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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구르 연합 쪽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악신 바르와 관련된 피해도 없었고, 연합 영토를 배회하는 검은 괴수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을 운용하며, 피해 입은 곳을 복구하는 등 일상으로의 회복에 힘쓰고 있었다.
하마디아는 아직 그곳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한편으로는 신시우가 어디서 그 악신 바르를 맞고 있을지 불안했다.
“경비병 남는 인원 있나?”
하마디아는 임시 마법 통신소에서 나가면서 대기하고 있던 경비대장을 불렀다.
“일단은 남는 인원 없이 교대로 돌리고 있습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발 빠른 정찰병들이 필요해. 자네가 적절한 인원으로 뽑아 보게. 지금은 멀리 상황을 살필 필요가 있네.”
“예. 몇 명 정도 필요하십니까?”
“일단 네 개조 편성해 주게.”
“네.”
경비대장은 군말 없이 바로 그의 명령을 따랐다. 그리고 곧장 본가로 들어간 하마디아는 로아이스를 찾았다.
“한 가지 청이 있어서 왔습니다.”
“뭔가?”
“도와주십시오.”
“뭘?”
“다시 피어나려는 이 제국의 씨앗을 지키는 데에 힘을 빌려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그에 로아이스는 껄껄껄 웃었다.
“그렇게 나와야지. 내 언제쯤 그 말을 하러 오나 기다리고 있었네.”
하마디아가 눈을 끔뻑였다.
“우리는 신시우를 따라 움직이는 이들이지, 자네를 따르지 않는 자들이 아닌가? 당연히 와서 도움을 청할 줄 알았지.”
“혜안이 넓으십니다.”
“혜안까지야. 다 같이 죽을 판국에 힘을 보태는 게 당연하지. 그래. 이제 뭘 할 참인가?”
“일단은 도시 밖 멀리의 상황을 알 수 있게 정찰병을 운용할 생각입니다.”
“바른지 뭔지 그놈이 쳐들어오는지 알기 위해서?”
“예. 경비대장에게 정찰조를 편성해 놓으라 지시하고 오는 길입니다. 다만…….”
로아이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마법사의 넓은 눈이 필요합니다.”
“알리를 말하는가 보군. 흔쾌히 수락할걸세.”
하마디아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나 어두운 그림자가 가득 들어찬 미소였다.
“감사합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아닙니다. 칼란 대륙의 분들이 이 먼 곳까지 오셔서 이렇게 도와주시는데, 감사하죠.”
그때 로아이스의 동공이 확장되며,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표정이 굳은 것은 하마디아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로아이스의 표정을 보고 굳은 것이지 뭔가 좋지 않은 것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라도…….”
“방금 진동 느꼈나?”
말을 하자마자 로아이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예…….”
“생전 느껴 본 적 없는 강력한 존재감일세. 마신계가 참전한 것이 틀림이 없어.”
말을 끝낸 로아이스는 순간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알리에게 가 보겠네.”
로아이스는 급한 듯 자리를 떴고, 하마디아는 눈만 껌뻑였다. 그가 느끼는 것은 진동밖에 없었기 때문에 로아이스의 두 번째 행동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마디아는 가문의 본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거대해져 가는 검은 연기. 곧이어 그곳에선 기다란 곤충 같은 다리가 뻗어 나왔다. 그냥 곤충이라기엔 거대한 기둥 같은 다리. 그것이 땅을 짚자, 검은색의 강력한 충격파가 대지를 까뒤집으며 주변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여섯 번쯤 반복되고 나서야 놈의 다리가 다 나왔고, 드디어 몸통과 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를 홱 돌아보는 얼굴엔. 불타는 듯한 여덟 개의 눈동자가 박혀 있었고, 열릴 때마다 검은 연기를 펑펑 뿜어내는 주둥이는, 모든 것을 다 찢어먹을 듯 삐죽삐죽했다.
피부는 단단해 보이는 뾰족한 가시가 가득 돋아나 있었고, 셀 수 없이 많은 마디로 나눠진 꼬리는 세상 그 무엇보다 강력해 보였다.
[너희들이 얼마나 고강한 격을 가지고 있는지 시험해 보겠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마치 가스가 뿜어지듯 진한 검은 운무가 뿜어져 나왔다. 본능적으로 낫을 들고 있던 십이 사신 놈이 쓰던 권능이 떠올라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모든 것을 부패시키는 부패의 권능. 그 능력의 내용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놈이 그 부패 가스를 뿜을 때 전해지는 강력한 힘의 파동이었다.
만일 경지가 낮고, 격이 낮은 이들이 그 파동을 맞았다면, 부패 능력에 당하기 전에 이미 힘의 파동에 정신을 잃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그 파동은 머릿속을 강하게 뒤흔들어 놓았다.
신들 쪽으로 눈을 돌리는 그때. 하늘에서 거대한 보랏빛 화염 구체가 구름을 뚫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선공은 아덴인가.
아킬라 대륙 출신의 고대 신 보랏빛의 아덴. 그가 선공을 시작했다. 묘한 느낌을 주는 보랏빛 화염 구체는, 마나를 밀어내 강력한 하강 기류를 만들며 내려왔는데, 그 때문에 놈에게서 퍼져 나온 검은 운무가 지상을 타고 번져 나가는 탓에 공중으로 날아올라야 했다.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품은 거대한 보랏빛 화염 구체. 그것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음에도, 바르는 별 움직임 없이 고개를 쳐들고 응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순식간에 그것은 허공의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갔다. 실로 충격적인 장면에 나는 눈만 껌뻑였다.
아공간으로 날려 보낸 것일까?
마법으로 해석해 보자면, 아공간으로 날려 보내는 공간 마법의 경우. 그 대상의 에너지가 너무 거대하면 마법이 자동적으로 해제가 되어 버린다.
그런 원리로 보자면, 지금의 저 바르의 기술은, 그 힘이 구체의 에너지보다 충분히 높다는 얘기가 된다.
꿀꺽.
고작 한 번의 공방이었지만 엄청난 긴장감이 흘렀다. 그리고 충격을 받은 나에 반해 거리를 벌리고 흩어져 있는 신들에게선 일말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윽고 지형이 뒤바뀔 정도의 공방이 시작되었다. 마계의 신들이 공격했고, 악신은 방어에 치중했다. 하나하나가 맞으면 흔적도 없이 소멸될 만큼 강한 일격들이었으나, 그때마다 바르 놈의 주변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생겨나 막아 냈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검은 구멍을 만들어 빨아들여 버렸다.
그 와중에 바르 놈은 검은 구멍을 열어 빨아들였던 공격을 다시 돌려보내기도 하는 등 반격까지 해내며 신들과의 싸움에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천자족의 기억에서 훔쳐봤던 바르의 끔찍한 능력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천자족의 기억 속 바르의 모습은 아주 거대했다. 온통 검은 연기와 운무로 둘러싸여 정확한 생김새는 보지 못했지만,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에 비해 내 눈앞에 있는 이 놈은 그 크기가 10분의1도 안 되게 작았다. 그렇다는 것은 힘이 굉장히 약화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도 있었다.
이것이 단순히 희망회로일지 모르지만, 천자족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 보였던 그 강대한 힘과 비교해서 분명 많이 약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쪽 신들의 상태 또한 아주 좋았다. 마치 아침에 앞 산책길에 조깅 나온 가벼운 느낌이었으니까.
[몸 풀기는 이쯤하지.]
나직하지만 따스한 음성이 머릿속에 울렸다. 불특정 다수에게 하는 정신접촉이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찬란한 금빛 광채가 허공에 떠 있던 한 신에게서 터져 나왔고, 그것은 순식간에 바르와 충돌했다.
“크……!”
어마어마한 충격파에 급하게 실드를 쳐 막아 냈다. 실드를 덜덜 떨리게 만드는 그 충격파는 주변 대지를 뒤집으며 퍼져 나가 멀리 있던 산까지 흔들어 산사태를 일으켰다.
엄청나다……!
그리고 연이어 강렬한 빛이 터지며 강력한 충격파가 쏟아져 나왔다. 이제 갓 신격체에 발을 들인 내가 견디기에는 힘든 충격파라 더욱 멀리 떨어졌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 힘의 충돌을 보고 느끼면서 흥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마치 싸움을 잘하고 싶은 학생이 싸움꾼들의 싸움에 열광하는 것처럼 그런 흥분이 몸을 지배했다.
공간을 일그러트리는 강한 힘의 파동과 터져 나오는 빛 때문에 신들의 싸움은 육안으로 식별이 어려웠다. 하여 마나 감각으로 느껴야 했는데, 날카롭게 곤두선 감각에 어떤 다른 존재가 걸려들었다.
하마디아……!
새롭게 감각에 걸린 존재가 향한 곳은 바로 하마디아가 있는 곳이었다.
* * *
마나필드를 펼쳐 광범위한 곳을 감시하던 알리가 순간 마법을 해제하며 서쪽 하늘을 바라봤다.
“큰 놈이 온다.”
“……?”
근처에서 검을 손질하고 있던 스레인은 알리의 말에 벌떡 일어났다. 심상치 않은 목소리와 분위기가,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줬다.
“무슨 일입니까?”
“영감님 불러와. 곧 놈이 올 거다. 일단 도시에 방어막을 전개할 거야. 그 사이에 전투 준비를 마쳐.”
“예.”
스레인은 칼란 대륙 서열 5위의 강자 알리의 명령에 재빠르게 움직였고, 알리 또한 강력한 결계를 전개하기 위해 입과 손을 빠르게 놀려 댔다.
그의 주변으로 강력한 마나 기류가 일어나더니, 도시 전체의 마나를 휘어잡아 흐름을 만들었고, 그 흐름이 마법 반응을 일으키며 결계를 만들어 냈다.
도시 전체를 아우르는 강력한 결계. 알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결계였지만,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도시 위에 쳐진 결계를 바라봤다.
‘느껴 본 적 없는 강함이다. 결계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신시우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갈 정도는 될 법한 강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가 대충 느껴 봐도 이곳에 있는 인원으로 그 존재를 막기는 버거울 것 같았으니까.
그는 죽음을 각오했다. 그때 로아이스가 그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곧… 옵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충격파가 지상을 강타했다. 당연히 결계는 한 방에 깨어졌고, 충돌하는 충격파로 많은 이들이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크…….”
알리 또한 충격에 머리가 흔들리는 내상을 입었고, 로아이스와 스레인은 내부에서부터 파동을 일으켜 충격을 상쇄했다.
커다란 두 개의 뿔을 가진 붉은 피부의 거한. 염소를 닮은 얼굴엔 불타는 듯 붉은 두 눈 이 주변을 훑었다.
이어지는 그의 행동은 바로 공격이었다. 서로 간파할 틈도 없이 로아이스를 가장 먼저 공격했다. 가까스로 두 팔을 들어 그 존재의 주먹을 막은 로아이스는, 담을 부수고 건물들을 부수며 멀리 날아갔다.
[기분 나쁜 눈을 가지고 있군.]
불특정 다수의 정신에 하는 말이 모두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대체…….’
로아이스가 한 방에 날아간 이 시점에서 그 존재와 대적할 자는 이곳에 없었다. 알리가 아무리 강해도 로아이스만 못하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알리가 아니었다.
“엄호하마. 스레인.”
그는 스레인에게 강력한 강화 마법들을 순식간에 몇 개를 걸어줬고, 스레인은 검을 뽑아 들고 공격 준비를 마쳤다.
[해 보거라.]
마치 한 대 맞아 줄 테니 쳐 보라는 듯 십이사신 서열 1위 발렉의 음성은 여유로웠다. 그 말이 신호탄이 되어 바람과 함께 사라진 스레인이 발렉의 앞에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너무나 손쉽게 그 검은 부러졌고, 몸통만 한 커다란 주먹에 맞은 스레인은 로아이스와 같이 멀리 날아갔다.
[시시하군.]
“과연 이것도 시시할지. 처맞아 봐라.”
알리는 자신이 구현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마법의 술식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