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두 남자의 시선이 곧장 소리가 난 쪽을 향했다.
“여보! 저예요, 클로엔.”
“……!”
일순, 문을 향해 있던 에드먼드의 붉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여, 여보……?”
그러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보. 살면서 들어 본 적도 들을 생각조차도 한 적 없는 생소한 단어였다. 그런 엄청난 말을 클로엔에게 듣다니.
이건 또 무슨 꿍꿍이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안에 없어요? 랜돌프 공작님? 에드먼드? 나예요!”
또다시 들려오는 다정한 클로엔의 목소리.
“공작님, 부인께서 찾으시는 것 같은데요……?”
보다 못한 마르스가 말을 거들었지만, 에드먼드는 꿈쩍을 하지 않았다.
“나 들어가요? 분명 말했어요, 들어간다고. 나중에 딴말하기 없어요?”
일방적 통보와 함께 문고리가 철컥거리는 소리를 냈다. 잠금 버튼을 눌러놓은 덕에 닫힌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고.
“뭐야, 이거 왜 안 열려. 저기요? 여보세요? 에드먼드!”
뒤이어 당황한 듯한 클로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쾅쾅쾅! 연신 그를 찾는 목소리에 에드먼드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억을 잃으면…… 사람이 갑자기 변하기도 하나?”
“여보! 거기 있어요?”
계속되는 외침에 공작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 *
에드먼드 공작의 집무실 앞. 샤샤의 투쟁은 그리 길지 않았다. 덕분에 문 앞에 선 두 사람의 표정은 극명히 달랐다.
“공작님! 문 열어요! 당신의 아내, 클로엔이 왔다고요.”
쾅쾅쾅! 나긋한 목소리와 달리 부술 듯한 굉음이 다시 한번 울렸다. 소리가 이어짐에 따라 샤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부, 부인 대체 어쩌자고 이러세요. 공작님께서 쉬시라고 하셨잖아요. 이러시면 저 정말 죽어요……!”
샤샤가 닫힌 문을 힐끗거리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쩌기는 그냥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거지.”
“외람된 말씀이지만, 방법이 조금 잘못된 것 같아요. 지금 부인의 모습은 마치…… 떼인 돈 받으러 온 빚쟁이 같아요. 무척 위협적이죠. 그것도 아주 많이!”
“음…… 보기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네.”
천진하게 답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샤샤가 미간을 구부리며 볼멘소리를 늘려 놓았다.
“아니, 정말 대체 왜 이러세요! 공작님과 얼굴만 마주하셔도 으르렁대셨잖아요. 아무리 기억을 잃으셔도 이렇게 한 번에 바뀌는 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된다고요. 제가 부인을 한두 해 모셨어요? 한 번 뜻을 굽힌 건 번복하지 않으시는 게 철칙이라고 제게 누누이 말씀하신 분께서…….”
그 순간.
철컥!
기관총이라도 된 듯, 연신 다다다 거리던 샤샤의 입술이 꾹 닫혔다. 새빨간 눈동자가 소리 없이 두 사람을 향하고.
“무슨 일이지?”
낮게 가라앉은 에드먼드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어쩐지 흐트러진 듯한 모습. 답지 않게 떨리는 눈동자.
‘뭔가 이상한데 뭐가 이상한지를 모르겠단 말이지.’
두 눈을 굴리며 빠르게 주변을 살폈지만, 별다른 특이점을 찾지는 못했다.
“있으면 인기척을 하던가, 왜 문을 걸어 잠그고 그래요. 한참을 기다렸네.”
짧은 툴툴거림과 함께 에드먼드를 지나쳐 집무실로 향했다. 안에는 조금 전까지 제 손바닥을 고문시키던 중년의 의사가 들어 있었다.
“어머! 마르스 경, 아직 계셨네요? 저희 남편이랑 뭐, 재밌는 이야기라도 나누신 모양이에요?”
“아하하! 부인, 이렇게 또 뵙는군요. 몸,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그럼요. 가져오신 고철 덩어리 덕분에 아직도 간질거리긴 합니다만…… 괜찮아요. 아주, 신선했거든요.”
이 세계에서 거짓말 탐지기를 만날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그 말뜻을 알 리 없는 마르스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분명 웃는 낯임에도 등골이 서늘했다. 이대로 지하로 끌려가 목숨을 잃는 건 아닐까? 연신 식은땀을 닦아 내던 마르스의 귓가에 구세주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이만 가 보지.”
“부, 부인의 증세에 도움이 될 만한 약은 인편을 통해 전하겠습니다. 그럼 랜돌프 공작님, 저는 이만 돌, 돌아가 보겠습니다. 두 분 편히 말씀 나누십시오.”
곧장 몸을 돌린 마르스가 재빨리 말했다.
“먼 길 오셨는데, 밥이라도 한 끼하고 가세요. 이참에 제 증세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시고. 저만 모르잖아요. 제 상태를.”
샐쭉 미소 짓는 나를 향해 마르스가 눈살을 접어 가며 작위적인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제가 요즘 금식 중이라서요. 부인에 대한 소견서 역시 인편으로 전하겠습니다. 그, 그럼 이만.”
곧바로 쾅! 마르스가 허둥거리며 방문을 나섰다.
“하루 다섯 끼도 드실 것 같은데…….”
닫힌 문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때.
“그, 그럼 저도 이만 식사 준비를 하러…….”
옆에서 눈치를 살피던 샤샤 역시 슬금슬금 자리를 떴다. 얼결에 둘만 남았다. 커다란 집무실은 어색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얼마나 지났을까, 전혀 다른 두 개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얽혔다.
“무슨 일이지?”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귀에 꿀을 발라 놓으면 이런 기분일까?
“같이 점심 먹으려고요. 샤샤가 당신도 아직 식사 전이라길래.”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예쁜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일순 에드먼드의 한쪽 눈썹이 씰룩거렸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 화염을 닮은 붉은 눈동자가 제게 고정됐다.
“점심?”
“네, 점심. 뭐해요? 어서 내려가지 않고.”
진득한 시선이 한동안 계속됐다. 타오를 듯한 동공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저런 얼굴로 3초 이상 눈 맞추는 건, 반칙이잖아.’
이어지는 침묵에 어깨를 으쓱이며, 샐쭉 미소 지었다. 그런데도 마주 선 이의 표정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점심, 점심이라…….”
한편, 에드먼드의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 복잡했다.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이 또한 손쉬운 이혼을 위한 작전 중 하나인 걸까.
“재밌군. 당신 눈에는 내가 그리도 우스운 모양이지? 지금껏 모르는 척 속아 준 게 되레 독이 된 모양이야.”
피식, 작게 조소하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꿍꿍이지? 음식에 수면제라도 탔나, 아니면 음료? 나를 재우고 뭘 하려는 거지?”
“아니 그냥, 밥 한 끼 먹자는…… 건데요? 기, 기념으로! 얼마 전에 결혼기념일이었다면서요?”
“볼수록 흥미롭군.”
어느새 가까이 온 에드먼드로 인해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뿐인가, 친히 허리까지 숙인 그는 나와 시선을 맞춘 채 한 걸음 한 걸음 거리를 좁혔다. 사내의 몸이 가까워질수록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3년 동안 밥 한 끼는커녕, 눈조차 마주치지 않은 우리야.”
“…….”
“이제 와 다정하게 겸상을 하자?”
고저 없는 목소리와 함께 마주 선 몸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등 뒤로 느껴지는 서늘한 벽면이 더는 물러설 곳이 없음을 상기시켜 줬다.
‘아, 이거 잠시만…… 이 분위기는……?’
머릿속을 스치는 핑크빛 상상의 나래에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나를 벗어나기 위해, 우리 고귀한 공작 부인께서 또,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걸까?”
에드먼드의 적안이 사냥감을 발견한 듯, 번뜩였다. 이마 위로 느껴지는 성난 숨결. 두 사람 사이로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당신은 여전히 날 전혀 믿지 못하는군요.”
나직한 읊조림과 함께 가느다란 손아귀가 사내의 옷깃을 느슨하게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 위로 커다란 음영이 졌다.
‘맹수는 길들이는 맛이지 역시.’
간격이 좁아질수록, 차게 식어 있던 붉은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느덧, 두 사람의 사이에 남은 거리는 주먹 하나조차도 되지 않고.
“우리 사이에 애초에 신뢰라는 게 있었나? 당신과 나, 애초에 애정을 바란 사이는 아니잖아.”
뾰족한 그의 말이 내부를 울렸다. 오밀조밀한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에드먼드에게로 다가섰다.
“그 신뢰라는 거, 이제부터 쌓아 보려고요. 이왕이면 애정도. 아주 끈끈하게.”
“도무지 알 수가 없군. 그 작은 머리통으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이야.”
“잘 모르겠어요? 그럼, 하나는 확실하게 말해 줄게요.”
“기꺼이.”
말과 동시에 그의 뺨을 느릿하게 어루만졌다. 찰나였지만, 에드먼드의 울대가 움찔거리는 걸 보았다.
‘게임 끝났다 이 말이야.’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은 애써 찍어 누르며 고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당신과 이혼할 생각이 없어요. 전혀.”
“당신이라는 여자는 늘 속내를 숨기는 데에 능했지.”
“그래요. 뭐, 마음 가는 대로 생각해요. 내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앞으로 보여 줄게요. 역시 말보다는 행동이잖아요?”
“…….”
“기대해요. 무얼 상상하던 그 이상을 보여 줄 테니까.”