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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즉위식 날 균열을 만났다-80화 (80/100)

80

제국 ‘크로하’. 크로하라는 이름은, 크로하가 왕국일 때부터 개국공신이었던 ‘하마디아’가 제안한 이름이다.

하마디아는 마계에 존재하는 내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난데, 수십 년간 나와 발을 맞춰 준 믿을 수 있는 친구다.

그런 그를, 지금 나는 찾으러 간다.

제국이 괴멸되었다는데 무슨 친구 타령이냐고? 그 녀석은 대륙이 멸망해도 살아남을 놈이니까. 내가 준 아티팩트를 버리지만 않았으면, 이 제국이 괴멸 위기여도 분명 녀석은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심심풀이로 만든 아티팩트인데, 심심풀이치고는 그 성능이 마계 전체에 내놓아도 될 정도로 고성능이다.

아티팩트를 발동시키면 2가지 결계가 쳐지고, 3겹의 실드가 둘러쳐진다. 내 어릴 때 쓰던 말인, ‘우주 방어’라는 말이 절로 어울릴 만큼 최강의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

육황이 마음먹고 두들겨도 쉽게 부서지지 않을 만큼 튼튼하게 만들었으니까.

총 다섯으로 늘어난 나의 일행들은, 공간이동 마법을 이용해 제국의 대도시 ‘루몬’으로 이동했고, 또다시 익숙한 풍경을 맞이했다.

루몬은 나도 잘 아는 대도시로, 제국의 북부에 위치한 화려한 건축물이 많은 도시였다. 10층급 이상의 큰 규모의 건물들이 많았고, 제국 북부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였다. 그러나 우리가 도착한 곳에 화려한 도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파괴되어 있는 풍경. 그에 걸맞지 않게, 날씨가 너무 화창했다. 따사로운 햇빛에 눈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새록새록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처음 황제가 되고 이곳을 방문했을 때.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날 반겼던 것이 떠올랐다. 그들이 모두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반드시 이곳에서 끝을 본다.

다시 한번 이를 악물었다.

마법 이동소의 파괴된 석판 위에서 내려와 무너진 담벼락 사이로 보이는 파괴된 도시로 들어갔다.

곳곳에 널린 시체들은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난 듯, 시체들은 부패하여 역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 끔찍한 모습들에 거부감을 강하게 느낀 마를레나의 감정이 마나를 타고 전해져 왔다. 그런 마를레나의 손을 말없이 잡아 줬다.

미간을 찌푸린 마를레나와 눈이 마주쳤고, 믿음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으흠.”

우리를 의식한 로아이스가 헛기침을 했고, 우리는 다시 눈을 맞추고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시금 난장판이 된 도시를 빠져나갔다.

이번에는 생존자가 하나도 없었다. 하여 나는, 제국의 수도가 있는 제국의 동부를 향해 방향을 잡았다.

북쪽이 어딘지 알았기에 방향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전과 같이 공간이동 마법으로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검은 군대를 만나 모조리 소멸시켰고, 다시 이동하길 거듭했다. 그리고 생존자가 있는 도시를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 있는 생존자는, 멜랑이 일부러 살려 둔 생존자였다. 역시나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고, 나는 그 생존자를 데리고 이동했다.

차마 내가 다스리던 나라의 국민이 저런 꼴로 죽어가는 것을 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왠지 남부에서 봤던 생존자에게 미안해졌다.

“조금만 더 가면 수도다.”

제국 크로하의 수도 ‘쥬센’. 그 거대한 도시를 머릿속으로 그려 봤다. 거대한 평원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도시. 서울? 내 생각엔 쥬센이 더 크다.

게다가 마법 건축학이 뛰어나 고층 건물을 올리는 데에 마법이 많이 사용되어, 건물들을 딱 보면 마법에 대한 느낌이 물씬 풍긴다. 흔히들 판타지 세계라고 그려 놓은 것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아킬라 대륙에선 정말 특별한 곳 중 하나. 그런 곳도 초토화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또 한 번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곧이어 우리는 수도 쥬센에 도착할 수 있었고, 3층 이상의 건물이 남아 있지 않은 거대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를레나. 도시에 생존자가 있는지 좀 찾아봐 줘.”

“네.”

내 긴 한숨 소리가 바람 소리를 뚫고 나갔다.

“누군가 도시를 거닐고 있어요.”

“음……?”

말이 어딘가 이상했다.

“거닐어?”

“네.”

마를레나와 눈이 마주쳤다.

“마족… 같은데, 좀 이상해요.”

“어떤 게?”

“주변의 마나를 모두 밀어내며 걸어 다니고 있어요.”

마를레나가 그렇게 느꼈다면 맞는 것이다. 다만, 대체 그게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마나를 밀어내며 다니다니.

“일단 가 보자.”

도시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그’와 마주할 수 있었다. 도시로 들어가면서부터 느꼈다. 이 세계에 존재해선 안 되는 존재가 이 도시 안에 있다고,

마를레나가 말했던, 마나를 밀어내면서 다닌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마나가 거부하고 있었다.

그의 걸음도 멈췄고, 우리의 걸음도 멈췄다. 그리고 일대에 기이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폭발할 것 같은 긴장감도 아니었고, 두려움이나 위압감에서 오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그의 아무렇지 않은 시선에서 기인한 이상한 긴장감.

그리고 그의 입에서 아킬라어가 튀어나왔다.

“너희들은 무엇이지?”

보랏빛의 긴 머리칼, 이마에 난 두 개의 백색 뿔과 백색의 피부. 그리고 고고한 목소리가 만나 고귀함을 만들어 냈다. 귀족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저 존재의 마성인가.

“생존자는 아닌 것 같은데.”

“저는 아킬라 대륙의 전 육황입니다. 대륙을 구하러 급하게 왔습니다. 오다가 다른 대륙도 구했고요.”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미지의 힘. 내가 가늠할 수 없는, 그러니까. 강해서라기보다는, 미지의 세계에 있는 듯 멀게 느껴지는 힘이었다.

“호오… 네가 이 대륙의 전 육황이라고?”

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습니다만. 누구십니까?”

“하하하하! 오랜만에 웃게 만들어 주는구나. 감히 내게 누구냐고 묻는 자는 실로 오랜만이야.”

그의 옆에 있는 난쟁이의 기세가 날카롭게 피어올랐다. 마치 맹수의 그것같이, 나를 뜯어먹기라도 할 듯했다. 그러나 입을 열진 않았다.

불쾌한 내 눈매가 살짝 좁아졌고, 그걸 포착한 보랏빛 머리칼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아킬라 대륙의 첫 육황. ‘아덴’이다.”

내 눈이 커졌다. 아덴. 어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을까? 너무나 특이한 그의 인상착의. 그것이 모조리 그와 겹쳐지며 내 입이 열렸다.

“그러면… 아킬라 대륙을 넘어 마계 전체에서 처음으로 대제행을 완주했던… 그…….”

“그래.”

그의 존재가 무섭게 다가왔다.

“아덴…….”

“네놈의 하등한 주둥이에 함부로 담을 존함이 아니다.”

난쟁이가 으르렁거렸다. 기세만 보면 나와 대등하게 맞서 싸울 수 있을 만큼 용맹한 기세였다.

“아서라. 네놈이 상대할 만한 자가 아니다.”

날 꿰뚫어 본 아덴이 난쟁이를 말렸다.

“그래. 들어는 보았나 보구나.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이지.”

조용히 말했지만, 그의 심기는 아주 뒤틀린 듯했다. 하여,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강자에 대한 예우를 갖췄다.

“못 알아봐서 죄송합니다. 아직 실존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 건 됐다. 넌 이 땅을 활보하는 검은 벌레들에 대해 아는 게 있느냐?”

그제야 나는 그의 심기가 왜 뒤틀렸는지 알 것 같았다. 예를 갖추지 않은 나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그 검은 군대 때문에 화가 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들은 생존자인가?

난쟁이의 뒤에 낮게 떠 있는 사람이 둘 보였다.

“그것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들은 아주 강하고, 질기며,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가 다른 차원에서 이곳에 강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배후?”

아덴의 눈매가 좁아졌다.

“예. 제게 사정이 있어서 다른 차원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돌아온 곳이 칼란 대륙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검은 것들에서 정보를 얻기 위해 놈들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려 하자 그 배후와 정신접촉이 되었고, 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악신 바르에게서 느낀 것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다음 접촉에 관해서도, 십이 사신이라는 놈들에 관해서도, 그들이 바르의 힘을 빌려와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했다.

꽤 긴 설명이었음에도 그는 흥미롭다는 듯한 얼굴로 끈덕지게 서서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를 향해 나는 내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혹시, 흰 날개 달린 악마를 아십니까?”

“흰 날개 달린 악마?”

뭔가 아는 듯한 눈치였다.

“예.”

그의 호흡이 달라졌다.

“알지. 내 바로 이전 세대에서 겪었던 일이기에, 뼛속 깊이 새겨지도록 교육받았다.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거지?”

“제가 만났기 때문입니다.”

“뭐?”

그의 표정에 큰 변화가 생겼다. 그의 심경이 요동을 쳤기 때문이리라.

“저는 이계종입니다.”

“알고 있다.”

그는 살짝 날이 선 얼굴로 고고하게 말했다.

“불가항력적인 어떤 힘에 의해 이 세계로 날아왔죠. 그리고 기연을 만나 강해졌습니다. 제가 모르던 재능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발판삼아 육황, 더 나아가 칠대제의 자격을 갖추었죠. 그리고 칠대제 즉위식을 하는 날. 저는 다시 한번 그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결 차분해진 눈빛으로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얀 날개를 가진 악마. 천자족을 만났습니다.”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돌아왔다.

“계속해 보거라.”

“그들은 모종의 이유로 5천 년이라는 긴 세월을 제 고향 세계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을 뒤져 본 결과. 그들은 지금 마계를 침공하고 있는 검은 군대에게 패배하여, 세계는 멸망하고, 종족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아덴은 이전과 같은 차분한 얼굴로 계속 내 이야기에 집중했다.

“검은 군대는 배후에 강력한 악신. 바르라는 놈이 존재합니다. 그 바르라는 놈에게 천자족의 신격체들이 모조리 패배하였고, 절반은 봉인되고, 절반은 소멸하였습니다. 그리고 제 고향에 숨었던 놈은 그 신격체들 중 빛의 신을 섬기는 놈이었는데, 그를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 제 고향에서 오랫동안 영혼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부활시키기 전에 제가 막았죠.”

“어이가 없는 이야기군.”

그의 얼굴은 별 변화가 없었다.

“믿지 못하셔도 좋지만, 사실입니다.”

“알고 있다. 네 녀석이 사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정도는 판가름할 수 있는 통찰을 가지고 있으니 쓸데없는 소리는 접고 핵심만 이야기하거라.”

그의 독촉에 마지막으로 내 의견을 제시했다.

“중요한 것은 악신 바르라는 놈입니다. 놈의 힘은 재앙 그 자체이고, 어느 정도로 높은 격을 가졌는지 짐작조차 불가능합니다.”

그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마계가 왜 힘을 추구하는지, 왜 강자 숭상을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나?”

“모릅니다.”

“다 그놈들 때문이었지. 한번 침공 후 차원으로 뻗어 나갈 길을 잃었으니까. 우리가 만들어 낸 초차원을 제외하고는 어느 차원으로도 건너갈 수도, 올 수도 없이 차원 고립이 되었으니까. 힘이 없다는 것은 그렇게 고립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라는 것을 내 선조들이 처음 느꼈다.”

나도 모르게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고, 그의 말이 진실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강자 숭상의 율법 아래에 마계는 계속해서 강해졌다. 이전에도 강했었지만, 그놈들에게 당하고 나서 더욱 강해졌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는 내 뒤를 한번 슥 둘러보며 얘기를 이어 갔다.

“우리 마계는 절대 지지 않는다. 그 어떤 것들이 오더라도 지지 않아. 너희들이 해내지 못한다면, 초차원계에서 나설 것이다. 그곳에는 이곳이 강림하는 것만으로도 너희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자들이 많다. 나 또한 이렇게 본 모습을 감추고 있기에 너희들이 버틸 수 있는 것이고.”

그는 나를 유심히 쳐다봤다.

“넌 격을 뛰어넘었구나. 요즘엔 격을 넘어야 칠대제가 가능해진 건가?”

대체 아덴의 통찰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의 통찰력을 볼수록 발가벗고 있는 느낌이 들어 숨고 싶어졌다.

“아닙니다. 제가 특별한 유형이죠.”

그는 여유로운 눈빛을 한 채 말했다.

“나는 또 그 정도로 요즘 녀석들이 강해졌나 하고 놀랐는데, 아니었구나. 다른 대륙의 상황은 어떻지?”

“육황도 죽어 나가고, 상황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

“흠… 육황들이 죽어 나가면, 칠대제들은 투입이 되었나?”

“아직 연락이 되질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

“연락이 되질 않아?”

“예.”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화가 난 듯하기도 하고.

“그라가레에 가 봐야겠다. 핀.”

“예.”

“그라가레로 가는 문을 열어라.”

“예.”

“너희들은 이 둘을 받아 보살펴라. 아직 숨은 붙어 있으니까.”

핀이라 불린 난쟁이가 마법을 시전하자 허공에 길쭉한 타원형의 입구가 생겨났고, 둘은 그곳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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