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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신 바르. 그는 자신이 창조해 낸 죽음의 병사들 중 오래 살아남아 큰 힘을 비축한 것들에게 ‘사신’이라는 직위를 주고, 자신의 힘 중 극히 일부를 빌려 쓸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런 그들 중 특출 난 재능을 가진 존재에게는 특별히 자신이 가진 능력을 권능으로 쥐어줬는데, 딱히 특출 난 재능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가장 오래 존재해 왔다는 이유로 권능을 하사받은 존재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라밧.
그는 악신 바르가 최초로 창조해 낸 죽음의 병사들 중 하나로, 바르에게 가장 오랫동안 충성해 왔고, 그렇기에 자연스레 바르에게 가장 많은 죽음의 힘을 가져다준 존재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공을 높이 사 부식과 부패의 권능을 주었고, 라밧은 그 권능으로 더욱더 많은 공을 세웠다.
전장의 모든 적들은 부식과 부패의 권능 앞에 공포로 물들었으며, 무력하게 스러져야 했다. 무시무시한 권능을 지닌 라밧은 자신보다 강한 상대도 손쉽게 해치우며 그것을 희열 삼아 살아왔다.
그가 권능을 하사받은 뒤 목숨이 위태로운 적은 딱 두 번 있었는데, 하나는 천자족의 신격체를 상대했을 때, 두 번째는 바르에게 심각한 타격을 준 정체불명의 존재와 마주쳤을 때였다.
워낙 질긴 목숨이라 두 번째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도 살아남았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의 요행은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점점 힘이 빠지는 정체불명의 물속에서 도저히 감도 잡히지 않는 어마어마한 압력에 꼼짝없이 땅에 처박힌 그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머리를 굴려 봐도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 물속에서는 권능도 무용지물이었고, 오히려 힘을 사용하려 하면 할수록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을 무렵. 거대한 어떤 힘에 의해 그는 다시금 땅에서 끌어 올려졌다. 그리고 그는 눈앞에 거대한 두 손의 형상을 볼 수 있었다.
세상을 꽉 채우고 있는 물 그 자체가 만들어 내는 형상이라고 할까? 그것이 그의 몸을 잡더니 그대로 찢어 버렸고, 그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그대로 찢겨지고 또 찢겨지며 소멸의 절차를 밟아 나갔다.
그 긴 세월을 버텨 온 라밧의 최후는 너무나 무력하고 처참했다.
* * *
“…….”
라밧을 소멸시킨 후 이 물에 대해서 궁금한 것들이 많아졌다. 대체 이 물의 성질은 무엇인가? 왜 물 속에서는 모든 것들이 무력화되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들에게서 어떤 원리로 힘을 뽑아 내어 내게 들어오는 것인가?
잠시 동안의 경험이었지만, 내가 다루는 ‘물’이 가진 힘에 대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라밧이라는 놈에게서 계속해서 힘이 빨려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어떨 때는 강하게, 어떨 때는 약하게. 계속해서 그놈의 힘이 내게로 빨려 들어왔다. 분명 놈과 나의 힘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는데, 어떻게 그 이질적인 힘이 내게 들어와 합쳐질 수 있는지. 나의 진정한 속성은 무엇인지. 수많은 의문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계속해서 더 강한 힘을 뿜어내며 내 공격을 버텨 내던 놈을 이렇게 손쉽게 제압해 버리다니. 게다가 놈의 힘을 받은 까닭에 마력이 넘쳐흐를 것 같았다.
“참…….”
물이 없어지는 것을 생각하자 일대를 꽉 채우고 있던 물은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듯 사라져 버렸고, 커다란 산골짜기에는 검은 병사들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긴장한 것치고는 꽤나 싱거운 결말이었다. 그리고 그 끔찍한 능력을 가지고 이 땅을 딛고 있는 다른 이들과 마주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칼란 녀석들은 잘하고 있으려나.
이왕 홀로 떨어진 김에 해안가 쪽은 내가 돌아보기로 하고, 이동을 시작했다. 이동하며 자연스럽게 마력 고리 공명을 풀었고, 탈태가 해제되었다.
비행 마법으로 산골짜기를 따라 비행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상적이지 않은 해변이 눈에 들어왔다.
시커멓게 변해 버린 땅. 그리고 그 위에 흩날리고 있는 수많은 가루 더미들. 그것이 무엇일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마나 실드마저 부식시키는 놈의 그 권능 때문이겠지.
놈이 설치고 다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끔찍했다.
정화가 필요하겠어.
검은 회오리가 잠식시킨 땅을 회복시켰을 때처럼, 12개 고리를 공명시켰다. 그리고 마나를 모아 성력으로 변환시켰고, 그 성력은 그대로 검게 물든 땅의 한복판에 떨어졌다.
강렬한 성력의 파동이 일대를 휩쓸고 지나갔다. 성력이 내는 힘의 파동은, 언제나 느끼지만 마치 기적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성스러움이 있다.
환한 빛이 사라지며 검게 물들었던 땅이 정화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가루들 또한 힘의 파동에 모두 허공으로 날려 올라갔고, 해풍을 따라 내륙으로 퍼져 나갔다.
모든 것이 끝난 자리에는 마치 원래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깨끗한 대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주변에 살아남은 식물들이 경계를 만들어 그 앞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게 해 줬다.
대륙에 남은 상처가 너무 많다.
주변을 한번 슥 둘러본 나는, 혹여나 살아남아 있을 이들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더욱 이동을 재촉했다.
* * *
비나몬 대륙의 어느 산속. 어떤 이의 오열이 공기를 타고 산 전체를 뒤흔들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분노와 슬픔. 그것은 바로 칠대제 바라멜리아의 것이었다.
그가 딛고 있는 그곳은 폐허가 된 자신의 고향이자 소수 종족인 쥬난의 유일한 보금자리. ‘후라멜라’였다.
육황에 오른 것도 모자라 칠대제까지 올라간 바라멜리아를 배출해 낸 자랑스러운 도시 후라멜라. 산골에 위치한 그곳엔 잔혹한 시체들과 파괴된 건물들만이 남아 있었다.
바라멜리아는 절망했다. 그리고 분노했고, 슬퍼했다. 유독 고향에 대한 애착이 많았던 바라멜리아.
그것은 단지 고향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종족인 쥬난이 마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 종족인데다 규모도 작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런 고향이 처참하게 부서졌다. 마을 사람들은 시신조차 제대로 찾을 수 없을 만큼 처참한 모습이었고, 그것은 건물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나몬 대륙에 와서 가장 먼저 고향에 달려와 본 바라멜리아의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시신들의 상태로 볼 때 최소 1주일은 됐다.’
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고향을 이렇게 망쳐 놓은 것들을 모조리 잡아서 파괴할 것이라 다짐하자 그의 주변의 공기가 달아올랐고, 대지가 붉게 물들더니 녹으며 끓기 시작했다.
자연의 선택을 받은 자인 바라멜리아의 화염 능력이 그의 넘치는 감정에 통제를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금방 돌아와서 그 원혼을 달래줄게. 미안. 모두들.’
바라멜리아는 비나몬 대륙을 파괴하고 있을 악귀 같은 것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움직였다. 먼저 그것들의 흔적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숫자는 소수. 짐승에 가까운 행태. 그리고…….’
바라멜리아의 시선이 부서진 돌조각으로 옮겨 갔다.
‘굉장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돌은 ‘모타르’라 이름 붙여진 마을의 수호석이다. 암석의 실제 이름은 ‘마테이라’. 비나몬 대륙의 특산물로, 그렇게 흔하지도, 그렇게 희귀하지도 않은 광물. 그러나 그 경도와 강도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굉장히 강한 경도와 강도를 가진 광물이기에, 모타르라 이름 붙여진 그 거대한 암석은, 고대부터 마을과 종족을 지켜 준다고 전해져 내려왔다.
그런 커다란 마테이라가 박살이 나 있었다는 것은, 이곳을 침략한 것들이 굉장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에 충분했다.
대충 정보들을 입수한 바라멜리아는 그것들의 흔적을 쫓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집이 큰 놈들의 움직임이라 그 흔적이 강하게 남아, 빠른 추적이 가능했다.
그렇게 그는 몇 시간에 걸친 추격을 진행한 끝에 ‘그것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산꼭대기에 솟은 바위 위에 서서 본 풍경은 지옥 그 자체였다. 버마 대륙에서 본 것과 같이 온통 새까만 그것들은, 크기도 거대한 것이 강력한 검은 힘을 머금은 앞발로 주변의 것들을 파헤치고 있었고, 입에서는 검은 화염 같은 것을 내뿜어 모든 것을 파괴했다.
도시에서 설쳐 대는 것이 그 멀리서도 눈에 훤히 보일 정도의 커다란 검은 괴물들의 숫자는 대략 서른 마리 정도. 그럼에도 그 하나하나가 위력적이라 아마 막아 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그런 그것들의 난동에서 시선을 뗀 바라멜리아는 다른 것을 찾았다. 그것들을 이끄는 우두머리. 분명 있어야 할 것이었기에 그는 눈을 굴리고, 기감을 펼쳐 일대를 더듬었다.
[나를 찾고 있나?]
갑작스런 정신 접촉에 바라멜리아는 깜짝 놀라 감각을 날카롭게 세우고 자신의 주변을 훑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찾을 수 없었다.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거냐.’
[내 귀여운 새끼들을 따라오면 내게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한 놈만 남겨 놓으마.”
바라멜리아는 그대로 바위를 박차고 도시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총알 같이 쏘아진 바라멜리아는 날아가는 속도를 이용하여 먼저 한 놈을 때려눕혔다.
일격에 찌그러져 땅속 깊이 박힌 거구의 괴물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바라멜리아는 다른 놈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화염이 깃든 주먹은 하나하나가 메테오에 버금갈 정도로 위력적이어서 잘 맞은 놈은 도시 밖으로 날아가 산에 처박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시금 회복하여 일어섰고, 바라멜리아는 다시금 그것들을 때려눕혔다. 그러기를 수차례 반복하자, 점점 작아진 그것들은 결국 소멸했고,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한 마리를 여러 번 때려눕혀 작게 만든 다음 놓아주었다.
무언가 신호를 받은 듯 머리를 한 방향으로 돌리던 그 검은 괴물은 그대로 내달리기 시작했고, 바라멜리아는 그것을 쫓았다.
그의 정신에 접촉한 존재와 만나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멀리서 정신을 접촉해 왔다고……?’
멀리 강력한 존재가 그의 기감에 잡혔다. 어떻게 봐도 이 괴물들의 우두머리로 보였고, 그에게 정신 접촉을 한 존재일 거라는 촉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 존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수많은 검은 괴물들에 둘러싸여 있는 거대한 존재. 전신이 강력한 근육으로 둘러싸여, 멀리서도 그 위용을 알 수 있을 만큼 강력해 보였다. 그리고 품고 있는 힘은 칠대제들과 붙어도 될 만큼 위험하다고 그는 느꼈다.
그놈을 박살을 내버리겠다는 결심이 굳게 섰지만, 그래도 그는 싸움에서 베테랑이었다. 상대의 힘을 대략 가늠을 해 봤으니, 그놈이 어떤 능력과 기술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했다.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감정에 휘둘려 적의 아가리에 뛰어들 만큼 어리석진 않았다.
[네놈이구나.]
바라멜리아가 먼저 정신을 접촉해 갔다.
[쬐끄맣게 생겼군. 혼자서 지금 내게 덤비겠다는 생각인가?]
짐승형이라 네발로 일어설 줄 알았던 놈이, 그 거대한 덩치를 일으켜 세워 두 발로 서서 멀리 보이는 바라멜리아를 응시했다.
[나 혼자서도 너 정도 때려눕히는 건 충분하다. 덩치만 큰 허접아.]
그 거구의 포효가 일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러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괴수들이 빠르게 움직여 물러났다.
[그래. 그 말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한번 보마.]
순식간에 그 덩치가 사라졌고, 바라멜리아의 앞에 나타나 앞발을 휘둘렀다. 그리고 바라멜리아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