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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즉위식 날 균열을 만났다-93화 (9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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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대제 중 가장 강한 존재로 거론되는 라데미네. 그는 자신이 거의 신격에 다다랐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게다가 자신을 십이사신 중 서열 2위라고 소개한 조단이라는 존재를 해치웠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감히 신들 중에서도 고대신 급에 속하는 에단의 전언을 무시할 생각을 품었다.

“예……?”

라데미네의 옆에서 함께 신시우의 말을 들었던 대신관 ‘벤지’는 라데미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못 들었나?”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마신께서 하신 전언을…….”

“대륙들을 구하는 것이 첫 번째야. 검은 것들이 뭘 통해서 왔는지, 또 뭐가 어디서 나올지 모르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멸망한 대륙도 있는 이 판국에, 대륙을 잠식해 가는 검은 회오리를 그냥 내버려 두자고? 그런 미친 소리에 네놈은 따를 생각인가?”

맞는 말이긴 했다. 단지, 이후에 올 파장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며, 감당할 수 있는 이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계획대로 진행해.”

대신관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또한 신과 마주한 적은 없지만, 그들 중 하나만 내려와도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이라는 건 직감적으로 알았다.

“예.”

그러나 정작 눈앞에 있는 재앙을 피하고자, 그는 그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기나긴 대륙들의 화합이 시작되었다.

* * *

일주일에 걸쳐 제국의 모든 영토를 돌며 검은 괴수들을 소탕한 나는, 곧장 남부 혈맹의 땅으로 갔다. 그리고 가장 먼저 대륙 간 통신소가 있는 곳을 찾았다.

소장 불룹과 소속 인원들은 다행히 무사히 지내고 있었다. 건물 보수까지 해 가면서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그런 그곳에서 나는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내가 오기 직전 타 대륙에서 연락이 왔다는 얘기였다.

그것을 들은 나는 바로 그 문제의 대륙으로 연결을 하라고 지시했고, 그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 상대를 설득했다. 물론, 상대가 문제를 바로잡을 생각은 그다지 없어 보였지만.

그 문제라는 것은 바로 검은 회오리를 정화한다는 계획이었다. 타 대륙에서 연락이 온 자는 바로 칠대제 라데미네.

그는 대륙마다 존재하는 검은 회오리를 굉장히 심각한 현상으로 받아들였고, 그 현상을 파훼하고자 했다. 그는 성력이 효과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어정쩡한 성력으로는 죽도 밥도 안 되기에 각 대륙에 존재하는 사제나 신관들을 모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갈 생각이었다.

나 또한 검은 회오리를 없애야 한다는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의 뜻을 거역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보랏빛 신인 아덴 님의 뜻임을 전했음에도 수긍하는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뭘 잘 못 처먹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운 좋게 아덴을 직접 만나 보지 못했다면 안됐고. 만나 보고서도 그런 생각을 품는다면 그것은 애도할 가치도 없다.

중요한 것은 둘 중 어떤 이유든 신의 뜻을 거역한다면 분명 그 대가는 치르게 될 것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이 사실을 모든 대륙에 전파하기로 했다.

본래도 그러려고 했지만, 저런 생각을 가진 칠대제가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니 더욱 빨리 전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다 하시게요?”

“어. 괜찮아 너는 그냥 편안하게 있으면 돼.”

“아… 예. 저야 괜찮습니다만. 귀찮으실까 봐…….”

“아덴 님의 의지를 전하는데 귀찮다니.”

“아… 죄송합니다.”

불룹은 고개를 숙였다. 여리 여리하게 힘도 없어 보이는 사내가 이전 전투에서도 그렇고 꽤나 강단이 있다. 하고 싶은 말도 곧잘 하고.

“연결시켜.”

“옙.”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 통신 자체도 오래 걸렸고, 직접적인 통신이 안 되는 대륙도 존재했다. 이전에 겪었던 것처럼, 중계소가 파괴된 경우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 곳에는 다른 대륙에서 전달하는 방식으로 얘기를 전했다. 이 아덴의 의지 전파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모른다. 다만, 아덴의 의지를 받들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마, 그 분노를 받아 내야 할 것이 자명하다.

총 53개의 대륙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었고, 그 모든 곳에 제대로 아덴의 의지를 전파하는 데에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그냥 말만 전달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내가 누군지 증명도 해야 하고, 대륙 전역에 전파할 수 있을 만한 파급력이 있는 존재와 직접 통신하는 것이 좋으니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렸다.

중간중간 쉬엄쉬엄 하니, 꼬박 하루가 걸렸다. 다 끝내고 바깥으로 나가 보니, 로아이스와 스레인이 통신소의 경비병들에게 검술 지도를 해 주고 있었다.

그새 많이 친해진 모양이었다.

“그새 많이 친해졌군.”

“오. 왔는가. 이 친구들이 배우고 싶어 하기에 조금 지도를 해 준 것뿐일세.”

“다른 대륙들은 아덴 님의 의지를 잘 이해하던가요?”

스레인이었다.

“대부분은.”

“안 받아들인 곳도 있군요.”

“칠대제 놈 하나가 썩 달갑지 않은 태도를 보여 줬는데, 수긍 못 하는 놈들은 아마 그의 뜻에 따르는 자들이겠지.”

“그렇군요.”

스레인도 이곳에 와서 칠대제 라데미네가 마계 전 대륙에서 신관, 사제들을 모으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알리는?”

“잠깐 주변 좀 둘러본다고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곧 움직일 거니까. 다들 준비해.”

“이번엔 어디로 움직입니까?”

“남부 지역에 있는 것들을 전부 토벌한 뒤, 중앙을 거쳐서 캉구르 연합 쪽으로 향할 거야.”

“알겠습니다.”

나는 바로 마나필드를 펼쳐 알리를 찾았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곧, 움직일 거니까. 복귀해.]

[예……!]

알리는 금새 모습을 드러냈다.

“뭐 했어?”

“아… 근처에 어떤 생물들이 자라나 보고 왔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라면 흔한 행동이었으니까. 알리도 내려왔겠다. 스레인과 로아이스도 정리하고 짐을 챙겨 모였다.

“가시는 발걸음에 행운이 깃들길.”

불룹이 작별인사를 고했다.

“나중에 캉구르 연합에서 사람이 오면 잘 받아줘. 지금 대륙 상황은 적대 관계고 뭐고 없으니까.”

그는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럼요.”

“터도 나쁘지 않겠다. 이곳에서부터 마을을 형성해서 다시 남부 혈맹을 일궈 내야지. 그게 네가 할 몫이야.”

그는 웃음을 머금은 채 얘기했다.

“저는 계속 소장으로 남을 것입니다. 만일 하게 된다면, 적합한 누군가가 나타나겠죠. 죄송하지만, 저는 맹이나 국가를 일굴 만한 그릇이 못 됩니다.”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건 그때 가 봐야 아는 거고. 운명은 피해 갈 수가 없어. 재앙이 닥쳐도 살 놈은 살아남는 것처럼.”

“맞는 말씀입니다.”

“남부 청소는 우리가 잘해 놓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돌아 다니고.”

“감사합니다.”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동을 시작했다. 산맥을 넘어 일대를 이 잡듯이 뒤지며, 남아 있는 검은 것들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또 꼬박 하루 동안 이동한 끝에, 남부 중 3분의 1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륙이 넓어도 너무 넓네요.”

알리가 혀를 내둘렀다.

“아킬라가 좀 넓은 편이지.”

“좀이 아니라 굉장히 넓은 편인…….”

순간 온몸으로 받은 기이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일반인이 알아챌 수 없는, 아니 일반인이 아니라도 고강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알아챌 수 없는 느낌이었다.

뭐랄까. 이 세계에 위기가 닥쳤다는 느낌과 흡사했다. 그것은 이 세계가 주는 경고와 비슷한 것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말을 하다 말고 내 얼굴을 살피던 스레인이 물었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 같다.”

로아이스도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날 주시하고 있었다.

“심각한 일이 있는 게로군.”

그는 내게서 뭔가를 읽은 모양이었다.

역시 연륜인가.

“일단. 다시 불룹에게로 가자. 다른 대륙에 연락을 해 봐야겠어.”

그렇게 우리는 다시 대륙 간 통신소로 향했다.

* * *

십이사신 중 서열 1위 ‘발렉’에 의해 멸망한 대륙 ‘제피르’. 그곳은 가장 먼저 잠식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고, 강력한 잠식력으로 총 여덟 개의 검은 회오리가 빠르게 대륙의 절반가량을 잠식시켰다.

“곧 그분께서 오실 것이다. 준비해라.”

머리엔 휘어진 한 쌍의 뿔이 얼굴은 염소의 얼굴과 닮았고, 몸은 붉은빛이 도는 거인의 몸을 하고 있는 남자. 그의 굵직하고도 울림 있는 목소리가 드넓은 대지에 울려 퍼졌고, 검게 죽은 대지 위에 아무렇게나 있던 검은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무기들을 든 거대한 거병들과 마치 골렘을 연상시키는 커다랗고 굵직한 것들이 마치 약속된 듯 움직여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그 밑으로 중형, 소형 병사들이 도열했다. 마치 사열을 하는 듯 질서정연한 모습에서 경건함까지 느껴질 정도. 그렇게 선 그 검은 것들은 무언가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에 끼어 있던 두꺼운 먹구름이 일정한 방향을 가지고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부분이 조금씩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것은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냈다.

순간 커다란 구멍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쏟아지더니 무언가 커다란 것이 뒤이어 지상으로 떨어졌고, 그 충격파가 일대를 휩쓸며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후흡… 하아…….”

여덟 개의 거대한 검은 회오리. 그리고 그 가운데에 진한 검은 기운으로 둘러싸인 무언가가 깊은 호흡을 했다. 그리고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신시우는 어디 있느냐.”

칠흑 같은 검은 기운을 몸에 두르며 걸음을 옮기는 악신 바르의 입에선 놀랍게도 신시우의 이름이 가장 먼저 튀어나왔다.

“아킬라 대륙이라는 곳에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곳으로 간다.”

“따르겠습니다.”

악신 바르는 가볍게 하늘로 날아올랐고, 어떤 방향을 정하더니 쏜살같이 날아갔다. 바르가 사라지고 난 뒤 발렉은 손에 커다란 검은 기운을 만들어 땅바닥을 향해 던졌다.

그 새카만 구체는 바닥과 부딪히자마자 빠르게 퍼져 나가 그 넓은 지역에 도열한 전 군대를 감쌀 정도가 되었고, 그대로 검은 군대를 전부 집어삼켜 버렸다.

검은 군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 발렉은 바르처럼 날아올라 바르가 간 방향을 향해 날아갔다.

* * *

같은 시각. 긴데이라 대륙에 있는 라데미네 또한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생전 느껴 본 적 없는 거대하고도 강렬한 죽음의 기운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고, 그의 머리 위로 검은 꼬리를 만들며 빠르게 지나가는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저게… 바로…….’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순간적이었지만 숨도 못 쉴 만큼 그의 숨통을 조였고, 경지가 낮은 이들은 혼절, 일반인들은 혼절 또는 사망시킨 그것. 그의 머릿속에선 신시우에게서 들었던 악신 바르라는 존재밖에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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