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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대신 하마디아. 그는 크로하 제국의 개국공신이자 가장 인망 높은 인물로, 황제를 제외하면 제국 최고 권력가로 명성을 떨쳤었다.
가문의 가훈을 ‘제국의 힘은 국민이다.’라고 써놨을 정도로 그는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했고, 해냈다.
그런 그가 영지민들을 뒤로하고, 자신과 가문, 가신들만을 살리는 방어벽을 전개한 것은, 그의 사상에 철저히 위배되는 행위였다.
가끔. 정말 냉혹한 판단이 필요한 선택의 시간이 오면, 그는 냉철한 정신으로 판단을 내리곤 했다. 그것이 신시우의 옆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고, 지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자신의 신념에 위배되는 선택이었지만, 그가 판단하기에 모두를 살릴 수 없다고 판단했고, 본가만이라도 지키자는 선택을 한 것이다.
자신의 신념을 꺾어 가며 최후의 수단을 꺼내든 그는, 바깥의 비명 소리와 지축을 울리는 진동을 들으며, 가슴을 졸여야 했다.
대외적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생각보다 겁이 많은 성격이었다. 그는 본가로 들어오기 이전, 성벽 위에서 그 새카만 검은 군대를 보았고, 그것이 손쉽게 성벽을 부수는 것을 목도했다.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그 또한 그 무너지는 성벽에 휩쓸렸을 수도 있었을 위험한 순간이었다. 검은 군대는 묘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공포심이 단단하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호위들에 의해 본가로 끌려가듯 돌아간 그는 서둘러 친우의 선물을 꺼내었다. 그는 도저히 그 검은 군대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피난길에 오르는 대신 친우의 선물. 방어용 아티팩트를 발동시켰다.
아티팩트는 성공적으로 발동되어 본가 전체에 결계가 전개되었고, 그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안고 바깥을 두리번거렸다. 모두 시외로 도망을 쳤는지 본가 앞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지축을 울리는 진동과 비명 소리,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그는 비로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자신의 선택에 대한 무게를 느꼈다.
수많은 영지민들의 죽음을 모른 척하고, 자신의 식솔들만 챙긴 무능하고, 비정한 영주. 그것이 하마디아 자신이라는 것에 비통함과 굴욕감을 느꼈다.
“여보.”
검은 뿔을 지닌 백색 피부의 마족. 하마디아의 부인 ‘나베니아’가 그의 곁에 왔다. 그의 뒷모습에서 무거운 짐을 읽은 까닭이었다.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그건…….”
강한 폭음이 그녀의 말문을 막았다. 본가 정문 앞에 있던 둘은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고, 두려움에 가득한 눈으로 바깥을 살폈다. 그리고 이윽고 그 큰 소리를 낸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커다란 덩치를 지닌 검은 것이 그 자신의 몸의 색깔과 같은 거대한 망치를 들고 불타는 눈빛으로 문틈 너머의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마디아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써 심호흡을 해 봤지만 무리였다. 괴물같이 강한 신시우의 옆에서 그를 보좌했었지만, 이런 공포는 느낀 적이 없었다.
그것은 모두 신시우라는 거대한 산이 그의 편이 되어 옆에 든든하게 서 있어 줬기 때문에 무서울 것이 없었던 탓이었다.
마음속으로 신시우가 나타나길 바랐다. 혹은 그 누가 와서 구해 주길 바랐다. 그의 겁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그것은 그의 두 다리를 마비시켰고, 그의 팔을 잡아끄는 아내의 힘에도 끌려 나오지 않았다.
“여보……! 좀 일어나 봐요! 들어가요, 어서!”
그는 부끄러웠다. 그가 겁이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아내였지만, 그는 부끄러웠다. 언제나 그는 그 점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겁이 많은 자신을.
“알았소……! 조금… 기다려 보시오……!”
애써 휘청거리는 다리로 일어서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 순간 다시 강력한 망치질이 결계를 때렸고, 그는 다시 넘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더 큰놈들이 와서 결계를 사방에서 두드리기 시작했고, 그 충격파가 본가 전체를 흔들기 시작했다.
진한 공포가 본가 전체를 휘감았다. 물론, 하메디아 또한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떠올렸다. 친우가 했던 얘기를.
이게 네 목숨을 한 번은 살려 줄 거야.
“나베니아.”
“네.”
나베니아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 두려움이 엿보였다.
“이 결계는 절대 무너지지 않소. 초대 황제이자 현 칠대제인, 내가 세상에서 가장 믿는 친구가 보증했으니 믿어도 되오. 나는 여길 지키고 있을 테니, 본가로 가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들을 다독여 주시오.”
신시우를 말하는 남편에 잠깐 놀란 나베니아였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남편의 의지도 있었고, 초대 황제 신시우라면 그녀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혹시나 위험…….”
“아니, 절대. 무너지지 않소. 내 보증하리다.”
하메디아는 미간까지 좁혀 가며 얘기했고, 나베니아는 더 말하지 않고 몸을 돌려 본가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선가는 울음소리도 들리는 듯했고, 모두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본가 전체의 분위기가 음울했다.
정원 한가운데에 멈춰선 나베니아는, 마력을 실어 목소리를 내었다.
“본가의 안주인 나베니아입니다. 모두 잘 들으세요.”
그녀의 단단한 목소리는 삽시간에 본가의 분위기를 바꾸기 시작했다.
“이 결계는 초대 황제이자 아킬라 대륙 육황을 거쳐 현 칠대제이신 신시우 님께서 선물하신 아티팩트가 친 결계입니다. 바깥에 있는 정체 모를 저것들이 백날 두드려 봐야 절대 깨지지 않는 단단한 결계입니다. 다들 공포에 사로잡히지 말고,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려 주기 바랍니다. 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분명 있을 것입니다.”
본가에 있는 가신들과 하인들, 잠시 머무르고 있던 그 친인척들과 잠깐 방문했다 발이 묶인 손님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자녀들까지. 모두에게 전하는 말이었다.
그녀의 말에 사람들의 동요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결계가 부서지지 않자 본가를 잠식하고 있던 죽음의 공포도 많이 옅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검은 군대는 물러가지 않고, 끝까지 결계를 공격했다.
안도와 불안감이 교차하는 그때.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와 함께 강력한 번개가 사방을 환하게 밝혔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번개 공격이 결계 주변에 내리꽂혔고, 좌우로 움직이며 검은 병력들을 쓸어냈다.
하마디아는 얼굴을 가린 두 팔 사이로 그 광경을 어렴풋하게나마 보았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에는 커다란 땅덩이가 떠 있었고, 그 위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마디아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들이 난무하던 그때. 그의 눈앞에 환한 빛과 함께 세 사람이 나타났다.
“살아 있었구나 하마디아.”
그중 백발의 남자에게서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너…….”
당황스러움과 반가움이 교차한 하마디아의 입에선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시우야!”
하마디아는 그를 보자마자 달려들어서는, 붙잡고 엉엉 울었다.
“이야… 이 울보 녀석 변한 게 없구나?”
친구의 변함없는 모습에 반가운 웃음을 한껏 머금은 신시우는 하마디아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내 선물을 용케 기억해 냈구나. 잘했어.”
“응…….”
* * *
내무대신 하마디아. 라벤.
외무대신 브라마흐. 제미니.
군무대신 ‘리디안. 세비아나’.
국무대신 카라. 쿤도.
옥새상서 ‘벨라. 로만’.
친위대장 ‘호렐. 반쿠리아’.
크로하 제국을 건국할 때 가장 핵심이 되었던 인물들이자 나와 가장 가까웠던 인물들이다. 개중 친구라고 부를 만한 인물은 하마디아와 리디안 정도가 있는데, 리디안은 성격상 살아남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 일부러 처음에 물어보지 않았다.
수도가 위험에 처하고, 제국의 마지막 전투가 될 수 있는 수도 전투에서, 그는 분명 검은 군대를 막기 위해 영혼까지 불살랐을 것이 뻔했다. 그 녀석은 그런 놈이니까.
혹시나 해서 하마디아에게 가는 길에 히네에게 물어보니, 역시나 전장에서 전사한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고향에 잠시 일이 있어 내려간 벨라 외에는 모두 수도에 있었고, 생존자는 없을 거라 했다.
예상하곤 있었지만, 죽었을 거라는 얘기를 직접 듣자 마음이 묘하게 요동쳤다. 오랜 친구들을 잃는 슬픔이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차가운 전장에 버려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는 것도 미안했다.
미안하다, 리디안.
리디안을 포함하여, 나와 함께 제국을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들 그리고 나를 지지해 줬던 국민들까지. 검은 군대에게 죽어간 모두를 생각하며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드디어, 멀리 도시 고렝데가 모습을 드러냈다.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멀리서도 확인될 정도로 곳곳이 파괴되어 있었다. 그리고 도시의 북동쪽쯤에 돔 형태의 결계가 보였다.
내 선물을 잊지 않았구나.
녀석이 대견해졌다.
“자, 다들 내려갈 준비해. 놈들이 시민들을 추격하고 있어.”
“옙.”
“마를레나는 어떻게 할래?”
“시민들을 도울게요.”
“그래. 히네는 황태자를 데리고 나랑 같이 움직인다.”
“네.”
다들 병장기를 꺼내 들고, 뛰어내릴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타고 있는 땅덩이가 도시 상공으로 진입하자마자 모두 뛰어내렸다. 스레인과 로아이스는 강력한 마기를 흩뿌리며 신나게 검은 군대를 썰어 댔고, 알리는 광역 마법으로 놈들을 정밀타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도시의 안쪽으로 좀 더 깊숙이 들어가. 한창 맞고 있는 결계 근처에 도달했다. 그리고 번개 마법으로 결계 주변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강력한 번개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검은 놈들은 모조리 녹아내렸고, 일차적으로 모두 무력화시킨 나는, 히네와 황자를 데리고 결계 안쪽으로 공간이동 했다.
* * *
히네도 당황하는 얼굴이었고, 황태자도 마찬가지였다. 하마디아가 마치 어린애처럼 울었기 때문이다.
하마디아는 현명하고, 똑똑하고, 또 냉철한 판단을 내릴 땐 기가 막히지만, 가끔 어린애처럼 울 때가 있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와 터져 나갈 때. 그것이 두려움에 기인했건, 슬픔에 기인했건, 복합적이건. 감정이 넘쳐흐를 때 그는 울음을 터트린다.
처음 몇 번은 당황스러웠지만, 이후에는 그냥 놀리거나 다독이거나 하며 그 난감한 상황을 자연스럽게 넘겼다.
세상 그 누구도 제국의 내무대신이 울보라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의 부인인 나베디아를 제외하고는.
“난 정말 쓰레기 같은 놈이야. 영지민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식솔들만 살리자고 네가 준 아티팩트를 사용했어.”
울보 외에도 이렇게 자기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 또한 이 녀석의 특이사항 중 하나다. 어떻게 보면 참 나약한 녀석이지만, 또 중요할 땐 그의 집중력과 날카로운 판단력에 한 나라의 병력이 목숨을 건지기도 하니, 참 아이러니한 녀석이 아닐 수 없다.
“됐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야. 난 언제나 네 판단을 믿어. 그만 울고. 들어가 있어. 여기 정리 좀 할라니까.”
“고맙다…….”
녀석의 인사를 뒤로하고, 돌아서서 눈을 감았다. 마나 필드를 펼쳐 재생된 결계 주변의 검은 병사들을 감지했고, 다시 번개 쇼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