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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럭……!”
피를 한 움큼 내뱉은 로아이스는, 그 붉은 존재는 자신이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바르라는 놈이 데려온 부하인가…….’
그러나 로아이스는 움직여야 했다. 비록 부서져 사라질지언정 그냥 도시가 쓸려 나가는 것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을 순 없었다.
펼친 기감에 날아가는 스레인이 잡혔고, 로아이스는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고작 한 방의 공격이었지만 굉장히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후우…….”
숨을 고르고 몸을 추스른 그는 마기를 순환시키며 쓰러지려는 몸의 컨디션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보법을 펼쳐 빠르게 나아갔다.
발렉의 양옆에 생겨난 두 개의 커다란 마법진. 그곳에서 나오는 강력한 힘이 그를 옥죄어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었고, 이내 튀어나온 긴 손톱을 가진 검은 손 두 개가 합수(合手)를 하며 발렉을 짓뭉갰다.
실로 강력한 힘. 1명을 상대하는 데에 있어서 알리가 구사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마법이었다. 알리는 실패할 것이란 불안감을 안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도 했다. 그의 기준에선 무시무시한 마법이었으니까.
그러나 금세 그의 기대는 무너졌다. 그가 마법을 사용할 때까지 여유롭게 기다려 준 발렉이, 그 여유답게 마법을 찢어 발기며,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을 드러냈다.
[보아하니 이게 네 마지막 재주 같군.]
염소를 닮은 그 얼굴에서 실망하는 기색이 보이던 그때. 누군가 빠르게 접근해 왔고, 무너진 본가 담장에서 로아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에서 하얀 마기를 피워 올리며 그는 전투 준비를 마쳤다.
[흥.]
콧방귀를 뀐 발렉이 검은 기운을 뿜어내는 손을 들어 로아이스를 가리켰다. 그러자 무언가 하려는 것을 감지한 로아이스가 움직였는데, 안타깝게도 발렉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로아이스가 무릎을 꿇고 바닥을 짚었고, 그 주변의 땅이 한차례 내려앉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 일대를 짓눌렀고, 알리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겨우 버티고 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건… 정말 괴물이다……!’
절망과 공포가 그의 마음을 점점 조여 갔고, 그의 몸은 굳어 갔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발렉의 붉은 두 눈과 마주했을 때 그는 죽음의 문턱에 발을 들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재빨리 본채 쪽에서 뻣뻣하게 서 있는 하마디아의 정신에 접촉했다.
[이 틈에 얼른 도망치세요. 하마디아. 식솔들 모두를 데리고……!]
그의 호통에 퍼뜩 정신을 차린 하마디아가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고, 본채로 뛰어 들어갔다.
[너희들은 내 손으로 처리하기엔 가치가 없군.]
발렉이 손바닥을 올리자 그 앞에 칠흑 같은 검은 구체가 나타났고, 그것을 땅에 떨어트렸다. 그것은 땅에 닿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퍼져 나갔고, 도시가 세워진 땅 전부를 검게 물들였다. 그리고 그곳에선 검은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찌감치 도주를 택한 사람들조차 도시를 아직 빠져나가지도 못한 시점. 검은 병사들의 등장은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커헉……!”
짓누르는 힘이 없어지자 로아이스는 부들부들 떨며,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온 힘을 다해 그 힘을 받아 내다 보니 내상을 심하게 입은 탓이었다.
‘상대가 안 되는군.’
로아이스는 계속해서 강자와 싸우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의 눈앞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거대한 검은 병사들은 그의 계산 속에 들어있지 않았다. 그는 오직 염소같이 생긴 놈들의 우두머리만을 생각했다.
그러나 답이 나올 턱이 없었다. 품은 힘의 차이가 압도적이었으니까. 칠대제가 온다 한들 그를 꺾을 수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느꼈으니까.
로아이스는 다시 일어서서 검을 들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짧게 읊조렸다.
“와라.”
그의 몸에서 다시 한번 백색의 마기가 피어올랐고, 앞에서 검은 죽음의 기운을 뿜어내는 것들과 붙었다.
그렇게 도시는 비명 소리와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들이 섞여 쑥대밭이 되어 갔다. 히네는 우선적으로 본채에 있는 이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건물에 결계를 전개했고, 하마디아는 식솔들과 본채에 있던 인원들 전부를 1층 로비로 모았다.
“바깥에선 칼란에서 이 먼 곳까지 온 이들이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다. 아무리 힘이 없는 우리들이라고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순 없지. 크로하 제국의 긍지를 보여 주자. 모두들 각자 무기를 챙겨서 결계를 뚫고 들어오는 것들과 싸우자.”
겁쟁이 하마디아치고는 꽤 용감한 연설이었다. 그에 나베니아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모두들 무기가 될만한 것들을 찾으러 흩어지자 하마디아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꽤 멋있었어요.”
“아이들은?”
“싸워야죠.”
하마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히네. 어때요?”
“힘듭니다. 곧 뚫려요.”
결계를 두드리는 충격이 본채 안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마를레나는?”
“확인해 보려던 참이에요.”
그때 때마침 마를레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누워 있을 때보단 조금 나아진 얼굴로 나온 마를레나의 물음에 하마디아가 답했다.
“침공입니다.”
“아…….”
“시민들을 대피시킬 틈도 없었고, 너무 압도적인 존재의 침공이라 칼란의 귀족들도 힘을 못 쓰고 있어요.”
“저도 도울게…….”
마를레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히네의 비명 소리가 들렸고, 결계가 부서지며 부서진 본채의 문짝이 날아 들어와 하마디아를 때렸다.
그러나 순간 눈을 감으며 표정을 찌푸렸던 하마디아는, 자신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 이상하여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에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둥둥 떠 있는 부서진 문짝을 볼 수 있었다.
“저도 도울게요.”
마를레나였다.
“…….”
걸어 나가는 마를레나에 하마디아와 모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어서 강력한 마나 기류가 그녀의 손에 휘감겨 뻗어 나가는 것을 보았고, 건물을 부수고 있던 하체만 보이던 커다란 검은 병사가 날아가 버리는 것을 보았다.
“…….”
그리고 또다시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마를레나는 허공으로 떠올라 바깥으로 나갔고, 그녀의 폭풍 같은 공격이 시작됐다. 순식간에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 찼고, 그것은 지상으로 번개를 뿌려 댔다.
한 방 한 방이 강력한 번개가 한 번에 수십 번씩 지상을 강타했고, 맞은 이들은 그대로 쓰러졌다.
지상은 빙판으로 변했고, 어마어마한 얼음 가시들이 솟아나 검은 병사들을 꿰뚫었다. 분노한 마를레나는 마치 마나의 화신처럼 순식간에 강력한 속성 마법을 수도 없이 펼쳐 냈다.
알리는 허공에 뜬 채 휘둥그레진 눈으로 마를레나를 쳐다봤고, 신시우와 비교할 순 없지만 자신보다 더욱 방대한 마나를 다루는 그녀에게서 벅찬 감정을 느꼈다.
‘어마어마하다…….’
일대의 모든 마나가 그녀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고, 거대한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발렉은 갑자기 등장한 마를레나를 유심히 보더니, 검은 기운을 뭉쳐 그녀를 향해 쏘아 냈다. 순간이동과 같은 속도로 날아간 검은 구체는 순간적으로 생겨난 마나 실드에 부딪혀 강한 충격파를 만들어 냈고 그녀를 멀리 밀어냈다.
[꽤 거슬리는 힘을 가지고 있구나.]
마를레나를 향해 뭔가 행동을 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발렉은 순간 고개를 돌려 멀리 무언가를 바라봤다.
‘신격체……?’
* * *
무언가 강한 존재가 하마디아가 있는 곳에 착지하는 것을 느끼곤 바로 움직이려 했지만, 급변하는 신들의 싸움에 잠시 움직임이 늦춰졌다.
돌기가 나 있는 거대한 촉수들이 튀어나와 싸우고 있던 빛의 신 ‘곤데아’를 꽁꽁 감아 단단한 구체 형태를 만들어 냈고, 부패의 운무가 그 주변으로 모여들어 흡수되듯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계속 맞기만 하던 바르의 급작스러운 반격이었고, 곤데아는 손쓸 틈이 없었는지 그대로 당해 버렸다.
그러나 당하는 동료를 보면서도 신들은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다. 왜일까? 그만큼 믿는 걸까? 생각했으나 곧 그 의문이 풀렸다.
강렬한 빛이 꽉 조이고 있던 촉수의 틈으로 새어 나왔고, 강력한 폭발과 함께 촉수는 타이어가 터지듯 터져 나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찬란한 빛을 내뿜는 곤데아가 있었다. 그리고 더욱 강해진 그의 빛나는 주먹과 발길질이 시작됐다.
신들에게 뭔가 계획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신 하나가 놈에게 흡수당하는 끔찍한 참사가 일어나지 않은 것을 확인했으니 움직이기로 했다.
급한 마음은 이미 하마디아의 본가에 가 있었고, 뒤늦은 몸이 먼저 간 마음을 쫓았다.
제발 버티고 있어라, 칼란의 전사들아.
그곳에 있는 그 누구라도 그 존재와 붙었다면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마침내 고렝데가 보였고, 한 번의 공간 이동 마법으로 고렝데 상공으로 이동했다. 예상대로 도시는 쑥대밭이 되어 가고 있었고, 본가도 엉망진창이었다. 칼란의 귀족들은 당연히 전투 불능 상태로 보였고, 유일하게 대적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마를레나였다.
[너도 십이사신인가?]
내 등장에 거구를 가진 괴물 같은 놈이 붉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그래. 네놈이 바르 님이 만나고 싶어 하던 그놈이구나.]
[잘도 아는군.]
나는 감각을 펼쳐 도시에 우글대는 거대하고 작은 검은 것들을 모조리 포착했고, 그 숫자만큼 허공에 날카로운 얼음 창을 만들어 내 그대로 쐈다.
커다란 얼음 창에 검은 것들이 모두 꿰뚫렸고, 순간 도시는 적막이 흘렀다.
[십이사신 중 서열 1위 발렉이다. 널 넝마로 만들어 바르 님께 데려갈 것이다.]
[너 따위가?]
[허세는 그쯤 부리거라.]
순식간에 나와 같은 높이로 도약한 놈은 전신에서 검은 기운을 뿜어 내며 온몸을 강화하더니, 강한 검은 힘이 응집된 주먹을 내질렀다.
어마어마한 힘과 속도. 어떤 칠대제가 오더라도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주먹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녀석이 끌어낸 최대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나는 싸움을 길게 끌지 않기로 했다.
주먹을 피해 낸 나는, 놈에게 금빛 마나를 두른 주먹을 날린 후에 거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새로 터득한 기술. 물의 영역을 펼쳤다.
온 세상의 마나를 다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때와는 느낌이 또 달랐다. 뭐랄까? 이 물의 영역 안에서는 정말로 전지전능한 느낌을 받았다. 그 누가 있더라도 내 뜻대로 다룰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당황한 것인지 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영역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놈이 죽음의 힘을 끌어올리자 그것이 이내 물로 흡수되어 내게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수압이 되어 놈의 몸을 짓눌렀다.
마치 늪과 같이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늪은 더욱더 깊이 빨아 당기고 옥죄어 온다. 그것이 지금 내가 펼친 물의 영역과 흡사했다.
놈은 상상할 수 없는 높은 수압에 짓눌린 채 점점 몸이 찌그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힘을 사용해 수압을 급격하게 높였다. 그러자 놈은 완전히 구겨져 검은 연기를 흩뿌리며 둥그런 하나의 검은 구체가 되어 버렸다.
“후…….”
하마디아와 그 식솔들, 마를레나와 칼란의 귀족들. 모두 살렸다는 데에 안도감이 생겼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능력으로 바르를 잡아 둘 수 있을까?
십이사신 중 서열 1위라는 놈도 뭣 하나 해 보지도 못하고 끝이 났다. 이 정도 힘이라면 그놈을 잡아 둘 수 있지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이어 내 차례도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내가 이 정도 할 수 있다면, 더 높은 곳에 있는 다른 신들은 더 엄청난 것들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본 싸움은 그저 장난에 불과하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일단 마무리하고 내려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