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그러니까, 유독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평온하던 그들의 삶에 균열이 시작된 게.
“랜돌프 공작님! 여깁니다! 마차를 찾았습니다.”
내리는 빗물 사이로 정복 차림의 남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벅저벅, 쏟아지는 폭우에도 사내의 발걸음은 여유로웠다. 이내, 공작이라 불리던 사내가 위협적인 아우라를 풍기며 남자의 앞에 섰다.
“클로엔은 안에 있나?”
“공작 부인께서 이 마차에 오르신 건 확실합니다.”
“부상 정도는?”
“그게…… 아직 확인이 어렵습니다.”
주변은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커다란 마차는 내리붓는 빗물 속에 전복된 상태였고, 고요한 마차 속에서는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찬찬히 주변을 살피던 남자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차가 전복되면서 입구가 막혔습니다. 여름 내내 비가 내린 탓에 땅이 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섣불리 내려갔다가는…….”
“결론만 말해.”
“입구를 확보하려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후……. 랜돌프 공작이라 불리던 사내가 마른 숨을 내쉬었다. 곧바로 추적추적, 질척이는 진흙밭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공작님! 아직 길을 내지 않았습니다.”
“비켜, 내가 직접 확인할 테니까.”
말을 끝으로 랜돌프 공작이 구덩이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곤 전복된 마차를 소리 없이 바라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으…….”
아수라장이 된 나뭇더미 속에서 얕은 신음이 들려왔다. 랜돌프 공작의 적안이 빠르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교통사고 후유증이 보통이 아니라더니,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늦은 밤, 도보를 걷던 중 달려오는 트럭의 헤드라이트를 마지막으로 기억이 끊겼다.
그런데, 이놈의 병원은 환자에게 진통제조차 놔주지 않는 모양이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으…… 아……프.”
계속되는 고통에 얼굴도 모르는 주치의가 원망스러웠다.
주변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눈을 떠보려 노력했지만, 감긴 눈꺼풀은 돌덩이를 올려놓은 듯 무거웠다.
‘제발 떠져라.’
그렇게 한참을 바르작거린 후에야 시야가 트였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들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이게 대체 뭐야?’
새하얀 병원 천장은 어딜 가고, 조각난 나무판자들만이 뒤엉켜 있는 걸까?
조심히 눈을 떠 주변을 살폈다. 1평 남짓도 안 되는 좁은 공간.
‘잠시만, 여기는…… 마차?’
여기저기 부서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틀림없는 마차였다.
‘내가 왜 여기 있지?’
가장 일차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상식대로라면 병원에서 눈을 뜨는 게 맞다.
혹, 아직 이송되지 않았다면 이곳은 길바닥이어야만 했다.
근데 여긴 대체 어디냐고.
뒤집힌 시야만큼이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사방이 막힌 덕분에 숨쉬기조차 쉽지 않았다.
그때, 구세주라도 된 듯 엉망이 된 마차 너머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곤 쩍! 위쪽을 향해 있던 나무 조각이 시끄러운 파열음과 함께 부서졌다.
“하아, 하아…….”
쏟아지는 빛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눈이 접혔다. 다시 눈을 뜨자,
‘와우, 지저스……!’
자연광을 후광 삼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한 남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까지도 억수로 운이 좋은 게 분명했다.
제멋대로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은 내린 비를 맞은 모양인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뚝뚝, 물방울을 떨어트리는 그 모습이 어찌나 야성적인지 고통도 잊은 채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벌어진 머리카락 아래로 언뜻언뜻 보이는 짙은 눈썹, 쌍꺼풀 없이 살짝 올라간 눈매.
보이는 것들을 모조리 태울 듯 붉게 번들거리는 적안, 오뚝한 콧날과 도톰한 입술까지.
하나하나 나열하는 것조차 입이 아팠다. 그래, 소설에서 많이 보던 북부 재질. 그게 눈앞의 남자를 표현할 수 있는 완벽한 단어였다.
하느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런 존잘남과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수 있다니……!
불연 이곳이 사후 세계여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대단한 미남과 한 공간에 있는데 지옥인들 어떠하리. 여기가 극락이지.
남자의 외모에 홀린 듯 넋을 놓고 있기도 잠시.
“클로엔.”
존잘남의 입술 사이로 낯선 이름이 흘러나왔다. 감정을 억누르듯, 남자는 입술을 세게 짓이겼다. 이내, 발간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클로엔이 누군지는 모르겠고 당신이 찾는 영혼의 짝이 여기에 있노라, 주접을 떨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아 내던 그때였다.
주르륵, 무언가 이마를 타고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손을 뻗어 끈적한 무언가를 닦아 내자.
“어? 피…….”
시야가 점멸됐다.
* * *
두통이 일었다. 귓가는 윙윙거렸고, 삭신은 쑤셨다. 그중에도 가장 극심한 건 갈증이었다.
“물…… 물 줘. 물.”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찢을 듯한 고통은 사라졌지만, 물먹은 솜이라도 된 듯 온몸이 무거웠다.
여기저기 아프고 쑤시는 걸 보니 죽지는 않은 모양인데.
번쩍, 감긴 눈이 뜨이고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여기가 어디야?’
바쁘게 움직이던 눈동자가 멈춤과 동시에 종잇장 같은 몸이 벌떡 일어섰다. 동시에 툭! 이마에 얹어 있던 물수건이 떨어졌다.
“으음.”
물수건의 축축한 물기가 침대맡에 잠들어 있던 소녀를 깨운 모양이었다. 얕은 비음과 함께 메이드복 차림의 여자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부, 부인!! 정신이 드셨어요?”
“……?”
“다행이에요. 정말 어떻게 되시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응, 어떻게 되기는 한 것 같다.’
영문 모를 말들을 듣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마주 앉은 여자의 우스꽝스러운 차림은 무엇이며, 부인이라니? 판타지스러운 주변 경관은 또 뭐지? 답을 찾기도 전에 눈앞의 시녀가 다음 말을 이어 갔다.
“대체 어쩌자고 그런 어마어마한 걸 두시고 문밖을 나서신 거예요. 랜돌프 공작님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몰라요.”
“랜돌프 공작? 그게…… 누군데?”
물음과 동시에 시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공, 공작님이 누구시냐니요. 부인께서 이러시면…… 저 정말 죽을지도 몰라요.”
이제 갓 스물쯤 되어 보이는 여자는 두려운 듯, 연신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부인의 도주를 도운 사용인들은 모조리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어요. 저택을 지키던 경비병 아저씨들은 경계를 소홀히 했다며, 모조리 일자리를 잃었고요. 전…… 전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아요.”
겁에 질린 시녀가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힐끔 눈치를 보며 말했다.
“공, 공작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부인께서 깨시기만을 기다리셨어요. 잠시만 계세요.”
응? 아니, 너 누군데…….
내가 대체 뭘 했는데!
입 안에 맴도는 말을 차마 꺼내 보기도 전에 시녀는 문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덩그러니 남아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리를 해 보려던 찰나였다.
벌컥! 닫힌 문이 열림과 동시에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존잘남?’
시녀가 불러온다던 랜돌프 공작이 아무래도 아까 본 존잘남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는 얼굴이 나오니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은 환기되었다.
“다, 당신. 아까 본……!”
아는 체를 해 보려 말문을 열었지만, 남자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랜돌프 공작은 위험한 기류를 뿜었다. 커다란 키와 딱 벌어진 장골, 두꺼운 옷 아래로도 드러나는 탄탄하고 촘촘한 근육들까지.
‘세상에,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네.’
완벽한 공작의 모습을 보며 연신 내적 감탄을 토해 내던 그때였다.
남자의 큼직한 손이 정돈된 머리칼을 빠르게 쓸어 올렸다. 그러더니 알 수 없는 말들을 쏟아 냈다.
“그렇게도 싫었나? 이곳에서의 삶이? 남편을 버리고 도망이라도 치고 싶을 만큼?”
남편?
저는 애인은커녕 그 흔한 남사친조차 없는걸요. 투명한 눈망울이 연신 깜박이며 랜돌프 공작을 향했다.
그런 내 눈빛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인지, 랜돌프 공작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다음 말을 이어갔다.
“이런 허술한 방법으로 날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랜돌프 공작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렇다면 날 너무 가벼이 봤어, 클로엔. 3년이란 세월을 함께 했는데도 당신 남편을 모르는 건가!”
공작의 외침에 절로 어깨가 떨렸다.
‘소리는 왜 지르고 난리야? 난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동시에 서늘하게 식어 있던 적안 역시 함께 흔들렸다고 생각한 건, 착각일까?
“저…… 아까부터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잠자코 듣고는 있었는데요. 아무래도…… 번지수를 잘못 찾으신 것 같아서요. 저는 클로엔이 아니에요. 그리고…… 남편은커녕 애인도 없어요.”
“뭐? 클로엔이 아니라고? 그리고 뭐? 애인?”
기가 찬다는 듯, 랜돌프 공작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마지막 말을 되짚었다.
“네. 전 지금 이야기하시는 거랑 아무런 연관이 없거든요. 지금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걸……요. 하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랜돌프 공작의 고운 미간은 깨진 항아리라도 된 듯,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새빨간 눈동자가 천천히 내 쪽으로 향했다. 불구덩이라도 된 양, 벌겋게 이글거리는 동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건 무서운 게 아니야, 단순히 그냥 조금 추울 뿐이야……!’
공작의 떨림이 맞닿은 시선 위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무엇이 이토록 그를 화나게 한 걸까,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랜돌프 공작의 입술이 파르르 떨려 오며 틈을 벌렸다.
“이제는 아예 모르는 척을 하겠다는 건가? 나를 부정하면, 우리 관계가 없던 게 되나?”
랜돌프 공작이 언성을 높이며 가슴께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