
피식 웃었다.
“어. 그래. 바르 개새끼. 바르 시발놈. 바르 개쓰레기. 그 쓰레기 밑에 있는 네놈들은 재활용도 되지 않는 폐기물. 오물들.”
순간 놈이 검은 연기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내게 손끝을 찌르고 들어왔다.
“워워. 너무 화가 나 버렸군?”
반사적으로 만들어진 금빛 손이 놈의 찌르기를 붙잡고 있었는데, 벌벌 떨리는 것이 놈의 힘이 굉장하다는 것을 말해 줬다.
“주둥이 놀리게 내버려 뒀더니. 선을 넘는구나.”
“어떤 게 선을 넘었을까? 바르 개새끼? 아님 네놈들을 오물이라 한 거?”
녀석은 피식피식 웃더니 욕지거리를 시부렁거렸다. 그러고는 손을 회수하더니 멀찍이 떨어졌다.
“X만 한 새끼가 아주 신이 났구나. 그래. 어디 언제까지 그렇게 주둥이를 나불거릴 수 있는지 보자.”
놈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짙은 그것은 순식간에 금빛으로 반짝이는 마나를 잠식하더니 일대를 모조리 집어삼키려 했다. 그러나 그런 얕은 수작은 내게 통하지 않았다.
고농도의 금빛 마나가 나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며 검은 연기를 밀어 냈고, 역으로 놈을 내 영역 안으로 들이려 했으나 놈이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놈이 거리를 벌리며 손을 한 번 휘젓자 일대의 나무들이 모조리 뽑혀서 멀리 날아갔다. 그러곤 땅이 갈아엎어지더니,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전장이 만들어졌다.
놈이 오른손을 사선으로 뻗자 손에 진한 검은 기운이 맺히더니, 검 형태로 변해 그의 손에 쥐어졌다. 이윽고 검은 힘이 그의 검에서 타올랐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놈이 나타난 곳은 내 오른쪽. 우측면 전부를 노리고 수십 개의 검격이 쇄도했다. 실로 놀라운 속도의 쾌검. 마치 육황 중에서도 강한 자를 상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사선을 넘나드는 느낌은 없었다. 이미 내 격이 그런 수준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수도 없이 빗발치는 날카로운 겸 격을, 공격이 들어오는 곳마다 금빛 마나 실드가 만들어져 막아 냈다.
그것은 무의식에서 치러지는 방어전이었다. 놈의 검격의 속도는 보통의 인지를 벗어난 수준이었다. 반사적으로도 막아 내기가 힘든 속도. 자연스레 무의식이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놈의 공격을 따라 동그란 금빛 실드가 허공을 수놓았다. 놈의 공격은 금빛 실드를 뚫어 내지 못했고, 나는 잠시 지켜보았다. 놈이 어떻게 나오려는지. 그러던 어느 순간. 놈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위험할 정도로 응축되더니, 이내 내게 쏘아졌다.
“…….”
실드를 뚫고 들어와 내 가슴께까지 전진했지만, 내게 닿진 못하고 멈췄다. 계속해서 겹겹이 생겨난 실드들에 결국 속도를 잃은 탓이다.
“맘에 드는 공격이었어.”
내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놈을 보며 씨익 비웃어 줬다. 놈이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놈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는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면 놈은 단번에 육신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십이사신이라는 놈들이 어느 정도로 강한지. 어디까지 바르의 힘을 불러낼 수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버마 대륙에서 만났던 바라멜리아의 힘을 가늠해 본 것을 기준으로 하면, 아직까지는 칠대제들의 선에서 정리될 정도.
문제가 있다면, 아직 남아 있는 아홉의 십이사신들과 언제 강림할지 모르는 바르라는 놈이다.
놈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지더니, 찌르던 그 자세 그대로 힘을 올리기 시작했다. 놈의 기세에 마나들이 떨려 왔고, 놈의 전신에서 뿜어진 짙은 검은 기운에 놈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물감이 물에 풀어지듯, 놈의 검은 기운의 여운은 계속해서 뿜어져 나와 허공으로 흩어졌다.
미친 듯이 뿜어지는 검은 기운 사이로 보이는 놈의 눈동자는 전체가 시커멓게 물들어, 기이한 느낌을 줬다. 번뜩이는 시커먼 눈동자. 마치, 괴기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 느낌은 한국인 같은 외모 덕에 더했다.
“끝내 주마.”
목소리도 이상하게 뒤틀렸다.
그저 힘을 끌어올리는 것이 끝인가?
궁금해 가만히 보고 있었다. 지근거리에서 놈의 변화를 세밀하게 관찰했다. 놈의 등 뒤에 거대한 구체가 두 개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석유라도 뒤집어쓴 듯 새까맸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공격이 시작됐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두 개의 검은 구체가 내 앞에 펼쳐진 금빛 마나 실드와 부딪혔고, 점점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잠식……?
확실히 무언가 이전과는 달라졌다.
“넌 바르에게 받은 권능이 뭐지?”
“크큭… 이봐. 그런 걸 물어볼 여유가 있으신가?”
광기에 물들어 기괴한 느낌을 뿜어 내는 놈의 얼굴. 이전의 놈들과 비슷했다. 마치, 광인이 된 듯한 느낌.
광폭화 같은 건가?
“어. 당연히 있지.”
손을 한번 휘저었다. 그러자 강력한 금빛 섬광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고, 두 개의 검은 구체는 멀리 날아갔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초압축 마나 구체. 이전의 것과 다를 바 없었지만, 위력이 비할 바 없이 올라갔다. 이것이 한 단계 한 단계 마력 고리를 늘릴 때마다 일어나는 변화 중 하나다.
“이……!”
진득한 검은 기운으로 휘감긴 놈의 두 팔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다시금 놈은 금빛 마나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과 다르게 놈의 검은 힘은 금빛 마나 실드를 잠식했고, 그렇게 마나 실드를 없앤 놈은 계속해서 조금씩 밀고 들어왔다.
이놈의 권능은 잠식인가.
더 볼 게 없다면 끝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금빛 마나가 전신을 휘감으며 강화 및 가속을 하기 시작했다. 강화는 순식간에 끝났고, 눈 깜짝할 새에 나는 놈의 모가지를 틀어쥐고 높은 상공으로 올라갔다.
“야, 엄청 높이도 올라왔다. 그치?”
높게 솟은 먹구름 위로 올라갔으니, 굉장히 높은 상공까지 올라온 것이었다. 이렇게 먼 거리를 마법 없이 이런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니. 정말 이 고리 열세 개의 경지는 경험할수록 놀라웠다.
놈의 얼굴은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놈의 모가지를 틀어쥔 다음부터, 내 힘이 놈의 검은 힘을 압도하고 있다는 것에 경악을 하는 것인지, 먹구름 위에 보이는 맑은 하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퍽.
순식간에 놈의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압도적인 힘으로 대륙민들을 농락한 것치고는 너무나 허무한 결말. 그렇게 놈을 계속 죽이며, 이전의 놈들처럼 소멸 단계를 밟아 갔다.
“…….”
놈이 완전히 소멸되고 나자, 가슴 한구석이 빈 듯 허망한 느낌이 온몸을 지배했다. 놈들이 앗아간 수많은 생명들. 수많은 마을과 도시, 나라들.
그리고 지금도 파괴되고 죽어 가고 있을 다른 대륙을 생각하니, 잔잔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놈들은 마계에서 끝을 본다.
다른 차원으로 보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의 싸움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 초차원 마신계를 쳐들어가서 도움을 구하는 한이 있더라도 마계에서 모든 것들을 소멸시키고, 가능하다면 바르 놈까지 없애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먼 훗날 다시 이놈들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지상은 아직도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자리에 없는 마를레나를 찾기 위해 마나 필드를 펼쳐 보니, 멀리서 사람들과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를레나. 드디어 세상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되었구나.
마를레나가 편하게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게 세상을 바꿔 주겠다고 다짐했던 때가 떠올랐다. 지금 저 모습이 그것의 첫 발걸음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다 불쑥 수현이가 떠올랐다. 수현이를 보낸 지 수개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을 했지만, 너무나 괴로운 시간이었다.
종종 수현이에 대한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죄책감이 밀려오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밀려와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후우…….”
수도 없이 마음속으로 사과를 했지만, 해소되지 않는 죄책감. 끝까지 가져가야 할 것을 알지만, 무거운 마음은 도저히 가시질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
그런 막연한 질문을 던진 나는, 스레인과 알리, 로아이스를 찾았다.
* * *
남은 검은 군대의 소탕이 꽤나 시간이 걸렸다. 이전의 검은 것들보다 질이 월등히 높은 까닭이었다.
모든 전투가 끝난 뒤 도망치던 캉구르 연합군과 피난 가던 시민들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그들은 우리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마를레나.”
“시우 씨……! 그동안 잘 지냈어요?”
온갖 감정이 들어 있는 마를레나의 눈이 내 얼굴을 살폈다.
“응. 마를레나는?”
“시우 씨가 돌아와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죠.”
지저분해진 얼굴로 방긋 웃는 것이 예뻤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
“아니에요. 다시 보게 된 것만 해도 감사한걸요.”
마를레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치를 보던 알리가 끼어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얼마 전부터 시우 님의 조수로 활동하고 있는 알리라고 합니다.”
“조수였었냐?”
“아, 뭐라 소개할까 하다가, 조수가 좋겠다 싶어서요. 마법사들은 다 조수 하나씩 데리고 다니잖아요?”
녀석의 재치에 나는 고개를 저었고, 마를레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전 마를레나라고 해요. 반가워요.”
전보다 밝아진 모습에 내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빨리 정리하고 움직여야 돼. 나머지 대륙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놈들을 소탕해야지.”
“예.”
마를레나의 얼굴에 결의가 맺혔다.
“도울게요.”
고개를 끄덕였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