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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즉위식 날 균열을 만났다-99화 (9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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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도 차이가 없어졌다. 마계와 지구. 이 두 세계 간에 온도 차이가 없어졌다는 얘기다. 가슴속 깊이 응어리가 져 있던 것이 사라졌다. 이제 고향을 고향이라고 거리낌 없이 소개할 수 있고, 아무런 감정 없이 이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있던 악감정들이 사라졌다고 해서 내 태도가 하루아침에 바뀌진 않았다. 이 사회를 대하는 태도,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마를레나에게 혼났다.

“사람들한테 너무 신경질적으로 대하는 거 아니에요?”

“응? 그래 보여?”

나도 알고 있었지만, 시치미를 뗐다.

“네. 좀 더 부드럽게 대했으면 좋겠어요.”

“알았어. 노력할게.”

마를레나가 싱긋 웃었다. 그런 와중에도 알리는 계속 주변을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이채가 감돌았다.

“호오…….”

이들에게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복장부터 파격적일 것이고, 시커먼 아스팔트로 덮인 도로와 지나다니는 자동차들과 무채색의 건물들의 조합은 충격적일 것이다.

마를레나도 연신 입을 벌렸다.

“건물에 저렇게 유리들이 많이 쓰이다니… 보석 같습니다.”

“신비하게 생겼네요.”

알리의 입꼬리는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고, 마를레나도 입을 동그랗게 말아 보였다.

“이 근처에 순두부찌개라는 음식 잘하는 곳이 있는데, 한번 먹어 볼래?”

“순두부?”

“그게 무슨 음식입니까?”

“한 끼 식사로 끝내주는… 뭐랄까? 마계로 따지자면… 음……. ‘몰레 드류’랑 비슷해. 그런데 맛은 훨씬 좋다.”

“오… 먹어 볼래요.”

“저도 좋습니다!”

“따라들 오셔.”

관문 경비들이 맘대로 움직이는 우리들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그러다 문득 방위청장이 생각났다. 이런데 오면 가장 먼저 나와서 마중해 줬던 그가.

처음부터 속인 걸까? 아니면 중간에 바꿔 치기 한 것일까? 바꿔 치기 했다면 그는 어디로 갔을까? 죽은 걸까?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와중 금세 순두부찌개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 어서 와요! 그… 옆에 분들은……?”

내 얼굴을 보고 반색했던 주인 할머니가 내 뒤를 따라 들어온 두 남녀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는 얼굴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를레나는 뿔도 없애고 날개도 끊어 냈지만, 알리는 검은 날개를 등에 달고 머리에는 검은 뿔을 달고 있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요 앞에 관문에서 넘어온 제 친구들입니다.”

“아.. 그렇구나. 어서들 앉아요.”

“순두부찌개 세 그릇 주세요.”

“예~”

다행히 손님들은 한 테이블밖에 없었다. 주인 할머니가 주방으로 들어가고 난 뒤 알리가 불평을 늘어놨다.

“굉장히 좁군요.”

“어. 여기 꽤 오래된 곳이라 그래.”

“맛은 기대됩니다.”

의자도 불편하고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도 더 불평을 늘어놓진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나온 순두부찌개. 찌개의 겉모습에 주눅이 든 건지, 둘 다 잠시 머뭇거리고 있자 내가 먼저 한 숟갈 떠먹었다.

“크… 역시 이 맛이지. 한국은 찌개가 맛있어.”

내 말에 둘 다 한 숟갈씩 떠먹었다. 그러고는 둘 다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는데요?”

알리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음~”

마를레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요.”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다.”

“저도 다른 대륙 음식들 잘 안 먹는 편인데, 이건 굉장히 괜찮습니다.”

“어서들 먹고, 큰 도시로 올라가 보자.”

“예?”

알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음? 왜?”

“아… 그, 여기도 충분히 커보이는데, 더 큰 도시로 간다니 놀랐습니다.”

“엥? 여기가 크다고? 네가 살던 왕국 수도가 훨씬 거대할걸?”

“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왜? 이계는 다 시골 같을 줄 알았냐?”

알리가 멋쩍게 웃었다.

“아, 네. 확실히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하.”

뼛속부터 우월감에 물들어 있는 마계 상위 귀족다운 발상이다.

“아직 놀라려면 멀었어. 마탑만 한 건물들도 많아. 제일 높은 마탑이랑 맞먹는 건물도 있고. 외국으로 나가면 더 큰 것도 많다.”

“와… 여기도 대단한 문명이군요.”

“여긴 과학이 발달한 곳이니까. 대신 마법이나 이런 것들은 미개한 수준이지.”

“그렇군요.”

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먹고 보러 가요. 시우 씨 고향이 어떤지 확실히 구경해야겠어요.”

“다 둘러보려면 꽤 오래 걸릴걸? 숨은 좋은 곳들도 많아. 다른 나라도 구경 가 봐야지. 놀랄 곳이 많다.”

그렇게 식사를 끝내고 가게를 나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와 있었다.

“오셨다는 얘기 듣고 부리나케 왔습니다.”

먼저 협회장이었고,

“가시고 난 뒤 줄곧 기다렸습니다.”

제라드였다.

응?

협회장과 기에테라니. 두 조합이 이상해서 눈썹이 올라갔다.

“오랜만이네. 그런데 둘은 무슨 조합이야?”

“아, 각성자 협회 부회장으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하하. 이 친구가 꽤 사람들 다루는 솜씨가 있습니다. 머리도 굉장히 비상해서 협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제가 제안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네. 다른 기에테나 각성자들은 잘 지내나?”

“예. 대부분 잘 지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몇몇 잠적한 사람들도 있지만요.”

제라드가 꽤 표정이 밝아져 보기 좋았다.

“잘 지낸다니 다행이야. 내가 떠난 지 얼마나 지났지?”

“1년 6개월 정도 흘렀습니다.”

“꽤 많이 흘렀네?”

“그렇습니까?”

“어. 처음에는 수십 년 차이가 났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닌가?

그동안 너무 정신없이 살아서 그런지 시간차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고. 일단 이쪽은 내 애인. 이쪽은 내 조수.”

“아……! 처음 뵙겠습니다.”

협회장이 마를레나를 향해 머리를 숙였고, 제라드도 같이 숙였다. 같이 움직이니 정말 한 패거리 같은 느낌이다.

“반가워요.”

원활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둘 다 통역 마법을 걸어 줬다.

“협회장 박창식입니다.”

“제라드라고 합니다.”

“마를레나예요.”

“알리라고 합니다.”

넷은 인사를 나눴고, 천천히 얘기를 하며 같이 이동했다. 마계에서 있었던 얘기와 이곳에서 있었던 천자족과의 관계 등. 얘기를 하다 보니 마치 옛 친구와 얘기하듯 술술 다 흘러나왔다.

그렇게 얘기를 하고 나니 시원한 느낌이었다. 마치 이렇게 얘기를 하고 싶어 기다렸던 것처럼 기분이 상쾌했다.

이상한 느낌이야.

그렇게 싫어했던 곳. 그렇게 싫어했던 이 세계와 사람들. 그들에게 털어놓고 속이 시원한 느낌이라니. 이상했다.

“아무튼 우리는 이제 여행을 떠날 참이야.”

“차량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좋지. 일단 차량으로 서울까지 올라가자.”

자동차라는 탈것에 대해서 경험시켜 주고, 차를 타며 지나가는 풍경들을 보며 이 지구라는 곳에 대해 천천히 느끼게 해 줄 생각이었다.

차량이 준비되는 동안 알리는 마법을 사용해 보며 지구의 마나와 교감을 했고, 우리는 수다를 떨었다.

“오…….”

마를레나와 알리의 눈이 커졌다. 둘은 차의 표면을 이곳저곳 만져 보며 그것을 느껴 보려 했다.

“엄청난 기계군요.”

“자동차라는 거야. 전기나 기름으로 움직이지.”

“전기와 기름… 희한한 것을 동력으로 사용하는군요.”

“자동차라는 건 정말 예쁘네요.”

알리는 호기심이 폭발했고, 마를레나는 그것에서 미적인 것을 느껴 만족했다.

“아. 날개랑 뿔 때문에 타기가 힘들겠구나.”

“오픈카로 준비해 드릴까요?”

“음… 아냐. 됐어. 그냥 날아간다.”

“아, 예. 그러면, 서울에서 뵙겠습니다.”

“내 비서들은 어디서 일하고 있지?”

내 밑에서 고생했던 세 비서를 떠올렸다.

“현재 세 명 모두 방위부에서 근무 중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회귀자가 떠올랐다. 위험해서 한국에 묶어 두었던 그녀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했다.

“레이나는?”

“아, 그 회귀자 말씀이시라면, 한국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래?”

“예. 생각보다 한국이 잘 맞는다고, 여기서 계속 살기로 했습니다.”

“오. 잘됐네.”

“예.”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갑자기 이상한 촉이 왔다.

“요한은?”

“아, 기에테 요한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기에테들 간의 싸움으로 죽음을 맞았습니다.”

역시 이상한 촉이 맞았다.

“싸움?”

이번에는 제라드가 대답했다.

“그의 사상에는 언제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마신 숭배를 하는 것부터가 문제죠. 그런 그의 위험한 사상을 우려하는 기에테들이 그와 전쟁을 선포했고, 요한의 편에는 아무도 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패배했습니다.”

언젠가 충돌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뭔가 알 수 없는 씁쓸함이 입안을 감도는 것은 어쩔 수 없엇다.

“안타깝군.”

제라드는 별로 안타까워하지 않았지만, 협회장은 고개를 숙이며 숙연한 모습을 보였다. 기에테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였다.

“우리는 이만 이동할 거니까. 나중에 서울 가면 연락하마. 그때 다 같이 보자고.”

“참. 여행 경비는 있으십니까?”

“아, 저기 친구들한테 좀 빌렸어. 방위처에다가 청구하라고 했으니까. 네가 말 잘해 줘라.”

“아, 옙. 그렇게 하겠습니다.”

“서울 가서 경비 부족하면 얘기할게.”

“예.”

“그때 뵙겠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십쇼.”

연락 수단 하나 주고받지 않았지만, 둘과 우리는 헤어졌다.

“좋은 사람 같아요.”

“맞아. 좋은 친구지. 호탕하고. 건방지기도 하고?”

“아~ 그래요?”

“조금?”

내 말에 마를레나가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제라드라는 마법사가 협회장이라는 남자보다 강해 보이던데. 왜 그 밑에 있는 거죠?”

알리의 관심사는 좀 달랐다.

“글쎄다. 짬이 안 돼서?”

“짬… 말씀이십니까?”

“어. 그러니까 뭐랄까… 경력이 짧아서 밑에 있다고 얘기하면 맞을라나?”

“아… 그러니까. 조직 사회에선 밑에라 이거군요.”

“그래. 바로 그거야. 마계랑 다른데도 잘 이해하는군.”

상위 귀족에다가 칼란 대륙에서 다섯 번째로 강한 존재이며, 강자 숭상의 율법을 잘 따르는 편에 속하는 대륙에 사는 마족치고 이해가 빨랐다.

“전 웬만한 모든 것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실제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좋은 마법사의 자세야. 자. 이제 앞으로 볼 것들도 이해하자고. 간식 먹을까?”

멀리 작은 포장마차가 보였다.

“좋아요.”

“잘 먹는 편은 아닙니다만, 사 주신다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불필요한 말을 꼭 붙이는 알리를 데리고 마를레나와 함께 포장마차로 다가갔다. 두 마족의 모습에 주인은 겁에 질려 했으나 그 또한 내 얼굴을 알았고, 오해가 풀려 간식을 사 먹을 수 있었다.

“풀빵 오천 원어치랑 계란빵 만 원어치 주세요.”

생각보다 마를레나와 나는 대식가적인 면모가 있었고, 뭔가 잘 안 먹는 듯 한 느낌을 풍기는 알리 녀석 또한 굉장히 식성이 좋고 잘 먹는 편에 속한다. 물론, 너무 고고하게 먹어서 좀 재수가 없긴 하지만.

“오~ 맛있습니다.”

“와… 이게 풀빵이라고 했죠?”

“맞아. 여기서 죽치고 앉아서 차원 관문을 열기 위해 연구할 때 가끔 사 먹곤 했지.”

“와… 진짜 맛있어요.”

“그렇다니까.”

종이봉투를 하나씩 든 둘을 데리고 나는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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