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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즉위식 날 균열을 만났다-87화 (8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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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회오리는 이전과 같은 패턴으로 소멸되었다. 마력 소모가 크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일이기에 아쉬운 것은 없었다. 돌아온 나는 준비된 알리와 스레인, 로아이스와 함께 차멘으로 향했다.

도착한 우리들은 마법 이동소의 부서진 건물 잔해 위에 앉아 캉구르 연합의 마법사들을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부서진 석판 위. 마나가 소용돌이치는 것이 느껴지더니 강렬한 빛이 내리 꼽혔고, 그 자리에 여섯 명의 마법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와.”

“아……! 처음 뵙겠습니다! 게마도르 왕국의 궁중 마법사 소속 ‘멜보렌’입니다.”

여섯 마법사 중 통솔자로 보이는 여자가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런데 뒤에 있던 마법사들의 손에 한 보따리씩 무언가 들려 있었다. 그런 내 시선을 눈치챈 멜보렌이 빠르게 소개했다.

“아, 이건 저희 국왕폐하께서 대제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선물 고맙다. 가서 풀어 보도록 하지. 얘기는 가면서 하자고.”

“예.”

“현재 이 마계의 상태라든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는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울 하마디아라는 친구가 얘기해 줄 거야. 자네들은 그 친구의 얘기를 듣고 함께 힘써 주면 돼.”

“아… 예.”

“이쪽 친구들은 모두 칼란에서 온 귀족들.”

고위 귀족들이지만 내 앞이라 그런지 모두들 서로 공손하게 인사를 교환했다. 본래 알리나 스레인 정도의 고위 귀족들 같은 경우, 황궁도 아닌 고작 일개 왕국의 궁중 마법사와 인사를 나누는 일은 거의 없다.

보통 일방적으로 인사를 받지.

“캉구르 연합의 피해는 어느 정도 되지?”

“아… 대제께서 신경을 써 주신 덕분에 연합 통틀어서 도시 일곱 개와 마을 열두 개 정도의 피해만 있을 뿐. 나머지는 건재합니다. 아직 연합의 북쪽은 소식이 없어 정확한 피해는 아닙니다.”

“다행이군.”

“다 신경 써 주신 덕분입니다.”

“제국은 거의 멸망한 상태야. 생존자들을 찾아 끌어모으고 있지. 그래서 자네들의 도움이 필요한 거야.”

“예. 힘 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좋아. 자, 다들 모여 봐. 공간이동으로 가자.”

* * *

도시 고렝데에 도착하자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가고 있었다. 본가에는 생존자들이 바글바글했고, 곳곳에서 부상자 치료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 치료에 마를레나도 열심히 가담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와 눈을 맞추더니 그저 미소로 인사했다. 그러곤 다시 치료에 집중했다.

“왔구나. 저들은…….”

“캉구르에서 지원 온 마법사들이야. 공간이동 마법이 가능한 이들이라, 캉구르 연합과 교류를 원활하게 해 줄 거다. 그리고 웬만한 것은 다 지원해 줄 거야.”

“오… 그렇구나. 반갑습니다. 라벤 가문의 가주 하마디아입니다.”

하마디아는 화색을 띠며 인사했다.

“게마도르 왕국의 궁중 마법사 멜보렌이라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도 잘 부탁하오.”

“오늘 밤은 여기서 묵어야겠다. 내일 새벽 일찍 나설 거니까. 다들 흩어져서 쉬어. 알리는 그거 설치해야 하니까. 잠깐만 대기하고 있어.”

“옙.”

칼란 지원군들을 해산시키고, 하마디아와 길을 따라 정원을 거닐었다.

“차멘에 있는 마법 이동소를 여기로 옮기고, 마법 통신 기기를 설치할 거야.”

“오……! 고맙다.”

“고맙기는. 앞으로 네가 꾸려가야 할 나란데, 최선을 다해 도와야지.”

“검은 것들은 어때? 좀 봤어?”

“어. 중간 규모 무리 하나랑 소규모 무리 하나 소탕했어. 볼레느 쪽에 검은 회오리도 하나 있어서 소멸시켰고.”

“무섭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아킬라는 내가 있으니까. 그리고… 마신계가 움직일 거니까.”

이미 내게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힘내라 인마.”

옛날 분위기를 내기 위해 경쾌한 목소리를 냈다.

“고맙다.”

“마법 통신 기기는 어디다 설치할까?”

“아. 그거… 음…….”

고민하던 그는 이내 손으로 본관 뒤쪽을 가리켰다.

“뒤쪽에 손님들 머무를 용도로 건물이 하나 있는데, 거기다 설치하고 부서를 꾸려야겠어.”

“그래. 알리랑 잘 얘기해서 설치해. 나는 수련을 좀 해야겠다.”

“그래그래.”

나는 본관의 서쪽에 있는 작은 정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막힌 건물보다 탁 트인 곳이 좋았기에 그곳을 택했다. 그리고 마력 고리를 공명시키며 마나 호흡을 시작했다.

* * *

보랏빛의 신 아덴. 그의 강림은 그라가레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다. 간테를 시작으로 여섯 명의 칠대제 모두 아덴에게 혼쭐이 났고, 어떤 이는 대들었다가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혼난 이들은 모두 출신 대륙을 지키기 위해 내려갔고, 그라가레에 칠대제가 하나도 남지 않자 비로소 아덴 또한 지상으로 내려갔다.

“악신 바르라는 놈이 강림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던가?”

“예. 그 녀석이 했던 말은 그랬습니다.”

“마계 차원을 통째로 봉인시켰던,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존재. 그들을 멸망시켰다라…….”

가만히 생각하던 아덴은 입을 뗐다.

“가자. 일단 그 애송이부터 찾아야겠군.”

아덴은 신시우를 찾기 위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신시우의 흔적을 따라 크로하 제국의 수도에서 북쪽으로 이동했고, 금세 찾아낼 수 있었다.

슬슬 땅거미가 내려앉은 초저녁. 환하게 불이 켜진 라벤 가문의 본가에, 보랏빛 불꽃과 함께 두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

그것을 본 임시 경비병들은 그 자태와 존재감에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저쪽이군.”

보랏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남자는 좌중은 안중에도 없는 듯 시선을 흘려내며 본가의 북쪽 정원으로 향했다.

그가 도착하자 신시우는 이미 그가 본가에 들어온 것을 느끼고 그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며, 그에게 예를 갖추었다.

“오셨습니까. 보랏빛을 지배하는 신이시여.”

“오냐. 제국에서 남은 것은 이게 전부인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아직 전부 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네가 말한 그 악신 바르라는 놈.”

신시우가 시선을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그놈이 준비한다는 그것. 마계를 잠식해 나간다는 그 검은 회오리. 그대로 두거라.”

신시우의 눈이 번뜩 뜨였다.

“예?”

“찾아내서 없애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그게 무슨…….”

“과연 놈이 얼마나 강할지. 내 한번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겠다.”

“그놈을 제압하지 못한다면요?”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마신계에 존재하는 이들은 수만이 넘지. 거기에 신격을 갖춘 이들의 수는 천에 가깝다.”

신격체가 천명이라는 소리에 신시우의 동공이 확장됐으나, 그는 납득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미리 강림을 막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 아예 소멸시키는 것이 맞다. 강림을 막는다고 해서 다음에 이런 침공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어. 뿌리를 뽑아야 한다.”

신시우는 말없이 시선을 내리고 생각에 잠겼다.

“왜? 내가 미덥지 못한가?”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만, 도저히 신격체 간의 싸움이 상상이 가질 않아서요.”

“뭘 상상하든 네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다.”

“일단 아덴 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인명 구조와 검은 군대 소탕에 신경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아덴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홱 돌아서 보랏빛 머리칼을 휘날리더니, 그의 옆에 있는 시종에게 명령했다.

“문을 열어라.”

“예.”

강력한 에너지가 응집되며, 수많은 마법들이 얽히고설켜 허공에 두 줄기의 붉은 광선이 채찍처럼 휘둘러지더니, 하나의 커다란 원형을 그려 냈다. 그리고 환한 빛이 원형의 안쪽에서부터 채워지더니 이내 그것은 어떤 세계로 통하는 문이 되었다.

마신 아덴과 그 시종은 망설임 없이 그 속으로 들어갔고, 붉은빛을 발하던 원형의 테두리는 순식간에 그 크기를 좁히더니, 붉은 입자들을 허공에 날리며 사라져 버렸다.

* * *

“후…….”

보랏빛의 신 아덴. 그가 한 말도 일리는 있다. 허나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 될 수 있음을 왜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얘기인가?

천자족의 멸망을 얘기했음에도 별 경각심은 없는 얼굴이었다. 나보다 몇 단계는 위에 있는 격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에 이해는 된다만, 그의 판단과 결정이 틀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만일 그의 판단이 틀리는 순간. 마계는 천자족처럼 멸망할 테니까.

“누구야 대체… 그 남자는?”

하마디아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는 달려와서 물었다.

“마신 아덴. 보랏빛을 지배하는 신.”

“뭐어? 그… 그 사람이?”

“어. 사람이 아니지. 신격체니까. 아까의 모습은 그저 껍데기를 쓰고 있을 뿐이고.”

“허…….”

마신 아덴을 직접 목격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하마디아는 넋이 나간 얼굴로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들었어? 악신 바르를 강림시키잔다.”

“뭐어!”

하마디아는 눈에 불을 켜고 나를 노려봤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 검은 군대만 해도 피해가 이 정도 규모인데……! 악신을 강림시키자고? 그 인간은 감당할 수 있대냐?”

“어. 그렇데. 마신계에 있는 신격체만 천에 가깝다나 뭐라나.”

“말도 안 돼.”

당연히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그 악신이 이 마계의 땅을 밟는다는 것 자체가 두려울 것이다. 이런 전대미문의 대침공으로 많은 대륙들이 도륙을 당하고, 멸망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으니까.

그것을 코앞에서 직접 목격한 이들은 얼마나 심란할까? 그러나 격이 다른 이들의 생각은 또 다르겠지. 그들에게 마족 몇만, 몇십만 정도 죽어 나가는 것은 대수롭지 않을 것이니까.

그들은 그들의 생각을 밀어붙이는 존재들이다. 육황이 건의한들 그들의 생각을 굽힐까? 전혀 아닐 것이다. 격이 다른 이들을 하찮게 생각할 것이니까.

그나마 마계가 멸망하는 것을 막는다고 칠대제를 혼내 준 아덴이 좀 더 마족의 생각을 하는 신일 것이다.

나도 신격의 기분을 느껴 봐서 알지만, 그 고양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괜찮아요?”

달려온 마를레나가 내 온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그 모습이 여타 다른 사람들과 달라 웃음이 났다.

“괜찮아 마를레나. 그는 우리 편이니까.”

“그래도… 너무 무서워요 그 사람.”

자신의 영역에 마나가 들어오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 격을 가진 존재. 상상할 수 없는 경지를 가진 존재이기에, 나 또한 두렵다. 마나를 통해 세상을 보는 마를레나는 오죽할까.

그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아. 겁 먹지 마. 그는 우릴 걱정해 주는 신이니까.”

“신…….”

그녀에게 신이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궁금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하마디아의 아내 나베니아도 내 걱정을 해 주러 왔다. 그리고 뒤늦게 달려온 칼란인들도 한마디씩 건넸다.

“별일 아니니까 걱정하지들 말고, 곧 저녁 시간이니까 다들 식당에서 보자고. 나는 수련 좀 더 하다가 갈 테니까.”

모두들 물러가고 혼자 남았을 때 문득 악신 바르와의 접촉이 기억났다. 그 어마어마한 중압감. 정신 줄기가 몇 개가 연결된지는 모르지만, 그 엄청난 압박감이 생각나 소름이 돋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몸을 다 떨게 될 줄이야.

악신 바르에 대한 기억과 아덴의 호언장담이 합쳐져 묘한 불안감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나는 저녁 식사 시간까지 그 묘한 불안감에 휩싸인 채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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